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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 5권, 현종 3년 6월 10일 신해 3번째기사 1662년 청 강희(康熙) 1년

윤지미와 원만리를 선발함에 사사로움이 개입된 것에 관한 대사성 서필원의 상소문

대사성 서필원(徐必遠)이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사(私)라는 한 글자야말로 나라를 망치는 근본이 된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점차 이런 풍조가 횡행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버젓이 공정하지 않은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길거리마다 이를 비판하는 이야기가 자자한데도 대각에서는 한 마디 말씀도 드리지 않고 조용하기만 하니 성상께서 어떻게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옥당의 관원은 으레 경연(經筵)을 겸하여 논사(論思)하고 보도(輔導)하는 책임을 전담하고 있으니, 그 임무가 얼마나 중합니까. 이렇듯 중하기 때문에 선발하는 것 역시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홍문록(弘文錄)의 규정을 보건대, 처음에는 재주나 명망이 당대에 뚜렷이 드러난 자를 가린 다음 본관(本館)의 관원들이 모두 모여 권점(圈點)097) 해서 점수가 많은 자를 뽑는데, 그것을 본관록(本館錄)이라 합니다. 그 뒤 삼공(三公) 및 정부의 동서벽(東西壁)098) 과 관각(館閣)의 당상이 도당(都堂)에 일제히 모여 본관록 중에서 부적합한 자는 삭제하고 적합한데도 누락된 자는 취하는데, 이것을 도당록(都堂錄)이라고 이름하니, 이렇게 한 뒤에야 비의(備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대저 한 관사(官司)의 후보자 명단에 대해 처음에 본관의 심사를 거쳤다가 재차 도당을 거치게 하는 등 매우 상세히 심사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중하게 하고 가볍게 하려 하지 않는 것이고, 공(公)에 입각해서 하고 사(私)를 개입시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전일 도당에서 권점을 행하여 뽑을 때에, 윤지미(尹趾美)원만리(元萬里)는 모두 본관록에 참여되지도 않은 사람인데 홀연히 도당록에 끼이고 다른 사람은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게 어찌 도당록에 참여될 만한 사람이 오직 이 두 사람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윤지미는 상신(相臣)의 누이의 아들이고 원만리는 상신의 친아들입니다. 도당이란 바로 정부의 별명으로서 실제로는 삼공이 이 일을 주도하고 있는데 본관록에 누락된 그 아들과 조카만 참여되었으니 아무리 사(私)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신은 감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고(故) 상신 이준경(李浚慶)은 도당에서 권점을 행하던 날, 그의 아들이 도당록의 대상자 명단에 끼어 있자 직접 붓을 잡고 지우면서 ‘내 아들이 이 선발에 부적합하다는 것은 나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공정한 그 마음 자세에 대해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칭찬하는데, 이 어찌 뒷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최유지(崔攸之)송규렴(宋奎濂) 같은 자는 모두 부적합한 사람인데도 인아의 세력 덕택으로 함부로 대상자 명단에 등록되었으니, 어떻게 뭇사람들의 입을 막고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이를 바로잡아 풍절(風節)을 힘쓰게 하고 앞으로 징계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박장원(朴長遠)처럼 퇴보(退步)하는 자야 원래 꾸짖을 가치도 없는 것이지만, 민정중(閔鼎重)처럼 과감하고 강직한 자마저 입을 꾹 다문 채 체직되려고만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오늘날의 나랏일이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만약 일체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둔다면 앞으로 환란을 구하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그대의 충성심을 가상하게 생각한다.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서필원이 소장을 진달한 뒤에 어떤 이가 그에게 묻기를 ‘윤지미 등 4인 모두가 꼭 홍문록에 부적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없는데, 그대가 어찌하여 갑자기 상소하여 배척을 하였는가?’ 하니, 필원이 대답하기를 ‘윤지미는 본래 범상할 뿐 취할 만한 장점이 없고, 원만리는 사람됨이 거칠고 포악하여 전혀 아망(雅望)이 결여되었다. 그런데 상신의 조카이거나 상신의 친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본관록에 누락되었는데도 그 뒤에 도당록에 참여되었다. 경악의 청선(淸選)에 어찌 그런 자들을 끼워둘 수 있겠는가. 최유지는 너무나도 용렬하여 그 벼슬과 걸맞지 않은 정도뿐만이 아닌데다가 더구나 남한 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되었을 당시 용서받기 어려운 죄까지 지었는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송규렴은 일찍이 호남의 방백으로 있으면서 고을 일을 결딴내었고 또 연소한 부마(駙馬)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왕래하다가 뒤섞여 도당록에 참여되었으니, 외람스럽기 짝이 없다. 내가 그래서 소장을 올려 배척한 것이다.’ 하였다. 필원이 편협하고 너그럽지 못한 병통을 가지고 있긴 하였으나 일단 일을 당하면 마음을 바꾸지 않고 곧게 행동하는 것으로 자임(自任)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중히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35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 [註 097]
    권점(圈點) : 후보자 이름 위에 둥근 점을 치는 것.
  • [註 098]
    동서벽(東西壁) : 동벽(東壁)은 좌찬성과 우찬성을, 서벽(西壁)은 좌참찬과 우참찬을 말함.

