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의 사부들을 일체 부역에 차정하게 하고, 최후상의 원통함을 풀어주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요즈음 조정의 기강이 해이하여 사람들이 임금의 명령이 중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패초를 하여도 나오지 않는 폐단이 있으니, 참으로 아주 한심한 일입니다. 오늘 대사헌 정지화(鄭知和)는 비록 병이 들었더라도 아주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병을 무릅쓰고라도 나와서 사은을 하는 것이 일의 체모를 보아 당연한 것인데 끝내 나오지 않았으니, 체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대사헌 정지화는 체차하라."
하였다. 홍명하가 또 아뢰기를,
"장령 여민제(呂閔齊)는 병으로 행공하지 못하니, 역시 아울러 체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또한 따랐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박천 군수(博川郡守) 강열(姜說)을 갑산(甲山)에 옮겨 제수하셨는데, 강열이 비록 잘 다스린다는 명성은 있으나 나이가 이미 일흔이니 아주 먼 변방에 부임시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체차하게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강열은 청렴하고 백성들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갑산의 직임을 체직하였으니, 박천에 잉임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호판 정치화가 아뢰기를,
"동래(東萊)에 상왜(商倭)가 나오면 으레 시장을 여는데,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가 그들이 드나드는 것을 검속하고 살펴서 잠상(潛商)을 엄하게 금합니다. 지난번에 석류황(石硫黃) 매매하는 일을 틈타서 우리 나라 사람들도 물화를 많이 싣고 가서 사사로이 중간에서 교역을 하였으니, 앞으로의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로 제수된 부사 안진(安縝)이 지금 내려가게 되었는데, 비국에서 분부하여 엄하게 금지시키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홍명하가 또 아뢰기를,
"경기(京畿)에 대동법을 시행한 뒤에 연호(烟戶)의 부역의 괴로움이 매우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습니다. 사부(士夫)들은 모두 부역에 응하지 않아서 소민(小民)들만 그 폐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신칙하여 일체 부역에 차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교리 장선징이 아뢰기를,
"승문원 권지 정자(權知正字) 최후상(崔後尙)은, 등제(登第)한 뒤에 그를 음해하고자 하는 자가 강도(江都) 때의 일을 가지고 헤아릴 수 없는 추잡한 말을 얽어서 청선(淸選)에 나오는 길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최후상은 그 추잡스러운 욕이 그의 모친에게 미치자 원통한 마음을 품고 벼슬길에 뜻을 끊었습니다. 인심의 험악함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매우 통분스러운 일입니다.
대개 강도의 일은 신이 눈으로 직접 본 일입니다. 정축년 정월에 청나라 군대가 강도를 함락하고서, 처음에는 약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상의 형 최후량(崔後亮)이 집안 사람들을 모아 놓고 청나라 장수를 찾아가 말하기를 ‘나는 화친을 주장한 최상서(崔尙書)의 아들이다. 상서의 가족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하니, 청나라 장수가 고 정승 윤방(尹昉)에게 가서 후량에 대해서 물어보고 그 실상을 안 뒤에 즉시 그 가족들을 성의 서쪽 민가에다 두고 자신의 군사들로 하여금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피난간 사부(士夫)의 가족 및 본토의 남녀 30여 명이 모두 최씨 집안의 노비라고 칭탁하여 아울러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대개 청나라 장수가 강화섬을 함락시킨 처음에 한(汗)이, 최상서의 가족이 섬 안에 있으면 잘 대우하라고 명했었는데, 마침 후량이 청나라 장수를 찾아가서 만났기 때문에 한 집안이 모두 보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청나라 장수가 말 4필을 내관(內官) 백대규(白大圭)에게 주어 최씨네 집에 가져다 주도록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실상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전일 덕산 현감(德山縣監) 최세경(崔世慶)이 학궁(學宮)의 재임(齋任)으로 있을 때에 새로 천거된 재임 유명견(柳命堅)의 이름을 삭제하였는데, 유명견의 친구 채시귀(蔡時龜)가, 천거를 삭제한 일이 후상에게서 나왔다고 잘못 전해듣고는 이 때문에 원한을 품고 불측한 말을 지어내어 중상한 것입니다. 후상이 등과(登科)한 뒤에 무함하는 비방이 널리 전파되어 세상에 자자하였는데, 선동하고 얽어 무함한 그 일이 채시귀에게서 나왔는지는 모르겠니다만, 그 말의 뿌리를 따져보면 채시귀가 한 짓입니다. 