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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4권, 숙종 1년 7월 12일 무술 1번째기사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판중추부사 김수항이 차자를 올려 박헌의 소 등을 비롯한 남인의 횡포를 논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수항(金壽恒)이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아! 이제 시론(時論)을 주장하는 자들이 걸핏하면 반드시 말하기를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윤리(倫理)를 밝힌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보는 바로는 이른바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윤리는 밝지 못하고 어두워 가고 있음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써 말함인가 하면, 옛적 한(漢)나라 성제(成帝)가 즉위(卽位)한 첫 해에 승상(丞相) 광형(匡衡)과 어사 대부(御史大夫) 장담(張譚) 등이 석현(石顯)의 죄악을 아뢰어서 옛 고을로 옮겨 돌아가 죽게 하였습니다. 이를 사예 교위(司隷校尉) 왕존(王尊)이 탄핵하여 아뢰기를, ‘승상과 어사 대부는 석현(石顯) 등이 권세를 독단하여 위복(威福)을 크게 지어 해내(海內)의 우환과 해독이 될 것을 알았으면서도 때맞게 아뢰어서 벌을 행하게 하지 아니하고는, 도리어 선제(先帝)가 경복(傾覆)할 무리들을 임용(任用)한 것을 드날려 나타내고 백관(百官)들이 그들을 두려워하기를 주상(主上)보다 더 했다고 함부로 말하여, 임금을 낮추고 신하를 높인 것은 잘했다고 일컬을 수 없습니다.’ 하니, 광형(匡衡)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사죄(謝罪)하였습니다. 대저 홍공(弘恭)석현(石顯)의 방자한 독단은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혼약(昏弱)함을 나타낸 것이어서 왕존의 말이 오히려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어찌 방자한 죄가 비록 석현에게 있지 않았겠습니까마는 그를 임용한 과실은 원제로부터 연유함이니, 원제의 신자(臣子)가 된 자로서는 감히 그 과실을 폭양(暴揚)하여 마침내는 임금을 낮추고 신하를 높이는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려 함이 아니겠습니까? 왕존 같은 자는 가히 임금과 신하의 의리(義理)를 안다고 이를 만하며, 광형(匡衡)으로도 오히려 부끄럽고 두려움을 알았다는 것은 또한 한 조각의 천리(天理)가 민멸(泯滅)하지 않고 있음을 보인 것입니다. 오늘날 조정(朝廷)의 신하들이 송시열(宋時烈)의 죄(罪)를 논할 적에 문득 나라의 명령을 쥐고 위복(威福)을 지은 것으로써 죄안(罪案)을 삼으면서 심지어는 ‘인주(人主)로서도 그 죄를 바로잡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아! 전하(殿下)께서는 어찌 명철한 임금이 위에 있는데도 그 밑에 나라의 명령을 쥐고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는 신하가 있는 것을 일찍이 보셨습니까? 옛일을 끌어다가 논(論)한다면, 노(魯)나라의 삼가(三家)와 한(漢)나라의 동탁(董卓)조조(曹操), 당(唐)나라의 이임보(李林甫)와 송(宋)나라의 한탁주(韓侂胄)·가사도(賈似道)가 바로 그 사람들인데, 이는 그 때를 어떠한 때로 여기며 그 임금을 어떠한 군주(君主)로 여기는 것입니까? 한갓 송시열(宋時烈)을 죄주기에 급급하여 그 말이 군부(君父)를 침범(侵犯)하였음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니, 어찌 왕존(王尊)의 죄인이 되지 않겠습니까? 전번에 ‘신하가 강하다.’는 말이 북쪽 통역의 입에서 나왔을 적에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모두 분완(憤惋)하고 통박(痛迫)하여 장차 변무(辨誣)하려는 거조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신하를 위하여 그러하였겠습니까? 진실로 이미 ‘신하가 강하다.’