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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 7권, 현종 5년 1월 20일 계미 3번째기사 1664년 청 강희(康熙) 3년

김만균의 입장을 변호한 우찬성 송시열의 상소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아뢰었다.

"신은 근래에 들은 것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이 두려운 마음을 더욱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사직해야 마땅할 뿐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죄를 청해야 할 실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은 불행하게도 난리를 겪던 날 동기(同氣)017) 가 죽음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지극히 원통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이야말로 천성에 근거한 것이라 할 것이니 어찌 한 순간인들 이를 잊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신이 소시에 《예경(禮經)》을 읽어 보건대, 공자(孔子)께서 형제의 원수를 갚는 의리에 대해서 논한 것이 있었는데, 무릇 사람이라면 그 누군들 이런 마음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신이 몇해 전 조정에 나아갔던 날, 소임이 미관 말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쪽과 저쪽018) 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간여하게 되다 보니 마음이 혼자 속으로 아파오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예경에 의거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애원하였더니 우리 선왕께서 스스로 사의(私義)를 펴도록 허락해 주셨으므로 신이 편안한 마음으로 일을 볼 수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신은 늘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남에 대한 도리를 다하는 성인의 도라고 여기면서 삼가 흠앙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듣건대 근일 종신(從臣)019) 이 대략 이와 같은 의리를 내세워 전하에게 간청하자 조정이 그만 정위(廷慰)에게 내리고 결국 파직시켰다고 하는데, 신은 삼가 이를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내세운 것이야말로 조손(祖孫)의 큰 윤기(倫紀)로서 주자(朱子)도 이미 ‘복수는 5세(五世)020) 까지는 모두 해야 한다.’고 하였고 보면, 이 어찌 천경(天經) 지의(地義)로서 없앨 수 없는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의리를 미루어 저들 청나라 사신의 일에 간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본래 인간의 심정상 당연한 일인 데다가 그 사람이 또 아비의 유지(遺志)를 받들었고 보면 죄가 없어야 마땅할 듯한데 오히려 죄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신이 망령되게도 그만 감히 전에 마음내키는 대로 앞질러 행동하여 시의(時義)를 범하였으니, 어찌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하여 편안히 조적(朝籍)의 끝에나마 끼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체로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되고 나라가 나라답게 되는 것은 단지 인륜(人倫)이 있기 때문이니 혹시라도 이를 버리면 인류는 금수(禽獸)의 상태가 되고 중국은 이적(夷狄)으로 전락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주 부자(朱夫子)도 일찍이 송(宋)나라 유공(劉珙)의 일을 기록하였던 것인데,021)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공에게 일찍이 조부의 원수를 갚을 일이 있었는데, 그가 진강(鎭江)을 지키고 있을 때에 오랑캐의 사신이 우호 관계로 이르러 큰 깃발을 배 위에 세우자 유공이 노하여 다른 깃발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이에 접반사(接伴使)가 크게 두려워하여 매우 급히 찾았는데, 유공은 말하기를 ‘그 깃발을 나의 고을 경내에서 세우려고 한다면 나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고는 그 경내를 벗어나서야 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상황은 송나라 왕실이 결딴난 나머지 고종(高宗)이 오랑캐에게 신하라고 칭할 정도였으니, 두려워하며 굴복한 정상이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필부가 스스로 사의(私義)를 펴는 것을 이처럼 용납하였는데, 이와 같았기 때문에 윗사람도 믿고 의지하며 핑계댈 바가 있어 왕업을 계속 유지시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형세는 송나라 때와는 또 더욱 다릅니다. 그렇다면 공공연히 말하고 전파하여 이 의리를 밝히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고통을 참고 원망을 품고서 절박한 심정에서 부득이하게 하는 말이라도 있어서 천하의 대방(大防)을 보존해야 마땅할 것이니, 그렇게 할 경우 인심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천리(天理)가 모두 없어지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힘을 남기지 않고 쏟아 그런 발언은 모조리 족쇄를 채우고 녹여 없애면서 온통 그런 방향으로만 몰고 가니, 그야말로 주 부자가 마음 아파하며 탄식한 바와 같다 하겠습니다. 신은 식견이 어둡고 어리석어 세상과 의견이 맞지 않으니 감히 다시 이 세상에 설 수가 없습니다. 다시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아울러 신의 정세를 양찰하시어 속히 요청을 들어주심으로써 꽉 막히고 오활한 지조나마 온전하게 지키도록 해 주소서."


