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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4권, 숙종 1년 6월 3일 경신 3번째기사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대마도 태수 평의진이 보내 중국에서 오삼계·정금이 반란한 사실을 알리다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 평의진(平義眞)의 서신이 왔다. 그 편지의 겉봉[皮封]에 큰 글씨로 두 줄을 쓰기를 ‘화융(華戎)의 병사(兵事)와 인양(隣壤)의 안부(安否)를 물으려고 예부 대인(禮部大人)에게 올립니다.’ 하였다. 그 편지의 대략(大略)에 말하기를,

"명(明)나라 옛 신하 오삼계(吳三桂)가 선제(先帝)의 어린 아들을 도와서 외로운 황자(皇子)를 세워 명나라를 회복할 계책을 오랫동안 품고서 차자(箚子)를 여러 곳에 나누어 보내 훌륭한 장수를 모집하고 절의(節義)를 짚고 정의의 군사를 일으켜서 바야흐로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의 공(功)을 세우고자 하여 지금 이미 남경(南京)과 북경(北京)의 두 서울을 도모했다 합니다. 〈대마도는〉 하늘과 땅을 달리하고 있어서 전투(戰鬪)의 어지러운 정상(情狀)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귀국(貴國)은 국토가 말갈(靺鞨)567) 과 가깝고 길이 중원(中原)과 통하고 있으므로, 전란의 여파(餘波)가 〈귀국의〉 변방에는 미치지 아니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그가 동래(東萊)부산(釜山)에 보낸 서신도 대략 같았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어진익(魚震翼)이 이를 임금에게 아뢰어 왔으므로, 비변사(備邊司)에 내렸다. 오삼계(吳三桂)는 명조(明朝)에 대장(大將)이 되어 산해관(山海關)을 지키고 있을 때 이자성(李自成)이 북경(北京)을 함락하였다. 이에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고 청(淸)나라 군사를 끌어들여서 이자성(李自成)을 쳐서 달아나게 하니, 중원(中原)이 드디어 청(淸)나라 사람의 소유(所有)가 되었다. 이에 청(淸)나라에서 오삼계를 봉(封)하여 평서왕(平西王)으로 삼았다. 오삼계는 마음속에 〈명나라를〉 회복할 뜻을 품고 남모르게 천하(天下)의 날래고 건장한 자를 기르면서 형초(荊楚)의 기재(奇材)들을 불러 들였다. 이에 청나라 사람이 의심하여 오삼계를 운남왕(雲南王)으로 옮겨 봉하였다. 오삼계는 드디어 군사를 일으키고 격서(檄書)를 천하(天下)에 전하였으며, 숭정 황제(崇禎皇帝)568) 의 셋째 아들을 세워 황제를 삼아서 갑인년569) 1월 1일에 운남(雲南)에서 즉위(卽位)하였으며 연호(年號)를 ‘광덕(廣德)’이라 하였다. 이에 오삼계흥명토로 대장군 정남왕(興明討虜大將軍靖南王)으로, 경정충(耿精忠)을 정남왕(定南王)으로 삼으니, 공유덕(孔有德)의 사위[女婿] 손연령(孫延齡) 등이 이에 호응하여 의(義)를 부르짖었고, 정금(鄭錦)도 또한 군사를 연합하여 함께 진군(進軍)하였다. 또 황극 달자(皇極㺚子)와도 서로 통하였다. 이에 장군(將軍) 마이두(馬爾頭) 등으로 하여금 여러 번 청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호남(湖南)과 섬서(陝西)의 땅을 다 탈취하였다. 오삼계획책(嚄唶)570) 한 옛 장수로서 지혜와 용맹이 있었다. 이에 명(明)나라가 멸망한 지 30여 년 만에 주씨(朱氏)571) 를 받들어 다시 일어났으니, 이는 대개 하(夏)나라 신하 미(靡)와 서로 비슷하고, 궁인(宮人)·태감(太監)과 더불어 〈황족의〉 한 핏덩이를 숨겨 보전한 것은 〈진(晉)나라의〉 정영(程嬰)과도 서로 비슷하며, 궁려(穹廬)572) 에 무릎을 꿇었다가 마침내는 큰 욕(辱)을 참으면서 쌓은 뜻을 분발(奮發)한 것은 〈한(漢)나라의〉 이능(李陵)도 일찍이 하려다가 못했던 것이었다. 