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대왕 시책문(諡冊文)
유세차(維歲次) 경인(庚寅)035) 12월 경인삭(庚寅朔) 초9일 무술(戊戌)에 고자(孤子) 사왕(嗣王) 신 돈(焞)036) 은 삼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씀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어린 나이에 상(喪)을 당하고 나니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 합니다. 빛나는 업적을 크게 드러내기 위해 시호 올리는 성대한 의례(儀禮)를 베풀었습니다. 대왕의 업적에 대해 저희 정성을 펴려는 것뿐이지 감히 거짓말로 찬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건대, 대행 대왕께서는 효도와 우애를 하늘에서 타고났고 정밀하고 전일한 것을 마음으로 전수받으셨습니다. 뛰어난 자질로 성조(聖祖)037) 의 사랑을 받으셨고, 착하고 지혜로운 성품으로 어진 스승에게서 지도를 받으셨습니다.
세자로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큰 근본을 세워 모든 혈구(契矩)038) 의 정치를 행하셨기 때문에 일용의 사이에서 시설(施設)하는 것이 모두 천리(天理)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일념(一念)으로 성의를 간직하시니 신화(神化)039) 가 팔도에 미쳤고, 하루에 세 번 문안드리는 예(禮)를 다하니 화기가 양궁(兩宮)040) 에 가득하였습니다. 사시(四時)의 제사를 경건히 지내니 종묘(宗廟)의 제사가 정결하였고, 학교와 서원을 중히 여기자 유교(儒敎)가 크게 밝았습니다. 어진 보필을 불러들인 다음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진지하게 정사를 토론하였으며, 성인의 경서(經書)를 토론하여 심성을 간직하고 살피는 공부에 힘쓰셨습니다. 친족을 친애(親愛)하신 것은 몸을 닦은 효과이고 노인을 존경하신 것은 효도를 미루어 행한 것이었습니다. 신하들에게 솔선수범하되 먼저 검소함을 숭상하셨고, 사사로운 길을 막아 끊어버리되 권세에 빌붙은 것을 가장 경계하셨습니다.
신명(神明)을 대하듯이 하여 혼자 있는 곳에서도 더욱 조심하셨으며, 밤낮으로 국사를 걱정하여 요양할 때에도 부지런히 하셨습니다. 옥사를 바르게 판결하고 외로운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니 급급해 하는 왕도 정치였고, 농민을 위로하고 농사를 권장하니 백성이 농사의 시기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비용이 걱정되면 경상의 부세로부터 어공(御供)까지 줄이셨으며, 기근(饑饉)을 구제할 적에는 내창(內倉)041) 의 것을 모두 풀어 쓰고 외방의 창고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교훈은 모두 후손에게 전할 만하고, 계술(繼述)은 선왕을 받드는 데에 더욱 신중히 하셨습니다. 태묘(太廟)에 모시는 의례(儀禮)를 소급해 거행하니042) 마침내 빠뜨린 전례(典禮)가 닦아졌고, 영릉(寧陵)을 이장(移葬)하는 일을 거행하니 영구한 계책을 도모한 것이었습니다. 예제(禮制)에 의문이 있을 적에 참고하고 연구하기를 더욱 자세히 하시고 마음으로 결정을 내려 인정과 예문(禮文)에 결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옥궤(玉凡)에 의지하여 내리는 유명(遺命)이 갑자기 감렴(感奩)043) 의 때에 선포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병환이 겨우 나으셨으나 진실로 지나치게 야위신 것을 이미 근심하였습니다. 하늘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지만 어인 일로 조금도 연장시켜 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중제(中制)044) 를 끝마치지 못한 끝없는 슬픔을 차마 말할 수 있으며, 어린 나이에 부왕(父王)을 여읜 것은 실로 불초(不肖)의 허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붙잡고 울부짖음 속에서 크나큰 서업(緖業)을 계승하니, 피눈물만 흐를 뿐이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던 빈 궁전을 바라보니 용안을 뵈올 길이 영원히 막혔습니다.
다행히도 새로 지은 유택(幽宅)이 마침 조종(祖宗)의 능침(陵寢)과 가까우니 신도(神道)로 볼 때 어찌 인정과 크게 다르겠습니까. 백성의 노역을 줄이게 된 것도 대왕의 평소 뜻을 본받은 것입니다. 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리니 달리는 사마(駟馬)보다 빠른 세월을 슬퍼하고, 쓰시던 활과 칼만 부질없이 남아 있으니 선어(仙馭)045) 를 바라보아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에 아름다움을 왕에게 돌리는 정성을 가지고 시호 올리는 떳떳한 전장(典章)을 따라 행합니다. 모든 임금이 모범을 삼을 행적이 이미 중외(中外)에 드러났고, 오직 은혜스러움으로 시호를 올리니 아름다움이 고금을 두고 빛납니다. 아, 왕의 순수하신 덕이여, 길이 제향을 받으실 것입니다.
