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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 16권, 현종 10년 4월 14일 병자 3번째기사 1669년 청 강희(康熙) 8년

송시열이 이경석의 차자로 인해 행궁에 오지 않고 소만 올려 피혐하다

판부사 송시열이경석의 차자 내용에 관하여 듣고는 오지 않고 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병을 무릅쓰고 길을 떠나 몸이 이상하더니 병이 다시 도져 길가로 물러나 엎드려 조양하면서 다시 길을 떠나려 하였습니다. 때마침 도성에 머물러 있는 대신의 차자를 얻어 볼 수 있었는데 논척한 바가 매우 준엄하여 비록 곧바로 신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다른 사람을 지적하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의리상 당연히 의장(儀仗) 밖에서 사죄하며 벌을 청하여야 하지만, 병세가 이와 같아 오도가도 못하니 다만 절박한 마음뿐입니다. 신이 스스로 삼가 생각해 보니, 의리를 괴란케 하고 기강을 문란케 한 것은 바로 신하의 가장 큰 죄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이 이 죄로 논척했다 하여도 오히려 매우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를 터인데, 하물며 대신의 말인 경우이겠습니까. 신이 또 삼가 생각해 보니 옛날 송(宋)나라 손종신(孫從臣) 같은 이는 오래 살고 강녕하여 한때의 존숭을 크게 받기는 하였지만,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시켰다는 일컬음은 받을 수 없었으니, 도리어 어떤 이는 그를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매우 용렬하고 비루한 자가 있어서 행실이 보잘것 없기 때문에 도리어 그 사람에게 비난을 받았으니, 뭇 사람들이 얼마나 비난하며 비웃었겠습니까. 지금 신이 당한 일이 불행히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병중이라는 것을 알고는 내가 매우 근심했는데, 이제 사직소를 보니 심히 당혹스럽다. 대수롭지 않은 문자는 지나치게 혐의할 바가 아니니, 나의 갈망하는 마음을 깊이 생각하여 내가 만나 볼 수 있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당시에 이경석이상진 등 몇몇 사람 때문에 차자를 올린 것인데 송시열은 자기를 공격하는 줄 알고 크게 노하여 소를 올리고 오지 않았다. 손적(孫覿)에 빗대어 이경석을 모욕한 것은 이경석이 일찍이 인조 때에 명에 따라 삼전도의 비문을 지었는데, 찬양하는 말이 많아서 청의에 기롱을 받은 까닭이었다. 송시열이 조그만 일로 너무나 각박하게 배척하니, 논자들이 병되이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25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判府事宋時烈李景奭箚辭, 上疏不來曰:

臣强疾作行, 而頓撼搖戞, 疾勢復作, 投入路傍, 祗伏調治, 復欲前進矣。 得見留都大臣箚本, 則其所論斥, 至峻且深, 雖不直擧臣名, 而其所指摘, 豈在他人哉? 臣義當泥首仗外, 以請罪譴, 而疾病如許, 進退路窮, 但切危迫。 臣竊自惟念, 乖義理、紊朝綱, 自是人臣之極罪。 此論雖出於他人, 猶不勝其惶惑, 況大臣之言乎。 臣又竊念, 古昔如孫從臣之壽而康者, 雖大爲一時之所尊崇, 然不堪以知義理、振朝綱見稱, 則或反有哀之者。 而時有庸陋之甚者, 行身無狀, 乃反爲其人所非, 則爲衆人之非笑, 何如哉? 今日所遭, 不幸近是矣。

上答曰: "知卿疾病, 予用深憂, 今觀辭疏, 心甚驚惑。 泛然文字, 非所深嫌, 體予如渴之望, 俾予相見。" 遣史官傳諭。 時景奭之箚, 爲李尙眞等諸人, 而時烈疑其斥己, 大怒陳疏不來。 而以孫覿景奭景奭曾在仁祖朝, 奉命撰《三田渡碑》, 而語多(楡)〔揄〕 揚, 爲淸議所譏故也。 時烈因一微事, 譏斥太迫, 論者病之。


  •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25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