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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권, 숙종 2년 1월 13일 병신 2번째기사 1676년 청 강희(康熙) 15년

경상도 관찰사 정중휘가 왜에 다녀온 역관 한시열의 수본을 치계하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정중휘(鄭重徽)가 문위(問慰)하는 일로써 도해(渡海)하였던 역관(譯官) 한시열(韓時說)의 수본(手本)을 치계(馳啓)하기를,

"오삼계(吳三桂)·정금사(鄭錦舍)의 사정(事情)을 도왜(島倭)027) 에게 탐문(探問)하니, 오삼계정금사·경정충(耿靖忠)·왕보신(王輔臣)과 더불어 서로 연결하여 합세(合勢)하였는데, 호광(胡廣)·사천(泗川)·섬서(陝西) 등지는 한 명의 군사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격문(檄文)을 전달하자 평정되므로, 성세(聲勢)가 날마다 떨쳐서 남방(南方)의 군읍(郡邑)이 태반이나 귀순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정금사가 전선(戰船) 4백여 척을 만들었는데, 모두 은밀한 구멍을 만들어 두고서는 청인(淸人)과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여 배를 버리고 달아나면, 청인이 구멍이 있는 줄 알지 못하고 그 배를 타고 승세를 타 쫓아가다 바다 한가운데 이르자마자 물이 은밀한 구멍으로 들어와서, 청나라 군사 만여 명이 모두 익사(溺死)하고, 하나도 산 자가 없었다 합니다. 또 대포(大砲) 5천여 개를 땅 속에 묻어 세 층으로 배치해 놓고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유인하니, 청나라 군사가 몰고 쫓아와 4,5리(里)에 접근하자, 대포를 일제히 쏘아대어 죽은 자가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하는데, 이로부터 청인이 벽을 굳게 지키고 감히 나오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정금사(鄭錦舍)오삼계(吳三桂)와 더불어 연합한 뒤에는 전적으로 주사(舟師)를 관장하여 왕래하는 선박을 모두 단속하기 때문에 그 증명서가 없으면 왕래할 수 없다 합니다. 정금사가 살마 태수(薩摩太守)를 통하여 일본에 청병(請兵)한 일을 또한 탐문하니, 도왜(島倭)들이 말하기를, ‘10여 년 전에 정금사의 아버지 곡천옥(谷泉屋)이 일본에 청병하였는데, 대군(大君)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고 하고, 정금사가 청병한 것은 아직 듣지 못하였으며, 다만 금년 봄에 정금사가 장차 차병(借兵)028) 할 뜻이 있어서 사사로이 그 숙부인 칠좌위문(七左衛門)에게 말하니, 칠좌위문이 장기수(長崎守)에게 전달하여 강호(江戶)에 아뢰게 하였던 바, 허락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장기수를 크게 꾸짖고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였는데 이른바 칠좌위문은 바로 곡천옥(谷泉屋)의 동복 동생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5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18면
  • 【분류】
    외교-야(野) / 외교-왜(倭)

慶尙觀察使鄭重徽以問慰渡海譯官韓時說手本馳啓

曰: "吳三桂鄭錦舍事情, 探問島, 則吳三桂鄭錦舍耿靖忠王輔臣, 連橫合勢, 湖廣泗川陝西等地, 不動一兵, 傳檄而定, 聲勢日振, 南方郡邑, 太半歸順。 鄭錦舍造戰船四百餘隻, 皆作隱穴, 與淸人戰, 佯敗棄船而走, 淸人不知其有穴, 乘其船, 乘勝逐之, 纔至洋中, 水自隱穴入, 兵萬餘皆溺死, 無一生者。 又埋置大砲五千餘箇於地中, 三層排置, 且戰且引, 兵驅逐, 迫近四五里, 大砲俱發, 死者不記其數。 自是淸人堅壁不敢出。 鄭錦舍吳三桂連和之後, 專掌舟師, 都撿往來船舶, 故無其驗則不得往來。 鄭錦舍薩摩太守請兵於日本事, 亦爲探問, 則島倭等以爲: ‘十餘年前, 錦舍之父谷泉屋, 請兵於日本, 而大君不許。’ 云, 而錦舍之請兵, 未有聞也。 但今春錦舍將有借兵之意, 私通于其叔七左衛門, 則七左衛門, 轉達于長崎守, 使之聞於江戶, 不特不許, 大責長崎守, 使不得相通。 所謂七左衛門, 乃谷泉屋之同母弟云矣。"


  • 【태백산사고본】 4책 5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18면
  • 【분류】
    외교-야(野)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