삼가 신(臣) 의정부 영의정 허적(許積)을 보내어 옥책(玉冊)을 올리고, 존시(尊諡)를 ‘순문 숙무 경인 창효(純文肅武敬仁彰孝)’로, 묘호(廟號)를 현종(顯宗)으로 올립니다. 대왕께서 굽어살피시어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큰 미덕(美德)을 끝없이 펴서 자손이 번창하게 하고 큰 명호(名號)를 영구히 드날려 해와 별처럼 빛나소서.
아, 슬프도다. 삼가 말씀올립니다.
정헌 대부 의정부 우참찬 겸 예문관 제학 신(臣) 강백년(姜栢年)은 지어 올림.
- 【태백산사고본】 29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03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35]경인(庚寅) : 1674 현종 15년.
- [註 036]
사왕(嗣王) 신 돈(焞) : 숙종을 말한다.- [註 037]
성조(聖祖) : 인조.- [註 038]
혈구(契矩) : 자로 잼. 곧 사람을 생각하고 살피어서 바른 길로 향하게 하는 도덕상의 규칙.- [註 039]
신화(神化) : 신묘한 교화.- [註 040]
양궁(兩宮) : 자의 대비(慈懿大妃)와 인선 왕후(仁宣王后).- [註 041]
내창(內倉) : 궁내의 곳집.- [註 042]
태묘(太廟)에 모시는 의례(儀禮)를 소급해 거행하니 : 현종(顯宗) 10년(1669) 10월에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신주를 태조의 실(室)에 합부(合駙)하고 정릉(貞陵)을 회복하여 수호자를 두었다.- [註 043]
감렴(感奩) : 대왕 대비의 장신구를 보고 감동하여 슬퍼하는 것.- [註 044]
중제(中制) : 인선 왕후(仁宣王后) 상사를 가리킴.- [註 045]
선어(仙馭) : 신선이 타고 오르는 수레. 곧 임금이 세상을 떠남을 말함.○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謚冊文:
維歲次甲寅十二月庚寅朔初九日戊戌, 孤子嗣王臣焞, 謹再拜稽首上言。 竊以, 少遭閔凶, 孺慕徒切。 丕揚徽邵, 縟儀斯陳。 秪欲伸乎忱悰, 匪敢誣於論譔。 恭惟, 大行大王, 孝友天得, 精一心傳。 以岐嶷之姿, 受眷愛於聖祖。 以睿智之性, 資輔導於賢師。 自儲位至于御邦, 立大本措諸絜矩。 所以日用間施設, 皆從天理中出來。 一念存誠, 神化馳於八域。 三朝盡禮, 和氣藹於兩宮。 虔禴祠烝嘗而宗禋克精; 重學校庠序而儒敎大闡。 招延良弼, 虛己乎都兪; 討論聖經, 用切於存省。 親親乃修身之效, 老老惟錫類之推。 表率群工, 先尙儉約; 杜絶私逕, 最戒扳援。 對越神明, 處幽獨而益惕; 憂虞夙夜, 在靜攝而猶勤。 折獄哀煢, 所急者王政; 勞農勸稼, 不違乎民時。 恤費則減常賦以至於御供; 振饑則傾內倉竝及於外廩。 謨訓摠宜於詒後, 繼述冞謹於奉先。 行太廟追祔之儀, 聿修闕典; 有寧陵改堋之擧, 式爲永圖。 疑於禮制, 則參究尤詳, 斷自宸衷, 而情文無缺。 不料憑几之命, 遽揚感奩之辰。 玉候纔瘳, 固已憂其過毁。 天心難度, 胡不獲乎少延? 中制未終, 忍說無涯之痛? 沖年失怙, 實繇不肖之辜。 纉丕緖於攀擗之中, 只有泣血; 瞻虛殿於定省之所, 永隔承顔。 惟幸宅兆之新營, 適近祖宗之舊寢。 求諸神道, 豈遠於常情? 省得民功, 亦體乎素志。 霜露旣降, 悲隙駟之如流。 弓劍空留, 望僊馭而靡及。 玆將歸美之悃愊, 庸循易名之彝章。 百辟其刑, 行已著於中外; 壹惠爲謚, 休有光於古今。 於乎, 之德之純! 其永以享以祀。 謹遣臣議政府領議政許積, 奉玉冊, 上尊謚曰純文肅武敬仁彰孝, 廟號曰顯宗。 仰冀沖鑑, 俯垂明歆。 申景鑠於無疆, 雲仍衍慶; 揭鴻號於不朽, 日星竝輝。 嗚呼, 哀哉! 謹言。
正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藝文館提學臣姜栢年撰進。
- 【태백산사고본】 29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03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