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령 정창도와 지평 이섬이 서필원을 파직시키라는 논계를 정지하다
장령 정창도(丁昌燾)와 지평 이섬(李暹)이 서필원을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라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초봄에 필원의 상소가 북관(北關)으로부터 들어오자 당시 의논이 놀라워하며 이르기를, 상소의 말이 성나고 패려한 데서 비롯되어 유현(儒賢)을 능멸하고 모욕하니 규찰해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사(三司)는 곧바로 논핵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필원의 무리들이 서로 구원해 감히 가벼이 거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소가 들어간 지 한 달이 지난 뒤에 유학 조해(趙楷) 등이 항쟁하는 소장을 올려 필원을 공격하고, 또 삼사가 논핵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였다. 대사간 김수흥(金壽興) 이하 양사의 관원들이 서로 이어 인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를 청한 뒤에도 또한 추급해 논핵하지 않았다. 그뒤 지평 이규령(李奎齡) 등이 먼저 논의를 일으켰다가 박증휘(朴增輝)에게 저지를 당하였고, 정언 조성보(趙聖輔)가 뒤이어 의논을 일으켰다가 또 박세당(朴世堂)·윤심(尹深)에게 저지를 당하였다. 태학생 윤헌(尹攇) 등이 또 소장을 올려 논척하니, 상이 특별히 하교하여 조정을 멋대로 제재한 것으로 죄를 삼아 소두(疏頭)를 부황(付黃)하라는 명이 있었다. 비록 여러 신하들이 힘껏 간쟁함으로 인해 곧바로 벌을 풀어주기는 하였지만, 권당(捲堂)하는 데까지 이르러 여러 날이 지난 뒤에야 도로 들어갔다. 연이어 규령·성보 등이 배척을 받아 북변의 읍으로 보임되고 전관(銓官)을 파직하고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다. 윤형성(尹衡聖)·조원기(趙遠期)를 특별히 대각의 직에 제수하여 진정하는 벌판을 만들고자 했지만, 필원을 대우하는 것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한 시대의 논의도 대부분 둘로 갈라져 준론(峻論)·완론(緩論)의 칭호가 있었다. 이른바 준론은 모두 송시열(宋時烈)을 숭봉하여 유종(儒宗)으로 삼고 청론(淸論)으로 자임하는 젊은 사람들이었다. 이른바 완론은 의논하기를, 필원의 상소에서 한 말이 거칠고 경솔하기는 하지만 원수를 갚는 데 차이가 있다는 등의 말은 일리가 없지 않다고 하며 양자간을 조정하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로부터 조정이 날로 점점 어긋나고 틈이 벌어졌으며, 점괘가 날로 점점 아름답지 않게 되었다. 이경휘(李慶徽)·윤형성(尹衡聖)·유상운(柳尙運)이 삼간(三奸)을 이루고, 박세당(朴世堂)·조원기(趙遠期)·박증휘(朴增輝)·오시수(吳始壽)·윤심(尹深)이 오사(五邪)를 이루어, 점점 번져나가 서로 격렬해져 안정될 기약이 없었다.
5월이 되어 집의 민유중(閔維重)이 강도(江都)에서 돌아와 필원의 일을 홀로 아뢰면서 이어 전후 대관들의 잘못을 논하였는데, 엄한 전지를 내려 특별히 체직하였다. 그뒤에 대관들이 잠시 출사하여 논계할 적마다 엄한 전지를 받고 물러났다. 혹 고향으로 내려가 체직을 도모하는 사람도 있었고, 혹 소명에 나아가지 않아 인피하여 체직된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양사가 모두 비었다. 6월 10일 이후 집의 이준구(李俊耉)가 시골에서 부름을 받고 올라와 한 달 넘게 연계(連啓)하여 쟁집하였는데, 상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자, 정창도(丁昌燾) 등이 이때 와서 정계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원수를 갚는 의리는 《예경(禮經)》에 논해 놓은 것이 자세하다. 예에 이른바 원수를 만나면 그를 죽인다고 한 것은 대체로 한 장부와 원수가 되어 원수를 갚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오늘날의 사세와는 참으로 같지 아니한 점이 있다. 병자년 큰 난리를 만나던 날 사대부의 가문으로서 뜻밖에 적의 칼날을 만나 죽은 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아비의 원수는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으니, 원수가 있는데도 갚을 수 없는 자는 참으로 마땅히 애통함을 머금고 평생 벼슬을 하지 않으면서 세상일에 간여하지 않는 것이 옳다. 그러나 손자가 할아버지에 대해서, 동생이 형에 대해서 비록 각각 마땅히 복수해야 할 의리가 있지는 하지만,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아비의 원수와 비교해 보면 또한 어찌 차등이 없겠는가. 필원의 말이 애당초 사리에 어긋난 것이 아니었는데, 시열이 이에 이적(夷狄)에 빠지고 금수의 지경으로 들어간다고 배척을 하였고, 그의 무리들이 또 이어서 그에 화답하여 어지럽게 거론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아 또한 괴이하다.
