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을 마친 후 중국 사람 황공의 상소에 대하여 논하게 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동지사(同知事) 장선징(張善瀓)이 《논어(論語)》의 침윤부수장(浸潤膚受章)을 강(講)하다가 말을 올리기를,
"소인(小人)의 정상(情狀)은 이와 같으니, 무릇 편벽(便辟)하고 아첨하는 길을 말미암아 진출(進出)한 자는 더욱 마땅히 그 말을 깊이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니, 이는 논어의 글을 인하여 간쟁(諫爭)하는 뜻을 둔 것이다. 강을 파(罷)한 뒤에 명하여 대신(大臣)들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상들을 인견(引見)하였다. 허적(許積)이 소매 속에서 황공(黃功)의 상소를 꺼내 올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상소를 다 보았느냐? 말할 것이 있으면 말하라."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먼저 황공(黃功)의 사람됨을 말하겠습니다. 효종(孝宗)께서 황공을 속(贖) 바치고 데려와 본궁(本宮)의 곁에 있게 하고 요(料)를 주어 후하게 대우하였으니, 그가 반드시 감격하였을 것인데 다만 허황스럽게 내용이 없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황공이 일찍이 ‘염초(焰硝)를 구워낼 줄을 안다.’고 말하였기에, 충청도(忠淸道)에 내려보내어 구워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더니 황공(黃功)이 서울로 돌아와서 말하기를, ‘땅이 좋지 못하여 이루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뒤에 다시 말하기를, ‘함경도(咸鏡道)에 들어가면 구워 만들 수 있다.’ 하기에, 신이 계달(啓達)하여 역마(驛馬)에 태워 함경도에 보내 주고 호조(戶曹)로 하여금 털옷을 만들어 주었습니다만, 그가 또 굽지 않고 왔습니다. 이렇게 함경도에 가겠다 한 것은 실지로는 그가 금성(金城) 지방에 혼인(婚姻)을 하였기에 역마를 타고 가려고 이처럼 기망(欺罔)하는 말을 한 것인데, 신(臣) 등이 두 번이나 속임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4조(條)의 창(槍) 쓰는 법을 안다.’고 하는 것은 유혁연(柳赫然)에게 물으시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하였는데,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그를 불러서 창 쓰는 법을 시험하려고 하였습니다만, 그가 매양 병(病)을 핑계하고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무사(武士)들이 창 쓰는 법을 배워 아는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창 쓰는 법은 군문(軍門)에 명령하여 그를 불러 시험하게 하고,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도 조금 시험하여 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장선징(張善瀓)이 아뢰기를,
"정유년290) 이후로 중국 사람이, ‘이 땅에 머물러 우리 군사들에게 기예(技藝)를 가르치겠다.’고 청하였습니다만, 끝내 실상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윤휴(尹鑴)가 나와서 아뢰기를,
"신도 황공이 18기의 무예가 있다고 말함을 들었는데 이것은 황공에게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가 정금과 통호한다는 한 가지 일만은 신의 뜻에는 좋다고 여깁니다. 천하(天下)가 크게 어지러워서 모두 호인(胡人)을 배반하고 있는데도 유독 우리 나라만이 복종하여 섬기고 있으니, 후일에 중원(中原)이 회복된다면 우리 나라가 무슨 면목(面目)으로 존립(存立)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일개 사신(使臣)을 보내어 정금에게 통호하면 후일에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너댓 사람의 무리를 보내어 길을 나누어 가게 한다면 비록 정금에게 도달(到達)하지 못하더라도 해로운 것은 없을 것이며, 도달할 수 있다면 사직(社稷)을 위하여 가장 좋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한 두 명의 유생(儒生)들이 이 사실로 소(疏)를 올렸다고 들었으니, 이 유생들을 칭찬 권장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권대운이 배척하여 아뢰기를,
"이일은 이미 계달(啓澾)하였던 것인데, 어찌하여 다시 이런 말을 합니까?"