고 말하였으면, 임금이 약한 것은 스스로 그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인신(人臣)의 강함이 뉘라서 나라의 명령을 쥐고 위복(威福)을 독단하는 것과 같은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마땅히 변무(辨誣)할 무망(誣罔)은 다른 나라에 있지 않고 우리 조정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나라에 있으면 변명하고 우리 조정에 있으면 그만둔다면 그 의리(義理)에 있어서 과연 어떻다 하겠습니까? 전하의 출천(出天)의 효성으로 무릇 자성(慈聖)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면 진실로 지극하게 하지 아니하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심(人心)이 착하지 못하고 의리(義理)가 밝지 못하여, 전하의 신자(臣子)로서 전하의 효성을 체득(體得)하지 못하고서 전후해서 전하께 진언(進言)한 자가 거의 다 윤리를 거슬리고 강상(綱常)을 어지럽게 하는 자가 많을 뿐 아니라, 전하께 자성(慈聖)의 동정(動靜)을 조관(照管)하시기를 권하는 자까지 있기에 이르렀습니까? 예로부터 오면서 아들로서 부모를 살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어찌 이치에 거슬리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설사 자성(慈聖)께서 과연 실덕(失德)이 있었다 하더라도 공족(公族)으로서 중죄[重辟]를 범한 자에게는 오히려 ‘친(親)을 위해서는 휘(諱)해야 한다.’ 하여 기필코 덮어두려 하면서, 어찌하여 유독 자성(慈聖)에게만은 《춘추(春秋)》의 존(尊)을 휘(諱)하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은 국가와 휴척(休戚)659) 을 같이하는 의리가 다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온즉, 그의 소 가운데 아뢴 것은 다만 지성으로 근심하고 사랑하는 데서 나온 것인지라, 전하께서 받으시고 스스로 돌이켜 보시면서 사색(辭色)은 보이지 않으셨더라도 또한 그 뜻에 다른 것이 없음을 살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김우명을 불러 들여서 조정에서 힐문하기를 청하기에 이르러서 마치 치대(置對)하여 구문(鉤問)하는 것과 같음이 있었으니, 이는 무슨 뜻입니까? 《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의 단(彖)에 말하기를 ‘여자는 안에서 그 위치를 바르게 하고 남자는 밖에서 위치를 바르게 한다.’고 하였고, 그 하문(下文)에 말하기를 ‘가인(家人)은 엄군(嚴君)이었다.’ 하였으니, 이는 부모를 이른 말입니다. 이를 주석(註釋)하는 자가 말하기를 ‘이미 남자와 여자의 정위(正位)를 말하고 또 엄한 부모에 그 근본을 추구(推求)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남녀와 안팎의 위치는 어머니와 아들을 이른 것이 아님이 어찌 작연(灼然)하게 너무나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홍우원이〉 이를 끌어다가 비유한 것은 본디 이치에 거슬리는 것입니다. 허물을 두 번 거듭하지 않는다[不貳過]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신자(臣子)로서 감히 입에서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여항(閭巷)의 사람으로서 필적(匹敵)하는 사이에서도 오히려 아들을 대하여 감히 그 부모의 잘못을 배척하지 못하는 것인데, 자성(慈聖)의 허물을 전하의 앞에서 지적하며 배척하여 말하기를 ‘그 허물을 두 번 거듭하지 말게 하소서.’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분의(分義)이며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전하의 명철하신 예지(睿智)로도 오히려 큰 허물을 가대(假貸)하시어서 일찍이 엄중한 말씀으로 통렬하게 물리치지 않으셨으니, 박헌(朴瀗)의 호서(狐鼠)같은 무리들이 그 뒤를 이어 일어날 것은 본래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박헌의 소(疏)에서 말한 ‘안으로 자성(慈聖)의 마음을 경동(驚動)케 한다.’ 함은 그 말이 크게 불경(不敬)하고 그 뜻은 극히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말로 자성(慈聖)을 경동케 하였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성(慈聖)께서 경동하신 것이 어떠한 일에 나타났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남의 지시와 사주를 받은 지의 여부(與否)는 논하지도 말고 엄하게 국문(鞫問)을 가하여 그 정상을 얻고 그 죄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물며 자성(慈聖)께서 약방(藥房)에 내리신 하교는 신자(臣子)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성(慈聖)의 하교가 박헌의 소에 연유하였음은 대신(大臣)이 이미 탑전(榻前)에서 하교를 받은 바 있습니다. 