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국을 인견하여 북한 산성의 수축과 삼남에 순무 파견하는 일을 논하다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청대(請對)하여, 북한(北漢)에 성을 쌓는 것이 마땅한 계책이 아니라는 것과 삼남(三南)에 순무(巡撫)를 보내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극진히 논하였는데, 이튿날 비국(備局)을 인견(引見)할 때에 임금이 허적(許積)에게 물으매, 허적이 말하기를,
"북한의 형세는 의논하는 자가 다들 주필(駐蹕)하기에 합당하다고 말하므로, 성을 쌓으려 하였으나, 이제 듣건대, 좁아서 사람을 많이 수용하기 어렵다 하니, 어찌 다만 서울 백성이 피난할 곳이라 하여 큰 일[大役]을 경솔히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의논하는 자 중에서 괜찮다는 사람이 많고 안된다는 사람이 적으니, 입시(入侍)한 신하들에게 물으소서."
하였다. 임금이 소견을 각각 아뢰게 하매, 신하들이 다 허적의 말과 같이 대답하고, 허적이 말하기를,
"김만기(金萬基)·오시수(吳始壽)만을 보내어 삼남을 살펴보게 하소서. 순무(巡撫)는 선조(先朝)에서 이미 정한 일이고, 순심(巡審)하여 검칙(檢飭)하면 도움이 될 것이 없지 않으니, 보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정익(鄭榏)이 말하기를,
"청컨대 갑곶이[甲串] 일면에 목책(木柵)을 설치할 것을 의논한 곳은 목책을 세우지 말고 제언(堤堰)을 더 쌓아 그 둑 안을 일구게 하소서. 그러면 적을 막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또 말하기를,
"군향(軍餉)·기계(器械)가 쌓여 있다 하더라도 군병(軍兵)이 4천명뿐이므로 경급(警急)이 있으면 지킬 군병이 없을 것이니, 통진(通津)·풍덕(豊德) 등 몇 고을의 군병은 신지(信地)를 미리 정하였다가 난에 임하여 들어가 지키면 좋을 것이다."
하매, 허적이 말하기를,
"풍덕 등의 고을은 다 총융청(摠戎廳)의 소속이므로 구도(舊都)에 가시는 행차가 있으면 총융청이 선봉(先鋒)이 되어야 하는데, 적은 군병이라도 어찌 다른 곳에 옮겨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익이 또 강도(江都)의 민역(民役)이 몹시 고된 정상을 아뢰었는데, 허적이 말하기를,
"이것은 비국에서 짐작하여 변통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오시수가 강화의 지도를 바치고 가리키며 형세를 아뢰었는데, 허적이 말하기를,
"근일의 논하는 자는 흔히 강도는 지킬 수 없을 것이라 하는데, 해구(海寇)가 있다면 과연 만전(萬全)할는지 알 수 없겠으나, 강과 바다로 둘러 있으니 어찌 지킬 수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병자년136) 에 지키지 못한 것은 사람의 모책(謀策)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친히 가서 두루 보고서 조치할 방도를 의논하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윤휴(尹鑴)의 소(疏)를 내어 전일 다하지 못한 말을 끝내게 하였다. 허적이 오가통(五家統)의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백성의 수를 몰라서 허다한 폐단이 있게 되니, 호패(戶牌)를 시행하고서야 이 폐단을 없앨 수 있으나, 사복(嗣服)137) 하신 처음에 소란이 있을까 염려하여 아직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가통의 법은 본디 먼저 시행해야 마땅한데, 김석주(金錫胄)는 열 집을 한 통(統)으로 만들기를 바라므로, 그것이 마땅하겠는지를 강구해야 하겠으니, 올해 호적(戶籍)을 만들 때에 절목(節目)에 보태어 넣어서 시행하소서."
하였다. 허적이 또 총부랑(摠府郞)의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크게 변통하는 것이니, 시행할 수 없겠습니다."
하고, 권대운(權大運)이 말하기를,
"사대부(士大夫)의 자제를 서얼(庶孽)과 함께 섞어서 하나로 기록하여 총부(摠府)에 붙이는 것이니, 어찌 그렇게 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허적이 소(疏) 가운데의 말을 지적하여 윤휴에게 묻기를 ‘이러한 말들은 꼬투리를 모르겠다.’ 하니, 윤휴가 말하기를,
"채택하여 시행하자면 절로 조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낭위(郞位)는 천문(天文)에서 상징하는 것이 전문(殿門)에서 창을 잡는 임무이며, 여씨(呂氏)가 난을 일으켰을 때138) 에도 이들로 힘을 얻었는데, 우리 나라의 사족(士族)은 그 수를 모를 만큼 많으므로, 이것으로 단속하려는 것입니다."