하니, 윤휴가 아뢰기를,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있으면 다시 진달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대신(大臣)들도 무슨 이유로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훗날에 사변(事變)이 있게 되면 반드시 신의 말을 생각할 것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뜻이 좋기는 합니다만, 사신들을 들여보냈다가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그치면 그만이지만, 만약 청(淸)나라에 붙잡히게 되면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윤휴가 아뢰기를,
"명나라에 복종하여 섬긴 것이 3백 년이었는데, 오늘날 불행(不幸)이 이처럼 되었습니다. 지금 들으니, 주씨(朱氏)의 자손을 다시 임금으로 세운다고 하니, 한 명의 사신을 보내어 통문(通問)하는 것이 어찌 잘못된 일입니까?"
하자, 권대운이 아뢰기를,
"오삼계(吳三桂)가 반드시 주씨(朱氏)를 도울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과연 그렇게 되리라는 것만 안다면 전패(顚沛)될 것을 헤아리지 않고 보내더라도 괜찮겠습니다만, 사정을 알지 못하면서 먼저 사신을 보내 통문(通問)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윤휴가 아뢰기를,
"오삼계의 마음을 억측해서 사신을 보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니, 허적은 아뢰기를,
"호인(胡人)에게 붙잡힐까봐 염려가 될 뿐만이 아닙니다. 정금이 만약 우리 사신들을 호인에게 자랑하여 보인다면 큰 근심이 생길 것입니다. 또 정금이 우리 사신들에게 수로(水路)를 물어 길잡이로 삼아서 나온다면 이는 신이 가장 근심하는 것입니다."
하고, 권대운은 아뢰기를,
"정금이 반드시 우리 사신들을 붙잡아서 호인(胡人)에게 보이면서 자기를 복종하여 섬긴다고 말할 것입니다. 요사이 들으니 정금(鄭錦)이 청(淸)나라 사람과 싸울 때에 우리 나라 사람들의 복색(服色)을 하고는 우리가 그들과 군사를 연합(連合)하였다고 하였답니다."
하자, 윤휴는 아뢰기를,
"이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정의는 서로 그다지 멀지 않으니, 우리가 지성(至誠)으로 대하면 저들이 어찌 이렇게 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허적은 아뢰기를,
"정금은 명(明)나라를 배반한 사람이니 어찌 우리를 생각하겠습니까?"
하니, 윤휴가 분하고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는 듯이 아뢰기를,
"다만 하늘에 무죄(無罪)를 호소하려고 해도 할 길이 없을 뿐입니다."
하였다. 이계상(李啓祥)과 황공(黃功)도 참으로 사신으로 갈 뜻이 있는 것은 아닌데, 조정에서 반드시 보내지 아니할 것을 알고 상금(賞金)을 타 먹으려는 마음으로 갈 것을 청(請)한 것이다. 허적이 일찍이 이계상(李啓祥)의 일을 진달한 것은 그 실정을 실제로 알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윤휴도 반드시 꼭 보내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이미 이런 명분(名分)을 가탁하여 꺼냈기에 부질없이 말한 것이 이와 같았다. 허적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황해 감사(黃海監司) 윤계(尹堦)가 배천(白川)의 강서사(江西寺) 뒤에 성(城)을 쌓아서 강도(江都)의 후원(後援)으로 삼고자 하니, 유혁연(柳赫然)이 강화(江華)에서 평산(平山)으로 갈 적에 강서사의 뒤쪽에서 배를 내려 그 지역(地域)의 형세를 두루 살펴보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좋다."
하였다. 허적이 다시 주청(奏請)하기를,
"강도에 가서 형세를 살펴볼 적에 시재(試才)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윤휴(尹鑴)가 아뢰기를,
"옛사람이 제사를 지내는 일은 대개 새벽이거나 혹은 오시(午時)에 하였는데, 지금은 밤중에 제사를 지내게 되니, 참석치 않으시면 성상께서 인정과 도리로 보아 미안(未安)할 것이요, 제사에 참석하시면 피로하여 손상이 있을 듯하니, 시각(時刻)을 조금 물려서 편안히 주무신 뒤에 제사를 지냄이 어떻하겠습니까?"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큰 제사는 고치기 어렵겠습니다만 삭망(朔望)의 제사는 조금 물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김만기(金萬基)의 말이 있게 되자, 다시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하게 하여 예전대로 하고 물리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6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군사-군기(軍器) / 공업-관청수공(官廳手工) / 외교(外交)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註 290]정유년 : 1657 효종 8년.
