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학 조석윤이 가뭄·형벌의 공평·백성의 편리·당파 등을 아뢰다
대제학 조석윤(趙錫胤)의 응지(應旨) 상소에 말하기를,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영명(英明)하신 자질로 간대(艱大)한 왕업을 이어 정신을 가다듬고 지치(至治)를 구하시며 밤낮으로 노력하신 지가 이제 3년이 되었습니다마는, 국세는 날로 위태로워지고 인심은 날로 흩어지고 조정은 날로 분열되고 기강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민생은 날로 곤란해지고 천변은 날로 겹겹이 일어나고 사기는 날로 위축되어가고 언로는 날로 막혀지는 등, 우려되는 형상이 수없이 많아 난망(亂亡)의 화가 조석간에 닥칠 판국이니, 이는 식견 있는 선비가 크게 한탄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만 통곡하고 싶어하는 이유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그 원인을 자신에게 돌이켜 찾아보신다면 성덕(聖德)의 소홀한 점과 정령(政令)의 잘못에 대해 반드시 시원하게 깨달으시겠지만 어리석고 얕은 신의 소견에도 또한 한두 가지 말씀드릴 만한 것이 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임금이 왕위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는 도는 사실 한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성실성과 명철함이 가장 긴요한 공부입니다. 대체로 성실하지 않으면 시행하는 모든 일들이 겉치레로 돌아가 끝내 실효가 없고, 명철하지 않으면 좋아하고 싫어하며 옳고 그른 것이 서로 뒤바뀌는 것을 면치 못하여 인심이 승복하지 않는 법이니, 이것이 치란 흥망이 갈려지는 소이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큰 덕과 지극하신 행실로 선대의 왕업을 계승하려는 뜻이 간절하시니, 어찌 일찍이 공업을 떨쳐 일으키고 기강을 크게 세워 지치(至治)를 이룩하시려고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날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신은 삼가 전하께서 정사를 하시는 도에 혹 그 성실성이 미진하고 아랫사람을 대하실 때 명철함이 부족하신 듯하다고 생각됩니다.
임금이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면서 위로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래로 백성을 돌보아 주지 않으면 하늘이 노여워하고 백성이 원망하여 나라가 따라서 망하는 법인데, 오늘날 하늘의 노여움은 그 또한 정도가 심합니다. 전고에 없는 놀라운 재변이 매일 생기고 있으니, 모르겠습니다마는 무슨 재앙이 보이지 않는 데에 도사리고 있기에 하늘이 경계를 보이는 것이 여기에까지 이른단 말입니까. 더구나 지난해의 기근은 근고(近古)에 없던 일인데 이제 또 여름철을 당하여 가뭄이 극심합니다. 삼가 듣건대, 양남(兩南)069) 의 모를 심은 곳은 이미 어찌 해볼 가망이 없고 근기(近畿) 지방에도 오히려 비가 흡족하지 못하니, 올해의 농사 형편은 이미 알 만합니다. 이처럼 부역이 많고 무거우며 백성이 궁하고 재물이 바닥난 날에 또 흉작의 재앙을 만났으니, 백성이 흩어지고 나라가 무너질 것은 지혜 있는 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어찌 등골이 오싹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진정 전하께서 삼가고 두려운 마음으로 행실을 닦아 서둘러 일대 전환을 모색하셔야 할 때인데 정령(政令)과 행사가 평소에 비하여 크게 다른 것을 볼 수 없으니, 신은 상께서 분부를 내려 구언(求言)하시고 친히 거둥하여 비를 비시는 것도 하늘의 견책에 답하는 실상이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원옥(冤獄)을 심리하는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죄명이 무겁더라도 인정과 도리로 보아 용서해 줄 만한 자를 살펴 특별히 석방한 뒤에야 억울함을 신설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저번에 의계(議啓)한 사항 가운데 유계(兪棨)와 정태제(鄭泰齊) 등은 용서를 받지 못하였으니, 어찌 일월의 밝은 빛이 두루 비추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두 신하가 죄명이야 다르지만 억울한 사정은 마찬가지로서 온 조정의 사람이 모두 그들을 위해 불쌍하게 생각하니, 어찌 사람마다 두 신하에게 사사로운 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공론이 다 한결같습니다. 이 두 신하는 광망(狂妄)한 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마음은 결코 별다른 속셈이 없고, 불측(不測)한 죄를 졌다고 할 수 있으나 사실인즉 조금도 증거가 없습니다. 만약 죄가 중대하다고 하여 더 이상 그 실정을 따져보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원통함을 안고 본심을 밝게 드러내지 못하여 살아서는 성명한 세상의 죄인이 되고 죽어서는 머나먼 지방의 원귀가 되게 한다면, 어찌 불쌍한 이를 돌보시는 큰 덕에 손상이 가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성상께서 특별히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미루어 비록 완전히 풀어주지는 못하더라도 조금 내지(內地)로 옮겨주시는 은혜를 내리신다면 반드시 화기(和氣)를 감화시키는 데에 일조가 될 것입니다.
아, 사람은 혹시 속일 수 있지만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전하께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만, 마음속에 지니고 계신 것이 과연 결백하여 하늘에 짝할 수 있겠으며, 국사를 행하시는 것도 또한 두려워하고 삼가하여 하늘의 명을 따른다고 보십니까. 신은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시는 것이 어쩌면 그 실제를 다하지 못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날 백성의 원망은 또한 이미 극도에 이르렀으니, 가렴 주구에 시달려 원망하고 기근에 병들어 원망하고 수령이 침해하여 원망하고 세력가가 약탈하여 원망합니다. 그리하여 굶어죽지 않으면 곧 본의 아니게 도적떼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적미(赤眉)와 황건(黃巾)070) 이 어찌 일찍이 생업을 잃은 백성에게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까. 신은 국가의 걱정거리가 나라 밖에 있지 않다고 봅니다. 백성의 임금이 되어 이 백성으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우리 백성을 통하여 보고 듣는 하늘이 어찌 노여워하고 또 경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후 백성의 부담을 감면해 주는 분부를 여러 번 내리시어 비록 진공(進供)에 관계된 물품이라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니, 전하께서 백성을 돌보시는 마음이야 극진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작은 혜택이라서 두루 미치지 못하고 내실 있는 정사를 행하지 못하셨으니, 이 어찌 양 혜왕(梁惠王)이 국사에 대해 마음을 다한 경우071) 와 다르겠습니까.
