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4권, 숙종 1년 7월 28일 갑인 2/5 기사 /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김해일·이항 등이 이수경의 파직과 강석구의 체차를 청하므로 윤허하다
국역
장령(掌令) 김해일(金海一)·지평(持平) 이항(李沆) 등이 말하기를,
"전(前) 정언(正言) 이수경(李壽慶)이 지난번 인대(引對)에서 감히 〈대신을〉 면대(面對)하여 배척한 것은 현저히 경알(傾軋)의 자취가 있습니다. 조정을 가볍게 보고 사의(私意)를 이루려는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罷職)을 청합니다. 그리고 장령(掌令) 강석구(姜碩耉)는 사어(私語)를 하여 예의를 잃었으니, 체차(遞差)를 청합니다."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당시에 윤휴(尹鑴)는 아침 저녁으로 정승이 되기를 바랐지만, 복상(卜相)에 들지 못하였다. 이수경(李壽慶) 등이 먼저 권대운(權大運)을 쫓아내고 윤휴를 우상(右相)으로 삼음으로써 소북(小北)파를 끌어 쓰려고 하니, 소북파에서도 또한 은밀히 허락하였으며, 함께 소북파의 문관(文官)을 세어보니 마땅히 끌어 쓸 만한 자가 십수인(十數人)이었다. 그런데 정익(鄭榏)의 일문(一門)은 오정창(吳挺昌)의 부족(婦族)이었기 때문에 우두머리가 되어서 음으로 모계(謀計)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이에 이르러 이수경이 더욱 총애와 신임을 받았으므로, 드디어 때를 타서 소(疏)를 초(草)하여 윤휴(尹鑴)를 정승으로 삼고 허적(許積)과 권대운(權大運) 등을 배척하기를 청하려 하였으나, 소가 미처 나오기 전에 말이 먼저 새어나갔다. 남인(南人)들이 급히 권유(權愈)를 보내어 엿보게 하였으니, 권유는 이수경(李壽慶)의 매부(妹夫)였다. 이수경이 바야흐로 사람을 물리치고 문을 닫고는 이일정(李日井)과 마주 앉아서 〈소를〉 정서(淨書)하는데 권유가 곧장 들어가 문을 열었으므로 드디어 권유에게 발각되었고, 그의 만류(挽留)로 중지되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인대(引對)에 들어가서 민희(閔熙)가 복상(卜相)에 적합하지 못함을 말하였고, 이어서 김휘(金徽)를 공격함으로써 두 정승도 배척한 것이며, 그 이른바 ‘반드시 유생(儒生) 때부터 여망(輿望)을 짊어진 사람이 정승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곧 윤휴를 추천하는 것이었다. 이에 여러 남인(南人)들이 크게 놀래어서 홍우원(洪宇遠)이 먼저 소를 올려 공격하였고, 김해일(金海一)과 이항(李沆)이 이어서 발론(發論)하였다. 강석구(姜碩耉)는 윤휴에 붙었기 때문에 즐겨 좇지 아니하다가 허적의 배척을 받아 체직되었으며, 이항(李沆) 등은 모두 문자(文字)에 짧아서 홍우원의 소를 본떠서 문장을 만들었는데, 어느 누구라고 말하지 않고 곧장 감히 ‘면대하여 배척하였다.’고만 써서 여러 사람들이 다 전해가면서 웃었다.
