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대동법 실시, 옥당의 신록에 관한 일, 궁가에 전결을 지급하는 일 등에 대해 의논하다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역관 이분신(李芬新)이 북경에서 돌아와, 영력 황제(永曆皇帝)134) 가 청(淸)나라 군대에 포위당해 핍박을 받다가 스스로 목매 죽기까지 하였다고 했는데, 그 쪽의 과장된 소문을 또한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 청나라 사람들이 우리 국경을 넘어왔을 때 상토 첨사(上土僉使)가 양찬(粮饌)을 지급하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저쪽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쫓아냈기 때문에 약간의 양찬을 내주어 달래려고 했던 것이니, 대체로 부득이해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통사(通事)가 청나라 말에 능통하지 못해 개유(開諭)하지 못한 탓으로 빚어진 일이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말에 능통하지 못한 통사는 도태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호남의 산간 고을은 올 가을부터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할 예정인데, 영상이 장차 나라 밖으로 나가게 되어 있으니 속히 의논해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입시한 신하들에게 두루 하문하였는데, 어떤 이는 수령에게 전담시키는 것이 편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호조가 주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기읍(畿邑)의 전결(田結)이 옛날에는 13만 결이었는데 지금은 3만 결밖에 되지 않으니, 이것은 바로잡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양서(兩西) 지방 역시 양전(量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여러 신하들도 똑같은 내용으로 행하기를 권하였으나, 이완만은 홀로 아뢰기를,
"양전이야말로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이기는 합니다만, 올해는 민역(民役)이 엄청나게 많으니 단연코 행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옥당의 신록(新錄)에 관한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좋겠는가? 영부사는 재야(在野)의 유신(儒臣)에게 물어보았으면 하는데, 남구만(南九萬)과 이민서(李敏叙)는 모두 ‘이것은 《예경(禮經)》에 관한 일이 아니니 물어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한다. 내 뜻도 그러한데,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태화는 아뢰기를,
"신은 수석(首席)에 몸담고 있으면서 누이의 아들로 하여금 참여될 수 있게 하였으니 정말 두렵기만 합니다. 어떻게 감히 의논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홍명하(洪命夏)는 아뢰기를,
"지금 만약 그대로 둔다면 그들의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으며 전조(銓曹) 역시 어떻게 의망(擬望)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의견으로는 4인을 삭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정유성(鄭維城)은 아뢰기를,
"도당록(都堂錄)을 작성할 때는 본래 상피(相避)하는 규정에 구애받지 않는데, 어떻게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삭제해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민적(李敏迪)은 아뢰기를,
"도당록이 공정하게 되지 못했다면 재신(宰臣)들을 죄주어야 마땅합니다. 어떻게 4인을 모두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조복양은 아뢰기를,
"지금 삭제한다면 뒷날의 폐단이 염려됩니다. 그리고 최유지(崔攸之)는 경학(經學) 면에서 가장 우수한데 어째서 옥당의 선발에 부적합하단 말입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찌 참록(參錄)된 것을 삭제할 수야 있겠는가. 전조(銓曹)에서 공의(公議)에 따라 수용(收用)하는 것이 온당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 궁가(宮家)에 전결(田結)을 지급하는 문제를 의논했었는데, 6백 결(結)로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복양이 아뢰기를,
"6백 결은 중읍(中邑)의 결수(結數)에 해당하니 실로 과다할 듯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는 1천 4백 결이나 되었던 것을 지금 6백 결로 정한다면 이 역시 너무 줄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어째서 지나치다고 하는가?"
하니, 민적이 아뢰기를,
"6백 결은 너무 많으니,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제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전대로 하고 제도를 정하지 말도록 하라."
하니, 복양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는 온당치 못합니다. 이치상 결수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뜻은 6백 결로 정하는 것인데, 안 된다면 고치지 않고 예전대로 할 뿐이다. 그대들은 이 두 가지 중에서 택일하라."
하니, 복양이 아뢰기를,
"6백 결이 많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고치지 않고 예전대로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하고, 민적은 아뢰기를,
"6백 결은 너무 많으니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유성은 아뢰기를,
"민적의 말이 옳습니다."