자성(慈聖)께서 숙환(宿患)이 침고(沈痼)되신 가운데 거듭 거창한 일을 당하셨으므로, 기력(氣力)의 쇠약하심은 진실로 늠름(懍懍)660) 하심을 견디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근심과 슬픔으로 초삭(焦爍)661) 한 것은 약이(藥餌)로서 효험(効驗)을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이제 또 이로 인하여 더욱 손상하시어 옥체(玉體)에 불예(不豫)를 더하시게 되면, 전하께서는 마땅히 어떠한 심회를 지으시겠습니까? 옛 말에 이르기를 ‘효도란 어버이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자성(慈聖)을 섬기시는 도리로는 그 마음을 위안(慰安)하여 드리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간사한 사람들의 무함하여 헐뜯은 죄를 다스리시와, 조금이라도 자성(慈聖)의 마음을 위안하심이 이 또한 〈자성을〉 보호해 드리는 한 방법입니다. 이에 있어 혹시라도 다스림이 엄하지 않으면 뒷날에 흉악하고 패역한 말이 반드시 이에서 그치지 아니하여, 성상(聖上)의 효성을 드러낼 수도 없거니와 중외(中外)의 의혹을 풀 수도 없을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박헌의 정상은 성상께서도 이미 통촉(洞燭)하시고 나포(拿捕)하여 국문(鞫問)하라는 명을 특별히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조사기(趙嗣基)가 공공연하게 소를 올려서 ‘자성(慈聖)께 원망이 돌아간다.’는 말로써 군상(君上)을 공동(恐動)하게 하려는 계책을 삼기에 이르러서는 너무도 기탄(忌憚)없는 행위라고 이를 만합니다. 조사기가 견책(譴責)을 입은 뒤에 박헌을 두둔하던 무리들이 조금은 그치는 데 이르렀습니다만, 그러나 온갖 계책으로 그를 구해내려 하여 합사(合辭)하여 석방(釋放)을 청합니다. 그들이 박헌을 위하는 데는 지극하였거니와 유독 자성(慈聖)은 위하지 않는 데이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고도 군신과 부자간의 윤리를 밝힌다고 이른 것은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정(李楨)이연(李㮒) 등은 왕실의 지친(至親)으로서 두 조정의 망극(罔極)한 은혜를 입었는데도 전고(前古)에 없었던 죄를 범하였으니, 사람의 마음이 함께 통분하는 바이며, 나라의 헌장(憲章)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인데도 전하께서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펴서 다만 찬배(竄配)의 은전을 베푸셨으니, 이는 본시 성덕(盛德)의 일이었습니다. 겨우 반년(半年)만에 갑자기 완전한 석방을 명하셨으니, 이는 은혜에 치우쳐서 법을 멸시(蔑視)한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거조는 처음부터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인즉 또한 친친(親親)의 인(仁)에 해가 되지는 아니하겠으나, 신하로부터 힘써 청하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일찍 석방하여 돌아오지 못할까 두려워하기에 급급(汲汲)하였으니, 어찌 크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들으니, 그들이 조목으로 올린 소(疏)의 말에 ‘〈은〉 처음부터 중대한 죄가 아니라.’ 말하고, 비유한다면 마치 인가(人家)의 자제들이 부형의 앞에서 비복(婢僕)을 가까이 한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는 선왕(先王)께서 깊이 근심하시며 난처(難處)해 하셨던 바이며, 자성(慈聖)께서 이미 신린(臣隣)에게 친히 유시(諭示)하신 일입니다. 만일 선왕께서 근심하신 것을 부당(不當)한 근심으로 여기고 자성(慈聖)의 하교를 반드시 믿을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면, 감히 방자하게 이런 말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윤리를 밝힌다는 자도 또한 이와 같습니까? 