근래에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거두고 백성을 부리는 일이 우리 나라의 마음과는 관계없이 타의에서 나오는 일이 많으니, 이는 사실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마는, 우리가 힘을 쓸 만한 부분에도 오히려 백성의 원망을 사고 있습니다. 일이 내사(內司)에 관계된 것이면 덮어두고 궁척(宮戚)에 관계된 것이면 가로막아 언관이 간쟁한 일이 대부분 빈말이 되고 마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시험삼아 그 중 한두 가지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산택(山澤)에 대한 금지가 날로 심해져서 백성이 도끼를 들고 산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낫을 차고 들녘에 나가지도 못하니, 무지한 평민들이 어찌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도성에서 지척에 있는 지방도 그 폐해가 이와 같으니 더구나 먼 지방이야 그 침탈이 땔감을 채취하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은 당연합니다. 이는 인심을 잃는 일 중에서도 큰 것인데 끝내 금하여 혁파할 수 없겠습니까.
숨어 있는 내사(內司)의 노비를 고발하는 일은 비록 구례라고는 하나 주인을 배반하고 내사로 투입하는 길이 갈수록 넓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송사를 걸 수 있도록 허용한다 해도 시골 마을의 한미한 그들의 신분으로 어찌 능히 그 억울함을 위세 있는 자와 맞서서 전부 밝힐 수 있겠으며, 유사(有司)가 된 자도 어찌 마음을 공정하게 잡아 오로지 곡직에 따라서 명쾌하게 처결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사족(士族) 가운데 곤궁한 자는 한 사람도 선대의 업을 보전한 자가 없고 또 압공위사(壓公爲私)072) 의 율로 다스리며, 혹 공의(功議)073) 의 소지가 있더라도 경감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멀리 변방으로 유배되어 굶주림과 추위로 쓰러져서 가슴을 두드리며 원통함을 부르짖어 원기(怨氣)가 하늘에까지 사무치니, 어찌 족히 재앙을 부르지 않겠습니까. 설사 그들이 그 사람이 공천(公賤)인 줄 알고 점유하였더라도 이미 그 사람을 되찾아가고 또 그 신공을 징수하고 거기다가 무거운 율을 가하기까지 하는 것은 이미 국가의 관대한 정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더구나 자기 종의 양처(良妻)로 잘못 알았던 자가 자손을 낳고 오랫동안 복역(服役)하였다면 어찌 내사(內司)의 여종으로서 빠져나와 양인(良人)이 되었던 것임을 알겠으며, 또 더구나 진짜로 그들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소유물인데도 미약한 주인을 배반하고 공가로 투입하는 자가 수없이 많은 상황임에야 더 말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신이 요즈음 듣건대 금천현(衿川縣) 사람들이 서로 뒤를 이어 이러한 곤경을 겪고 있다 하니, 이로써 팔도 가운데 자기의 처소를 잃고 원한을 품은 자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진고(陳告)의 법은 혁파하지 못하더라도 공물을 징수하고 압공위사하는 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다행히 죄를 면하는 자가 있고 불행히 원한을 품은 자는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공물을 방납(防納)하고 이웃 사람과 친족을 침해하는 것은 실로 첫째가는 고질적인 폐단으로서 고치지 않으면 안 될 일입니다. 대동법(大同法)은 어찌 좋은 법이요 아름다운 뜻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어떤 사람은 백성에게 거두는 것이 너무 무겁다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일이 애로점이 많다고 걱정하기도 하니, 그 사이의 이해는 실로 쉽게 알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만약 먼저 공안(貢案)을 가지고 경감할 수 있는 것을 조사하여 경감한 뒤에 대략 임토법(任土法)074) 을 모방하여 서로 조정해서 상정(詳定)하되 한결같이 대동법의 절가(折價)075) 를 준수한다면 경중이 고르지 못한 문제거리가 없을 것이고, 여기저기서 생산되는 산물을 한 곳으로 취합한다면 중간에 뇌물을 주는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며, 또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토산물을 본색(本色)으로 수납하도록 허용하고 관리들이 농간을 부려 점퇴(點退)하는 것을 엄금한다면 그 또한 많은 값을 낭비하는 폐해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대단한 변통이야 되지 않더라도 오히려 한푼의 도움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군오(軍伍)가 정돈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도망간 자와 죽은 자가 다 대오(隊伍)에 들어있기 때문에 불법으로 재산을 빼앗는 폐해가 친족과 이웃 사람에게 미치며, 끝내는 그 친족과 이웃 사람도 지탱하지 못하여 결국 백성이 죄다 없어진 뒤에야 말 지경입니다. 만약 먼저 물고(物故)로 인해 응당 역을 면제받을 자와 도망가고 없는 자로서 나이가 60이 된 사람을 군안(軍案)에 부표(付標)하여 그 역을 면제해 주고, 각읍으로 하여금 모자라는 액수를 연차적으로 차츰 채우게 하되 그 액수를 정해주어 행여 태만히 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당분간 연례로 행하는 세초(歲抄)를 정지하여 이 일에다 온 힘을 쏟도록 하고, 나이가 60세가 되지 않았더라도 도망간 지가 오래되어 전혀 알아볼 데가 없는 자도 다른 사람으로 역을 대신 정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 원안(元案)에서 이름을 삭제한다면 군안이 허술해지지 않고 이웃과 친족이 조금은 침해를 받지 않게 되어 백성을 내몰아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아, 백성은 지극히 어리석지만 그 마음은 신령하여 위엄으로 구속할 수 없고 실없는 말로 감동시킬 수도 없습니다. 오직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진실한 마음으로 진실한 정사를 행하되 밤낮으로 꾸준히 하며, 오직 자기는 검소하고 남은 풍족하게 하며 위를 덜어내고 아래를 보태주는 것으로 마음을 갖되 말단의 사무에 철저히 하지 말고 겉치레에 얽매이지 말며, 반드시 혜택이 아래 백성에게까지 미치고 쌓인 폐단이 전부 제거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뒤에야 비로소 백성을 실지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과연 이미 이와 같이 행하셨다면 어찌 온 나라 도처에서 시름과 원망이 날로 일어날 리가 있겠습니까. 신은 전하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는 것이 어쩌면 그 실지를 다하지 못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신 초기에는 늙은이와 덕있는 이를 예우하여 초야에서 초빙하여다가 힘써 의지하고 응대가 메아리처럼 순조로웠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전하의 현인을 좋아하시는 정성은 천고에 으뜸이라고 말했는데, 얼마 가지 못하여 성의가 쇠퇴해지셨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시니, 처음과는 달라졌다는 시인(詩人)의 탄식076) 정도만이 아닙니다. 신은 산야의 선비는 논의가 과격하여 시의(時宜)에 맞지 않으므로 함께 일을 할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곧고 진실한 말이 성상의 뜻에 거슬리어 처음에는 불쾌함을 참고 좋게 대하시다가 단호히 버리고 다시는 생각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그렇게도 처음에는 서둘다가 나중에는 모른 체하십니까.
