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영의정 최명길, 영중추부사 이경여, 전 판서 김상헌이 심양에서 돌아오다
전 영의정 최명길(崔鳴吉),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 전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심양에서 돌아왔다.
이경여는 정축년 이후로 소장(疏章)이나 부서(簿書) 사이에 숭덕(崇德)014) 이란 연호를 전혀 쓰지 않았는데, 마침내 역적 이계(李烓)에 의해 그 사실이 청나라에 밀고되어 임오년 겨울에 박씨(博氏) 두 사람이 정명수와 함께 와서 이경여를 심양으로 가자고 다그쳤다. 그러자 이경여는 이를 두려워하여 마침내 이조에 직첩을 고쳐 써내고 숭덕이란 연호를 추서(追書)하여 자신을 변명하는 뒷받침으로 삼았고, 정명수에게 뇌물을 주어 목숨을 구하는 계책으로 삼았으며, 심지어는 음식을 장만하여 그들을 대접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이경여 혼자서 한 것은 아니었으나 명망이 크게 훼손되었다. 본국에 돌아와서는 곧 재상에 제수되었고 얼마 후에 사은사로 다시 심양에 들어갔는데, 청나라 사람에 의해 ‘죄가 완전히 용서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재상이 되었다.’는 이유로 드디어 그곳에 억류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세자가 그를 위해 주선해 주어 돌아오게 되었다.
최명길은 남한 산성의 난을 당하여 끝까지 화의를 주장해서 마침내 성(城)을 나가서 항복하자는 의논을 결정하였고, 간사한 무리들을 이끌어 등용하여 김상헌을 무함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사류에게 용납되지 못함을 알고는 후일의 화를 면하기 위하여 사명을 받들고 기성(箕城)015) 을 지날 때에 제문을 지어가지고 기자(箕子)의 사당에 제사지내서 스스로 변명하는 뜻을 폈다.
그는 또 임경업과 함께 비밀리 명나라와 통하기를 꾀하여 중[僧]을 얻어서 해로를 통해 자문(咨文)을 싸가지고 왕래하도록 하였는데, 그 자문은 최명길과 이명한이 찬정하였고, 구굉(具宏)·신경진·강석기(姜碩期) 등의 이름도 거기에 모두 써서 보냈었다.
이에 앞서 청나라 사람들이 늘 한선(漢船)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 우리와 서로 통하고 있는가를 의심해 오다가 마침 명나라 병부 상서 홍승주(洪承疇)가 심양에 투항하여 우리 나라의 일을 자세히 말해 줌으로써 우리가 명나라와 밀통하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으나 청나라 사람들은 오히려 그 사실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 후 이계가 한선과 잠상(潛商)016) 한 일이 발각되자, 용골대가 우리 세자를 데리고 봉황성으로 나가 주둔하면서 이계를 잡아다 놓고 잠상한 상황을 추문하니, 이계가 그 중을 보내 자문을 전달한 일을 자세히 고발하고 이어 작은 종이에 글을 써 주었는데, 당시 청류(淸流)들의 이름이 모두 그 가운데 들어 있었고, 상을 범한 말에 이르러서는 차마 듣지 못할 말도 있었다. 최명길은 이때 막 영상이 된 몸으로 역시 고발을 당하여 잡혀갔는데, 용골대 등이 엄격히 신문하면서 우리 나라 사람에게는 그 내막을 들을 수 없게 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최명길이 신경진·강석기 등을 끌어들여 인물의 중요도를 빙자해서 화를 나누어 받으려는 계책으로 삼았다.’고 하나, 그간의 허실을 들어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해 겨울에 박씨(博氏) 및 정명수가 와서 장차 신익성(申翊聖)·이명한(李明漢)·허계(許啓)·이경여(李敬輿)·신익전(申翊全)을 잡아가려고 하면서 상의 앞에서 말하기를 ‘이 다섯 신하의 이름은 이계의 입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고 최 정승도 끌어대었다.’고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비로소 최명길이 끌어대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여겼다.
