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에서 권유가 거살의 뜻을 강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권유(權愈)가 거살(去殺)의 뜻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비록 나라를 잘 다스려서 형벌을 폐지하였다고는 하지만, 실제는 엄격(嚴格)함으로써 나라를 다스린 것이니, 요(堯)와 순(舜)만 인정(仁政)일 뿐이었고, 한(漢)나라 이후부터는 엄격함을 숭상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두렵게 하였을 뿐입니다."
하니, 허적(許積)은 오히려 그를 비난하기를,
"다만 백성들로 하여금 두렵게만 한 것은 바로 진(秦)나라 법입니다."
하였다. 이하진(李夏鎭)이 《강목(綱目)》을 강하여 말하기를,
"초(楚)나라의 법은 군주가 일마다 힘쓰지 않고, 나라의 일을 모두 영윤(令尹)들이 하였습니다."
하였으니, 대개 이하진은 임금이 정사를 허적과 윤휴 등에게 오랫동안 위임시키게 하고자 해서 미묘(微妙)한 말로 넌지시 말한 것이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재아(宰我)의 전율(戰慄)한다는 한 마디의 말이 당시의 임금에게 살벌(殺伐)한 마음을 열어 주었으므로, 공자(孔子)가 이를 깊이 책망하였다. 지금 권유가 말한 한(漢)나라 이래로는 백성들로 하여금 두렵게만 한다고 함은 어찌 그리 재아의 말과 같은가? 대저 제왕(帝王)이 정치를 할 적에 덕(德)을 정치하는 근본으로 삼았다고, 형벌을 정치 돕는 도구로 삼았다. 또 역사에서 한나라 문제는 오로지 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데만 힘썼다고 일컬었으니, 이것이 권유가 말한 ‘백성들로 하여금 두렵게만 한다.’ 한 것과 같다 하겠는가? 권유 등은 다만 군주에게 형살(刑殺)로 권하여 자기들의 해독(害毒)을 전파하는 계책을 시행하려고 하였으니, 훗날의 근심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허적이 이내 아뢰기를,
"이만형(李萬亨)의 소(疏)를 두어 달 뒤에 추후해서 들여온 것은 군주의 사체(事體)에 맞지 않습니다. 비록 이미 정배(定配)를 하였습니다만, 그가 이미 허물이 무거움을 알았으니, 도로 거두어 들임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김석주(金錫胄)가
"허적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고, 승지(承旨) 이관징(李觀徵)도,
"추죄(追罪)하는 것은 성덕(聖德)에 손상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유벌(儒罰)만 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임금이 유혁연(柳赫然)에게 묻기를,
"경이 목욕(沐浴)하는 곳을 다녀왔으니, 소견(所見)이 어떠한가?"
하니, 유혁연이 개성부(開城府)와 강화(江華)와 평산(平山)과 파주(坡州)의 네 성(城)의 지도(地圖)를 올렸다. 그리고 먼저 강화(江華)의 지도를 가지고 그 지역의 형세를 가리키면서 아뢰었고, 다음에 개성부(開城府)의 지도를 가리키면서 아뢰기를,
"참으로 하늘이 만든 땅입니다. 산의 형세가 담을 두른 듯하고 그 높이가 하늘에 닿은 듯하니, 백성들을 보호하고 군사를 조련(調鍊)하는 데는 이곳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곳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성(城)을 쌓기를 원하는데, 다만 조적미(糶糴米)를 운반하여 오는 어려움이 염려됩니다. 그러나 박연 폭포(朴淵瀑布) 아래에 창고를 지어 곡식을 쌓아 두었다가 위급한 때에 임하여서 성중(城中)으로 실어 들이는 것이 편리하고 좋을 듯합니다."