저번에 영돈녕부사 김상헌이 병든 몸을 부축하고 국상(國祥)에 와서 곡하고 소장을 올려 물러가겠다고 했을 때 흰 머리의 늙은 신하가 또다시 대궐문을 들어온다는 것은 점치기 어려운데도 인견하고 싶다는 뜻을 비답의 내용에만 언급하고 더 이상 인대(引對)하겠다는 명이 없었고, 사직소가 올라갔을 때도 미련을 두고 달래는 분부가 없으셨으니, 전하께서 원로 대신을 대하시는 것이 어찌 이와 같이 소홀하단 말입니까. 전 승지 신천익(愼天翊)을 특별히 자급을 뛰어올려 승정원의 관리에 제수하셨으니, 성명께서 명리에 욕심이 없는 절개를 가상히 여겨 장려하신 것을 충분히 알 만합니다만, 관작은 현인을 대우할 만한 것이 못 되고 반드시 예로써 접하고 성의로써 대하여야 비로소 현인을 대우하는 도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벼슬만 올려주셨을 뿐 아직까지 한번도 소대(召對)하지 않으셨으니, 어찌 전하께서는 천익을 대우하시는 것이 이렇게도 박하십니까. 이 몇 가지 일로 말하면 전하께서 현인을 좋아하시는 것은 비록 그 실지가 없다고 말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신 초기에는 간언(諫言)을 따르시는 미덕이 거의 흠결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용기를 갖고 모두가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을 다하려고 생각하였으나, 그 뒤로 차츰 처음과 같지 않으셨고 요즘에 와서는 간언을 거부하시는 병이 고질이 되어 조금이라도 뜻에 거슬리면 곧장 꺾어버리시어 준엄하신 비답을 내리시는데 신자로서 차마 듣지 못할 내용이 있기까지 합니다. 이 때문에 곧은 기운이 없어져 대각이 쓸쓸하므로 사람들이 언관의 자리를 피하기를 마치 가시밭을 피하듯 합니다. 대체로 대신(臺臣)의 말이 반드시 하는 말마다 이치에 맞지는 않더라도 또한 어찌 전혀 채택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경시하여 꺾어버리기를 이와 같이 하시니, 이 어찌 이목의 관원을 두어 스스로 돕는 뜻이겠습니까. 이제 대간을 믿지 않으시면서 도리어 널리 바른말을 구하려고 하시니, 식견이 있는 자는 모두 전하의 기색이 바른말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또한 어느 누가 앞에 나서서 쓸데없는 말을 올리려고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간언을 따르시는 것은 비록 그 실지가 없다고 말하더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전하의 총명하고 영특하며 강인하신 자질은 그야말로 하늘이 낸 것이지만, 신이 감히 밝음과 슬기가 아랫사람을 굽어 살피기에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른바 밝음이란 잘 살펴 안다거나 장래의 일을 잘 추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마음으로 위에서 아래를 굽어살피어 시비를 판단하는 나의 밝음이 항상 거울속과 수면처럼 트여있게 한다면, 사람의 사정(私正)과 말의 시비가 다 저절로 분명하게 참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남의 말을 들으며 일을 처리하실 때 간혹 그 시비를 분명히 분별하지 않으시어, 갑이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면 갑을 편들고 을이 또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면 또한 을을 편드심으로써 뒤섞이어 청탁이 가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른 것을 옳다고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여 거의 흑백이 자리를 뒤바꾸는 판이니, 진실로 전하께서 환하게 보고 분명히 아셨더라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성상의 총명이 극진하지 못한 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 오늘날의 조정은 대단히 바르지 못합니다. 당파를 짓는 풍조가 오늘날보다 심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 화가 필시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니, 한탄스러움을 어찌 금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러한 풍조를 타파하시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 요체를 얻지 못하신 듯합니다. 성상의 뜻은 신하들이 편당을 짓는 것을 미워하면서도 그보다 앞서 한쪽으로 치우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추측이 혹 실정을 벗어나고 결정하여 조처하시는 것이 혹 당연한 법칙을 잃으십니다. 굽은 것을 지나치게 바로잡다보면 그 해로움이 도리어 심한 법이니, 마음을 비워가지고 일을 조처하고 자신의 몸을 먼저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들을 인도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진퇴 취사하는 모든 일을 오로지 지공(至公)으로 하고 사심이 없으시다면, 뭇 신하들이 아무리 형편이 없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그 누가 마음을 씻고 생각을 고쳐먹어 우러러 성상의 뜻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아, 당론의 분열이 요즘에 와서 한층 더 심해 각자 표방하는 것이 날로 더욱 선명해짐으로써 상대방을 노려보는 기색이 아름답지 못하고 어지럽게 떠도는 말들이 그치지 않고 있는데, 그 원인은 대체로 송준길(宋浚吉) 등이 탁류를 배격하는 의논이 너무 날카롭고 신면(申冕) 등이 반박하는 마음이 너무 각박하였기 때문이니, 서로 잘못을 범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초에 논할 때는 공론이 이미 지나친 것으로 여겼고 실제 말을 한 자도 반드시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성상께서도 영원히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거두어서 쓰기를 평소 때와 다름없이 하셨으니, 스스로 처신할 도리로서는 진정 불평한 마음을 깨끗이 씻고 조심하고 삼가하여 과거의 허물을 만회함으로써 임금의 특별한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지 않아 자신에 대한 용서는 지나치게 후하고 남을 책망하는 것은 지나치게 각박하며 시기와 의심과 원한이 어느 때 끝이 날 기약이 없으니, 그 잘못을 따져보면 일을 논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한 정도만이 아닙니다.