무릇 신이 진달하는 바가 큰 윤리와 큰 기강(紀綱)에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혼란[淆亂]되고 패퇴[斁敗]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돈독하게 펴고 소연(昭然)하게 높이 게양(揭揚)한 뒤에야 임금의 덕을 닦을 수 있고 조정을 다스릴 수 있으며 인심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신은 아마도 날로 민민(泯泯)하고 분분(棼棼)한 곳으로 나아가서 구원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말단의 업무와 미세한 폐단을 파하고 베푸는 일과 서옥(庶獄)의 경수(輕囚)를 소결(疏決)하여 석방하는 데 이르러서는 행하여도 좋고 행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로써 하늘의 노여움을 감동시켜 돌리고 나라의 운명을 길이 연속하고자 한다면, 또한 그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차자(箚子)가 들어갔을 적에는 임금이 마침 하직(下直)하는 수령(守令)들을 인견(引見)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시(入侍)한 승지(承旨) 이하진(李夏鎭)으로 하여금 비답을 쓰게 하였다. 비답에 이르기를,

"경(卿)의 차사(箚辭)를 보고 몸이 떨리고 마음이 냉각해 옴을 깨닫지 못하겠다. 내가 들으니, ‘대신(大臣)의 책무는 당(黨)을 보호하는 데 있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성심을 다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근일에 극심한 가뭄의 참혹상은 전고(前古)에 없었던 바이므로 특별히 소결(疏決)을 행하여 위로는 하늘의 노여움에 답(答)하고 아래로는 도현(倒懸)의 위급함을 풀어주려 한 것인데, 이제 경의 차자(箚子)를 보니 놀라고 분함을 이길 수 없다. 아! 효종[孝廟]께서 송시열(宋時烈)을 대우하시기를 마치 〈은(殷)나라〉 고종(高宗)부열(傅說)에게, 〈주(周)나라〉 문왕(文王)여상(呂尙)662) 에게, 〈촉(蜀)나라〉 소열(昭烈)663)공명(孔明)664) 에게, 〈당(唐)나라〉 태종(太宗)위징(魏徵)에게 대하듯 하셨으니, 송시열로서는 마땅히 힘을 다하여 보답을 도모하는 데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그의 계획이 이러한 데서 나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음험(陰險)한 계책을 내서 윤서(倫序)를 폄강(貶降)하고 예제(禮制)를 괴란(壞亂)하였다. 마따히 일죄(一罪)665) 로 논단하여야 할 것이로되, 효종께서 예우(禮遇)하셨기 때문에 차율(次律)로 시행한 것이다. 경의 차자 가운데에 말한 ‘한갓 송시열을 죄주기에 급하여서 그 말이 군부(君父)를 침범(侵犯)하였음을 알지 못하였다.’고 이른 것은 더욱 경악할 일이다. 옛적에 대순(大舜)의 세상에서도 오히려 공공(共工)666)곤(鯀)667) 을 유극(流殛)에 처한 법이 있었다. 하물며 송시열효종의 후은(厚恩)을 잊어버렸으며 효종의 종통(宗統)을 그르쳐 놓았으니, 이는 참으로 효종의 죄인인 것이다. 어찌 효종의 죄인을 석방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고 재이(災異)를 그치게 할 이치가 있겠는가? 또 말하기를 ‘전하께 자성(慈聖)의 동정(動靜)을 조관(照管)하기를 권하였다.’ 한 데 이르러서는 더욱 놀라고 분함을 견딜 수가 없다. 이는 장차 우리 모자(母子)를 이간하려는 것인가? 내가 자성(慈聖)을 받들기를 새벽과 저녁으로 문안하면서 옛날 문왕(文王)왕계(王季)668) 에게 문안하던 일을 사모하여 동동 촉촉(洞洞屬屬)669) 하면서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장차 잃어버릴 것같이 하여 조금도 간단(間斷)함이 없는 것이 나의 밤낮으로 잊히지 않는 마음이다. 그런데 경은 대신(大臣)의 반열에 있으면서 이에 인자(人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언연(偃然)하게 글을 써서 중외(中外)의 청문(聽聞)을 놀라고 의혹하게 하였으니, 나는 곧장 땅을 뚫고 들어가서 보지 않고 싶다. 아! 