하고, 유혁연(柳赫然)이 말하기를,
"윤휴의 뜻은 과거(科擧)를 폐(廢)하는 데 있으므로 이 법을 시행하려는 것인데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이니, 행할 수 없습니다."
하고, 윤휴가 말하기를,
"어느 곳을 폐단이라 합니까?"
하고, 유혁연(柳赫然)이 말하기를,
"잡인(雜人)을 많이 모으면 정제(整齊)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윤휴가 말하기를,
"널리 모으되 정하게 쓴다면, 사람을 섞어 쓴들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까?"
하고, 오정위(吳挺緯)가 말하기를,
"옛 폐단을 없애야 할 것이지, 어찌 새 법을 세워야 하겠습니까? 나라의 저축이 죄다 없어졌는데 사족(士族)을 많이 모으면, 어떻게 접제(接濟)하겠습니까?"
하고, 윤휴가 말하기를,
"도감(都監)139) 의 군사는 편안히 앉아서 봉료(俸料)를 먹는 자가 수없이 많은데, 사족(士族)만은 휴양(休養)해서 안되겠습니까? 임금과 정승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때에 따라 변통하여 될 것인데, 어찌 옛일에 얽매여서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원정(李元禎)이 말하기를,
"그 뜻은 좋으나 예와 이제는 마땅한 것이 다르니, 반드시 시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족의 자제는 단속을 받지 않을 것이니, 요란할 뿐입니다."
하고, 윤휴가 말하기를,
"예전부터 폐단이 없는 법은 없습니다. 요순(堯舜)의 선양(禪讓)과 탕무(湯武)의 정벌(征伐)도 후세의 폐단이 되었거니와, 어찌 그들이 고생을 싫어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법을 시행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김석주가 말하기를,
"한대(漢大)의 기문(期門)140) ·우림(羽林)141) 의 제도는 우리 나라에 이미 본떠서 설치한 것이 있는데, 다른 제도를 따로 두어 경장(更張)하려고 힘쓰니, 그 이해(利害)에 대하여 신은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법이 있더라도 사람이 없는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하고, 윤휴가 말하기를,
"신을 과거를 폐하고 다른 제도를 따로 두려 한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운운(云云)이 있으나, 옛말에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마땅한 정치가 거행된다.’ 하였거니와 마땅한 사람이 없다면 조종(祖宗)의 법이라도 어찌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고, 허적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재상(宰相)의 자제는 좋은 집에 편히 살며 글을 읽는 것을 일삼으므로, 홍문랑(弘文郞)이라 하여도 괴롭게 여기는데, 하루아침에 총부랑(摠府郞)이라 하여 금군(禁軍)과 마찬가지로 하면, 요란할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사진(仕進)하는 길이 된다면 사정(私情)이 크게 행해질 것이니, 적을 막는 데에 쓰는 것으로는 더욱 그럴듯하지 않습니다."
하고, 윤휴가 말하기를,
"왕궁(王宮)을 가까이하고 임금 앞에서 봉사하면, 사대부의 자제는 간선(簡選)에 들지 못할세라 염려할 것입니다."
하고, 허적이 말하기를,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한 자는 사서(四書)·삼경(三經)에 능통하여도 재주를 이루지 못하는데, 더구나 총부(摠府)에서 《효경(孝經)》·병서(兵書)만을 강독(講讀)하여 어찌 인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근래 금군(禁軍)은 태반이 상한(常漢)인데도 제어하기 어려움을 걱정하는데, 사대부의 자제가 한 곳에 모이면 당론(黨論)만을 일삼고 무사(武士)를 종처럼 볼 것이니, 누가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윤휴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다 불편하게 여기니, 다시 아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또 차제(車制)의 일을 논하였는데, 허적이 말하기를,
"이것은 군사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총융사(摠戎使)의 생각은 어떠하오?"
하였다. 김만기(金萬基)가 말하기를,
"그 만듦새는 어떠하오? 메는 것은 말로 하오, 소로 하오?"