○辛卯/御晝講。 同知事張善澂因講《論語》浸潤膚受章, 進曰: "小人情狀如此。 凡由(便僻)〔便辟〕 側媚之路而進者, 尤當深察其言。" 蓋因文寓諫也。 罷後, 命引見大臣、備局諸宰。 許積自袖中, 出黃功疏, 上曰: "盡見耶? 有可言者則言之。" 積曰: "臣請先言功之爲人。 孝廟贖出率來, 舍之本宮之側, 給料厚待, 渠必爲感, 而但虛談, 無實功。 曾言知燔硝, 下送忠淸道監燔, 則歸言, 地不好不成。 後言入咸鏡道則可燔, 臣陳達乘馹遣之, 令戶曹製給毛衣, 又爲不燔而來。 其實渠成婚於金城地, 欲乘驛以去。 爲此欺罔之言, 臣等再見誑矣。 渠言知四條槍法云, 問于柳赫然則可知。" 赫然曰: "臣嘗欲招試, 則每稱病不來, 故武士無學得者。" 積曰: "槍法則使軍門招試, 十八般武藝亦少試之可矣。" 張善澂曰: "丁酉後唐人請留, 敎我人技藝, 而終爲無實之歸矣。" 鑴出曰: "臣亦見功自言有技藝, 而此則不必學於功也。 至於渡海一節, 臣意爲好。 天下大亂, 皆叛胡, 而獨我國服事。 他日中原恢復, 我國何面目可立? 今送一介使, 通問於鄭錦, 則庶有辭於他日。 發遣四五輩, 分道以行, 則雖或不達, 無害; 能達則社稷之至計也。 聞一二儒生, 以此陳疏, 褒奬可矣。" 權大運斥之曰: "曾已陳達, 何復爲此言?" 鑴曰: "有懷則更陳, 何不可? 大臣亦何不容受? 他日有事變, 必思臣言。" 積曰: "意則善矣, 入送而不能達而已, 則好矣, 若被捉於淸國, 則奈何?" 鑴曰: "服事三百年, 不幸如此。 今聞朱氏子孫復立, 送一介問之, 豈不可矣乎?" 權大運曰: "吳三桂之必扶朱氏, 亦未可知也。 知其果爾, 則不計顚沛而爲之可也。 今不知而徑先通問, 不可矣。" 鑴曰: "不可億逆三桂之心而不爲也。" 積曰: "非但見捉於胡人爲可慮, 鄭錦若以我人誇示胡人, 則大患生矣。 且錦問水路於我人, 爲前導而出來, 則此臣之最憂者也。" 大運曰: "錦必執我人, 示胡曰: ‘服事渠矣。’ 頃聞, 錦與淸人戰時, 效我人服色, 謂我與渠連兵云矣。" 鑴曰: "此則必不然。 人情不相遠, 自我至誠爲之, 彼寧有是理?" 積曰: "錦乃叛明之人, 豈恤我乎?" 鑴若不堪憤悶者然曰: "直欲籲天而無從也。" 李啓祥、黃功, 非眞有行意, 知朝廷必不遣之, 要賞而請行。 許積曾陳啓祥事者, 實得其情也。 鑴亦非欲必送, 旣假此名而出, 故浪說如此也。 積白上曰: "黃海監司尹堦欲城白川 江西寺後, 以爲江都之援。 柳赫然自江華, 將往平山, 令下船于江西寺後, 周覽形勢何如?" 上曰: "唯。" 積請於往審江都時試才, 上從之。 鑴曰: "古人行祀事於質明, 或午時, 而今則夜裏行祭。 不參則自上情理未安; 參祭則恐有勞傷, 稍退時刻, 安寢後行事何如?" 積曰: "大祭則難改, 而朔望則稍退好矣。" 上從之。 後以金萬基言, 更議大臣, 而仍舊勿退。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6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군사-군기(軍器) / 공업-관청수공(官廳手工) / 외교(外交)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