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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 13권, 현종 7년 11월 6일 임오 2번째기사 1666년 청 강희(康熙) 5년

대신 등을 인견하여 증직·복호, 속오군의 정예병화, 대동법의 실시 등을 논의하다

사시(巳時)에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남양 현감(南陽縣監) 민시중(閔蓍重)이 상소 끝에 언급하기를 ‘병자년 난리에 부사 윤계(尹棨)가 오랑캐를 꾸짖다가 죽자, 당시 수하에 있던 병사와 장교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으나 오직 군관(軍官) 송후경(宋後璟)과 현리(縣吏) 김택(金澤)·홍인언(洪仁彦)·홍신(洪信), 관노(官奴) 명길(命吉) 등 및 그의 가노(家奴) 1인이 끝까지 서로 지키다가 죽었습니다. 그중 후경은 난도질을 당하고도 목숨이 끊기지 않아 지금 생존해 있으니 마땅히 국가에서 포장하는 뜻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였는데, 이 사람들의 절의가 가상합니다. 민시중의 상소에 따라 증직·복호 등의 일을 해조로 하여금 아뢰어서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홍명하가 아뢰기를,

"송후경은 해조로 하여금 수용토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에게 적당한 벼슬을 제수하여 격려하고 권면하는 본보기가 되게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수원 부사 유창(兪瑒)의 상소에 ‘본부의 속오군은 누차 증가시켜서 현재 6천여 명이나 되지만 그중에는 노약자나 도망간 사람, 죽은 사람도 많으니, 만일 수를 줄이고 가려 뽑는다면 정예병(精銳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6천 명 중에 2천 명을 감하여 노약자는 모두 면제해 주고 정예하고 건장한 자만을 뽑아 내도록 하되 마군(馬軍)은 10초(哨)로 한정하고 보군(步軍)은 30초로 한정하여 이후부터는 해마다 자리가 비게 될 경우에만 채우도록 하고, 다시는 한 사람이라도 늘리거나 줄이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내년 초봄에 세자의 책례(冊禮)를 거행해야 하는데, 날짜를 미리 정해 놓아야 기일(期日) 안에 의절을 익힐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예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일관(日官)으로 하여금 길일(吉日)을 가리게 했더니, 정월 22일 및 2월 4일이 길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우선 정월 22일로 정해 놓고 그때 가서 형편에 따라 앞당기거나 늦추도록 하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남의 산골 지방에서는 대동법이 불편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으며, 도신(道臣)도 그 폐단을 진달하였기 때문에 혁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어사가 서계(書啓)한 내용을 보니, 백성들이 모두 다시 실시하기를 원한다고 하니 어찌된 일인가?"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대동법을 혁파한 후에 호남 사람들이 모두 잘못을 신에게 돌리는가 하면 심지어 글을 보내 책망하는 자까지 있었는데, 소읍(小邑)의 백성들은 모두 혁파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지금 백성들의 심정을 들어보니, 모두 혁파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의 소원이 이와 같으니 산골에 대동법을 다시 실시하는 것이 좋겠다."

하자, 형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올봄에 연해(沿海)의 대동법은 1결 13두 중에 이미 1두를 감하여 길이 정식으로 삼았으니, 산골의 대동법도 똑같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입적(入籍)하지 않고 과거에 응시한 자를 전가 사변(全家徙邊)시키는 것은 이미 사목이 있으므로 무과(武科)에 응시한 자는 진실로 사변시켜야 하겠습니다만 유생(儒生)인 경우는 사족(士族)에 관계되므로 처벌의 등급을 감해주는 조처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문(文)과 무(武)를 어찌 가릴 수 있겠는가. 하물며 무과에 응시한 자 중에 만일 사족이 있다면 역시 등급을 감해 주어야 할 것인가? 법이 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29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군사-군정(軍政) / 재정-공물(貢物) / 신분(身分)

○巳時, 上引見大臣、備局諸臣。 領相鄭太和曰: "南陽縣監閔蓍重疏本末端有云: ‘當丙子之亂, 府使尹棨罵賊而死, 當時手下兵校, 無不散潰, 獨軍官宋後璟、縣吏金澤洪仁彦洪信, 官奴命吉等及其家奴一人, 終始相守, 以身殉之。 其中後璟, 亂斫之中, 喉息未絶, 至今生存, 宜示褒奬之意’ 云, 此人等節義可尙。 依蓍重疏, 贈職復戶等事, 令該曹稟處何如。" 上從之。 左相洪命夏曰: "後璟則令該曹收用似宜矣。" 上曰: "相當職除授, 以爲激勸之地。" 太和曰: "水原府使兪瑒疏言: ‘本府束伍, 累次增加, 至於六千餘人, 而其中老弱逃故亦多, 若減數抄擇, 則可爲精鍊’ 云, 將若之何?" 上曰: "六千人內, 減二千, 盡除老弱, 抄出精壯, 而馬軍, 則限十哨, 步軍, 則限三十哨, 而此後, 則每年只隨闕充定而已, 更無得加一人、減一人。" 太和曰: "明春歲首, 當行世子冊禮, 而預定日字後, 方可以前期習儀也。" 禮判鄭致和曰: "令日官涓吉, 則正月二十二日及二月初四日爲吉云。" 上令第定以正月二十二日, 而臨時觀勢進退。 上曰: "湖南山郡大同之不便, 人多言之, 道臣亦陳其弊, 故不得不革罷矣。 今見御史書啓, 以爲民情皆願復設云, 何如?" 命夏曰: "罷大同之後, 湖南人皆歸咎於臣, 至有貽書責之者。 小邑之民, 皆願不革云。" 太和曰: "今聞民情, 皆以革罷爲非矣。" 上曰: "民願如此, 山郡大同, 復設可也。" 刑判金佐明曰: "今春沿海大同一結十三斗中, 旣減一斗, 永爲定式, 山郡大同, 亦令一體施行。" 上從之。 佐明曰: "不入籍赴擧者, 全家徙邊, 已有事目, 武擧子, 則固當徙邊, 而至於儒生, 則係是士族, 似有減等之擧矣。" 上曰: "不然。 文武何擇焉。 況武擧子中, 若有士族, 則亦當減等乎? 法不當如是也。"


  •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29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군사-군정(軍政) / 재정-공물(貢物) / 신분(身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