모자(母子)의 사이는 남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물며 이와 같이 결코 이치에 가깝지도 않은 말로써 군부(君父)를 후욕(詬辱)하였으니, 이를 차마 할 수 있는데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차사(箚辭)를 한 번 보고 하늘을 우러르며 가슴을 치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또 정(楨)연(㮒) 등은 모두 골육(骨肉)의 지친(至親)으로 비록 죄를 범한 것이 있어 먼 땅에 오랫동안 귀양가 있어도 아직도 관유(寬宥)의 은전(恩典)을 입지 못하였던 것을 자성(慈聖)께서 인애(仁愛)하신 마음으로 특별히 석방하고 싶어하시기에, 내가 자성(慈聖)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서 서울 집으로 돌아와서 문을 닫고 자책(自責)하게 하였으니, 이는 의친(議親)·의족(議族)의 의리가 분명하다. 그런데 경의 뜻은 크게 서로 같지 않으니, 내가 참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겠다. 정(楨)연(㮒) 등이 범한 것은 몸가짐을 삼가지 못한 데 지나지 않았을 뿐이고, 송시열(宋時烈)은 그 자신이 일죄(一罪)를 범하였는데도, 경은 도리어 그를 신구(伸救)하려 하고 나의 골육지친(骨肉至親)으로 하여금 불측(不測)한 곳에 빠뜨리려 하였다. 경이 아무리 호당(護黨)에 급하기로서니 방자하게 차마 들을 수 없는 패어(悖語)를 남발하였으니, 무슨 면목(面目)으로 지하(地下)에서 양조(兩朝)를 다시 뵙겠는가? 대개 경의 차자의 말은 교지(敎旨)에 응하여 폐단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송시열(宋時烈)이 죄를 입은 데에 노여움을 쌓아서 분분(忿忿)한 나머지 이로써 조정을 현혹하려는 계획이다. 대신의 하는 짓이 이러하고서야 어찌 재앙을 부른 데 한 도움이 되었다고 하지 않겠는가? 나는 실로 국가가 장차 망할 것을 통탄한다."

하였다. 임금이 빨리 유시하기를 한 번에 하여 마치 글을 외우듯 하니, 사관(史官)이 붓을 날려서 써도 십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하진(李夏鎭)이 자기의 뜻을 보태쓰려 하니, 사관(史官) 조지겸(趙持謙)이 이를 못하게 하였다. 임금이 처음에 말한 것은 ‘하늘을 우러러도 부끄러워서 다만 스스로 분읍(憤泣)할 뿐이다.’ 한 것을 이하진이 ‘다만 스스로 분읍한다[只自憤泣].’의 네 글자를 빠뜨리고 ‘부끄러워서 가슴을 친다[愧恧以叩胷].’는 다섯 자로 썼다. 조지겸이 말하기를 ‘「가슴을 친다[叩胷]」는 두 자는 주상의 처음 하교에는 「부끄럽다[愧恧]」뿐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슴을 친다[叩胷]」 그대로 쓰라.’ 하였다. 윤휴(尹鑴)가 청하기는 ‘자성(慈聖)을 관속(管束)케 하라.’고 하였는데, 김수항(金壽恒)이 잘못 듣고 ‘조관(照管)’이라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의 자(字)는 구지(久之)요, 호(號)는 문곡(文谷)이니,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다. 풍의(風儀)가 단수(端粹)하고 문장이 정련(精鍊)하여 당시의 관면(冠冕)이 되었다. 이때는 여러 소인(小人)들이 그 흉악하고 패역(悖逆)함을 마음대로 자행하여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대륜(大倫)이 거의 이멸(夷滅)해 버리니, 사람들의 마음이 분완(憤惋)하여 진언(進言)하는 자가 서로 이었지마는, 거의가 그 정절(情節)을 부석(剖析)하지 못하였는데, 유독 김수항만이 모두 열거해 가면서 통렬하게 가려내니, 명백(明白)하고 격절(激切)하여 사기(辭氣)가 늠연(凛然)하였다. 차자(箚子)가 한 번 나오매, 적신(賊臣) 윤휴(尹鑴) 등의 심간(心肝)이 육안(肉案) 위에 달려 있어 사람마다 볼 수 있었다. 몸은 비록 함패(陷敗)하였지만 장채(章蔡)의 꾀670) 가 또한 이로 인하여 조금은 지식되었고, 동조(東朝)가 보존함을 얻어 무사(無事)하게 된 것은 실로 김수항의 한 차자의 힘이었다. 사람들은 그 윤이(倫彛)를 붙들어 세운 것은 참으로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됨이 부끄럽지 않다고 일렀으며, 사림(士林)에서 흡연(翕然)히 존앙(尊仰)하였다. 송시열이 시(詩)로써 그를 찬미하니, 그 시에 이르기를, ‘한 기둥 정정(亭亭)하게 홀로 서 있으니[一柱亭亭獨立時], 미친 물결 성나게 부딪쳐도 기울지 않았네[狂瀾怒觸未曾欹]. 뉘라서 동쪽 노(魯)나라의 사문(斯文)이 죽었다 말하리오[誰言東魯斯文喪]. 천추(千秋)에 길이길이 힘입으리이다[驘得千秋永頼之].’ 하니, 한 때에 전송(傳誦)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93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고사(故事) / 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인물(人物) / 어문학-문학(文學)

  • [註 659]
    휴척(休戚) : 안락과 근심 걱정.
