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학 이일상이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대제학 이일상(李一相)이 상소하기를,
"신은 본디 바보처럼 머리가 텅 비어 일개 쓸모 없는 위인일 뿐입니다. 비록 가정에서 저절로 단련된 덕으로 요행히 과거 시험에 붙어 일찍 벼슬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만, 본성이 또 게을러 세월만 마냥 보내다 보니 공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정축년부터 10여 년 동안 전후로 가족을 잃는 처참한 재앙을 당하여 실로 사람의 도리로는 차마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혼자 외로이 형체만 남아, 마치 넘어지지 못한 마른 나무가 겉에는 가지와 잎이 달렸어도 속은 벌레가 먹어 생기를 다 잃은 상태와 같습니다. 평상시 남과 이야기하고 돌아서면 곧 잊어버리니, 무슨 정신으로 다시 서책을 대하여 공부하겠습니까. 쓸데없이 반평생을 보냈고 학문에 뜻을 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는 신의 일가 친척이 다 아는 사실일 뿐만 아니라 친구나 모든 사람들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보고 듣기에 크게 놀라운 일이 있을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조정에서 인재를 임용하는 도리와 신하로서 기량에 따라 받아들이는 의리는, 한산하고 느긋한 직위가 있더라도 본래 구차히 충원하여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물며 이 대제학의 직위가 얼마나 중요한 임무인데 감히 천만 부당하게 저처럼 같잖은 위인이 갑작스레 맡아서야 되겠습니까. 예로부터 과거 시험에 요행히 합격한 사람은 더러 있지마는 대제학의 자리를 요행히 차지한 이는 결코 없었습니다. 신이 임명의 소식을 들은 이후 무거운 죄를 진 것처럼 부끄러워 땀이 흘러내렸으며, 잠자다가도 놀라 산이나 바다로 곧장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만일 염치없이 영화를 탐하여 털끝만큼이라도 무릅쓰고 나아갈 의향이 있다면, 온 조정 사람들의 비난은 우선 접어 두더라도, 그것이 사림(詞林)에까지 욕을 끼치고 사방 천지에서 비웃음을 사게 된다면 어찌합니까. 국가의 관직을 훔쳐 더럽히는 일이 신한테서 비롯될까 두려운데, 어찌 저의 사문 중에만 두려움이 가득할 뿐이겠습니까. 결코 받들 수가 없으니, 내리신 분부를 속히 거두어 감당할 만한 인물에게 돌려 제수하시면 참으로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재능이면 이 임무에 합당하다. 계속해서 사직하지 말고 속히 출사하여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이일상이 다섯 번 상소하여 굳이 사직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179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大提學李一相上疏曰:
臣本白癡空踈, 特一無用人耳。 雖以家庭濡染之得, 倖占科第, 而早從仕宦, 性且懶漫, 悠泛度日, 素蔑功課。 且自丁丑十餘年來, 前後喪禍之慘, 實人理所不可堪忍。 孑然人世, 形殼徒存, 譬如枯木未顚, 外着枝葉, 而蟲食其內, 生意已盡。 尋常對人言語, 旋輒遺亡, 有何精神, 更及於書卷上工夫乎? 乾沒半生, 絶意鉛槧之業久矣。 此則不惟臣一家親戚之所知, 朋友國人, 亦莫不知之。 豈料今日, 有此大駭瞻聆之擧也。 朝家器使之道, 人臣量受之義, 雖在閑漫之職, 固不可苟充而濫叨, 況此是何等重任, 而乃敢以萬萬不似之身, 猝然當之乎? 自古倖占科第者, 容或有之, 倖占文衡, 必無之事也。 臣聞命以來, 如獲重戾, 愧汗猶瀉, 窹寐亦驚, 直欲走海登山, 而不可得也。 今若貪榮喪恥, 有一毫冒進之意, 則同朝之譏刺, 姑置不論, 而其如貽辱詞林, 取笑八方何哉? 竊恐國家名器之玷汚, 自臣而始, 豈但臣私門盈滿之懼而已也? 決無承當之理, 亟收成命, 回授可堪之人, 不勝萬幸。"
答曰: "卿才允合此任。 宜勿控辭, 速出察任。" 一相五上疏固辭, 不許。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179면
- 【분류】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