○大司成徐必遠陳疏辭職, 且曰:

私之一字, 喪邦根柢。 而近年以來, 漸至橫肆, 十目所視之地, 顯有不公之事, 街談巷議, 莫不藉藉, 而臺閣寥寥無言, 聖上何由得聞。 玉堂之官, 例兼經筵, 專任其論思輔導之責, 其爲任不其重乎? 其重如此, 故其選亦重。 自前《弘文錄》之規, 初擇一時才望之表著者, 本館多官, 齊會圈點, 取其優數, 名曰《本館錄》。三公及政府東西辟館閣堂上, 齊會都堂, 取本館錄中, 不合者刪之, 可合而見遺者取之, 名曰《都堂錄》, 然後乃得備擬。 夫以一司之錄, 初經於本館, 再經於都堂, 極其詳審者, 無他, 欲重不欲輕, 欲公不欲私之意。 而頃日都堂之圈取也, 尹趾美元萬里俱以未參本館錄之人, 忽焉參錄, 而他人無預者。 豈都堂可錄之人, 止此兩人而然耶? 趾美, 相臣之妹子, 萬里, 相臣之親子。 而都堂卽政府別名, 三公實主張此事, 而見遺本館之其子其姪, 獨得預焉, 雖謂之非私, 臣不敢信也。 故相臣李浚慶在都堂圈點之日, 其子在應錄中, 而手筆抹去曰: 吾子之不合是選, 吾自知之。 其處心以公, 人到于今稱之, 此豈非後人之可法者乎? 至如崔攸之宋奎濂, 俱以不合之人, 賴有姻婭之力, 冒濫參錄, 其何以默衆口, 而厭人心乎? 臣愚以爲: 不可不擧正, 以勵風節, 以懲將來。 而退步如朴長遠, 固無足責, 剛果如閔鼎重, 緘口結舌, 汲汲圖遞, 今之國事, 可謂寒心。 一切任他, 則將來之患, 有難救藥。"

答曰: "嘉爾爲國之誠。 勿辭察職。"

【史臣曰: "必遠陳疏之後, 或有問之者曰: ‘趾美等四人, 未必皆不合於弘錄, 而君何遽爾疏斥也。’ 對曰: ‘趾美, 本來凡庸, 無可取之長處, 萬里, 爲人麤暴, 全欠雅澹。 而或以相臣之姪子, 或以相臣之親子, 得參都堂錄於見遺本館之後。 經幄淸選, 豈容濫廁。 攸之不但闒茸之甚, 人器不稱, 況有南漢圍城時難貸之罪, 奎濂曾宰湖南, 官事板蕩, 且與年少駙馬輩, 親密往來, 混同參錄, 猥濫極矣。 吾以是疏斥云。’ 必遠雖有固滯之病, 而遇事不回, 以直自任, 士論重之。"】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35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