신은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인자하신 덕이 없지 않으나 호령하고 행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항상 준엄하고 각박한 기상이 있으신데, 이 어찌 쇠잔한 시대를 당하여 습속이 나빠지고 기율이 무너졌으므로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는 정사를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신은 삼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군주는 만인의 위에 군림하여 천만 근의 무게가 있으므로 너그러움과 인자함이 모자랄까 염려스러운 것이지 위세와 무력이 세워지지 않을까 걱정될 것은 없으니, 전하께서 한번 옛날의 역사를 살펴보소서. 어찌 너그러움을 힘쓰다가 잘못되거나 위세를 앞세우다가 잘된 일이 있었습니까.
지난번 사관(史官)을 형추하고 재신(宰臣)을 나국하고 대신을 조율하라는 등의 명은 다 이상한 거조로서 성상의 덕에 누가 되고 기강을 세우는 데에 도움이 없으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 판부사 조익이 일생을 두고 충성과 신의로 남을 속이지 않은 것은 참으로 온 세상이 아는 일인데, 전하께서는 이 순수하고 진실하며 충직한 마음을 살피지 못하시고 억울한 하교로 너무 박하게 대하고 삭출(削黜)의 율로 너무 무겁게 죄를 주셨으며, 심광수(沈光洙)를 일과는 무관한 쓸데없는 말로 깊이 비난하고 배척하기까지 하셨으니077) , 너무 심하였습니다. 사서(四書)를 주해(註解)하는 일은 사실 후학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소견을 기록하여 일설을 갖추는 것은 옛사람도 그렇게 한 적이 있습니다. 혹시 그것을 임금께 올린 것을 가지고 경솔한 짓이라고 한다면 옳지만, 사문에 죄를 얻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또한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대신을 대할 때는 반드시 예로써 불러오고 의리로써 내보내었으니, 한번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여 모욕을 주고 멀리 내쫓고서 위아래가 서로 뜻이 맞아 전혀 되돌아 보지 않기를 이와 같이 한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신이 전하께 바라는 바는 진실로 성의로써 마음을 다하고 명철로써 사물을 다스리는 데에 있는데, 이 두 가지의 근본은 또 학문을 강론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장구와 글뜻의 말단에만 열심히 할 뿐, 도를 정밀하고 전일하게 닦으며 사심을 극복하고 예를 회복하는 공을 다하지 못하시니, 이 또한 한층 더 유의하셔야겠습니다.
현재의 일 가운데 말씀을 드릴 만한 일이 한이 없으니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여 사사로운 경로를 막고, 인재의 선발을 밝게 하여 벼슬길을 맑게 하고, 검소함을 숭상하여 더러운 풍속을 변화시키고, 불필요한 경비를 줄여 나라의 재정을 여유있게 하는 일 등은 다 신이 말씀드리고 싶은 것들이나 마음은 길고 문장력이 짧아 감히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신의 소장이 만들어진 뒤에 삼가 정태제(鄭泰齊)를 석방시키라는 명이 내린 것을 보았는데 성상께서 간하는 말을 흐르는 물 따르듯 하시는 도량은 더할 나위 없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신은 더 이상 이 일을 개진해서는 안 될 일이나 이미 소장을 정서하여 다시 고치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감히 그대로 올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읽어 보건대 전적으로 내 신상의 과실을 말하였으니, 감탄하는 마음이 실로 여느 경우보다 갑절이나 된다. 어찌 깊이 유념하지 않겠는가. 경은 더욱더 나를 깨우치고 인도하여 잘못을 바로잡아 달라. 경의 바르고 진실하여 아부하지 않는 충성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비록 나의 자질이 함께 나라를 다스리기는 부족하더라도 부디 버리지 말라.