하고, 파주(坡州)의 지도를 가리키면서 아뢰기를,
"여기에 성을 쌓고 또 저기에 성을 쌓으면 실지로 강도(江都)를 성원(聲援)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평산(平山)의 지도를 가리키면서 아뢰기를,
"이 성은 관서(關西)로 통하는 큰 길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박엽(朴燁)이 이 성을 쌓았습니다만, 지금은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서로 가는 길의 성터는 이 성이 가장 낫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만약 개성부(開城府)에 성을 쌓으면 해서(海西)와 기전(畿甸)의 백성들이 여기에 들어와 보전하게 될 것이므로 쌓지 않을 수가 없으니, 〈성을 쌓기 전에〉 먼저 사찰(寺刹)에 들어가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강화(江華)가 훗날 만약 주필(駐蹕)하는 곳이 된다면 성을 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둘레 수백 리에 비록 성을 다 쌓을 수는 없더라도, 성을 쌓을 만한 곳이 60여리나 됩니다."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창성(昌城)은 가장 요충(要衝)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병사(兵使)의 행영(行營)을 설치하고 또 감사(監司)로 하여금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지금 비록 옛날처럼 회복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마땅히 부성(府城)을 수축(修築)하여야 하겠습니다. 창성으로부터 귀성(龜城)·태천(泰川)과 운산(雲山)으로 향하는 길에는 완항령(緩項嶺) 밖에 당아 산성(唐阿山城)이 있는데, 직로(直路)에 당해서는 자못 험준한 곳입니다. 그러니 만약 사변(事變)이 있으면 창성(昌城)과 삭주(朔州)에 후퇴(後退)하여 이 성(城)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완항령 밑의 우구리(牛仇里) 옛 진(鎭)에 하나의 만호(萬戶)를 설치하여 시채(恃寨)로 칭호를 고치고, 본부(本府)의 중군(中軍)을 겸무(兼務)시키며, 창성(昌城)의 관향(管餉) 둔전(屯田)을 이관(移管)해 주어서 만호로 하여금 겸관(兼管)하게 하고, 산성(山城)과 군기(軍器)를 보수(補修)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석주(金錫胄)가 아뢰기를,
"선혜 호서청(宣惠湖西廳)에서 금년 가을에 봉납(捧納)하는 것이 겨우 1만 3천여 석(石)입니다. 다음 해의 세폐(歲弊)의 값으로 받는 면포(綿布)와 정포(正布)의 값으로 받는 쌀은, 연례(年例)에 따라 호조(戶曹)로 이송(移送)하던 것을 금년에는 이송하지 말도록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57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77면
- 【분류】인물(人物)
○癸未/御晝講。 權愈釋去殺之義曰: "文帝雖刑措, 實以嚴致治。 堯、舜仁而已, 漢以下尙嚴, 使民畏懼。" 許積猶非之曰: "只使民畏懼, 是乃秦法。" 李夏鎭講《綱目》曰: "楚國之法, 君不事事, 國事皆令尹爲之。" 蓋夏鎭欲上久委政積、鑴等, 故以微言諷之。
【史臣曰: "宰我戰栗之言, 啓時君殺伐之心, 故夫子深責之。 今愈言漢以下使民畏懼, 何似宰我之言也? 夫帝王爲治, 以德爲致治之本, 刑爲輔治之具。 且史稱文帝專務以德化民, 豈若愈所言, 使民畏懼也哉? 愈等只欲勸君刑殺, 以售其流毒之計, 他日之憂, 可勝言哉? 積仍言: "李萬亨疏推納於數月之後, 不合人君事體。 雖已定配, 旣知其過重, 則還收可矣。" 金錫冑以積言爲是, 承旨李觀徵亦以爲追罪有傷聖德。"】
上曰: "卿等之言如此, 只施儒罰可也。" 上問柳赫然曰: "沐浴之行, 所見何如?" 赫然進開城府、江華、平山、坡州四城圖, 先以江華圖, 指陳形勢, 次指開城府圖曰: "眞天作之地。 山勢如墻, 其高如天, 保民調兵, 莫如此地。 居民咸願築城, 但慮糶糴之難運。 然於朴淵下置倉積, 臨急輸入城中, 亦便好。" 指坡州圖曰: "城於此, 又城於彼, 實爲江都聲援。" 指平山圖曰: "此城當關西大路。 昔者朴燁築此城, 今至頹圮, 而西路城基, 惟此城最勝。" 積曰: "若築開城府, 海西、畿甸之民可以入保, 不可不築。 可先入寺刹也。" 又曰: "江華他日若爲駐蹕之所, 不可不城。 周廻數百里, 雖不可盡築, 當築者六十餘里矣。" 積又言: "昌城最當要衝, 舊設兵使行營, 且令監司留住者此也。 今雖不可復舊, 宜修築府城。 自昌城向龜、泰、雲山之路, 有緩項嶺外唐阿山城, 當直路, 頗險阻, 有變則昌、朔當退守此城。 卽嶺底牛仇里舊鎭, 設一萬戶, 改號恃寨, 兼帶本府中軍, 移給昌城管餉屯田, 使萬戶兼管, 修補山城及軍器好矣。" 從之。 錫冑言: "宣惠湖西廳今年秋捧, 僅一萬三千餘石。 次歲幣價綿布及正布價米, 年例移送戶曹者, 今年則請勿移送。" 從之。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57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7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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