하니, 윤휴가 말하기를,
"마소에 메지 않고 위에 병기(兵器)를 싣고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밉니다."
하고, 김만기가 말하기를,
"얼마나 만들어야 하겠소?"
하니, 윤휴가 말하기를,
"1만 승(乘)이면 넉넉합니다."
하였다. 김만기가 말하기를,
"어렵습니다. 열흘 안에 어떻게 1만 승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유혁연이 말하기를,
"부서(扶胥)는 큰 수레이나, 무강(武剛)은 외바퀴이므로 한 사람이 운전할 수 있습니다. 위청(衛靑)은 사차(四車)로 자위(自衛)하였고, 마융(馬隆)은 수레로 식량을 싣고 요새(要塞) 밖 3천 리의 평량주(平凉州)에 나갔는데, 그 만듦새는 길이 좁으면 좁히고 평지에서는 펴니, 그 제도가 갖추어 있어 참으로 행군(行軍)하고, 적을 막는 미기(美器)이나, 신이 한 수레를 만들어 보니, 여드레 걸려서야 끝나고 드는 물력(物力)이 자못 많았으며, 또 여느 때에는 쓸 곳이 없는데 간수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윤휴가 말하기를,
"신도 한 수레를 만들어 보았는데, 한 그루의 나무로 두 량(輛)을 만들 만하였습니다. 사람이 탈 수 있고 물건을 실을 수 있는데 어찌 쓸 곳이 없겠으며, 전마(戰馬)를 먹여 기르는 데에 견주면 간수하기가 무엇이 어렵겠으며, 나라에 이롭다면 어찌 물력을 헤아리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생각에도 물력만 헛되이 쓸 듯하다."
하였다. 유혁연이 말하기를,
"윤휴는 일을 맡아 보지 못하였으므로 쉽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고, 윤휴가 말하기를,
"신의 나이가 60이 되어 가는데도 어찌 전혀 이해(利害)에 어두워서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이 기계가 아니면 남만(南蠻)·북적(北狄)을 막을 수 없는데, 금백(金帛)142) 을 가지고 무릎을 꿇고서 섬기기만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차전(車戰)이 없더라도 어찌 적을 막을 수 없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말하기를,
"삼대(三代)에는 수레가 있어도 융적(戎狄)의 화(禍)를 자주 입었고, 한대(漢代)에는 수레가 없어도 흉노(凶奴)가 요새에 와서 복항하였으니, 윤휴의 말이 지나칩니다. 그러나 그 제도도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니, 먼저 양국(兩局)143) 을 시켜 두 세 량(輛)을 만들어 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허적이 또 소(疏) 끝의 ‘스스로 경동(警動)하여’ 이하를 읽고 말하기를,
"이것은 말이 지극히 요약되었으니, 반드시 염려하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윤휴가 말하기를,
"신은 본디 학문에 실속이 없고 궁마(弓馬)에도 재주가 없으나, 신의 생각은 여기에 거의 다 아뢰었는데, 한 가지도 시행할 만한 것이 없다면 끝내 성상께 보답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일찍 스스로 물러가야 할 따름입니다. 한 두 가지라도 쓸 만한지를 시험할 것이 있다면 또한 몸을 바쳐 힘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성상께서 생각하여 진퇴(進退)하소서."
하고, 허적이 말하기를,
"이 말은 지나칩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다가 예의(禮意)가 쇠퇴하면 떠나야 하고, 경륜(經綸)의 큰 뜻이 있어도 행해지지 않으면 떠나야 하겠으나, 어찌 이 몇 가지 일에 따라 거취를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이 소(疏)에는 우악(優渥)한 내용으로 비답(批答)을 내리고 머물러 두고 살펴 보아 그 중에서 시행할 만한 것은 다시 강구(講究)하셔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접때 김휘(金徽)가 양서(兩西)의 군정(軍政)을 닦는 뜻을 말하였는데, 어떠한지 모르겠다."
하매, 허적이 말하기를,
"신들이 근일 강구한 것이 이 일입니다."