그리고 소장에서 이른바 심광수에 관한 말은 박절한 글은 아닌 듯하나 아래에서 상의 뜻에 맞추었다는 설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너그럽고 인자한 것은 사실 군주가 우선으로 삼아야 할 일이긴 하나, 한 원제(漢元帝)처럼 우유부단한 것은 또한 경계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몇 가지 말은 무엇을 꼬집어 내어 흠을 잡자는 것이 아니라 가부를 상의하고 흉금을 서로 터보자는 뜻이니, 경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하고, 그 소를 비변사와 제사(諸司)에 내렸다. 비변사가 조사하여 아뢰기를,
"소장 속에 여러 가지 개진한 일은 다 채택해 시행할 만하며 유계(兪棨) 또한 양이(量移)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으나 유계에 대해서는 양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형조가 조사하여 아뢰기를,
"금천(衿川) 사람 이우빈(李友賓)은 당초에 자기 종 아내의 신원을 모른 채 양처(良妻)라는 그 종의 말만 믿고서 그 자손을 부리다가 내사(內司)가 수색하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그 종의 아내가 양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한 마디도 시비를 다투는 말이 없이 그저 전혀 내사의 여종인 줄을 몰랐다는 사유로 본관(本官)에 납초(納招)하였으니, 이는 자기의 노비라고 우겨대면서 문권(文券)을 위조하여 공가(公家)와 송사를 벌이는 경우와는 크게 달라서 당연히 죄가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도 그 당시 본조가 그 사실과 법을 참작하여 따져보지 않고 섣불리 율에 따라 정죄할 것을 청했으니, 참으로 억울한 일입니다.
지난번 우빈이 징을 쳐서 억울함을 호소한 것은 공감(功減)의 은전을 받고자 원한 것인데, 상께서는 ‘전가 사변(全家徙邊)의 무거운 율은 본디 공감하지 않는 것이다.’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마땅히 전가 사변할 죄라도 공감으로 도배(徒配)된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 억울한 사정을 알면서도 끝내 진달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법을 지켜 흔들리지 않는 뜻이 아니기 때문에 신들이 일찍이 이를 계품하려 하면서도 이제까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제 이 소로 인하여 비로소 그 곡절을 진달하니,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 우빈에게 사변하는 율을 특별히 감하여 상의 대공 무사(大公無私)하신 은덕을 보이신다면 구언(求言)을 채용하는 내실에 있어서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소장의 말뜻을 살펴보면 사실 그 뜻이 깊어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없으나, 대체로 내수사의 설치 운영은 건국 초기에서부터 이제까지 3백 년을 전해왔는데 그 사이에 명신 석보(名臣碩輔)와 홍유 정사(弘儒正士)가 많았고 명왕 성주(明王聖主) 또한 한두 분이 아니었으나 건백하여 혁파하지 않고 이제까지 존속되고 있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떠들썩하게 조사(朝士)들의 일개 혹붙이가 되어 이를 늘 염두에 두고 반드시 내사를 불의(不義)한 것으로 배척한 뒤에야 비로소 그를 명관(名官)이라 부르니, 어찌하여 오늘날의 조사는 옛날 사람보다 훌륭하고 옛사람은 오늘날 사람보다 못하단 말인가. 매우 이상한 일이다.
본조는 사천(私賤)으로서 내사에 투입된 자가 줄을 잇고 있다는 것만 말하는데, 공천으로서 부당하게 빼앗겨 사가(私家)에 부려지고 있는 자가 어찌 없겠는가. 이는 방자하여 기탄이 없는 말이다. 죄가 있어서 율에 해당되면 사형에 처하여 용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며 만일 죄가 없다면 심의하여 처리할 것을 청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비통하고 궁색한 말을 많이 해가며 이로써 내 마음을 감동시키려고 하니, 이는 부녀자의 고식적인 자비심에 가까운 것으로서 나는 매우 못마땅하다. 이우빈의 일은 그 정상이 극히 간교하여 아무런 증거가 없다. 스스로 변명하는 말은 결코 믿기 어려운데 본조가 애써 감률(減律)을 청하니, 매우 부당하다. 그러나 구언에 따른 소장이라서 채용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상례(常例)에 맞게 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는 것078) 도 안 될 것은 없다. 한 등급을 공감(功減)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85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구휼(救恤) / 사법-법제(法制)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재정-상공(上供) / 재정-공물(貢物) / 군사-군역(軍役) / 신분-천인(賤人)
- [註 069]양남(兩南) : 호남과 영남.