  •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94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註 017]
    동기(同氣) : 송시열의 형을 말함.
  • [註 018]
    저쪽 : 청 나라 사신쪽을 말함.
  • [註 019]
    종신(從臣) : 송시열의 문인으로서 수찬으로 있던 김만균(金萬均)을 가리킴.
  • [註 020]
    5세(五世) : 고조(高祖)에서.
  • [註 021]
    주 부자(朱夫子)도 일찍이 송(宋)나라유공(劉珙)의 일을 기록하였던 것인데, : 주자가 찬(撰)한 병산 비문(屛山碑文)에 이 내용이 상세함. 유공은 병산(屛山) 유자우(劉子羽)의 아들로서 금(金)나라 군대에게 죽은 유협(劉鞈)의 손자.

○右贊成宋時烈上疏辭職, 且曰:

臣因近聞, 尤有所隕越戰怖之心, 不但職名之當免, 極有請罪之實焉。 臣不幸於喪亂之日, 同氣之人, 有原隰之裒。 痛毒怨嫉之意, 根於秉彝之天者, 何嘗一刻忘耶? 臣少讀禮經, 孔子有論, 昆弟之讎之義, 凡在人類, 誰無是心哉。 臣於頃年趨朝之日, 所任者非微官, 彼此大小之事, 靡不相涉, 臣隱於心, 竊有所不忍焉。 敢據禮經, 冒死哀籲, 則我先王, 許以自伸私義, 臣得以安意從事, 而每竊欽仰聖人所以盡己盡物之道也。 玆聞近日, 有從臣, 略引此等義理, 以干宸聽, 而朝廷乃下廷㷉, 竟罷其職, 臣竊以爲其人所引, 是祖孫之大倫, 則朱子旣有復讎者可盡五世之說, 此豈非天經地義不可泯之理哉? 推以此義, 而不欲與於彼中之事者, 固人心之所當然, 而其人又承父之遺志, 則宜若無罪, 而猶不得免焉。 顧臣謬妄, 乃敢直情徑行於前, 以犯時義, 豈可以事在旣往, 而自安於朝籍之末乎? 蓋臣之妄意, 以爲人之所以爲人、國之所以爲國, 只是人倫而已, 苟或去此, 則人類入於禽獸, 中國淪於夷狄。 故朱夫子嘗記劉珙, 嘗有祖父之讎, 其守鎭江也, 虜使以好, 至建大旗於舟上, 怒易以他旗。 接伴使大懼, 索之甚急珙曰, 欲揭此於吾州之境者, 吾有死而已, 乃於境外授之。 當是時, 室蕩覆之餘, 高宗稱臣於虜, 其畏懼壓屈, 何可勝言。 而尙容匹夫之自伸也, 如此夫, 如是故上之人, 亦能有所恃賴憑藉, 以綿惙旒之業也。 今之形勢, 與之時, 又加遠矣。 則縱不能誦言公傳, 以明斯義, 亦當有忍痛含冤, 迫不得已之言, 以存天下之防, 則人心不至全晦, 天理不至盡滅矣。 今乃梏亡銷鑠, 不遺餘力, 而其肆然以令者, 正如朱夫子之所傷歎焉。 臣見識愚闇, 與世枘鑿, 不敢更立於斯世矣。 更乞聖慈, 竝諒情勢, 亟准所請, 俾全其固滯迂妄之守焉。


  •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94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