잡아다 추문하여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들 생각하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정축년 이후로 국가가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실로 최명길(崔鳴吉)의 공인데, 명길이 난리 뒤에 신인(新人)들을 끌어다 등용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또 사족 부녀자로서 저들에게 잡혀갔던 자들에 대해서 이혼을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비방하는 자들이 ‘그 집안에 필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최후상이 등제하자 바로 이러한 비방이 있었으니, 그 말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다만 지금 만약 그 말의 근원을 따지게 되면 점점 서로 끌어들어 추핵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고 나라의 체모만 손상시킬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이미 상께서 그 근거없고 망령된 것을 통촉하셨고 여러 신하들도 모두 자세히 알았으니, 그 말의 뿌리에 대해서 다시 물을 것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홍명하도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 좌참찬 허적도 아뢰기를,
"무릇 말이 나온 뒤에 혹 분명하지 못하여 밝히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만, 이 일은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니, 굳이 조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삼사(三司)에게 물으니, 집의 이정(李程)과 정언 신후재(申厚載)가 모두 아뢰기를,
"비록 잡아다 추문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분명히 밝혀졌으니 저절로 원통함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함하여 비방한 정상이 이와 같이 명백하니, 저절로 원통함이 풀린 것이다. 말을 만든 자를 굳이 잡아다 추문할 것이 없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388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외교-왜(倭) / 외교-야(野) / 재정-역(役) / 무역(貿易) / 광업(鑛業) / 군사(軍事) / 정론(政論) / 사법(司法)
○上御熙政堂引見大臣及備局諸宰。 右相洪命夏 〔曰〕 : "近來朝綱解弛, 人不知君命之爲重。 牌招不進之弊, 誠極寒心。 今日大司憲鄭知和, 雖有身病不至苦重, 則强疾出謝, 事體當然, 而終不來赴, 遞差宜矣。" 上曰: "然則大司憲鄭知和遞差。" 命夏又曰: "掌令呂閔齊病未行公, 亦當竝遞矣。" 上亦從之。 領相鄭太和曰: "博川郡守姜說, 移拜甲山, 說雖有善治之名, 年已七十, 不可使遠赴絶塞矣。" 上令遞差。 命夏曰: "姜說淸而愛民。 旣遞甲山, 宜仍任博川。" 上從之。 戶判鄭致和曰: "東萊商倭出來, 則例爲開市, 東萊府使及釜山僉使, 檢察其出入, 嚴禁潛商矣。 頃因石硫黃買賣, 我人亦多載物貨, 私相交易於中路, 前頭之弊, 不可不慮。 新府使安縝, 今當下去, 請自備局, 分付痛禁。" 上許之。 命夏又曰: "京畿大同後烟戶之役, 極其偏苦。 士夫, 則皆不應役, 小民獨受其弊。 宜自今申飭, 一體差役也。" 上然之。 校理張善瀓曰: "承文權知正字崔後尙, 登第之後, 欲爲陰害者, 以江都時事, 搆成不測之醜言, 欲枳淸選之途。 後尙以醜辱及於其母, 飮痛抱冤, 絶意仕宦。 人心之危險至此, 極可痛也。 蓋江都之事, 臣所目覩。 丁丑正月, 淸兵陷江都, 初不搶掠, 故後尙之兄後亮, 團聚家屬, 往見淸將曰: "我是主和崔尙書之子。 尙書家屬盡在此。" 淸將以後亮, 往問於故相臣尹昉, 得其實狀然後, 卽置其家屬於城西民舍, 使其軍士不得侵犯。 避亂士夫家屬及本土男女三十餘人, 皆稱以崔家奴婢, 竝皆得全。 蓋淸將陷島之初, 汗命崔尙書家屬在島中, 則使之善待, 適會後亮往見淸將, 故一家皆得以保全。 淸將至以馬四匹與內官白大圭, 使之給送崔家。 其時實狀, 誰不知之? 前日德山縣監崔世慶, 爲學齋任, 削其新薦齋任柳命堅之名, 命堅之友蔡時龜, 誤聞削薦, 出於後尙, 以此嫌怒, 作爲不測之說, 以中之。 後尙登科之後, 誣謗喧傳, 不勝藉藉, 其煽動構陷之擧, 雖不知出於時龜, 而究其言根, 則時龜當之。 宜拿問明辨也。" 上問諸臣曰: "此言何如。" 太和曰: "丁丑以後, 國家之至今保存, 實是崔鳴吉之功, 而鳴吉於亂後引用新人之故, 見忤於一時, 又以士族婦女被擄者, 令勿離異之故, 謗者以爲: ‘其家必有此事。’ 崔後尙登第之後, 乃有此謗, 其言之無據, 孰不知之? 但今若究問言根, 則轉轉相引, 推覈極難, 徒傷國體, 臣意, 則今已自上燭其虛妄, 諸臣亦皆詳知, 不必更問言根矣。" 命夏亦以此爲對。 左參贊許積, 亦曰: "凡言語旣出之後, 或有暗昧難明者, 而此則國人之所共知, 不必査問矣。" 上又問三司執義李程、正言申厚載, 皆以爲: "雖不拿問, 旣已明辨, 自可伸雪矣。" 上曰: "誣詆之狀, 如是明白, 則自可辨雪。 造言者, 不必拿問矣。"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388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외교-왜(倭) / 외교-야(野) / 재정-역(役) / 무역(貿易) / 광업(鑛業) / 군사(軍事) / 정론(政論) / 사법(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