김상헌은 의주(義州)에 억류된 지 2년 만에 이계의 고발을 받아 재차 구류됨으로써 전후 6 년 동안에 걸쳐 위험과 곤욕을 치뤘으나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돌아오게 되었는데, 수염과 머리털이 평소보다 더 젊어보였다. 김상헌은 도성에 들어오지 않고 상소하기를,
"신이 오랫동안 이역(異域)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고생한 것이 이후 헤아릴 수도 없었는데, 삼가 천지 부모께서 염려하여 돌봐주시는 사랑을 받아, 한 전대 곡식과 죽 한 그릇도 모두가 성상께서 내려주신 은혜를 입음으로써 실낱 같은 생명이 오늘날까지 연장되어 고국에 돌아와서 다시 대궐문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마른 버들에 꽃이 피고 싹이 난 것이나 썩은 뼈에 푸짐하게 살이 오른 것쯤은 성은에 비유하잘 것도 못 됩니다. 그래서 이 감격스러운 충정을 다만 스스로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었다가 저승에 가서 결초 보은하려는 것이 바로 신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책임을 회피하고 태만히 한 죄가 쌓여서 점점 더 깊은 죄의 구덩이에 빠져들어갔으므로 가슴을 쓰다듬으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아직도 깨끗이 씻지 못하여 감히 무릅쓰고 대궐에 나아가서 삼가 큰 은혜에 사례드리지 못합니다. 게다가 거듭 질병에 걸려 기동하는 것도 거의 폐하는 형편이므로 머리를 들어 대궐을 바라만 볼 뿐 몸을 바칠 방도가 없습니다. 신의 나이 벌써 80이 다 되었으니, 남은 세월을 헤아려보면 아침에 죽을지 저녁에 죽을지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한번 고향 집에 들어오니 영원히 천일(天日)017) 과 멀어져버렸고, 한 자쯤 되는 상소장을 봉해 올리니 눈물만 줄줄 흐릅니다."
하였다. 이 상소가 들어갔으나 답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상의 뜻은 ‘김상헌이 들어와서 사례하지 않는 것은 조정에 나오기를 탐탁잖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청나라 경중명(耿仲明)이 우리 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김상헌의 안부를 묻고는 칭찬하기를 ‘동국에는 김 상서(金尙書)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또 명나라 예부 상서 이사성(李思誠)은 이자성(李自成)의 난리에 절개를 굽혀 각형(脚刑)을 면치 못했는데, 그가 우리 나라 역관을 만나서 묻기를 ‘김 상서는 별고 없는가? 나는 지금까지 구차하게 살아 남아 있다.’ 하고, 자기의 다리를 어루만지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김상헌이 최명길과 함께 심양의 관소(館所)에 있을 적에 최명길이 김상헌에게 시를 지어 보이며 화운(和韻)하기를 청하자, 김상헌이 다음과 같이 차운(次韻)하여 그에게 보였다.
성패는 천운에 달린 것이니
반드시 의리에 부합하길 추구해야지.
비록 그러나 조석으로 반성해보면
어찌 벼슬에 급급할 수 있으랴.
권도란 현인도 혹 잘못 쓸 수 있지만
상도는 응당 보통 사람도 어김이 없네.
명예 이끗 좇는 이에게 말하노니
창졸간에도 신중히 기미를 헤아리소.
김상헌이 나올 때에 한인(漢人) 맹영광(孟英光)이란 자가 시를 지어달라고 청하자, 그는 즉시 편면(便面)018) 에 다음과 같이 써주었다.
육년 동안 남관019) 쓰고 있다가 이제야 돌아오니
일편단심은 변함 없건만 귀밑머리가 희어졌네.
다른 해 그대가 강남 가는 날에
하량020) 에서 울며 작별한 오늘을 기억할지.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208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14]숭덕(崇德) : 청 태종의 연호.