김만균(金萬均)이 이미 조정에서 벼슬하여 시종이 되었으니 대가(大駕)가 관소(館所)에 나아가는 때를 당하여서는 단지 배종하며 왕래하면 될 뿐으로 자신이 직접 저 사신들을 접대할 일이 진실로 없는데, 이에 감히 소장을 올려 종반(從班)을 면하기를 구하였다. 만균은 참으로 외람되고 참람하였고, 만균을 두둔하고 필원을 배척한 자 또한 자못 편벽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419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掌令丁昌燾、持平李暹停徐必遠罷職不敍之啓。 春初必遠之疏, 自北關入來, 時議駭然, 以爲疏語, 出於忿懥悖戾, 侵侮儒賢, 不可不紏正。 而三司趁不擧劾, 蓋以必遠朋儕相援, 莫敢輕發也。 疏入月餘, 幼學趙楷等, 抗章攻必遠, 且斥三司之不論。 大司諫金壽興以下兩司之官, 不得不相繼引避。 玉堂處置請出之後, 亦未追論。 厥後持平李奎齡先發, 見格於朴增輝, 正言趙聖輔繼起, 又沮於朴世堂、尹深。 太學生尹攇等又上章論斥, 則自上特下敎, 以擅制朝廷爲罪, 而有疏頭付黃之命。 雖因諸臣之力爭, 旋卽解罰, 至於捲堂, 累日而還入。 繼有奎齡、聖輔等斥補北邑銓官罷推之命。 以尹衡聖、趙遠期特除臺職, 欲爲鎭定之地, 而其所以待必遠者, 無替於前。 一時論議, 亦多携貳, 有峻論緩論之稱。 所謂峻論者, 皆年少崇奉宋時烈爲儒宗, 而自任以淸論者也。 所謂緩論者, 其議以爲必遠疏語雖麤率, 至於復讎有差等之說, 不無意見, 而欲調劑於兩間者也。 自是之後, 朝著日漸乖隔, 爻象日漸不佳。 至以李慶徽、尹衡聖、柳尙運爲三奸, 朴世堂、趙遠期、朴增輝、吳始壽、尹深爲五邪, 而轉輾相激, 寧靖無期。 及至五月, 執義閔維重自江都還, 獨啓必遠之事, 仍論前後臺官之失, 而嚴旨特遞。 其後臺官, 乍出乍啓, 輒遭嚴旨而退。 或有下鄕而圖遞者, 或有不赴召命而(避)〔被〕 遞者。 迄過一朔, 兩司皆空。 六月旬後, 執義李俊耉, 自鄕承召而來, 連啓爭執月餘, 上終不納, 昌燾等至是停之。
【謹按復讎之義, 《禮經》論之詳矣。 禮所謂遇其讎, 而殺之云者, 蓋指與一夫爲讎, 而讎之之謂也。 與今日事勢, 固有不同者矣。 當丙子大亂之日, 士夫之家, 橫罹鋒刃, 殺死者何限。 夫父之讎, 不可與共戴天, 有其讎, 而不得報者, 固當茹哀抱痛, 沒齒不仕, 以無與於世事可也。 至於孫之於祖, 弟之於兄, 雖各有當復之義, 其視不共天之讎, 亦豈無差等哉。 必遠之言, 初非乖舛, 時烈乃以淪夷狄、入禽獸斥之, 其徒又從而和之, 紛紜不已, 吁! 亦異哉。 萬均旣已仕於朝, 爲侍從, 則當大駕詣館所之時, 只是陪從往來而已, 固無身自接待彼人之事, 而乃敢陳疏, 救免從班。 萬均固猥越, 而其右萬均, 而斥必遠者, 亦頗僻哉。】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419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