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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 17권, 현종 10년 8월 21일 신사 3번째기사 1669년 청 강희(康熙) 8년

형조 판서 서필원이 송시열에게 논핵받은 것으로 인해 체직을 청하다

형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세 번째 상소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했는데, 그 소에,

"당초에 판부사 송시열이 상차하여 신을 ‘임금의 총애를 받아 멋대로 행동하는 버릇이 있다.’고 공척하였는데, 이른바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반드시 한(漢)나라 문제(文帝)등통(鄧通)을 총애하듯, 무제(武帝)가, 한언(韓嫣)039) 을 총애하듯 한 뒤에야 그러한 것이라고 지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은 형편없는 인물이지만 과거에 급제하여 출신하였고 순서에 따라 승진하였을 뿐, 분수에 지나친 동산(銅山)이나 전포(錢布)를 하사받은 적이 없고, 또한 자개로 장식한 띠를 두르고 연지분을 바르고서 임금을 친근히 하려고 한 일도 없는데, 그런 말을 하였으니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현(儒賢)의 한 마디 말은 태산보다 중한 것이니, 신이 어떻게 자신은 그런 일이 없다고 하여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뒤를 이어 대간들이, 간사스럽고 음흉하며 현자의 진출을 저지하고 나라를 병들게 한다는 등의 말로 온 힘을 다해 신을 공척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고 시세에 따라 부합할 줄은 모르지만 현인의 진출을 저해하는 일에 있어서는 원래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신의 재주와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 일에 도움이 되지는 못해도 나라를 병들게 하는 데 있어서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비난하는 소리가 온 나라에 시끄럽게 퍼지고 있습니다. 아, 현인의 진출을 저지하고 나라를 병들게 한다는 것은 당(唐)나라 이임보(李林甫)와 같은 인물이 해당된다고 선유가 말했는데, 이임보의 죄를 지고 경(卿)의 반열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처지로 보아 불안할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조정에 있어서 또한 어떻겠습니까.

지난날 인조조 때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강화(講和)하는 일 때문에 대간의 논핵을 당하자, 강외(江外)에 가 있으면서 소명을 계속 사양하다가, 나중에는 상차하여 선조조 때의 전례에 따라 묘당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상을 의논하게 할 것을 청했습니다. 이에 인조께서 그의 소장을 묘당에 내렸는데 당시 상신(相臣)인 윤방(尹昉)·신흠(申欽) 등이 서로 의논하고 회계하여 이귀의 마음을 환히 밝혔습니다. 이귀는 이 일로 인하여 또다시 대간의 논의를 겸제(箝制)하였다는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 한 뒤에야 출사하였습니다.

지금 신을 이귀에 비교하면 천양지차가 나지만 자신의 명예를 아끼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함부로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야 어찌 오늘날이라 하고 다를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인조조 때의 전례에 따라 묘당으로 하여금 신의 죄상을 의논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신의 정상이 용서해 줄 수 있다고 한다면 신은 아침에 출사하여 저녁에 쓰러져 죽는다 하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 것이고, 만약에 그렇게 해주시지 않는다면 신은 만 번 죽음을 당하더라도 결코 출사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소를 비국에 내리자 회계하기를,

"형조 판서 서필원은 장주(章奏)할 때 간혹 말을 가려하지 않는 것이 그의 병통입니다. 그러나 전번에 올린 상소에 대해서 현인의 진출을 저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본정이 아닙니다. 조정에서 그를 수용하는 것은 범연한 뜻이 아니니, 지나치게 인혐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로 하여금 속히 출사하여 직무를 수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42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역사-전사(前史)

  • [註 039]
    한(漢)나라문제(文帝)가 등통(鄧通)을 총애하듯, 무제(武帝)가, 한언(韓嫣) : 모두 한(漢)나라 때 아첨 잘하기로 이름높은 자들이다. 등통은 문제(文帝)에게, 한언은 무제(武帝)에게 총애를 독차지하여 교만 방자했다. 《사기(史記)》 권125 영행전(佞幸傳).

○刑曹判書徐必遠三疏請遞, 疏曰:

當初判府事宋時烈上箚斥臣曰: "寵幸橫恣之習", 所謂寵幸, 必如文帝鄧通武帝韓媽, 然後方可以當此目也。 臣雖無狀, 科第發身, 循序而進, 銅山錢布, 無分外之賜, 具帶脂粉, 又無私昵之事, 其所云云, 未知何據。 而儒賢一言, 重於泰山, 臣何敢自謂無是, 而晏然乎。 繼而臺臣以奸邪陰譎妨賢病國等語, 攻斥臣身, 不遺餘力。 臣雖好執愚見, 不能隨時俯仰, 而至於妨賢, 本無是心, 臣雖才智淺短, 不能裨補國事, 而至於病國, 斷無此腸, 而惡聲嘈嘈, 流布四方。 噫! 妨賢病國, 先儒以爲李林甫可以當之, 負林甫之罪, 而翺翔於卿列。 非惟在臣不安, 於聖明, 亦何如哉。 向在仁祖朝, 延平府院君李貴, 以和議一事, 重被臺臣之斥, 出避江外, 連辭召命, 末乃上箚, 請依宣祖朝故事, 令廟堂議其情罪。 仁祖下其章, 伊時相臣尹昉申欽等相議回啓, 洞卞心事。 雖因此, 又得箝制臺論之謗, 而得此, 然後乃出仕。 今臣比之於, 雖不啻壤蟲之於黃鵠, 其愛惜身名, 不苟進退之心, 豈以今日而有異哉。 伏乞依仁祖朝故事, 令廟堂議臣情罪。 如以爲情有可恕, 則臣雖朝出夕仆, 敢不承命, 如以爲不然, 則臣雖萬被誅戮, 決不敢出。

疏下備局, 回啓曰: "刑曹判書徐必遠凡於章奏之間, 語或不擇, 此是病痛。 若以頃日疏, 謂之出於妨賢病國, 則非其本情。 朝家收用, 意非偶然, 不當過爲引嫌。 請使之速出察任。" 上允之。


  •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42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