동래 부사 조세환이 왜인으로부터 정금이 패해 퇴보한 일에 관한 글을 받아 올리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조세환(趙世煥)이 치계(馳啓)하기를,
"관(館) 가운데 왜인(倭人)으로 역관(譯官) 안신휘(安愼徽)와 서로 좋게 지내는 자가 있어, 훈도(訓導) 박유년(朴有年)을 청하여 말하기를, ‘내가 안 역관과 평소에 좋게 지냈으며, 일찍이 오삼계(吳三桂)349) 와 정금(鄭錦)350) 의 승패를 들은 즉시 서로 통하며 부탁을 했었는데, 지금 족인(族人)이 마침 장기도(長崎島)로부터 돌아와 우연히 정금(鄭錦)이 패했다는 문서를 얻었기 때문에 이를 알려 줄 것을 부탁한다.’ 하고, 이에 한장의 왜서(倭書)를 내놓았는데, 곧 정금이 패주하여 퇴보(退保)한 일이었습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오삼계가 병사를 이끌고 사천(泗川)에서 성을 지켰다.’고 하며, 또 이르기를, ‘청(淸)나라가 천주(泉州)와 장주(漳州)를 차지한 뒤부터는 상선(商船)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엄금하였기 때문에, 강남(江南)의 상선이 절대로 장기(長崎)에 왕래하지 못하며, 가끔 왕래하는 것은 단지 정금이 부탁한 배일 뿐이다.’라고 합니다.
왜서(倭書)를 번역하여 알리니, 그 글에 이르기를, ‘보타산(普陀山) 【정금(鄭錦)이 관장하고 있는 지명(地名)이다.】 의 상선이 일본 장기도(長崎島)에 이르러 말하기를, 「정금사(鄭錦舍) 【일본 사람들이 정금을 일컬어 금사(錦舍)라고 하였으니, 맹자에 이른바 맹시사(孟施舍)라고 한 것과 같다.】 가 하문(廈門)에 성을 쌓고 살고 있는지가 여러 해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 금사(錦舍)의 아버지 나라 성은 삼관(森官) 【나라의 성이 삼관인데 이로써 별호(別號)를 했다.】 이다. 무대장(武大將)이 있어서 말하기를, 「시오(施吾)라는 자가 청나라에 항복하여 후한 녹을 받다가 8년 전에 죽고, 그 조카 시해(施亥)는 청나라의 작은 관리가 되어 천주(泉州)에 있었는데, 갑인년351) 에 정금사가 천주·장주(漳州) 두 부(府)를 공격하여 빼앗으니, 시해는 정금사에게 사죄하고 항복하였으며, 정금사는 시해를 총애하고 신임하였으나, 시해는 다시 몰래 다른 뜻을 품고 청나라와 내통하니, 청나라 사람들은 시해로 하여금 내응하게 하고 틈을 엿보게 하였다. 마침 정금사가 군량이 떨어졌으므로, 시해는 군량을 운반한다는 핑계로 정금사에 큰 전선(戰船)을 광동(廣東)의 고주(高州) 땅에 보낼 것을 청하였으며, 청나라 사람들과 비밀히 약속하여 육군 12만을 동원하여 장주의 지면(地面)인 관음산(觀音山)을 공격하였으니, 관음산은 곧 해징현(海澄縣)으로 정금사가 거주하고 있는 하문(厦門)의 요충지이다. 청나라 복주 수장 수군 총병(福州水將水軍摠兵) 임현(林賢)이 또 전선 2백 50척과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하문(厦門)을 공격하였는데, 정금사는 오히려 시해가 청나라 사람들과 내통한 것을 알지 못하였고, 그의 큰 전선은 모두 군량을 운반하러 고주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정금사는 급작스러워 나아갈 곳을 알지 못하고, 겨우 나머지 배 백여 척에 무장(武將) 25인과 군졸 1만여 명을 싣고 금년 2월 25일 하문으로부터 물러와서 지키고는 감히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시해가 몰래 청나라와 내통하였는데도 정금사는 의심하지 않았으며, 마침 해징현(海澄縣)이 청나라 사람들의 공격을 받자 수장(守將) 유국현(劉國賢)은 능히 대적하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도망하여 하문으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비각(飛脚) 【잘 달리는 것을 일컫는다.】 을 만나니 주는 서신[賚書]이 있었는데, 곧 시해가 청나라 사람들과 몰래 내통하는 글이었다. 그 사람을 사로잡아 함께 하문으로 가서 배를 당산(鐺山) 【곧 하문과 가까운 지명이다.】 에 대어 놓고 그 일을 정금사에게 보고 하였으나, 정금사는 오히려 믿지 않았다. 유국현이 마침내 그 서신을 올리니, 정금사는 비로소 크게 놀래어 시해를 당산에서 베어죽였다. 정금사는 패망한 나머지 군사를 수습하여 동녕(東寧)으로 물러와서 지키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청나라에서는 요도독(姚都督)과 양부총(楊副摠)으로 천주(泉州)·장주(漳州) 두 부(府)의 장수로 삼아 지키게 하였다. 정금사는 유국현으로 하여금 하문을 지키게 하여 항거하고 있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오삼계가 몇년 동안 호광(湖廣)에 있으면서 동정호(洞庭湖)를 점거하여 청나라 병사와 진을 마주하면서 운남(雲南)을 빼앗았다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다만 보타산(普陀山)과 호광(湖廣)은 아주 멀어서 그 진실 여부를 알지 못하겠으나, 오직 이들 성을 빼앗고, 군사를 패퇴시킨 일은 정금사의 가신(家臣)과 총병(摠兵) 등이 비선(飛船)으로 보타산에 통보하였으므로, 보타산 사람들이 그 일을 알고 장기도에 말하니, 장기도에서는 금년 5월 초9일에 강호(江戶) 【일본의 관백(關伯)이 도읍하던 곳이다.】 에 위와 같이 통보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9권 66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463면
- 【분류】외교-야(野) / 외교-왜(倭)
- [註 349]오삼계(吳三桂) : 청(淸)나라 요동(遼東) 사람. 명(明)나라 때 총병(總兵)까지 올라가 평서백(平西伯)에 봉해졌음. 이자성(李自成)이 서울을 함락시키자 청(淸)나라 군대를 이끌고 그를 격파한 공으로 청나라로부터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졌고, 성조(聖祖)가 국경을 방치하였다고 책망하자 마침내 모반하여 주제(周帝)라 칭하고서 백관(百官)을 두었음. 그가 죽은 후 손자 오세번(吳世蕃)이 청나라에게 멸망되었음.
