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5권, 숙종 2년 7월 8일 무자 5/5 기사 / 1676년 청 강희(康熙) 15년
생원 김문하 등이 상소하여 윤휴를 신구하다
국역
생원(生員) 김문하(金文夏) 등이 상소(上疏)하여 윤휴(尹鑴)를 신구(伸救)하니, 임금이 예(例)대로 답하였다. 윤휴의 집은 대대로 본래 소북(小北)이었는데, 처음에는 송시열(宋時烈)과 도의(道義)로서 서로 허여(許與)하였고, 크게 민정중(閔鼎重) 등으로부터 추대되어 찬양받았으며, 효종[孝廟]의 측석(側席)에서 융성한 예우를 받기에 이르렀는 데도 마침내 나오지 아니하니, 헛된 명예가 날로 높았다. 이때에 사람들은 서인(西人)으로 지목하였다. 기해년192) 대상(大喪)에 이르러 송시열의 예론(禮論)을 잘못이라 하고, 또 주자(朱子)의 주소(註疏)를 헐뜯자 사류(士類)들의 버림을 당하였다. 금상(今上)의 초기에 비로소 남인(南人)들에게 천발(薦拔)되어 시기를 타고 갑자기 떠오르게 되어 허목(許穆)과 더불어 나란히 유현(儒賢)이 되었다. 다만 사람들이 윤휴를 남인(南人)으로 지목할 뿐 아니라, 윤휴 스스로도 그 몸가짐이 또한 이와 같았으나, 하는 일이 정도에 어긋나서 당시 사람들도 불복하는 이가 많았다. 이에 윤휴는 실망하고 분노하여 제류(儕流)와 더불어 점점 혐극(嫌隙)을 이루게 되니, 이때에 이르러 소북(小北)의 무리들이 이 기회를 타서 힘을 내고 도와서, 윤휴로 하여금 그들의 당(黨)으로 복귀하게 하고자 하여 정박(鄭樸)은 이미 글을 올려 신변(申辨)하였고, 김문하 등도 소북 집안의 자제(子弟)이기 때문에 또 정박의 뒤를 따르게 된 것이나, 당시의 여론은 이를 미워하였다.
- [註 192]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숙종실록5권, 숙종 2년 7월 8일 무자 5/5 기사 / 1676년 청 강희(康熙) 15년
생원 김문하 등이 상소하여 윤휴를 신구하다
국역
생원(生員) 김문하(金文夏) 등이 상소(上疏)하여 윤휴(尹鑴)를 신구(伸救)하니, 임금이 예(例)대로 답하였다. 윤휴의 집은 대대로 본래 소북(小北)이었는데, 처음에는 송시열(宋時烈)과 도의(道義)로서 서로 허여(許與)하였고, 크게 민정중(閔鼎重) 등으로부터 추대되어 찬양받았으며, 효종[孝廟]의 측석(側席)에서 융성한 예우를 받기에 이르렀는 데도 마침내 나오지 아니하니, 헛된 명예가 날로 높았다. 이때에 사람들은 서인(西人)으로 지목하였다. 기해년192) 대상(大喪)에 이르러 송시열의 예론(禮論)을 잘못이라 하고, 또 주자(朱子)의 주소(註疏)를 헐뜯자 사류(士類)들의 버림을 당하였다. 금상(今上)의 초기에 비로소 남인(南人)들에게 천발(薦拔)되어 시기를 타고 갑자기 떠오르게 되어 허목(許穆)과 더불어 나란히 유현(儒賢)이 되었다. 다만 사람들이 윤휴를 남인(南人)으로 지목할 뿐 아니라, 윤휴 스스로도 그 몸가짐이 또한 이와 같았으나, 하는 일이 정도에 어긋나서 당시 사람들도 불복하는 이가 많았다. 이에 윤휴는 실망하고 분노하여 제류(儕流)와 더불어 점점 혐극(嫌隙)을 이루게 되니, 이때에 이르러 소북(小北)의 무리들이 이 기회를 타서 힘을 내고 도와서, 윤휴로 하여금 그들의 당(黨)으로 복귀하게 하고자 하여 정박(鄭樸)은 이미 글을 올려 신변(申辨)하였고, 김문하 등도 소북 집안의 자제(子弟)이기 때문에 또 정박의 뒤를 따르게 된 것이나, 당시의 여론은 이를 미워하였다.
- [註 192] 기해년 : 1659 효종 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