- [註 070]
적미(赤眉)와 황건(黃巾) : 적미는 서한(西漢) 말에 농민이 일으킨 반란군.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 왕조 때 번숭(樊崇)과 양음(楊音) 등의 여러 장수가 각각 수만 명의 군사를 일으켜 유분자(劉盆子)를 황제로 추대하였는데,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기 위해 눈썹을 모두 적색으로 발랐기 때문에 적미군이라 불렀음. 《후한서(後漢書)》 권11 유분자전(劉盆子傳) 황건은 동한 영제(靈帝) 때 중평(中平) 원년(184)에 태평도(太平道)의 수령(首領) 장각(張角) 등이 농민을 발동하여 일으킨 반란군인데, 그 수효가 수십 만에 이르고 모두 황건으로 머리를 쌌으므로 황건군, 또는 황건적이라 불렀음. 《후한서(後漢書)》 권8 영제기(靈帝紀).- [註 071]
양 혜왕(梁惠王)이 국사에 대해 마음을 다한 경우 : 양 혜왕이 백성을 위하여 있는 마음을 다 쓰지만 보다 실제적이며 근본적인 왕도 정치를 강구하지 않고 일시적이고 하찮은 혜택에 힘을 쓴 것을 말함. 《맹자(孟子)》 양혜왕상(梁惠王上).- [註 072]
압공위사(壓公爲私) : 공가(公家)의 것을 빼앗아 개인의 소유로 만듦.- [註 073]
공의(功議) : 국가에서 특별한 신분의 소유자에게 형벌을 경감해 주는 제도인 팔의(八議) 가운데 하나임. 《주례(周禮)》 추관 사구(秋官司寇)에 "여덟 가지 의형법(議刑法)을 국법에 붙여 형벌을 감면한다……." 하였다.- [註 074]
임토법(任土法) :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법.- [註 075]
절가(折價) : 토지의 한 결(結)에 대한 조세(租稅)의 액수.- [註 076]
시인(詩人)의 탄식 : 춘추 시대 진(秦)나라의 현인이 임금의 대우가 소홀해진 것을 탄식하여 읊은 시로 《시경(詩經)》 진풍 권여(秦風權輿)에 "아, 나에게 과거에는 식탁이 풍성하더니 이제는 끼니 때마다 남는 것이 없네. 슬프도다. 처음과는 달라졌구나." 하였다.- [註 077]
심광수(沈光洙)를 일과는 무관한 쓸데없는 말로 깊이 비난하고 배척하기까지 하셨으니 : 조익(趙翼)이 지난날 이식(李植)이 지어둔 윤방의 시장을 자기의 이름으로 올리면서 강빈(姜嬪)을 예우한 그 전의 표기를 고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효종의 노여움을 사 ‘임금의 심중을 떠보려고 했다.’는 질책과 아울러 삭탈 관직하고 문외 출송하라는 벌칙을 내리자, 심광수가 상소하여 임금의 처사가 너무 과하다는 것을 논하면서, 조익이 함부로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注)》를 고친 것으로 볼 때 오활하여 사리를 모르는 사람이니, 지나치게 탓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효종실록(孝宗實錄)》 권6 2년 신묘 5월 무자조.- [註 078]
차라리 상례(常例)에 맞게 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는 것 : 법으로 보아서는 곤란하지만 용서해 준다는 것임.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상규에 맞게 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려 하였다." 하였다.○大提學趙錫胤應旨上疏曰:
伏覩, 殿下以英明之資, 承艱大之業, 勵精求治, 夙夜孜孜, 已三年於此矣, 而國勢日益(扤捏)〔杌隉〕 , 人心日益渙散, 朝廷日益潰裂, 紀綱日益紊亂, 民生日益困悴, 天變日益層疊, 士氣日益消縮, 言路日益閉塞, 憂虞之形, 不一而足; 亂亡之禍, 非朝則夕, 此有識之士所以太息流涕, 而直欲痛哭者也。 殿下誠能反而求之, 其於聖德之闕遺、政令之差謬, 宜必翻然覺悟, 而愚臣慒淺之見, 亦有一二可言者矣。 臣竊念, 人君御極撫世之道, 固非一端, 惟誠與明, 最是喫緊工夫。 蓋不誠則凡所施措, 歸於文具, 而終無實效; 不明則好惡是非, 未免顚倒, 而人心不服, 此治亂興亡之所由分也。 今我殿下, 以盛德至行, 志切繼述, 何嘗不欲奮興事功, 振擧紀綱, 以臻至治, 而事與心左, 日趨於不可爲之地。 臣竊恐殿下爲政之道, 或未盡其誠實, 臨下之際, 恐未足於明睿也。 人君代天理人, 上不畏天, 下不恤民, 則天怒民怨, 國隨以亡。 今日之天怒, 亦已甚矣, 無前可愕之變, 式日斯生, 不知何等禍機, 伏於冥冥, 天之示警, 一至此歟? 況上年飢荒, 近古所無, 今又當夏亢旱。 竊聞, 兩南移秧之處, 已無可及, 近畿之地, 亦尙有得雨未洽之歎, 此歲農形, 已可知矣。 當此賦煩役重, 民窮財竭之日, 又遭凶歉之災, 則民散邦蹶, 不待智者而可知, 豈不澟然寒心? 