처음에 오삼계가 운남왕(雲南王)으로 봉함을 받아 부임할 적에 고(故)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가 마침 연(燕)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의 융성한 위의(威儀)가 마치 한 천자(天子)와 같음을 보았다. 그렇지만 오삼계의 얼굴에는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 정태화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오삼계는 마침내는 오랑캐의 신하[虜臣]가 될 자는 아니다.’ 하였다. 정금(鄭錦)에 대하여는 혹은 정지룡(鄭之龍)의 손자라 말하고 혹은 우리 나라 사람이라고 말한다. 정금(鄭錦)해도(海島)573) 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우리 나라의 호서(湖西) 지방과 아주 가까웠다. 계축년574) 사이에 사기(砂器)를 파는 자가 배를 부평(富平)에 정박(淀舶)하여 놓고는 다만 갈모[笠帽] 등의 물건만 사 가지고 갔었다. 고(故) 상신(相臣) 이완(李浣)이 수군[舟師]을 거느리고 서해(西海)로 나갔을 때에 우연히 절강(浙江)의 그림을 그린 그릇을 보았다. 그 그릇을 보고 놀래면서 말하기를, ‘이는 절강(浙江)에서 만든 것이다. 어찌하여 여기에 왔는가?’ 하고 체포하려 하였으나 체포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 사신(使臣)이 돌아와 말하기를, ‘정금(鄭錦)이 오랑캐[胡]와 더불어 싸울 적에 온 군사가 갈모로써 우리 나라 사람의 복색(服色)을 본받아 차렸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의심하더라.’ 하였다. 그 때야 비로소 사기(砂器)와 바꾸어 간 이유를 알았다. 갑인년575) 10월에 해서(海西) 지방으로부터 와언(訛言)이 있기를 ‘경외(京外)가 크게 시끄러웠다.’ 하였고, 혹은 말하기를 ‘이는 괜히 놀란 것이 아니라 정금이 이끄는 수군[舟師]이 해상에서 등주(登州)와 내주(萊州)로 향하였다고 바닷가의 사람들이 서로 전파하여 이 말이 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 영남(嶺南)의 인동(仁同) 약목촌(若木村)에서는 산벼랑이 떨어져 빠졌는데, 그 가운데 돌에 새긴 것이 있어 말하기를 ‘홍무(洪武)576) 후 310년에 산동(山東)의 마장군(馬將軍)이 군사를 이끈 패(牌)’라고 하였다. 이는 오삼계정금의 장수 가운데 마가(馬哥)의 성(姓)을 가진 자가 있는 것이라 하였고, 이 때문에 그들이 나올까봐 더욱 두려워하였다. 이에 윤휴(尹鑴)는 ‘일본을 매개로 하여 정금과 통해야 한다.’ 하고 묘당(廟堂)에서는 ‘왜(倭)의 서신으로 청나라에 통고해야 한다.’고 서로 다투어 결정하지 못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지난날 우리 나라의 운수가 망극(罔極)함을 당하였을 적에 우리의 꾀가 성실하지 못한 데서 나왔기 때문에 중조(中朝)의 3백 년의 은의(恩義)를 저버리고 온 천하(天下) 천만세(千萬世)의 치욕을 안고서 마침내는 저들을 돕는데 이르렀으니, 이는 마치 개나 양을 호랑이 앞에 내 준 격이라, 당세(當世)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우리 효종(孝宗)께서 영무(英武)하신 자질로 큰 뜻을 분발하셨고, 한편으로 준예(俊乂)의 인재를 모아서 밀물(密勿)577) 의 경영(經營)을 하면서 월(越)나라의 쓸개578) 를 바야흐로 달아 놓았었는데, 헌원(軒轅)의 활을 문득 버렸으니579) 중도(中途)의 뼈아픔은 하늘과 땅처럼 한이 없었다. 때마침 천도(天道)는 적현(赤縣)580) 의 화(禍)를 뉘우치고 인심(人心)은 주씨(朱氏)581) 를 아직 잊지 않고 있는지라, 오삼계(吳三桂)가 운남(雲南)에서 한 번 부르짖으매 뭇 영웅들이 해내(海內)582) 에서 함께 응하였다. 