- [註 015]
기성(箕城) : 평양.- [註 016]
잠상(潛商) :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법령으로 금지된 물품을 몰래 매매하는 장사를 말한다.- [註 017]
천일(天日) : 태양, 즉 임금을 뜻함.- [註 018]
편면(便面) : 옛날 남에게 자기 얼굴을 보이기 싫을 때 얼굴을 가리는 데 쓰던 기구. 즉 부채 따위를 가리킨다.- [註 019]
남관 : 남방인 즉 초(楚)나라의 관을 말하는데, 초나라 사람 종의(鍾儀)가 남관을 쓰고 진(晋)나라에 수감된 고사에 의하여 타국에 포로가 된 것을 뜻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성공(成公) 9년.- [註 020]
하량 : 타국에서 송별(送別)하는 것을 뜻함. 한 소제(漢昭帝) 때에 흉노(匈奴)와 화친을 함으로써, 흉노에게 사신갔다가 억류되었던 소무(蘇武)가 한나라로 돌아오게 되자, 소무의 친구로서 흉노에게 투항한 이릉(李陵)이 시를 지어 소무를 송별하였는데, 그 시에 "손 잡고 하수의 다리 가에 이르노니, 이 나그네는 저물게 어디로 갈꼬.[携手上河梁 游子暮何之]" 한 데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 권54 이릉전(李陵傳).○前領議政崔鳴吉、領中樞府事李敬輿、前判書金尙憲還自瀋陽。 敬輿丁丑以後, 疏章、簿書之間, 絶不書崇德年號, 遂爲烓賊所告, 壬午冬, 博氏二人與鄭命壽來逼之以行。 敬輿懼, 遂改出職牒於吏曹, 追書崇德, 以爲自明之地; 賂遺鄭命壽, 以爲求生之計, 至於設饌供饋, 此雖非敬輿獨自作俑, 而名望大損。 及還, 卽拜爲相, 俄以謝恩使入瀋陽, 淸人以罪未全釋, 而遽以爲相, 遂留之一年。 至是, 賴世子爲之周旋, 乃得歸。 鳴吉當南漢之難, 終始主和, 遂決出城之議, 引進奸邪之徒, 誣陷金尙憲。 知其不見容於士類, 圖免他日之禍, 奉使過箕城時, 操文祭箕子廟, 以伸自明之意。 且與林慶業密謀通中國, 求得僧人, 由海路齎咨往來。 咨文則鳴吉與李明漢撰定, 而具宏、申景禛、姜碩期等, 皆書其名以遣之。 先是, 淸人每以漢船出入, 疑我之相通, 適中朝兵部尙書洪承疇, 降于瀋中, 備言我國事, 而淸人猶未發。 及李烓與漢舡潛商事覺, 龍骨大挾我世子, 出駐鳳凰城, 縛致李烓, 推問潛商之狀, 則烓盡告遣僧移咨之事, 仍書給小紙, 一代淸流之名, 皆在其中, 至於犯上之言, 有不忍聞者。 鳴吉方爲領相, 亦被告而去。 龍骨大等嚴加鉤問, 使我國之人, 不得聞焉。 或云鳴吉援引申景禛、姜碩期等, 以爲藉重分禍之計, 而其間虛實, 人莫得知。 及是年冬, 博氏及鄭命壽來, 將拿申翊聖、李明漢、許啓、李敬輿、申翊全而去, 言于上前曰: "五臣之名, 非但出於烓口, 又爲崔相所援引。" 云, 人始以鳴吉之援引爲無疑。 尙憲留灣上二年, 爲李烓所告, 再被拘囚, 前後六年, 危辱備至, 而志不少撓。 至是乃得還, 髭髮勝於平昔。 尙憲不入都中, 上疏曰:
臣久蟄異域, 艱苦萬狀, 伏蒙天地父母軫恤之仁, 一橐一饘, 罔非雨露, 縷命絲息, 延至今日, 獲返故國, 復瞻脩門, 枯楊華荑, 朽骨豐肌, 未足以喩聖恩也。 感激之衷, 只自銘鏤心肝, 九原之下, 結草圖報, 是臣至願也。 第念罪積逋慢, 轉入坎窰, 撫心怵惕, 尙未湔白, 不敢冒進闕庭, 祗謝鴻渥。 加以重嬰疾病, 幾廢運動, 矯望楓宸, 末由致身。 犬馬之齒, 已迫八十, 測景視晷, 朝夕懍懍。 一投田廬, 永隔天日, 尺疏緘辭, 但有涕淚。
疏入不報, 蓋上意, 尙憲之不入謝, 有不屑就之心故也。 其後耿仲明見我國人, 必問起居, 每稱之曰: "東國只有金尙書一人。" 中朝禮部尙書李思誠失節於李志成之亂, 而未免脚刑, 見我國譯人問曰: "金尙書無恙否? 吾至今偸生矣。" 仍撫其脚而垂泣云。 尙憲與鳴吉同在瀋館, 鳴吉以詩求和, 尙憲次以示之曰:
成敗關天運, 須看義與歸。 雖然反夙暮, 詎可倒裳衣? 權或賢猶誤, 經應衆莫違。 寄言名利子, 造次愼衡機。
出來時漢人 孟英光者乞詩, 卽題其便面曰:
六載南冠今始歸, 丹心不改鬢如絲。 他年爾到江南日, 倘記河梁泣別時。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208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