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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 9권, 현종 5년 12월 11일 무진 2번째기사 1664년 청 강희(康熙) 3년

황해 감사 서필원이 이단상의 상소를 논박한 상소

황해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전 집의 이단상(李端相)은 전후 상소 가운데 신을 무식하고 해괴한 일파로 기필코 몰아넣으려고 했으니, 즉시 논파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은 그 전의 설을 끝맺고자 합니다.

단상은, 조손(祖孫) 관계로 단정하고자 했다는 것을 가지고 신이 무식하다는 근거로 삼았는데, 글쎄 단상의 마음에는 어느 관계[親]로 단정하여야 바야흐로 유식하게 된다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신이 삼가 보니 주자(朱子)《무오당의서(戊午讜議序)》 가운데에서 복수의 의리는 5세(世)가 지나야 끝난다는 뜻을 논하고서도 유공(劉珙)의 행장을 지으면서는 그가 금나라에 사신가는 일을 회피하지 않았던 사실을 가지고 ‘죽음으로써 나라에 몸바쳤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공은 곧 유겹(劉韐)의 손자입니다. 겹은 정강(靖康)의 변057) 에 죽었으니 유공의 마음으로는 어찌 강북 땅에 한 걸음이라도 내딛고 싶었겠습니까마는, 바야흐로 사신가는 날 한마디도 사사로운 원수에 대해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천경 지위(天經地緯)의 대륜(大倫)을 신하 되는 날에 이미 정했으므로 감히 개인적인 의리로써 공무를 폐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로부터 묘도 문자(墓道文字)는 그 아름다운 점을 치켜세우고 그 나쁜 점은 드러내지 않으며, 그 잘한 점을 칭찬하고 그 못한 점은 언급치 않으니, 사실에 의거해 곧이 곧대로 써서 포폄이 저절로 드러나는 글과 같지 않은 법입니다. 만약 유공의 이 일이 의리에 해로운 것이라면 주자는 틀림없이 무시하고 쓰지 않았을 것이며 혹시 쓰더라도 폄하하는 말을 현저하게 가했을 것입니다. 어찌 단지 죽음으로써 나라에 몸바친 것을 칭찬만 하고 끝냈겠습니까.

신은 앞 상소에서 사람이 복수하는 것을 금하는 주장을 편 일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의 손자로서 이미 벼슬하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에 임하여 회피하지 않기를 유공처럼 하게 하고자 하였을 따름입니다. 대체로 의리로써 은혜를 덮어버리는 것은 보통 사람의 정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고, 사사로움을 좇고 공무를 무시하는 것은 말세의 공통적인 걱정거리입니다.

지금 대각의 이름있는 인사가 이 설을 주장하여 한 세상을 몰아 동조하게 하니,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단상이 잇따라 이 논조를 펴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란 말입니까.

지금 단상은 겸퇴하여 스스로 즐기며 옛책을 널리 보고 당당히 선비로 자처하니, 신이 만약 침묵하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는다면 단상은 반드시 ‘내 말 한마디에는 그도 군소리를 못하는구나.’고 말할 것입니다.

가령 뒷날 전부 부화 뇌동하는 환난이 있어 모든 녹 먹는 무리에게 참으로 조손간이나 형제간에 서로 보전하지 못하는 형세가 있게 될 경우 애써 임금의 일에 종사하고 싶어도 반드시 남의 말을 두려워하여 진퇴를 주저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상의 이 논조는 오늘날을 그르칠 뿐 아니라 또한 뒷날까지 그르칠 수 있으니, 어찌 거듭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사직하지 말아, 관방이 오래 비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필원이 인용한, 유공이 사명을 회피하지 않은 일은 그야말로 오늘날의 명백한 증거가 된다. 이로써 말한다면 송시열서필원 간의 시비의 판가름은 어둠 속에서 촛불로 비추는 것보다 더 분명해진다.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442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 [註 057]
    정강(靖康)의 변 : 정강은 송 흠종(宋欽宗)의 연호. 정강 2년(1127)에 금 태종(金太宗)이 남침하여 송의 서울 변경(汴京)을 함락하고 휘종(徽宗)과 흠종을 포로로 잡고 북으로 개선해간 사변. 이로 인해 북송은 멸망하고 고종(高宗)이 강남에서 즉위하여 남송(南宋)이 세워졌다. 《송사(宋史)》.

黃海監司徐必遠上疏略曰:

前執義李端相前後疏中, 必欲納臣於無識駭悖之域, 登時辨破, 在所不已。 臣請畢其前說。 端相以斷自祖孫, 爲臣無識之案, 未知端相之心, 斷自何親, 然後方得爲有識乎。 臣伏見朱子讜議序中, 旣論復讎, 盡五世之義, 而及著劉珙行狀, 以奉使不避, 稱道其以死許國。 之孫也。 死於靖康之禍, 則之心, 豈欲履江北一步也, 而方其奉使之日, 曾無一言及於私讎者。 豈不以天經地緯之大倫, 已定於爲臣之日, 故不敢以私義廢公事而然耶。 自古墓道文字, 揚其美, 不揚其惡, 稱其得, 不稱其失, 非如據事直書褒貶自見之比。 若使之此事, 害於義理, 則朱子當沒而不書, 雖或書之, 亦宜顯加貶辭。 豈但稱道其以死許國而已哉。 臣之前疏, 未嘗爲禁人復讎之說。 只欲使爲人孫已仕之人, 臨事不避如劉珙而已。 夫以義掩恩, 常情所難, 趨私蔑公, 末世通患。 今以臺閣名流, 倡爲此說, 驅一世而駸駸, 臣之所大懼者, 正在於此, 而端相之繼爲此論, 抑何心哉。 今端相恬退自好, 博覽古書, 居然以儒者自處, 臣若噤無一言, 則端相必曰, 吾言之下, 彼亦無辭。 假令日後, 有奔波之患, 凡諸食祿之徒, 苟有祖孫昆弟不相保之勢, 則雖欲爲羈紲從君之事, 必將恐畏人言, 而有遲徊前却之心。 然則端相此論, 非唯誤今日, 亦得以誤來日, 豈不重可懼哉。

上答曰: "卿勿辭, 俾無關防久曠之弊。"

【謹按必遠所引劉珙奉使不避之事, 實爲今日明白証據。 以此言之, 則時烈必遠是非之判, 不翅若暗中燭照之灼然矣。】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442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