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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 18권, 효종 8년 6월 21일 임진 3번째기사 1657년 청 순치(順治) 14년

충청 감사 서필원이 서원·향사(鄕祠)의 폐단에 대해 아뢰니 예조의 의논을 따르다

충청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치계하기를,

"서원(書院)의 사체는 향교에 버금갑니다. 그런데 근래 조정에 금하는 규칙이 없고 선비들에게 정론(定論)이 없는 것을 틈타서 욕심대로 하면서 거리낌이 없습니다. 서원으로 짓기에 부족한 것을 향현사(鄕賢祠)라고 부르면서 서로 모방하여 날로 조금씩 번성하고 있는데, 개괄적으로 말한다면 그 폐단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향교와 서원은 그 비중이 다릅니다. 그런데 시골에 사는 선비 중에 사족으로 불리우는 자는 조금만 재주와 식견이 있으면 서원에 적을 두고 원유(院儒)라고 부르면서, 향교를 마치 주막같이 보며 향교생을 노예처럼 대우하여 선성(先聖)에게 석전을 드리는 곳을 잡초가 무성하게 하며 국가의 문(文)을 숭상하는 뜻을 헛되게 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첫째 폐단입니다.

양민과 천민을 막론하고 한가한 백성을 모집해서 보노(保奴)라고 부르면서 마음대로 부리는데, 그 얻은 수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집해 얻은 후에는 계속해서 서원의 물건으로 삼아서, 만일 빼앗아 군역(軍役)으로 이관하려는 일이 있으면 떼 지어 일어나서 떠들어대며 반드시 그들의 의향대로 하고야 마니, 이것이 둘째 폐단입니다.

그들이 높이어 받드는 사람은 한결같이 공론을 따르지 못해 혹은 그 자손이 자기 선조를 사적으로 위하거나, 혹은 자기가 좋아하는 자에게 아부하여 지나치게 추존하기 때문에 창립할 즈음에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싸우다가 선대의 누나 숨겨져 있는 허물을 모두 들추어 내기까지 합니다. 그리하여 아침에는 취향이 같다가 저녁에는 원수가 되곤 하니, 풍속을 해치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셋째 폐단입니다.

서원과 향사(鄕祀)의 춘추 제물을 본관에서 준비하여 지급할 때에 그 비용이 심히 많으나 학궁(學宮)에 관계된 일이므로 수령된 자는 힘을 다해 마련하여 보내면서도 오히려 부족할까 염려합니다. 그 중에 쉽게 마련할 수 있는 물건은 그래도 지장이 없겠으나 돼지나 염소 등과 같은 것은 회부(會付)에 기록된 것으로서 예사 물건이 아닌데 쓰는 데 절제가 없어서 점점 더 소모되어 가고 있으니, 이것이 넷째 폐단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만일 제때에 억제하지 않고 마음대로 번성해지도록 방치한다면 오월(吳越)의 참람함을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선성의 사당을 보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뒤에 기록한 서원과 향사 중에서 서원으로 짓기 부족한 것은 향사로 강등하고, 향사로 짓기 부족한 것은 즉시 철거케 하십시오. 그 가운데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치 않은 자는 구별하여 위패를 떼내게 하고, 비록 그 도학(道學)이 서원에 합당하다고 하더라도 한 도 안에 서원을 중복하여 건립하지 못하게 하며, 액호를 하사받은 서원 외의 서원에 드는 춘추 향사(享祀)의 제수는 관가에서 마련하여 지급하지 말게 하십시오.

오늘 이후로 서원이나 향현사를 세우려고 하는 자에 있어서는 그 행적을 갖추어 입궐하여 아뢰게 한 다음 이를 묘당에 하문하여 여러 의견이 일치해야만 허락하며, 조정에 품의하지 않고 마음대로 창립한 자에 있어서는 음사(淫祀)로서 논죄하여 앞장선 유생을 죄주십시오. 이른바 보노는 액호를 하사한 서원이나 향현사를 막론하고 모두 혁파하여 본관에 돌려 보내 군대에 소속케 하십시오. 입교한 유생으로 과거를 보려는 유에 대해서는 서울의 사학(四學)의 규례에 따라 10일간 입번(立番)하여 본관의 공문을 받은 연후에 경향시(京鄕試)에 가는 것을 허락하여, 한편으로는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고 한편으로는 선성을 높여 받드는 터전을 삼으소서."