원문
○掌令金海一、持平李沆等言: "前正言李壽慶頃於引對, 乃敢面斥, 顯有傾軋之跡。 輕朝廷, 售私意之罪, 不可不懲, 請罷職。 掌令姜碩耉私話失儀, 請遞差。" 竝允之。 時, 尹鑴朝夕望爲相, 而未參卜相。 壽慶等欲先逐大運, 以鑴爲右相, 而引用小北, 小北亦密許之, 共數小北文官當引用者十數人。 而鄭榏一門以挺昌婦族, 爲之首, 陰與謀計已久。 及是, 壽慶益見寵信, 遂乘時草疏, 請相鑴而斥積、大運等, 疏未及出, 而語先洩。 南人急遣權愈覘視, 愈, 壽慶妹夫也。 壽慶方屛人閉門, 與李日井相對凈寫, 愈直入開門, 遂爲愈所覺, 被其挽止。 俄而入引對言, 閔熙不合卜相, 仍攻金徽, 以斥兩相, 其所謂必自儒生負望之人爲相者, 卽薦鑴也。 於是, 衆南大駭, 宇遠首疏攻之, 海一、沆繼發。 碩耉附鑴不肯從, 爲積斥遞。 沆等俱短於文字, 依樣宇遠疏爲文, 而不言誰某, 直云乃敢面斥, 衆皆傳笑。
숙종실록4권, 숙종 1년 7월 28일 갑인 2/5 기사 /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김해일·이항 등이 이수경의 파직과 강석구의 체차를 청하므로 윤허하다
국역
장령(掌令) 김해일(金海一)·지평(持平) 이항(李沆) 등이 말하기를,
"전(前) 정언(正言) 이수경(李壽慶)이 지난번 인대(引對)에서 감히 〈대신을〉 면대(面對)하여 배척한 것은 현저히 경알(傾軋)의 자취가 있습니다. 조정을 가볍게 보고 사의(私意)를 이루려는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罷職)을 청합니다. 그리고 장령(掌令) 강석구(姜碩耉)는 사어(私語)를 하여 예의를 잃었으니, 체차(遞差)를 청합니다."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당시에 윤휴(尹鑴)는 아침 저녁으로 정승이 되기를 바랐지만, 복상(卜相)에 들지 못하였다. 이수경(李壽慶) 등이 먼저 권대운(權大運)을 쫓아내고 윤휴를 우상(右相)으로 삼음으로써 소북(小北)파를 끌어 쓰려고 하니, 소북파에서도 또한 은밀히 허락하였으며, 함께 소북파의 문관(文官)을 세어보니 마땅히 끌어 쓸 만한 자가 십수인(十數人)이었다. 그런데 정익(鄭榏)의 일문(一門)은 오정창(吳挺昌)의 부족(婦族)이었기 때문에 우두머리가 되어서 음으로 모계(謀計)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이에 이르러 이수경이 더욱 총애와 신임을 받았으므로, 드디어 때를 타서 소(疏)를 초(草)하여 윤휴(尹鑴)를 정승으로 삼고 허적(許積)과 권대운(權大運) 등을 배척하기를 청하려 하였으나, 소가 미처 나오기 전에 말이 먼저 새어나갔다. 남인(南人)들이 급히 권유(權愈)를 보내어 엿보게 하였으니, 권유는 이수경(李壽慶)의 매부(妹夫)였다. 이수경이 바야흐로 사람을 물리치고 문을 닫고는 이일정(李日井)과 마주 앉아서 〈소를〉 정서(淨書)하는데 권유가 곧장 들어가 문을 열었으므로 드디어 권유에게 발각되었고, 그의 만류(挽留)로 중지되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인대(引對)에 들어가서 민희(閔熙)가 복상(卜相)에 적합하지 못함을 말하였고, 이어서 김휘(金徽)를 공격함으로써 두 정승도 배척한 것이며, 그 이른바 ‘반드시 유생(儒生) 때부터 여망(輿望)을 짊어진 사람이 정승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곧 윤휴를 추천하는 것이었다. 이에 여러 남인(南人)들이 크게 놀래어서 홍우원(洪宇遠)이 먼저 소를 올려 공격하였고, 김해일(金海一)과 이항(李沆)이 이어서 발론(發論)하였다. 강석구(姜碩耉)는 윤휴에 붙었기 때문에 즐겨 좇지 아니하다가 허적의 배척을 받아 체직되었으며, 이항(李沆) 등은 모두 문자(文字)에 짧아서 홍우원의 소를 본떠서 문장을 만들었는데, 어느 누구라고 말하지 않고 곧장 감히 ‘면대하여 배척하였다.’고만 써서 여러 사람들이 다 전해가면서 웃었다.
원문
○掌令金海一、持平李沆等言: "前正言李壽慶頃於引對, 乃敢面斥, 顯有傾軋之跡。 輕朝廷, 售私意之罪, 不可不懲, 請罷職。 掌令姜碩耉私話失儀, 請遞差。" 竝允之。 時, 尹鑴朝夕望爲相, 而未參卜相。 壽慶等欲先逐大運, 以鑴爲右相, 而引用小北, 小北亦密許之, 共數小北文官當引用者十數人。 而鄭榏一門以挺昌婦族, 爲之首, 陰與謀計已久。 及是, 壽慶益見寵信, 遂乘時草疏, 請相鑴而斥積、大運等, 疏未及出, 而語先洩。 南人急遣權愈覘視, 愈, 壽慶妹夫也。 壽慶方屛人閉門, 與李日井相對凈寫, 愈直入開門, 遂爲愈所覺, 被其挽止。 俄而入引對言, 閔熙不合卜相, 仍攻金徽, 以斥兩相, 其所謂必自儒生負望之人爲相者, 卽薦鑴也。 於是, 衆南大駭, 宇遠首疏攻之, 海一、沆繼發。 碩耉附鑴不肯從, 爲積斥遞。 沆等俱短於文字, 依樣宇遠疏爲文, 而不言誰某, 直云乃敢面斥, 衆皆傳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