- [註 350]
정금(鄭錦) : 정지룡(鄭之龍)의 후손. 명(明)나라 사람으로서 청(淸)나라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싸움에 크게 패하자, 중국 본토를 떠나 바다를 건너 대만(臺灣)으로 들어가서 여기에 웅거하였음. 그가 죽은 뒤 그 아들 정극상(鄭克塽)이 청나라에 항복하였음.- [註 351]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丁酉/東萊府使趙世煥馳啓: "館中倭有與譯官安愼徽相厚者, 請訓導朴有年而言曰: ‘俺與安譯素厚, 而曾以吳三桂、鄭錦勝敗, 隨聞相通爲囑矣。 今者族人適自長崎島還, 偶得鄭錦敗狀。’ 故委此報知。 仍出一張倭書, 卽鄭錦敗走退保事也。 或云: ‘吳三桂引兵城守于泗川。’ 又云: ‘淸國自得泉、漳, 嚴禁商船之出海, 故江南商船, 絶不往來於長崎, 時時往來者, 只是鄭錦所屬船。’ 云。 因譯倭書以聞。" 其書曰:
普陀山 【鄭錦所管地名。】 商船至日本 長崎島言: "鄭錦舍 【日本人稱鄭錦爲錦舍, 如孟子所謂孟施舍云。】 築城於廈門, 居之者累年矣。 初, 錦舍父國姓森官, 【國姓森官似是別號。】 有武大將曰施吾者, 降於淸, 受厚祿, 八年前死。 其姪施亥爲淸小官, 在泉州, 甲寅年錦舍攻取泉、漳兩府, 亥謝罪降錦舍, 錦舍寵任之。 亥復潛懷異志, 通款於淸, 淸人使亥爲內應, 以伺間隙。 適錦舍乏軍食, 亥因託以運糧, 請錦舍送大戰船於廣東、高州之地, 密約淸人, 發陸軍十二萬, 攻漳州地面觀音山。 觀音山卽海澄縣, 乃錦舍所居厦門之要衝也。 淸 福州守將水軍摠兵林賢, 又以戰船二百五十艘, 卒數萬人, 攻厦門, 錦舍猶未知施亥之與淸人交通, 而其大戰船皆運糧往高州未還, 錦舍倉卒不知所出, 僅以餘船百餘艘, 載武將二十五人、軍卒一萬餘, 今年二月二十五日, 自厦門退保不敢出。" 云。 且曰: "施亥潛通淸國, 而錦舍不以爲疑, 適海澄縣爲淸人所攻, 守將劉國賢不能敵, 引軍遁還厦門, 路遇飛脚 【善走之稱。】 者, 有所齎書, 卽亥與淸人潛通之書。 擒其人, 共往厦門, 泊舟鐺山, 【卽厦門近地名。】 告其事於錦舍, 錦舍猶不信, 國賢遂進其書, 錦舍始大驚, 斬亥於鐺山。 錦舍收拾敗亡餘軍, 退保東寧以待。 時, 淸以姚都督、楊副摠者, 爲泉、漳兩府帥以守之。 錦舍使國賢鎭厦門以拒。" 云。 且曰: "吳三桂數年來在湖廣, 據洞庭湖, 與淸兵對鎭, 而傳聞取雲南云。 但普陀與湖廣絶遠, 未知其眞否, 而惟此拔城敗軍事, 錦舍家臣摠兵等, 以飛船通報於普陀, 故普陀人知其事, 言於長崎島。 長崎島乃於今年五月初九日, 通報於江戶 【日本關白所都。】 如右。" 云。
- 【태백산사고본】 8책 9권 66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463면
- 【분류】외교-야(野) / 외교-왜(倭)
- [註 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