하고, 정치화(鄭致和)는 아뢰기를,
"서서히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정태화와 원두표(元斗杓)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민적이 또 아뢰기를,
"요즘 들어 주현(州縣)이 피폐해진 것은 바로 노비가 적은 데에 연유한 것입니다. 《대전(大典)》을 보면 주(州)·부(府)·군(郡)·현(縣)의 노비에 각각 정액(定額)을 두고 있으니, 이제는 《대전》에 의거하여 그 정액의 수에 미달된 주현의 노비에 대해서는 다른 곳으로 옮겨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전》의 원액(元額)과 현재 주현에 있는 노비의 실수(實數)를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서계(書啓)하여 품처(稟處)토록 하라."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상평창(常平倉)의 제도가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즉 곡물 값이 오르면 값을 내려 내다 팔고 곡물 값이 내리면 값을 올려서 사들이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경수창(耿壽昌)135) 의 유법(遺法)입니다. 《대전》에 의거하여 진휼하고 남은 미곡을 가지고 상평창을 설치해서 도민(都民)을 구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조가 고갈된 상태라서 상평창을 다시 설치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진휼하고 남은 곡식은 호조에 붙여 별도로 놔두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41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외교-야(野) / 재정-공물(貢物) / 재정-창고(倉庫) / 농업-양전(量田) / 농업-전제(田制)
○乙未/引見大臣及備局諸臣于熙政堂。 領相鄭太和曰: "譯官李芬新自北京還, 永曆皇帝爲淸兵圍逼, 至於自縊云, 而彼中夸言, 亦何可信。" 上曰: "頃日淸人越來我境之時, 上土僉使, 至給粮饌, 何也?" 太和曰: "彼人放逐我人, 故給與若干粮饌以說之, 蓋出不得已也。 然莫非通事, 不曉淸語, 不得開諭之致也。" 上曰: "不曉語通事, 沙汰可也。" 金佐明曰: "湖南山郡大同, 擬於今年秋設行, 領相將出疆, 宜速議定。" 上遍問入侍諸臣, 或言專委守令爲便, 或言戶曹主管爲當。 鄭致和曰: "畿邑田結, 舊則十三萬結, 而今爲三萬結, 此不可不釐整也。" 趙復陽曰: "兩西亦不可不量田。" 諸臣同辭勸之, 李浣獨曰: "量田雖是必可行之事, 今年則民役浩大, 似難斷然行之也。" 上曰: "玉堂新錄事, 何爲而可? 領府事欲問于在野儒臣, 而南九萬、李敏叙皆以爲: ‘此非禮經事, 不當問之云。’ 予意亦然, 將奈何?" 太和曰: "臣忝居首席, 使妹子得參, 臣實瞿然。 何敢容議。" 洪命夏曰: "今若仍存, 渠豈安心, 銓曹亦安得擬望。 臣意則四人削之可矣。" 鄭維城曰: "都堂錄本不拘相避, 則何可以一人之言, 遽爾削去?" 李敏迪曰: "都堂錄不公, 則諸宰罪之宜矣。 四人者豈可竝棄乎?" 趙復陽曰: "今若削之, 後弊可慮。 且崔攸之經學最優, 何不合於玉堂之選?" 上曰: "何可削錄。 銓曹從公議收用宜矣。" 上曰: "前日所議宮家給結事, 定以六百結則如何?" 復陽曰: "六百結, 乃中邑結數, 實涉過多。" 上曰: "前則一千四百結, 今定以六百結, 亦是太減, 何謂過也?" 敏迪曰: "六百結太多, 依大典定制似當。" 上厲聲曰: "若然則依前勿爲定制。" 復陽曰: "上敎未安矣。 不定數, 於理不可。" 上曰: "予意在於六百結, 否則因循不改而已。 爾等擇於斯二者。" 復陽曰: "六百結雖多, 猶愈於因循不改。" 敏迪曰: "六百過多, 決不可爲。" 維城曰: "敏迪言是也。" 致和曰: "固當徐議。" 太和、斗杓默無一言。 敏迪又曰: "近來州縣凋弊, 正坐奴婢鮮少。 《大典》州府郡縣奴婢, 各有定額, 今依《大典》州縣未準數奴婢, 勿許移給他處宜矣。" 上曰: "《大典》元額及卽今州縣奴婢實數, 令該院書啓稟處。" 敏迪曰: "常平倉載在法典。 穀貴則減價而賣, 賤則增價而貿, 卽耿壽昌遺法。 請依《大典》, 以賑恤餘米, 設常平以濟都民。" 上曰: "度支匱竭, 更設常平, 力有不贍。 賑餘米, 須付諸度支別置。"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4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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