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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1권, 효종 즉위년 5월 23일 신사 3번째기사 1649년 청 순치(順治) 6년

부수찬 유계가 묘호에 대한 재고를 간하였으나 허락치 않다

부수찬 유계(兪棨)가 상소하기를,

"대행 대왕께서는 공렬(功烈)이 하늘에까지 알려지고 지극하신 인(仁)이 천하에 덮이시어 온 백성이 우러러 받든 지가 거의 30년인데, 뜻밖에 승하하시니 궁벽한 시골에 사는 백성들까지 달려와 비통히 울부짖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신민으로서 망극한 성은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성덕(聖德)을 찬양하여 만세에 전하는 것뿐이니, 묘호 휘칭(廟號徽稱)을 의논할 때에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함이 있게 하여 천하 후세에 뒷말이 있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지난날 묘당과 관각의 신하들이 거듭 의논을 올려 아름다운 호(號)를 정하였는데 그 글자가 포함하고 있는 뜻이 광대하니 지극하다고 할 만하고, 대행 대왕의 성대하신 공업에도 거의 부합하니 신민의 기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소견에는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인이 시법을 만든 것은 추모하는 효자 충신의 지극한 정성을 다하게 한 것이니, 혹시라도 정문(情文) 사이에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거나 구애되는 바가 있으면 선왕의 뜻을 받들어 선양(宣揚)하고 선왕의 뜻을 추모하여 효도를 지극히 하는 뜻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종에 이미 인묘(仁廟)가 계시는데 오늘날 묘호에 다시 인(仁)자를 쓴다면, 비록 전성(前聖)과 후성이 도가 같고 헤아림이 같다고는 하지만 어찌 혐의를 분별하는 뜻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시법이 생긴 이후로 주(周)·한(漢)·당(唐)·송(宋) 등 거의 수천 년이 지났지만 묘호가 중첩되어 나오는 예는 없었습니다. 만약 조손(祖孫)이 덕이 같을 경우 아울러 같은 글자를 사용하여도 의리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주(周)나라 이하 역대 왕조에 같은 종묘 안에 있는 현군 성군 중에 어찌하여 전왕과 후왕의 시호가 같은 분이 하나도 없겠습니까. 오직 명나라 순제(淳帝)소황(昭皇)013) 만이 한 글자를 같이 사용하였는데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당시 삼양(三楊)014) 의 무리가 의논한 바의 전례(典禮)가 실로 후인들의 비난을 많이 받았으니 이 또한 이들이 발의(發議)한 것이 아니라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상께서는 번거롭게 되풀이하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기지 마시고 다시 조정의 의논을 물어 사리에 맞게 처리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어제 응교 심대부가 상소하여 조와 종의 호칭을 의논하였는데 성상의 비답이 매우 엄하시어 논의를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대부는 근밀(近密)한 곳에 있는 사람이니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는 것이 진실로 그의 직분입니다. 하물며 그가 논한 바가 전거(典據)가 없지 않은데이겠습니까. 그 설명은 이미 대부의 원소(原疏)에 갖추어져 있으니 신이 감히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말한 ‘종이라 해서 조보다 낮은 것이 아니고 조라 해서 종보다 높은 것이 아니다.’는 것은 대부의 말이 아니라 이미 옛사람 중에 그렇게 말한 분이 있었습니다. 예는 중도를 얻는 것이 귀함이 되고 논의는 강명(講明)을 싫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이처럼 엄하게 비답을 내리신 것은 옳은 일이 아닌 듯합니다. 즉위한 초기라서 중외의 사람들이 주목(注目)하고 있는데 이러한 왕의 말씀이 한번 나왔으니 실망스러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진실로 성상의 뜻이 어떠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성상께서는 막중 막대한 예를 사람마다 경솔히 의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고 또 성상께서도 말씀하기 어려운 바가 있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일은 대소를 막론하고 논의해야 될 것이 있으면 뭇신하들이 소견에 따라 숨기거나 꺼림없이 할 말을 다하는 것이 바로 성세(盛世)의 일입니다. 가령 이보다 큰 논의가 있을 경우 신하들이 모두 관망만 하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어찌 조정의 복이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공의(公議)가 이미 정해졌으니 어지럽히지 말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67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궁관(宮官)

  • [註 013]
    순제(淳帝)와 소황(昭皇) : 순제는 명 태조의 아버지로서 황제에 추존(追尊)된 인조 순황제(仁祖淳皇帝)이고, 소황(昭皇)은 명나라 제 4대 황제인 인종 효소 황제(仁宗孝昭皇帝)이다.
  • [註 014]
    삼양(三楊) : 명나라 성조(聖祖)·인종(仁宗)·선종(宣宗)·영종(英宗) 등 4조(朝)를 섬긴 양사기(楊士奇)·양영(楊榮)·양부(楊溥)이다.

○副修撰兪棨上疏曰:

大行大王功烈格天, 至仁覆下, 億兆仰戴, 垂三十禩, 不意仙馭上賓, 弓劍莫攀, 窮山僻海, 莫不奔走而悲號。 今日臣民之所當仰報罔極者, 惟是褒揚聖德, 垂示萬世者而已, 則廟號徽稱擬議之際, 安敢有一毫之未盡, 以貽天下後世之竊議乎? 頃日廟堂、館閣之臣, 再三獻議, 克定美號, 其字義之包涵廣大, 可謂至矣。 其於大行大王鴻功盛烈, 庶幾允叶, 臣民之喜, 曷有其極哉? 然臣區區愚見, 不能無小疑焉。 何則, 夫聖人制爲謚法, 以盡孝子忠臣追慕之至情, 苟或於情文之間, 微有嫌礙, 則恐非奉揚先志, 聿追來孝之意也。 我祖宗旣有仁廟, 今日廟號, 復用仁字, 雖云前聖、後聖, 道同揆一, 而豈無別嫌之義也? 自有謚法, 歷幾數千年, 未有廟號之疊出者。 若使祖孫同德, 竝用一字, 不害義理, 則自以下, 一廟之內, 賢聖之君, 何故無前後同謚者乎? 惟皇朝淳帝昭皇, 同用一字, 未知有何經據, 而當時如三輩所議典禮, 實多後來之疵議, 又安知不爲此等而發也? 伏願聖明, 勿以煩複爲嫌, 更詢廷議, 以歸於至當, 不勝幸甚。 昨日應敎沈大孚投進封章, 以議祖宗之稱, 而聖批殊嚴, 不許容議。 大孚身在近密, 有懷必達, 固其職也。 況其所論, 實非無據, 其說已盡於原疏, 臣不敢更有所贅。 其所謂宗非貶祖, 祖非加宗等語, 非大孚之言, 古人已有言之者。 禮貴得中, 論不厭講, 竊恐聖批, 不當如是峻斥也。 新化之初, 中外拭目, 王言一出, 不無缺望。 臣固知聖意之所在。 以爲莫重莫大之禮, 不可人人輕議, 而亦有聖明之所難言者, 故不得不爾也。 雖然, 國家之事, 無大無小, 苟有容議之地, 群臣隨其所見, 盡言不諱者, 寔盛世事也。 設有論議之大於此者, 而臣下皆觀望不言, 則是豈朝廷之福也?

答曰: "公議已定, 勿爲紛紜也。"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67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궁관(宮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