此正殿下側身修行, 汲汲轉移之日, 而政令、擧措, 猶未見大異於平日, 臣不敢知下敎求言, 親幸禱雨, 亦可爲應天之實乎? 至於審理冤獄之擧, 必審察其罪名雖重, 而情理可恕者, 特加疏釋, 然後可謂伸雪冤枉, 而頃日議啓中, 兪棨、鄭泰齊等, 未蒙恩宥, 豈日月之明, 有所未燭耶? 兩臣罪名雖殊, 抱冤則一, 擧朝之人莫不爲之矜愍, 豈人人有私於兩臣哉? 公論之所同也。 玆兩臣者, 或有狂妄之罪, 而其心斷無他腸, 或陷不測之地, 而其實少無證左。 若以罪係重大, 不復舒究其情, 卒使含痛抱戚, 心事莫白, 生爲聖世之罪人, 死作絶域之冤鬼, 則不瑕有傷於欽恤之盛德哉? 倘蒙聖上特推好生之德, 雖未全釋, 且令稍徙內地, 則未必非感召和氣之一助也。 噫! 人或可欺, 天不容僞, 殿下固有其言矣。 所以存諸心者, 亦能精白而對越歟; 所以施諸事者, 亦能寅畏而奉若歟? 臣恐殿下之敬天, 或不能盡其實也。 今日之民怨, 亦已極矣, 困於徵斂而怨, 病於飢饉而怨, 守宰之侵漁而怨, 豪勢之攘奪而怨, 不塡溝壑, 卽投潢池, 赤眉、黃巾, 何嘗不起於失業之民? 臣恐國家之憂, 不在於邦域之外也。 爲人上而使斯民至此, 視聽自我之天, 安得不怒且警也? 殿下卽阼以來, 屢下蠲免之敎, 雖關進供之物, 亦無所惜, 殿下恤民之心, 非不至矣, 而小惠未遍, 實政未擧, 此何異梁惠之盡心哉? 近來斂民役民, 多出於不得自由, 此固無可柰何, 而自我容力之處, 尙復斂怨。 事關內司則置之, 事關宮戚則沮之, 言官所爭, 率爲空言, 可勝惜哉? 試言其一二, 則山澤之禁日甚, 民不得操斧入山、腰鎌適野, 小民無知, 能不怨詈? 都城咫尺, 其弊尙如此, 況於遐方, 其所侵奪, 不止於樵採而已乎? 此失人心之大者, 終不可禁而革之歟? 內司陳告, 雖曰舊例, 叛主投入, 其路益廣。 雖許接訟, 彼以鄕曲寒賤, 豈能盡暴其冤於威勢之下乎? 爲有司者, 亦豈能秉心公正, 一從曲直而明決乎? 由是士族之窮困者, 無一人保其舊業, 又繩以壓公爲賤之律, 或有功議, 亦未蒙減, 流徙邊遠, 飢寒顚踣, 叩心呼冤, 怨氣徹天, 豈不足以召災沴乎? 設令彼輩, 知其公賤而冒占, 旣推其人, 又徵其貢, 又加以重律, 已非國家寬大之政。 況誤認爲其奴之良妻, 生子生孫, 服役久遠, 則安知其內司之婢, 隱漏而爲良人乎? 又況有眞是渠輩之舊物, 而謀背弱主, 投入公家者, 滔滔皆是者乎? 臣近聞, 衿川縣人相繼遭此患, 以此知八路之中, 失所含冤者多。 縱未革陳告之規, 若不行徵貢壓公之法, 則有幸而免罪者矣, 無不幸而抱冤者矣。 若夫貢物防納、隣族被侵, 實爲第一痼弊, 不可不改者也。 大同豈不是良法美意, 而或言其斂民太重, 或憂其事多窒礙, 其間利害, 誠有未易知者。 若先將貢案, 査減其可減者, 略倣任土推移詳定, 一遵大同之折價, 則可無輕重不均之患, 聚合散出之物種, 則可省中間賂遺之費。 且於土産易得之物, 許以本色輸納, 而嚴禁其操縱點退, 則亦可免濫費重價之弊。 雖不得爲大變通, 猶有一分之益矣。 我國軍伍之不整頓久矣。 逃者、死者, 皆編隊伍, 故侵徵之害, 及於族隣, 其族其隣, 亦不能支, 終必無民而後已。 若先以物故應免者及在逃而年滿六十者, 付標軍案, 許免其役, 令各邑逐年漸充, 而定其額數, 毋得或慢, 姑停年例歲抄, 俾得專力於此事, 年雖未滿六十, 其逃旣久, 了無依據者, 亦許代定, 而除名元案, 則軍案不至虛踈, 隣族少免侵害, 庶無驅民四散之患矣。 噫! 民雖至愚, 其心則神, 不可束之以嚴威, 不可感之以空言。 惟在上之人, 以實心行實政, 日夜孜孜, 惟以約己裕人, 損上益下爲心, 不規規於末務, 不屑屑於文具, 必期惠澤下究, 積弊盡祛, 然後方可謂愛民以實。 殿下果已行之, 豈有四域之內, 愁怨日興? 臣恐殿下之愛民, 或未能盡其實也。 殿下嗣服之初, 禮遇耆德, 徵招草野, 倚毗密勿, 酬酢如響, 人皆謂殿下好賢之誠, 卓冠千古。 曾未幾何, 誠意衰薄, 至于今日, 已置相忘之域, 不啻詩人所歎, 不承權輿而已。 臣未知山野之士, 論議過激, 不合時宜, 無足與共事歟, 抑直諒之言, 有拂於聖意, 初欲隱忍而假借, 一棄而不復思之歟? 何其汲汲於前, 而邁邁於後歟? 頃日領敦寧府事金尙憲, 舁疾來哭於國祥, 陳章告退, 白首老臣, 難卜重入脩門, 而欲見之意, 只及於批辭, 更無引對之命。 及其辭疏之上, 亦無眷戀慰諭之旨, 殿下之待元老大臣, 何其忽略如是? 前承旨愼天翊, 特蒙超拜喉舌, 足知聖明嘉奬恬退之節。 第官爵, 非所以待賢, 必接之以禮, 待之以誠, 乃可謂待賢之道, 而只擢其官, 尙不一賜召對, 何殿下待天翊之薄也? 以此數事言之, 殿下之好賢, 雖謂之無其實可也。 殿下嗣服之初, 從諫之美, 幾乎轉圜, 人人吐氣, 皆思自盡, 厥後漸不如初, 以至近日, 拒諫之病已痼, 少有觸忤, 輒加摧折, 嚴辭峻批, 至有臣子所不忍聞者。 以此, 直氣銷沮, 臺閣索然, 人之避言地如避荊棘。 夫臺臣之言, 未必一一當理, 亦豈盡無可採者? 而殿下之輕視而折辱之如此, 夫豈置耳目自助之意乎? 今乃不信臺諫, 反欲廣求直言, 有識皆已知殿下聲色之訑訑, 又孰肯出位而進無益之言? 殿下之從諫, 雖謂之無其實可也。 殿下聰明英毅之資, 出於天縱, 而臣敢謂明、睿不足於臨下者, 抑有說焉。 所謂明者, 非謂聰察以爲明、億逆以爲智也。 