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현종개수실록 19권, 현종 9년 8월 11일 정축 2번째기사 1668년 청 강희(康熙) 7년

박장원 외 5인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장원(朴長遠)을 우참찬으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서필원(徐必遠)을 호조 참판으로, 윤집(尹鏶)을 형조 참판으로, 홍만종(洪萬鍾)을 봉교로, 박세당(朴世堂)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박세당은 출사하지 않으려고 하였었는데, 금부에 내려져서 곤장을 맞게 되어 부득이해서 행공(行公)하였다. 그러다가 사명(使命)을 받들게 되자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갑진년에 청나라 사신이 나올 때를 당해서 수찬 김만균(金萬均)이 상소를 올려 해직시켜 주기를 청해서 사피하였는데, 대개 오랑캐의 변에 화를 당한 집안의 친자식이 사피한 것은 이미 전례가 있었으나, 손자에 이르러서 또 사피하는 것은, 그 논의가 송시열에게서 처음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서필원이 조손(祖孫)은 삼강(三綱)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설을 주창하여서 송시열을 공격하였다. 이에 조정의 논의가 놀라워하며 시끄러운 단서가 크게 일어났다. 박세당은 이때 옥당에 있으면서 서필원의 설을 힘껏 지지해 마침내 사론에 배척받게 되었다. 그가 처음 이조 낭관으로 천거되었을 때 민시중(閔蓍重)이 전의 일을 들어 비난하였는데, 박세당이 이를 이유로 사피하고 물러가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삼사(三司)의 직에도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619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정론(政論) / 외교-야(野) / 가족(家族)

○以朴長遠爲右參贊, 李尙眞爲大司憲, 徐必遠爲戶曹參判, 尹鏶爲刑曹參判, 洪萬鍾爲奉敎, 朴世堂爲吏曹佐郞。 世堂不肯仕, 下吏決杖, 不得已行公。 及至奉使, 乃辭遞。 當甲辰使之來也, 修撰金萬均疏請解職, 以避之, 蓋虜變受禍家親子之避, 已有例矣, 而至於孫而又避, 則其論出於宋時烈。 而徐必遠倡爲祖孫不入三綱之說, 以攻時烈。 於是朝論駭然, 鬧端大起。 世堂時在玉堂, 力扶必遠之說, 遂見非於士論。 其初薦銓郞也, 閔蓍重執前事訾斥之, 世堂以此辭避, 仍退去鄕村, 竝與三司而終不就焉。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619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정론(政論) / 외교-야(野) / 가족(家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