  • [註 660]
    늠름(懍懍) : 두려워하는 모양.
  • [註 661]
    초삭(焦爍) : 태워 녹임.
  • [註 662]
    여상(呂尙) : 태공망(太公望).
  • [註 663]
    소열(昭烈) : 소열 황제 유비(劉備).
  • [註 664]
    공명(孔明) : 제갈양(諸葛亮).
  • [註 665]
    일죄(一罪) : 죄로서 가장 무거운 종류에 속하는 것으로, 십악(十惡)에 해당하는 죄임.
  • [註 666]
    공공(共工) : 사흉(四兇)의 한 사람.
  • [註 667]
    곤(鯀) : 사흉(四兇)의 한 사람.
  • [註 668]
    왕계(王季) : 문왕의 아버지.
  • [註 669]
    동동 촉촉(洞洞屬屬) : 성실하고 전일(專一)한 모양.
  • [註 670]
    장채(章蔡)의 꾀 : 장채는 장돈(章惇)과 채경(蔡京). 이들은 모두 송(宋)나라 때 정치가로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복구하고 원우(元祐)의 구신(舊臣)들을 배척하였음.

○戊戌/判中樞府事金壽恒上箚曰:

嗚呼! 今之主時論者, 動必曰明君臣、父子之倫, 而以臣觀之, 所謂君臣、父子之倫, 未免有不明而晦者矣。 何以言之? 昔 成帝卽位之初年, 丞相匡衡、御史大夫張譚等, 奏石顯罪惡, 徙歸故郡而死。 司隷校尉王尊劾奏丞相、御史, 知等顓權擅勢, 大作威福, 爲海內患害, 不以時白奏行罰, 反揚著先帝任用傾覆之徒, 妄言百官畏之, 甚於主上, 卑君尊臣, 非所宜稱, 慙懼謝罪。 夫以之顓恣、 之昏弱, 王尊之言尙如此。 豈不以顓恣之罪, 雖在於, 而任用之失, 由於元帝, 爲元帝之臣子者, 所不敢暴揚其過, 終爲卑君尊臣之歸也。 若王尊者, 可謂知君臣之義, 而以匡衡而猶知慙懼, 則亦可見一段天理之不泯矣。 今日朝臣論宋時烈之罪, 輒以執國命, 作威福爲罪案, 至曰人主不敢正其罪。 噫! 殿下曷嘗見明君哲辟在上, 而下有執國命, 擅威福之臣乎? 援古而論之, 若之三家、林甫侂冑似道是已。 此其時爲何等時, 而其君爲何如主耶? 徒急於罪時烈, 而不顧其言之侵犯於君父, 豈不爲王尊之罪人乎? 向者臣强之說, 發於北譯之口, 君臣上下, 憤惋痛迫, 將有辨誣之擧, 此豈爲臣下而然哉? 誠以旣曰臣强, 則主弱自在其中故也。 人臣之强, 孰如執國命, 擅威福者哉? 然則今日當辨之誣, 不在於異國, 而在於朝廷之上。 在異國則辨之, 在朝廷則置之, 其於義理, 果何如也? 以殿下出天之孝, 凡所以慰悅慈聖之心者, 固無所不用其極。 而奈何人心不淑、義理不明, 爲殿下臣子者, 不能體殿下之孝思, 前後進言於殿下者, 率多悖倫而亂常, 至有勸殿下以照管慈聖之動靜者。 從古以來, 未聞以子而照管父母, 則斯豈非逆理之言也? 