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방전, 경연, 인사 문제 등을 논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전일 청대(請對)했던 간관(諫官)들을 모두 패초(牌招)하여 대신과 함께 동시에 입시(入侍)토록 하라."
하고, 이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각년(各年)의 포흠(逋欠)된 곡식에 대해 3분의 2를 징수토록 청하자,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반절을 감해 받아들이도록 청하였는데, 제신(諸臣) 대부분이 명하의 의견에 동조하여 상이 따랐다.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궁가(宮家)의 면세전(免稅田)을 6백 결(結)로 하는 것은 너무 많다고 진달드렸는데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으므로 삼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내가 결수(結數)를 정하려고 하다가 못했는데, 5백 결로 한도를 정하면 어떻겠는가?"
하자, 명하와 민적이 모두 너무 많다고 하였는데, 김좌명(金佐明)은 아뢰기를,
"전일 인견한 뒤에 신들이 물러가 상의했었는데, 모두들 5백 결이라면 너무 많은 것은 아닌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좌우에 하문하자 삼사(三司)의 제신(諸臣) 역시 대부분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군(大君)과 공주는 5백 결로써 한도를 정하고, 왕자와 옹주는 3백 50결로 한도를 정하되, 절수(折受)한 것 가운데 진결(陳結)이 있으면 모두 실결(實結)로 보충해 주도록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 청대(請對)했던 대관(臺官)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라."
하니,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신이 괴이하고 망령스럽게 일을 처리하여 누차 엄한 비답을 받았는데, 이제 인접(引接)해 주시니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건강이 좋지 못하시다가 이제 다행히 조금 나으셔서 능에 참배하는 일과 열무(閱武)하는 일을 차례로 거행하게 되었는데, 유독 경연(經筵)만은 오래도록 폐지하신 채 인접하시는 일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신이 삼가 안타깝고 답답하게 여겼습니다. 인주(人主)가 마음을 태만히 갖고 소홀히 하는 것이야말로 난망(亂亡)으로 이끌어지는 조짐입니다. 그 동안의 일을 보건대 ‘현사(賢士)를 접견하는 때는 드물고 환관이나 궁첩(宮妾)을 가까이 하는 날이 많다.’고 경계한 말에 가깝지 않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질에는 글을 보는 것이 가장 해롭기 때문에 책상(冊上) 공부가 중단됨을 면치 못하였는데, 이 점을 나도 무척이나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제는 조금 나아진 듯하니 앞으로 경연을 열려고 한다. 그런데 지난번 그대들이 청대했을 때는 한창 이불을 덮고 땀을 내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인견을 할 수 없어 소회(所懷)을 서계(書啓)토록 했던 것이다."
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경연을 열 수 없다 하더라도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읽게 하고 들으신다면 어찌 조금이나마 보탬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삼가 듣자니 때때로 후원(後苑)에서 말[馬]을 조련하시고 작은 표적에 활을 쏘곤 하셨다 합니다. 거리에 나도는 이야기를 믿기는 어렵습니다만, 혹시 그런 일이 있지는 않았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설령 내가 그런 뜻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기력이 감당치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민적이 이어서 경연을 열고 강학(講學)해야 할 일을 누누이 진달하니, 상이 승지에게 앞으로는 관례대로 품(稟)하고 일을 보도록 하였다. 정중과 민적이 함께 해서(海西) 궁장(宮庄)의 폐단 및 윤겸(尹㻩)을 죄주어야 하는 정상에 대해 진달드리니, 상이 이르기를
"홍처윤(洪處尹)이 마음을 공평하게 가지지 못하고 윤겸을 함께 법사(法司)에 내릴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였다. 신하들 대부분이 민정(民情)과 직결되어 있는 만큼 궁가의 둔전을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민정중이 진구(賑救)할 때 조가(朝家)의 명령을 즉시 봉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상 감사 민희(閔熙)와 전라 감사 이태연(李泰淵)의 파직을 청하니, 따랐다. 또 객사(客使)가 공갈을 치자 개인적으로 너무 많이 뇌물을 주었다는 이유로 평안 감사 임의백(任義伯)과 병사(兵使) 김체건(金體乾)을 탄핵하며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객사가 장차 도착할 것인데 이 소문을 들으면 번거롭게 될 것이니, 올라 온 뒤에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전일 성상의 위엄이 거듭 진동하던 끝에 이렇듯 사대(賜對)하시는 조용한 거조가 계시게 되었으니, 입시한 신하들로서 그 누가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간원이 아뢴 것을 보건대 대부분 긴요치 않은 내용만 있고 마땅히 말해야 할 일은 언급하지 않고 있으니, 신이 진달드릴까 합니다. 