이러한 기미(幾微)를 타서 우리가 만일 군사를 이끌고 요동(遼東)을 건너가서 곧바로 〈적의〉 소혈(巢穴)을 무찔러서 왕사(王師)583) 는 그 남쪽을 공격하고 우리의 군사는 그 서쪽을 공격하였더라면, 가히 뱀을 베고 돼지를 죽이듯이 피비린내나고 더러운 것들을 깨끗이 씻어버려서 거의 인조(仁祖)께서 남기신 부끄러움을 씻고 신종(神宗)의 지극했던 은덕을 갚아서 천하(天下)의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삼한(三韓)584) 의 충절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스럽게도 그 희보(喜報)가 겨우 이르자마자 선왕(先王)께서 문득 뭇 신하들을 버리시고 주상(主上)께서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시니, 늙은 간신(奸臣)들이 나라의 일을 맡고 뭇 사특한 자들이 몰려나와서 유현(儒賢)을 마구 씹고 사류(士類)들을 물리쳐 내었으니, 어느 겨를에 생각이 국가 대계(大計)에 미치겠는가? 아! 만일 효종의 초년(初年)에 이러한 기회를 만났더라면, 반드시 충렬(忠烈)에 기대고 신위(神威)를 분발하여 금과(金戈)와 흰 깃발로 의기(義氣)를 중원(中原)에 고취(鼓吹)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선왕(先王)께서 훙(薨)하지만 않으셨더라도 또한 치밀하게 계책을 세워 때를 보아 움직였을 것이고 이처럼 앉아서 보기만 하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어찌 하늘이 우리로 하여금 끝내 치욕(耻辱)을 안은 채 씻지 못하게 하는가? 아! 이 아픔 어이 견디랴?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87면
  • 【분류】
    외교-왜(倭) / 역사-사학(史學)

  • [註 567]
    말갈(靺鞨) : 만주 지방을 말함.
  • [註 568]
    숭정 황제(崇禎皇帝) : 숭정(崇禎)은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 [註 569]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 [註 570]
    획책(嚄唶) : 잔소리가 많은 모양.
  • [註 571]
    주씨(朱氏) : 명나라 왕실의 성씨가 주씨임.
  • [註 572]
    궁려(穹廬) : 청(淸)을 흉노(匈奴)에 비유함.
  • [註 573]
    해도(海島) : 대만(臺灣)임.
  • [註 574]
    계축년 : 1673 현종 14년.
  • [註 575]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
  • [註 576]
    홍무(洪武) : 명나라 태조의 연호.
  • [註 577]
    밀물(密勿) :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기밀의 정사에 참여하여 처리하는 것.
  • [註 578]
    월(越)나라의 쓸개 :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몸을 괴롭게 하고 노심 초사(勞心焦思)하여 늘 쓸개를 맛보았다는 고사(故事).
  • [註 579]
    헌원(軒轅)의 활을 문득 버렸으니 : 헌원(軒轅)은 황제(黃帝)의 이름. 황제(黃帝)가 용(龍)을 타고 승천(昇天)할 때에 따라 타지 못한 소신(小臣)들이 용의 수염에 매달렸다가 수염이 뽑혀 떨어지고 황제의 활이 떨어지니, 백성이 그 활을 안고 울부짖었다는 고사(故事). 여기서는 효종의 승하를 뜻함.
  • [註 580]
    적현(赤縣) : 중국.
  • [註 581]
    주씨(朱氏) : 명나라를 가리킴.
  • [註 582]
    해내(海內) : 나라 안.
  • [註 583]
    왕사(王師) : 명나라 군사를 가리킴.
  • [註 584]
    삼한(三韓) : 우리 나라.