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서원의 설립은 송유(宋儒)에게서 비롯되었고, 향 선생(鄕先生)을 제사하는 것은 당나라 때에도 있었으니, 이것은 사실 유현(儒賢)을 흠모하고 분발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므로 진실로 쉽게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충청 감사 서필원의 장계를 보니, 이 일을 처음부터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니라 이익은 없고 해로움만 있는 것을 미워한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서원과 향사를 등급을 매겨 강등하자 한 것은 가볍게 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배와 후생이 같은 시대를 살지 않아 인품의 고하를 상세히 알기 어려우며, 오랜 시일이 지난 후라서 그 행적을 모으기도 어렵습니다. 향사에 모시기 부족한 자를 구별하여 위패를 떼어내자는 것은 그 형세가 더욱 어렵습니다. 도학과 절의가 일세에 높다 하더라도 한 사람을 위해 곳곳에 사당을 세우는 것은 과연 너무 번잡하니 한 도 안에 서원을 중첩하여 세우는 것은 마땅히 금지해야 할 것입니다.

대개 서원과 향현사를 설립하는 것은 이미 아름다운 뜻입니다. 후세에 본보기가 될 만한 현인과 의사(義士)의 신위(神位)를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고을 사람과 유림이 흠모하는 데서 나온 것이니 다른 음사(淫祀)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이처럼 많이 사우(祀宇)를 헐고 위판(位版)을 묻어서는 안됩니다. 국가에서 제도를 만들어 피차에 다름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 말대로 한다면 반드시 팔도를 똑같이 해야 할 것이니 어찌 중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서원과 향현사의 보노가 비록 너무나 많기는 하나, 다만 서원은 산골짜기에 있는 것이 많아서 지키는 사람이 없을 수 없으니, 액호를 하사받은 서원은 보노 7명, 그 외의 서원은 보노 5명을 정해 주고, 향현사의 사체는 서원보다 가벼울 뿐만 아니라 읍내와 마을에 있는 것이 많으므로 보노 2명만 주게 하소서. 그리하여 모두 제도로 하여금 길이 규정으로 삼게 하되 그 외의 군역을 모면하려는 양정(良丁) 및 속오(束伍)를 면하려는 공사(公私)의 천인으로서 서원과 향현사에 들어간 자는 모두 색출하여 군에 편입시키게 하소서.

앞으로 서원과 향현사를 건립코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그 행적을 갖추어 아뢰게 하여 묘당에 하문한 다음 건립을 허가하라는 것은 그 생각이 심히 옳으므로 이대로 시행하시고, 사사로이 창립한 자에 있어서는 본관이 즉시 금지하고 앞장선 자는 논죄토록 하십시오. 액호를 하사받은 서원 외의 서원과 향현사의 제수를 관에서 지급하는 일은 일절 폐지하며, 입교한 유생이 과거를 보는 것 등은 서울 사학의 예에 따라 입번(立番)하게 하며, 각읍에서 입교한 유생의 수를 통계하여 차례대로 입직하게 하되 만일 10일이 차지 않으면 공문을 내주지 말게 하고 공문이 없이 경향시에 응시한 자는 1년간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여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5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100면
  • 【분류】
    사상-유학(儒學)