하고, 윤휴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근심은 오직 정금(鄭錦)이 해변에 갑자기 닥치고 청로(淸虜)가 서로(西路)에 가득 찬 데에 있으며, 지난 가을의 헛 경보도 근거가 없는 일이 아니니 이것을 청국(淸國)에 고급(告急)하여 군사를 정비할 수 있도록 허락받고, 또 우리가 청국을 섬기는 것이 정금이 전에 의심하여 분노하던 것인데 이제는 오삼계(吳三桂)와 힘을 합쳐 그 형세가 매우 확장되었으므로 세상에 대고 죄를 말하고 치러 올 걱정이 있을 듯하니 한 사신이 바다를 건너가서 성심(誠心)을 보이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접때 수원(水原)의 유생(儒生) 이계상(李啓祥)이 상소하여 스스로 바다를 건너가겠다고 청하였는데, 이러한 사람을 특별히 아름답게 여겨 장려하면 반드시 잇달아 일어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요망(暸望)하는 한 가지 일도 신칙(申飭)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허적이 말하기를,
"주청(奏請)하는 일을 앞으로 사행(使行) 때에 붙여 보낼 수 있고, 연변에서 요망하는 것도 이미 분부하였으나, 정금(鄭錦)으로 말하면 그 할아비 정지룡(鄭芝龍)이 처음에 명(明)나라에 반역하여 해도(海島)에 몰래 웅거하였으므로 우리에게 적이 되는데, 어떻게 서로 교통하겠습니까?"
하고, 윤휴가 말하기를,
"저들은 이미 주씨(朱氏)144) 를 함께 도우므로 의리로 거사하여 우리를 침범할 뜻이 있을 것이니, 우리가 이제 통호(通好)하면 앉아서 10만의 군사를 물리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고, 허적이 말하기를,
"정금(鄭錦)이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고 확실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넓디 넓은 바다 어느 곳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청국 땅에 잘못 배를 대면, 큰 화(禍)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또 조정에 사람이 모자라더라도, 사신을 보낼만 하다면 어찌 한낱 유생(儒生)이 스스로 청하는 것을 허락하겠습니까? 이계상(李啓祥)도 조정이 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가 감히 스스로 청한 것입니다."
하고, 윤휴가 말하기를,
"휘종(徽宗)·흠종(欽宗) 때에 주변(朱弁)이 금(金)에 사신으로 가겠다고 스스로 청하여 사절의 임무를 다하고 돌아왔는데, 그가 있는 곳이 우리 나라에서 멀지 않다 하거니와 한 사신이 서로 교통하는 것이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권대운이 말하기를,
"이것은 한 사람의 사사로운 일이 아닌데, 어찌하여 이토록 굳이 다투는 것입니까?"
하고, 윤휴가 말하기를,
"품은 뜻을 아뢰었을 뿐입니다. 어찌 감히 대신과 서로 다투겠습니까?"
하였다. 허적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계상의 소(疏)는 누설될까 두려우니,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고 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김만기(金萬基)가 총융사(摠戎使)의 직임을 힘껏 사퇴하여 말이 매우 간절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고 승지(承旨)를 시켜 빈청(賓廳)에서 밀부(密符)를 전수(傳授)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4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건설-토목(土木) / 군사(軍事) / 인사-선발(選拔) / 역사-고사(故事)