惟以大公至正之心, 照臨於上, 使在我是非之明, 常如鑑水之虛, 則人之邪正、言之是非, 皆自瞭然而呈露矣。 竊見, 殿下聽言處事之際, 或不明加辨別, 甲自以爲是, 則右甲, 乙亦自以爲是, 則亦右乙, 混然不分涇渭。 以非爲是, 以是爲非, 幾乎黑白易位, 誠使殿下洞見而灼知, 則必不如是。 竊恐离明之猶有所未至也。 嗚呼! 今日朝廷, 不正甚矣。 黨比之習, 未有甚於今日, 其禍必至於亡人之國, 可勝歎哉? 殿下非不欲打破此習, 而或恐不得其要也。 聖意旣惡群下之爲黨, 先有偏係之心, 故揣度或出實情之外, 裁處或失當然之則, 矯枉過直, 其害反甚, 莫若虛心而處之, 正己而率之。 凡所進退取舍, 一以至公而無私焉, 則群臣雖甚無狀, 孰不洗心易慮, 仰體聖意乎? 嗚呼! 黨論分裂, 近又益甚, 標榜更新, 睢盱之氣色不美, 噂之流言不止, 其祟蓋由於宋浚吉等激濁之論太銳, 申冕等修却之心太深, 可謂胥失之矣。 雖然, 當初所論, 公議旣以爲過, 言者未必自以爲是, 聖上亦謂不可終棄, 收敍進用, 無異平日, 其所自處之道, 正宜澡瀹畏愼, 以補前愆, 以答殊私。 今乃不然, 恕己太厚, 責人太苛, 猜疑怨恨, 無有了期, 其失不但論事之過當而已。 臣竊觀, 殿下非無仁慈之德, 而發於號令、事爲之間者, 常有嚴迫之氣象, 豈不以時當衰季, 習尙委靡, 紀律頹廢, 矯弊之政不得不然也, 然臣竊以爲不然也。 人君尊居萬人之上, 有千勻之重, 患其寬仁之不足, 不患其威武之不立。 殿下試觀古昔, 曷嘗有務寬而失, 尙威而得者哉? 頃日史官刑推、宰臣拿鞫、大臣照律之命, 皆是異常之擧, 有累於聖德, 而無益於立紀綱, 可不愼哉? 前判府事趙翼之一生, 忠信不欺, 實擧世之所知也。 殿下不諒此純實忠樸之心, 而情外之敎, 待之太薄, 削黜之律, 罪之太重。 沈光洙至以事外剩語, 深加譏斥, 吁亦甚矣! 註解四書, 固非後學所可容易下手, 而記其所見, 以備一說, 古人亦嘗爲之。 若以其進獻爲踈率則可, 乃謂之得罪斯文, 不亦異乎? 古之待大臣, 必進之以禮, 退之以義, 未聞一有失誤, 而折辱之、屛黜之, 上倡下和, 無復顧藉如此者也。 臣之所望於殿下者, 實在於誠以盡心, 明以御物, 而二者之本, 又在於講學。 若或徒勤於章句、文義之末, 而猶未盡精一克復之功, 則亦宜更加留意焉。 當今之事, 可言者何限, 嚴宮禁以杜私逕, 明銓選以淸仕路, 崇儉素以變染俗, 省浮冗以裕國用, 皆臣所欲言者, 而意長辭短, 不敢覶縷。 且臣疏成之後, 伏見放釋鄭泰齊之命, 聖上從諫如流之量, 可謂至矣。 臣不當復陳此事, 而旣已繕寫, 塗改不便, 敢此仍爲投進。
答曰: "覽卿疏章, 專言予身上過失, 感歎之懷, 實倍常品, 可不體念哉? 卿宜益加啓沃, 匡救闕失。 直諒不阿之忠, 予豈不知哉? 雖不足與有爲, 幸勿棄之。 且疏中所謂沈光洙之言, 似非深文, 而下和之說, 無乃過乎? 寬仁固宜人主之所尙, 而漢 元之寬柔, 亦不當戒乎? 玆數語, 非欲摘出爲疵, 相議可否, 虛襟不阻之意也。 卿勿爲怪。" 仍下其疏于備邊司及諸司。 備邊司覈啓以爲: "疏中許多所陳, 皆可採施, 而兪棨亦當量移。" 從之, 兪棨則不許量移。 刑曹覈啓曰: "衿川人李友賓, 初不知奴妻之根脚, 只信其奴良妻之說, 使喚其子孫, 及聞內司有推捉之擧, 始知其奴妻之非良, 而不曾發一言爭辨, 只以曾不知爲內婢之由, 納招於本官, 此與强稱其奴婢, 而僞造文券, 與公家爭訟者, 大相不同, 宜若無罪。 然而其時本曹不參究其情法, 遽請依律定罪, 實涉冤枉。 頃日友賓之擊錚訴冤者, 冀蒙功減之典, 而乃以全家重律, 本不用功減爲敎。 在前罪當全家, 功減徒配者, 亦非一二。 知其冤狀, 終不陳達, 甚非執法不撓之意, 故臣等嘗欲啓稟, 而趑趄至今矣。 今因此疏, 始陳曲折, 此則臣等之罪也。 特減友賓徙邊之律, 以示大公無私之德, 則其於採用求言之實, 爲如何哉?" 答曰: "原疏辭意, 實非偶然, 不可不惕念, 而大槪內需司之設, 始自國初, 流來三百年于玆。 其間名臣碩輔、弘儒正士, 非不多矣, 明王、聖主, 亦非一二, 而曾不建白革罷, 尙爾仍存, 夫豈偶然? 而到今囂囂作一朝士之贅疣, 念念不忘, 必斥內司以不義, 然後方可謂之名官, 何其今士之賢於古, 而古人之不及於今也? 殊可怪也。 本曹只稱私賤之投入內司者相續, 公賤之壓勒而使喚於私家者, 豈無其人耶? 此言涉於無忌憚也。 有罪而當律, 則雖置大辟不赦, 可也, 如非其罪, 則請以審處可也。 多費悲辭苦語, 欲以此感動予心, 此近於婦人姑息之仁, 予甚不取也。 李友賓事, 其爲情狀, 極其奸巧, 無左驗。 自明之言, 決難取信, 而本曹之力請減律, 殊極不當。 然求言之疏, 不可不採用, 寧失不經, 固無傷也。 功減一等。"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85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구휼(救恤) / 사법-법제(法制)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재정-상공(上供) / 재정-공물(貢物) / 군사-군역(軍役) / 신분-천인(賤人)
- [註 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