忠淸監司徐必遠馳啓曰: "書院事體, 亞於鄕校, 而近緣朝無禁制, 士無定論, 唯意所欲, 不復顧憚。 不足於書院者。 稱爲鄕賢祠, 轉相慕效, 日以寢盛, 槪以言之, 其弊有四。 鄕校、書院, 輕重有間。 鄕居士子之名爲士族, 稍有才識者, 則籍名書院, 稱以院儒, 視鄕校如店舍, 待校生如奴隷, 使先聖釋菜之所, 鞫爲茂草, 使國家右文之意, 歸於虛地, 此一弊也。 毋論良賤, 募得閑民, 稱以保奴, 任意使喚, 隨其所得, 多少不齊。 而募得之後, 則執爲院物, 如有奪定軍役之擧, 則群起呶呶, 必得所欲而後已, 此二弊也。 其所尊奉之人, 不能一循公議, 或爲其子孫, 而私其祖先, 或阿其所好, 而過爲推許, 故創立之際, 論議不一, 始焉鬪鬨, 世累隱慝, 無不暴揚。 朝同臭味, 暮成仇敵, 傷風敗俗, 莫此爲甚, 此三弊也。 書院鄕祀, 春秋祭物, 自本官備給之際, 所費甚廣, 而事係學宮, 故爲守令者, 極力備送, 猶恐不及。 其中易辦之物, 容或無傷, 而如猪羔等物, 係是會付所錄, 不是等閑之物, 用之無節, 漸就耗損, 此四弊也。 臣愚以爲, 若不及時裁抑, 恣之令盛, 則吳越之僭, 不可勝言, 先聖廟庭, 無以保護。 就後錄書院鄕祀中, 其不足於書院者, 降以鄕祀, 不足於鄕祀者, 卽令毁撤。 其中不合享祀者, 區別拔去, 雖其道學合爲書院者, 一道之內, 使不得疊立院 宇, 賜額書院外, 未賜額書院, 春秋享祀祭需, 勿令官家備給。 今後欲立書院鄕賢祠者, 許令具其行蹟, 詣闕陳列, 下廟堂僉議歸一, 然後許之, 其不稟朝廷, 私自創立者, 則論以淫祀, 罪其首倡儒生。 所謂保奴, 毋論已賜額書院鄕賢祠, 一體革罷, 歸之本官, 以屬軍兵。 入校儒生赴擧之類, 依京中四學例, 立番十日, 受出本官公文, 然後許赴京鄕試, 一以爲救正士習, 一以爲尊奉先聖之地。" 禮曹回啓曰: "書院之設, 昉於儒, 鄕先生祭社, 見於時, 此實出於景慕儒賢興起之意, 固不可容易論之。 今觀忠淸監司徐必遠狀本, 則初非輕忽於此事, 蓋惡其無益而有害。 第念書院鄕祠之次第降等云者, 非但不可輕論, 先後之人, 生不竝世, 人品之高下, 有難詳知, 久遠之後, 亦難撮其行跡。 不足於鄕祠者, 區別拔去云者, 其勢尤難。 道學節義, 雖隆於一時, 以一人, 而處處立廟, 果爲太煩, 一道之內, 疊立院宇者, 宜令禁止。 大槪書院鄕賢祠之設, 旣是美意。 賢人義士之觀感於後世者, 設其位, 而俎豆之, 出於鄕人儒士之景慕, 則非他淫祀之比, 亦不當撤毁祠宇, 埋置位版, 若是之多也。 國家定制, 宜無異同於彼此。 若依此言, 則必將擧八道而同之, 豈不重哉? 臣等愚意, 書院鄕賢祠保奴, 雖極濫觴, 而但書院多在山谷中, 不可無守直之人, 賜額書院, 則保奴七名, 未賜額書院, 則保奴五名定給, 鄕賢祠, 則非但事體輕於書院, 多在於邑內村間, 只給保奴二名。 皆令諸道, 永爲恒式。 其餘良丁之謀免軍役及公私賤之謀免束伍, 投屬書院鄕賢祠者, 竝皆査出定軍。 今後書院鄕賢祠, 欲爲建立者, 必具其行跡, 陳疏下廟堂, 許令建立云者, 其意甚是, 依此行之, 至於私自創立者, 則自本官使之趁卽禁斷, 首倡者論罪。 賜額書院外, 未賜額書院鄕賢祠, 官給祭需等事, 一切革罷, 入校儒生赴擧之類, 依京中四學例立番, 著令各邑, 通計入校儒生之數, 輪次入直, 而如未滿十日, 則不許出公文, 無公文, 而冒赴京鄕試者, 限一年停擧, 以正士習爲當矣。" 從之。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5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100면
  • 【분류】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