- [註 136]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137]
사복(嗣服) : 선대의 사업을 이음.- [註 138]
여씨(呂氏)가 난을 일으켰을 때 : 여씨(呂氏)의 난(亂)을 가리킨 것.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황후 여씨(呂氏)는 고조가 죽은 뒤 여주(女主)로 집권하여 여씨 일족을 왕(王)으로 봉하였고, 황실을 억압하여 유씨(劉氏)의 한나라를 위태롭게 하였다. 여후(呂后)가 죽고 드디어 여씨의 난이 일어나자 주발(周勃)·진평(陳平)이 여씨 일족을 주멸(誅滅)하였음.- [註 139]
도감(都監) : 훈련 도감(訓鍊都監).- [註 140]
기문(期門) :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설치한 관명(官名). 군사를 맡아서 천자(天子)를 시종(侍從)하는 일을 맡아 보았음.- [註 141]
우림(羽林) : 중국에서 천자의 숙위(宿衛)를 맡아 보던 금위(禁衛)의 이름. 한(漢)나라 무제가 우림을 처음으로 두었는데, 당대(唐代)에는 좌우 우림위(左右羽林衛)를, 송대(宋代)에는 우림 장군(羽林將軍)을, 명대(明代)에는 우림위(羽林衛)를 각기 두었음.- [註 142]
○淸風府院君 金佑明請對, 極論北漢築城之非計, 三南巡撫之不便。 翌日備局引見, 上問于許積, 積曰: "北漢形勢, 議者皆言可合駐蹕, 故欲爲築城矣。 今聞其狹隘難以容衆云, 豈可只爲都民避難之地, 而輕擧大役? 然議者多可少否, 請詢于入侍諸臣。" 上令各陳所見, 諸臣皆對如積言。 積請: "第遣金萬基、吳始壽, 視之三南巡撫, 乃先朝已定之事。 巡審檢飭, 不無所益, 宜令發送。" 上竝從之。 江華留守鄭榏請於甲串一面, 議設木柵之處, 勿爲立柵, 增築堤堰, 堰內耕墾, 可以禦敵利民, 上從之。 又言: "軍餉器械, 雖曰積峙, 而軍兵只四千名, 脫有警急, 無兵可守。 以通津、豐德等數邑之軍, 預定信地, 臨亂入守, 則好矣。" 積曰: "豐德等邑, 皆是摠戎所屬, 脫有去邠之行, 則摠戎當作先鋒。 些少之軍, 豈可移給他處乎?" 榏又陳江都民役最苦之狀, 積曰: "此則當自備局, 斟酌變通矣。" 始壽進江華地圖, 指陳形勢, 積曰: "近日議者, 多以江都爲必不可守。 若有海寇, 則果未知萬全, 而環以江海, 豈有不可守之理乎? 丙子之失守, 人謀之不臧也。 臣欲親往周覽, 以議措置之方矣。" 上出尹鑴疏, 俾畢前日未盡之說, 積言五家統事曰: "我國不知民數, 致有許多弊端, 必行號牌, 然後可無此弊。 而嗣服之初, 慮有騷屑, 姑未遑暇。 五家統之法, 固宜先行, 金錫冑則欲以十家作統, 當講究便否。 今年戶籍時, 添入節目而行之。" 積又言摠府郞事曰: "此乃大變通, 不可行。" 權大運曰: "士夫子弟與庶孽, 混爲一錄, 屬之摠府, 安有如此之理乎?" 積擧疏中措語, 問鑴曰: "如此如此之說, 莫知端倪。" 鑴曰: "如欲採施, 則當自有條理。 郞位象天文, 乃執戟殿門之任。 諸呂作亂時, 亦以此得力。 我國士族, 不知其數, 故欲以此管束。" 柳赫然曰: "鑴意在廢科, 故欲行此法, 而必有弊不可行。" 鑴曰: "弊將何在?" 赫然曰: "多聚雜人, 整齊爲難。" 鑴曰: "聚之廣而用之精, 人之雜進, 何害之有?" 吳挺緯曰: "宜袪舊弊, 奚創新法? 國儲蕩竭, 多聚士族, 何以接濟?" 鑴曰: "都監軍士, 安坐食料者無數, 獨不可休養士族乎? 君相以爲可, 則隨時變通可也。 豈可泥古而不行乎?" 李元禎曰: "其意雖好, 古今異宜, 有難必行。 士族子弟必不受綰束, 徒擾亂耳。" 鑴曰: "自古無無弊之法。 堯、舜之禪、湯、武之征, 亦爲後來之弊。 豈以渠輩厭苦之故, 而不行美法乎?" 