設令慈聖, 果有失德, 而於公族之犯重辟者, 猶曰爲親者諱, 而必欲覆蓋之, 則何獨於慈聖而不思《春秋》諱尊之義耶? 淸風府院君 金佑明之於國家, 同休共戚之義, 非他人之比, 則疏中所陳, 只是至誠憂愛之發。 而殿下之受而自反, 不示辭色, 亦察其意無他也。 至請召致而廷詰, 有若置對鉤問者然, 此何意耶? 《易》 《家人》之彖曰: "女正位于內, 男正位于外。" 其下文曰: "家人有嚴君焉, 父母之謂也。" 註之者曰: "旣言男女之正, 又推本於父母之嚴。" 觀此則男女內外之位, 非母與子之謂者, 豈非灼然甚明? 而以此援以爲喩, 固已悖矣。 至於不貳過之說, 尤非臣子之所敢出於口也。 今夫閭巷之人, 匹敵之間, 猶不敢對其子而斥其父母之過, 則指斥慈聖之過於殿下之前, 而曰無使貳其過, 是何分義? 是何道理? 以殿下之明睿, 猶且假借大過, 曾不嚴辭痛斥, 如朴瀗狐鼠之輩, 接跡而起, 固不足怪也。 疏所謂內以驚動慈聖之心云者, 其言大不敬, 而其意極叵測。 未知何人以何說而驚動慈聖, 慈聖之所驚動者, 亦著於何事耶。 臣以爲毋論其受人指嗾與否, 不可不嚴加鞫問, 得其情而正其罪也。 況慈聖下藥房之敎, 有非臣子所忍聞者, 而慈敎之由於疏, 大臣已承敎於榻前矣。 慈聖宿患沈痼之中, 荐罹巨創, 氣力之澌綴, 誠有不勝其懍懍者。 憂哀之所焦鑠, 有非藥餌之所可責效, 而今又因此衋傷, 以致玉體之增其不豫, 則殿下當作何如懷耶? 《語》曰: "孝莫大於寧親。" 殿下今日事慈聖之道, 莫大於慰安其心。 治奸人誣詆之罪, 少慰慈聖之心, 此亦保護之一道也。 於此而苟或治之不嚴, 則日後凶悖之言, 必不止此, 而無以彰聖上之孝, 解中外之惑矣, 豈不大可懼哉? 之情狀, 聖上亦旣洞燭, 特下拿鞫之命。 而趙嗣基之公然投疏, 至以歸怨慈聖, 爲恐動君上之計, 可謂無忌憚之甚矣。 嗣基被譴之後, 右之徒, 迄可少戢, 而百計營救, 合辭請釋, 其爲地則至矣, 獨不爲慈聖地乎? 如此而謂之明君臣、父子之倫, 非臣之所敢知也。 等以王室至親, 荷兩朝罔極之恩, 犯前古所無之罪, 人心之所共憤, 邦憲之所不貸。 而殿下屈法伸恩, 只施竄配之典, 此固盛德事也。 纔及半年, 遽命全釋, 不幾於恩勝而蔑法乎? 然而此擧初出於特恩, 則亦不害爲親親之仁, 而至於自下力請, 汲汲然猶恐放還之不早, 豈非大可寒心者乎? 且聞其分疏之語, 至以爲初非重大之罪, 比如人家子弟之近婢僕於父兄之前, 是何言也? 先王之所深憂而難處者, 慈聖已親諭於臣隣矣。 如不以先王之憂爲不當憂, 而慈聖之敎爲未必信, 則必不敢肆然爲此言也。 明君臣、父子之倫者, 亦如此乎? 凡臣所陳, 無非關於大倫、大紀者。 而其淆亂斁敗, 乃至於此, 必使之敦敍、昭揭, 然後君德可修, 朝廷可理, 人心可悅。 不然, 臣恐其日就泯泯棼棼, 而莫之救也。 至若末務細瘼之罷施、庶獄輕囚之疏釋, 行之可也, 不行亦可也。 欲以此感回天怒, 迓續邦命, 不亦左乎?

