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우의정 이완의 졸기
의정부 우의정 이완이 죽었다. 이완이 임종에 입으로 불러 상소문을 꾸몄는데 그 내용은, 충언(忠言)을 애써 받아들일 것, 공도(公道)를 넓힐 것, 용병(冗兵)들을 태거할 것, 군사들 각종 신역(身役)을 견감하고 입작유민(入作流民)들에게서 벼를 징수하여 그것으로 수요를 충당할 것 등을 청한 것인데, 그 소를 올리지 못한 채 운명하여 그의 아들 인걸(仁傑)이 봉하여 올렸다. 상이 답하기를,
"올려 온 유소(遺疏)를 보니 복받치는 충성스런 마음에서 한 말들이 너무 절실하여 나라 위한 충심이 죽음에 임하여 더욱 독실했음을 감탄할 뿐이다. 아, 그 사람은 이미 갔는데 그의 말은 남아 있으니 이를 띠에다 써서 가슴에 새겨두지 않을까보냐."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완은 계림 부원군(鷄林府院君) 수일(守一)의 아들로서 효종조 때 구인후(具仁垕) 대신 훈련 대장(訓鍊大將)이 되었는데, 계해022) 이후 훈척 아닌 사람을 훈련 대장에 기용한 것은 완에서 시작이 된 것이다. 완은 성격이 강직하면서 편협하여 교장(驕將)이라는 평판이 꽤 있기는 하였으나 그가 훈국(訓局) 또는 추조(秋曹)에 있을 때나 경성 판윤이 되었을 때 모두 직책 수행을 원만히 한다는 칭언이 있었고, 세 번이나 서전(西銓) 제배를 받고서도 완강히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아 그의 사양에 대하여도 선비들 공론이 좋았으며 도하 군민(軍民)들은 더욱 그를 좋아하고 칭찬하였기 때문에 상도 그 여론에 따라 대배(大拜)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완이 죽고 유혁연(柳赫然)이 그 대신 훈국의 대장이 되어서는 거조가 뒤죽박죽이어서 점점 군으로부터 인심을 잃었고, 그리하여 결국 죄를 짓고 죽음을 당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지금까지도 군졸들은 완을 그리워하여 마지 않는다고 한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84면
- 【분류】인물(人物) / 정론-정론(政論)
- [註 022]계해 : 1623 인조 1년.
○丁未/議政府右議政李浣卒。 浣疾革, 口號搆疏, 請勉納忠言, 恢張公道, 省汰冗兵, 蠲減諸色軍兵之身役, 而收布於入作流民, 以充其需用之數。 疏未上而絶, 其子仁傑封進之。 上答曰: "省覽所進遺疏, 忠悃所激, 語甚切實, 益嘆爲國之忠赤, 至死彌篤也。 嗚呼! 其人已逝, 而其言猶存, 可不書紳而服膺焉?" 謹按, 浣, 鷄林府院君 守一之子, 孝宗朝代具仁垕爲訓鍊大將。 癸亥以後, 訓鍊大將之不以勳戚, 自浣始。 浣性剛褊, 頗有驕將之誚, 而其在訓局及秋曹、京尹, 皆以擧職見稱。 三拜西銓, 力辭不就, 士論亦多其讓。 都下軍民, 尤喜稱譽, 故上因之而至於大拜。 浣旣死, 而柳赫然代將訓局, 擧措顚妄, 漸失軍心, 終至於以罪戮死, 故至今士卒, 追思浣不衰云。
-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84면
- 【분류】인물(人物)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