錫冑曰: "漢之期門、羽林之制, 我國旣有倣行而設置者。 別設他制, 務欲更張, 其於利害, 臣莫測其涯岸。 設有美法, 奈無人何?" 鑴曰: "以臣爲欲廢科, 而別設他制, 故有此云云。 而古語曰: ‘人存政擧。’ 如無其人, 則雖祖宗之法, 豈能遵守乎?" 積曰: "我國宰相子弟, 安居華屋, 讀書做工, 雖稱以弘文郞, 猶以爲苦。 一朝謂之摠府郞, 而與禁軍一體, 則其擾亂必矣。 若爲仕進之途, 則私情大行, 至於用爲禦敵, 尤不近似。" 鑴曰: "親近王宮, 給事上前, 則士夫子弟, 猶恐不入於簡選中矣。" 積曰: "式年及第, 能通四書三經, 而不能成才, 況於摠府, 只講《孝經》、兵書, 其可以得人乎? 近來禁軍太半常漢, 而猶患難制。 士夫子弟聚會一處, 徒事黨論, 奴視武士, 誰能制之?" 鑴曰: "人皆謂不便, 更無所達。" 又論車制事, 積曰: "此則當問于主兵之人, 摠戎使之意何如?" 金萬基曰: "其制何如? 所駕者以馬乎? 以牛乎?" 鑴曰: "不駕牛馬, 上載兵器, 前挽後推。" 萬基曰: "當造幾何?" 鑴曰: "萬乘足矣。" 萬基曰: "難矣。 旬日之內, 何能造萬乘乎?" 赫然曰: "扶胥, 大車也, 武剛則獨輪, 一人可運。 衛靑以四車自衛; 馬隆以車載糧, 出塞三千里平凉州。 其制路狹則挾之, 平地則張之, 其制俱在, 實是行師禦敵之美器。 而臣試造一車, 八日始畢, 所入物力頗多。 且常時無用處, 藏置爲難。" 鑴曰: "臣亦試造一車, 一株之木, 可造二輛。 人可乘物可載, 豈無用處? 若如喂養戰馬, 則藏置何難? 苟利於國, 何計物力?" 上曰: "予意亦恐其徒費物力。" 赫然曰: "鑴未嘗當事, 故易言之耳。" 鑴曰: "臣年垂六十, 亦豈專昧利害而爲此言乎? 若非此器, 則南蠻北狄, 無以禦之。 只將金帛, 屈膝而事之乎?" 上曰: "此豈然哉? 雖無車戰, 豈不能禦敵乎?" 積曰: "三代有車, 而數被戎狄之禍; 漢時無車, 而凶奴款塞。 尹鑴之言過矣。 第其制亦非不美, 先令兩局, 試造數三輛宜矣。" 上從之。 積又讀疏末克自警動以下曰: "此言極要約, 必須惕念。" 鑴曰: "臣本空踈, 文學、弓馬俱無其才, 而臣之所懷, 略盡於此。 若無一事可施, 則終無可以報聖上者, 惟當早自退去而已。 如有一二試可者, 亦當許身盡力, 自上思量而進退之。" 積曰: "斯言過矣。 人臣事君, 禮意衰則可去; 有經綸大志而不見行則可去。 豈可因此數事, 決其去就乎?" 仍曰: "此疏須賜優批, 留置省覽, 隨其可施者, 更爲講究。" 上曰: "頃者金徽言兩西軍政修治之意, 未知何如。" 積曰: "臣等近日所講究者此事也。" 鑴曰: "今日之憂, 唯在於鄭錦之猝迫海邊, 淸虜之充斥西路, 前秋虛警, 亦非無根之事。 以此告急於淸國, 請得繕治兵事, 且我服事淸國, 鄭錦之所嘗疑而忿之者也。 今與吳三桂合力, 其勢甚張, 恐有聲罪致討之患。 一介浮海, 以致誠心, 似不可已。 頃者水原儒生李啓祥上疏, 自請渡海。 如此之人, 特加嘉奬, 則必有繼起之人。 瞭望一事, 亦宜申飭。" 積曰: "奏請一款, 前頭使行, 可以付送。 沿邊瞭望, 亦已分付, 而至於鄭錦則其祖芝龍, 初叛大明, 竊據海島, 在我爲賊, 何以相通?" 鑴曰: "彼旣共扶朱氏, 必有仗義侵我之意。 我今通好, 則是坐却十萬兵矣。" 積曰: "鄭錦不知何如人, 亦未知的在何許。 萬頃滄波, 何處可尋乎? 若誤泊於淸國之界, 則必生大禍。 且朝廷雖乏人, 若可通使, 則寧許一儒生之自請乎? 李啓祥亦知朝廷之不送, 故渠敢自請矣。" 鑴曰: "徽、欽時, 朱弁自請使金, 全節而還。 聞其所居, 與我國不遠。 一介相通, 何害之有?" 大運曰: "此非一人之私事, 何爲强爭至此?" 鑴曰: "只陳所懷而已, 何敢與大臣相爭乎?" 積白上曰: "啓祥之疏, 漏泄可怕, 留中不答可矣。" 金萬基力辭摠戎使之任, 言甚懇切, 上不聽, 令承旨傳授密符於賓廳。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4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건설-토목(土木) / 군사(軍事) / 인사-선발(選拔) / 역사-고사(故事)
- [註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