對馬島太守平義眞書至。 其書皮封, 大書雙行曰: "問華戎兵事、隣壤安否, 遺禮部大人。" 其書略曰:

大明舊臣吳三桂, 輔翊先帝幼子, 久懷立孤, 丕運恢復之籌, 分箚倡良將, 杖節擧義兵, 方欲樹創業守成之功, 而今業已圖南北兩京。 各天異地, 未詳鬪亂情形。 貴國地近靺鞨, 道通中原, 不知干戈餘殃, 無及邊徼耶?

其抵東萊釜山書略同。 東萊府使魚震翼擧而上聞, 下備邊司。 三桂朝爲大將, 守山海關李自成北京, 三桂開關引兵, 擊走自成, 中原遂爲淸人所有。 三桂平西王, 三桂內懷恢復之志, 陰養天下驍健, 收召荊楚奇材, 淸人疑之, 移封三桂雲南三桂遂擧兵, 傳檄天下, 立崇禎皇帝第三子爲皇帝, 以甲寅正月元日, 卽位于雲南, 年號廣德。 以三桂興明討虜大將軍靖南王, 耿精忠定南王, 孔有德女壻孫延齡等, 同聲倡義, 鄭錦亦連兵幷進。 又與皇極㺚子相通, 使將軍馬爾頭等, 屢破兵, 盡取湖陝之地。 三桂以嚄唶宿將, 智勇深沈。 乃於亡三十餘年, 奉朱氏復興, 則蓋與相似, 其與宮人太監, 匿一塊保全, 則與程嬰相似。 其屈膝穹廬, 而終奮大辱之積志, 卽李陵之所嘗欲而未能者也。 始, 三桂封王赴雲南時, 故相鄭太和適使, 見其威儀甚盛, 若一天子, 而三桂面有憂色。 太和歸言: "三桂非終爲虜臣者也。" 鄭錦或言之龍之孫, 或言我人。 據海島, 與我國湖西地方頗近。 癸丑年間, 有賣砂器者, 泊船富平, 只買笠帽等物, 故相李浣領舟師西赴時, 偶見浙江畫器, 見其器驚曰: "此浙江所造, 何以來此?" 欲捕之不得。 其後, 使臣歸言: "與胡戰, 一軍以笠帽, 效我人服色, 故淸人疑我。" 云, 始知爲砂器所易。 甲寅十月, 自海西有訛言, 京外大擾, 或言非虛驚, 乃鄭錦舟師自海向登萊, 海邊人傳相告語, 以致此云。 且嶺南仁同 若木村, 山厓墜陷, 中有石刻曰: "洪武後三百十年, 山東馬將軍領軍牌。" 將帥中有馬姓人, 以是益懼其出來。 尹鑴欲因日本, 廟堂欲以倭書告, 相爭不決。

【史臣曰: "昔我邦運丁罔極, 謀出不臧, 負中朝三百年恩義, 抱天下千萬世羞辱, 終至於助彼, 犬羊倀於虎前, 當世之事, 尙忍言哉? 肆我孝宗以英武之資, 奮發大志, 旁招俊乂, 密勿經營, 膽方懸, 弓遽遺, 中途之痛, 天壤無窮。 屬天道悔禍于赤縣, 而人心未忘乎朱氏, 三桂一呼於雲南, 群雄竝應於海內。 乘此之幾, 我若提兵渡遼, 直擣巢穴, 王師攻其南, 我兵擊其西, 則可以殪蛇斬豕, 掃淸腥穢, 庶幾灑仁祖之遺恥, 報神宗之至德, 使天下萬國, 知三韓忠節, 猶有不泯。 而不幸喜報纔至, 先王奄棄群臣, 主上沖年莅祚, 老奸當國, 群邪彙進, 咀嚼儒賢, 斥逐士類, 何暇念及國家大計乎? 噫若孝宗初年而遭此會, 則必仗忠烈、奮神威, 以金戈白旗, 皷義氣於中原。 先王未薨, 則亦必綢繆謀畫, 相時而動, 不作此坐視而已。 豈天之使我, 終抱羞而莫雪耶? 嗚呼, 可勝痛哉!"】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87면
  • 【분류】
    외교-왜(倭)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