箚入, 上適引見下直守令, 使入侍承旨李夏鎭書批, 批曰: "觀卿箚辭, 不覺體寒而心冷也。 予聞大臣之責, 不在於護黨, 而在於爲國盡誠。 近日亢旱之慘, 前古所無, 別爲疏決, 上以答天怒, 下以解倒懸之急。 今觀卿箚, 不勝駭憤。 噫! 孝廟之待時烈, 亦猶高宗之於傅說文王之於呂尙昭烈之於孔明太宗之於魏徵, 則爲時烈者, 所當竭力圖報之不暇。 而計不出此, 反生陰險之計, 貶降倫序, 壞亂禮制, 所當論以一罪, 而以孝廟禮遇之故, 施以次律矣。 卿之箚中所謂徒急於罪時烈, 而不知其言之侵犯君父云者, 尤極驚愕。 昔大舜之世, 尙有流殛之典。 況時烈孝廟之厚恩, 誤孝廟之宗統, 此實孝廟之罪人也。 豈有釋孝廟之罪人, 而回天怒, 弭災異之理乎?" 又曰: "至有勸殿下以照管慈聖之動靜云者, 尤不勝駭憤。 是將欲離間予母子耶? 予之奉慈聖, 晨夕問寢, 慕昔文王王季之事, 洞洞屬屬, 猶恐不及, 如將失之, 無少間斷。 乃予日夜耿耿之心, 而卿居大臣之列, 乃以人子所不忍聞之說, 偃然筆之於書, 以駭惑中外之聽, 予直欲鑽地以入而無覩也。 噫! 母子之間, 人所難言, 況以如是萬萬不近理之說, 詬辱君父,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一覽箚辭, 仰天扣胸, 生不如死。 且等, 俱以骨肉之親, 雖有罪犯, 久竄遠地, 尙未蒙寬宥之典。 以慈聖仁愛之心, 特欲放釋, 故予仰體慈聖之至意, 返之京第, 使之杜門自責。 其於議親、議族之義明矣。 卿意大相不同, 予實未曉也。 等所犯, 不過持身不謹而已。 時烈則身犯一罪, 而卿反伸救, 欲使我骨肉至親, 陷於不測之地。 卿雖急於護黨, 肆爲不忍聞之悖語, 何面目復謁兩朝於地下乎? 蓋卿之箚語, 非爲應旨救弊, 積怒於時烈之被罪, 忿忿之餘, 欲以此爲眩惑朝廷之計也。 大臣所爲如此, 此豈非召災之一助也哉? 予實痛國家之將亡也。" 上疾諭一遍如誦文, 史官飛書, 十不及一。 夏鎭欲以己意增書, 史官趙持謙止之。 上初曰: "仰天愧恧, 只自憤泣。" 而夏鎭落 "只自憤泣" 四字, 書愧恧以叩胸。 持謙曰: "叩胸二字, 自上初敎以愧恧。" 上曰: "仍以叩胸書之。" 請管束慈聖, 而壽恒誤聞以爲照管。 壽恒久之, 號文谷, 文正公 尙憲之孫。 風儀端粹, 文章精鍊, 爲時冠冕。 是時, 群小肆其兇悖, 君臣父子之大倫, 幾乎夷滅無遺, 人心憤惋, 進言者相續, 而率未能剖柝其情節。 獨壽恒悉數而痛辨之, 明白激切, 辭氣澟然。 箚本一出, 賊輩心肝懸在肉案上, 人人得以見之。 身雖陷敗, 而章蔡之謀, 亦因是少戢。 東朝得保無事, 實壽恒一箚之力也。 人謂其扶樹倫彝, 眞不愧爲尙憲之孫, 士林翕然尊仰之。 宋時烈以詩美之曰: "一柱亭亭獨立時, 狂瀾怒觸未曾欹。 誰言東斯文喪, 贏得千秋永賴之。" 一時傳誦。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93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고사(故事) / 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인물(人物)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