호조 참판 서원리(徐元履)와 참의 홍처후(洪處厚)는 당초 회계(回啓)를 잘못한 것 때문에 특명으로 파직시켰었는데, 다시 고쳐 복계(覆啓)를 올리자 격외(格外)로 휴가를 더 주는 명까지 받았으므로 외부의 의논이 이 점에 대해서 불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리가 처음에 착오한 실수를 저지르기는 하였다. 그러나 호조의 당상은 적임자를 택해야 마땅한데, 원리야말로 대신의 추천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휴가를 더 주게 된 것이다. 어찌 그가 내 뜻을 받들어 순종했다고 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원리가 앞뒤로 회계한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은데, 성상께서 전에는 특별히 파직시켰다가 뒤에 가서 휴가를 더 주셨으므로, 뭇 사람들이 모두 ‘성상께서 뜻을 어긴 것은 미워하셨다가 순종한 것을 기뻐하신 것이다.’고 합니다. 신도 원래 이 일을 말씀드리려 하다가 잊어버리고 미처 진달드리지 못했으니, 중신(重臣)이 배척을 한 것은 당연합니다. 신을 체척(遞斥)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이르고, 이어 승지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물의(物議)가 이와 같으니, 참판 서원리와 참의 흥처후는 모두 체차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민적이 아뢰기를,
"전일 이창현(李昌炫)의 일에 대해 신이 해조(該曹)의 사체(事體)를 들어 논계한 적이 있었습니다. 출가한 딸에게는 일단 연좌율(連坐律)이 적용되지 않고 보면, 역가(逆家)의 사위를 종신토록 폐기시키는 일은 없어야 할 듯하니, 한번 품정(稟定)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신도 일찍이 그 사람이 애석하니 종신토록 폐기시켜서는 안 된다는 뜻을 진달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경(署經)을 하는 관직에는 임명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청화직(淸華職)과 서경을 하는 관직을 제외한 나머지 직책에 임명토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45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구휼(救恤) / 농업-전제(田制) / 사법-탄핵(彈劾) / 가족-가족(家族) / 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上下敎政院, 頃日請對諫官, 竝牌招, 使與大臣一時入侍, 仍引見于熙政堂。 戶曺判書鄭致和, 請各年逋欠穀三分徵二, 吏曺判書洪命夏。 請減半收捧, 諸臣多右命夏, 上從之。 司諫李敏迪曰: "臣頃達宮家免稅六百結之過多, 而聖聽不回, 臣竊悶焉。" 上曰: "其時予欲定數, 而未果, 若以五百結定限, 則如何?" 命夏、敏迪皆以爲過多, 佐明曰: "頃日引見之後, 臣等退而相議, 皆以爲五百結, 則似非太多矣。" 上問左右, 三司諸臣亦多貌隨者。 於是, 大君公主以五百結爲限, 王子翁主, 則以三百五十結爲限, 折受中陳結, 竝以實結充給。 上曰: "前日請對臺官近前。" 閔鼎重曰: "臣作事怪妄, 累承嚴批, 今賜引接, 不任惶悚。" 上曰: "爾等所欲言者何事?" 鼎重曰: "玉候靡寧, 今幸差愈, 陵幸閱武, 次第擧行, 而唯獨經筵久廢, 引接甚闊, 臣竊悶鬱。 人主一心之怠忽, 實兆亂亡之機。 其不幾於接賢士時少, 親宦官宮妾之日多乎。" 上曰: "眼患最妨看書, 故冊上工夫, 未免間斷, 深以爲悶。 今則稍似差愈, 將欲開筵矣。 頃者爾等之請對也, 方擁衾發汗, 故不得引見, 使之書啓所懷矣。" 鼎重曰: "雖不得開筵, 使儒臣讀而聽之, 豈無少補? 伏聞時有後苑調馬臨射小的之事云。 街談難信, 無乃或有之耶?" 上曰: "設令予意在此, 氣力不堪也。" 敏迪繼而縷縷於開筵講學之事, 上謂承旨, 自今依例稟視事。 鼎重、敏迪竝達海西宮庄之弊及尹㻩可罪之狀, 上曰: "臺諫之言, 道臣之啓, 亦何可盡信也。" 敏迪曰: "道臣之言, 雖或失當, 若係民怨, 不可不念。" 上曰: "洪處尹不能平心, 至請同下司敗, 無已甚乎。" 諸臣多言民情所在, 宮屯不可不罷, 上不允。 大司諫閔鼎重以賑救時, 朝家命令, 不卽奉行, 請罷慶尙監司閔熙、全羅監司李泰淵, 從之。 又以客使恐喝, 私贈太多, 劾平安監司任義伯、兵使金體乾, 請罷職, 上曰: "客使將到, 有煩聽聞, 上來後推考可也。" 洪命夏曰: "頃日天威震疊之餘, 有此賜對從容之擧, 入侍諸臣, 孰不感動。 但諫院所啓, 多是不緊, 而不及當言之事, 臣請陳之。 戶曹參判徐元履、參議洪處厚以當初回啓之失, 特命罷職, 改爲覆啓之後, 至有格外加由之命, 外議不快於斯矣。" 上曰: "元履初雖有做錯之失。 戶曹堂上所當擇人, 而元履乃大臣所薦也, 以此加由。 豈爲其將順也。" 鼎重曰。 元履之前後回啓, 若出二手, 而聖上前則特罷, 後則加由, 群情皆以爲: ‘聖上惡其違拂, 而喜其順旨也。’ 臣固欲言, 忘未及達, 重臣之斥宜矣。 請賜遞斥。" 上曰勿辭, 仍顧承旨曰: "物議如此, 參判徐元履、參議洪處厚竝遞差。" 李敏迪曰: "頃日李昌炫事, 臣以該曺事體論啓矣。 出家女, 旣無當坐之律, 則逆家女壻, 似無終身永棄之事, 當有一番稟定矣。" 洪命夏曰: "臣曾達其人可惜, 不可終棄之意。 署經之官, 不可除拜矣。" 上曰: "淸華職及署經官外, 許令除拜可也。"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45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구휼(救恤) / 농업-전제(田制) / 사법-탄핵(彈劾) / 가족-가족(家族) / 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