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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40권, 인조 18년 6월 21일 신미 1번째기사 1640년 명 숭정(崇禎) 13년

파당·금궁·치병에 관한 행 호군 이경의의 상소

행 호군 이경의(李景義)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오늘날의 일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은 비록 용서할 만해도 자취는 가리기 어렵습니다. 밝고 밝은 하늘에게 어찌 용서할 만한 정상을 살펴 가리기 어려운 자취를 용서해 주기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도 항상 이 점에 대해 두렵게 여기면서 애통해 하여 일각도 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전하의 그런 마음을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참으로 여러 신하들이 충성스럽지 못한 죄입니다.

재상이 된 자들은 안배하여 성취하는 방도를 잃었고 장수가 된 자들은 침략을 방어하는 계책이 없습니다. 상하는 모두 태평스럽게 그럭저럭 날짜만 보내고 있으며, 사당(私黨) 세우기를 힘써 서로 파당을 만들고 있으며, 사사로움을 행하고 공도(公道)를 멸시하여 탐욕스러운 풍조가 극성스럽습니다.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무리들이 벼슬에 나올 준비를 하고 점잖은 선비들은 손을 빼고 물러나고 있습니다. 당의(黨議)를 좋아하는 자들은 이쪽이나 저쪽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는 무리들이어서 세력과 이익이 있는 곳으로 이리저리 날뛰며 한 사람도 용감하게 앞장 서서 국사를 담당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처럼 나라가 망할 지경이 되었는데 무슨 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서 이처럼 방자하단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깊은 궁궐 속에 계시니 어떻게 외정(外廷)의 상황을 아실 수 있겠습니까. 말이 이에 이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을 치고 통곡하게 됩니다. 전하께서도 항상 하늘을 본받아 좋아하고 싫어함과 쓰고 버림을 한결같이 하늘의 뜻에 따르며 조금도 속이거나 거절하는 사사로움이 없는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정축년014) 이후로 난을 당하였을 당시의 어려움을 잊고 계십니다. 원유(苑囿)와 누각에서 유람하기를 그치지 않고 기예(技藝)와 화석(花石)이 줄지어 바쳐지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전하께서 부득이해서 하시는 것입니까. 상방(尙方)의 신하들은 다투어 사치스럽게 하기를 힘써 미쁨을 받는 바탕으로 삼고 있으며, 내수사의 관원은 이익을 노리고 허물을 저질러 영합하려는 계책을 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을 전하께서 무슨 취할 것이 있다고 죄를 용서하고 그들을 총애한단 말입니까. 위(魏)나라 태화(太和) 2년에 크게 가뭄이 들었는데, 선유(先儒)들은 궁실을 높고 크게 하고 의복과 음식을 사치스럽게 한 응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일이 불행히도 여기에 가까우니, 신은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궁궐 안의 일에 대해서는 금법(禁法)이 있어서 외부 사람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닌데, 길가나 민간에서 여기에 대해 말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짓은 일이 없는 평상시의 어리석고 용렬한 임금도 하지 않던 일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오늘날에 어떻게 차마 하신단 말입니까. 신은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의심하였다가 끝내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는 놀라워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곧바로 전폐(殿陛) 아래에 나아가 머리를 부수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부득이한 것을 마음속으로 두렵게 여기시면서 더욱더 수성(修省)하는 방도를 다하소서. 척연히 근본을 돌이키어 개과 천선하며, 군자를 등용시키고 소인을 내치며, 사치를 제거하고 검약을 숭상하며, 좋아하고 미워함을 한결같이 하늘의 뜻에 따라 하소서. 그리고 죄가 있는 자는 용서하지 말고 죄가 없는 자는 깨끗하게 석방하며, 원유(園囿)와 놀이하는 도구를 혁파하고 상방궁과 내수사에서 보관한 것을 없애소서. 전하께서는 편전(便殿)에 앉아 계시면서 군신을 불러보되 스스로를 책하고 스스로를 면려하여 가언(嘉言)이 모두 진달되게 하고 모든 계책이 반드시 거행되게 하소서. 그러면 하늘과 사람은 한가지 이치여서 곧바로 감응이 있을 것으로, 어찌 비가 쏟아지는 감응만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신에게 병이 있어서 조섭하는 중에 병을 조리하는 방도를 조금 터득했습니다. 옛날에 송나라 유신(儒臣)인 여조겸(呂祖謙)이 처음에 양병술(養病術)로 인하여 곧바로 양심술(養心術)을 깨달았는데, 오래도록 함양(涵養)하여 크게 효험을 보아서 병을 치료하였을 뿐만 아니라 끝내는 심학(心學)의 공을 이루었습니다. 귀천은 비록 다르나 효험을 얻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차분히 조섭하시는 가운데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여, 힘을 써 조존(操存)하고 마음을 흡족하게 해 양병하여 양쪽 다 묘리를 얻는다면, 오늘날 옥후가 편치 않은 것이 뒷날 잘못된 정사를 바로잡는 바탕이 될지 어찌 알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때때로 와내(臥內)에서 유신들을 인견하시어 인심의 사정과 시정(時政)의 득실 및 재변을 불러온 까닭과 하늘에 응답하는 방도에 대해서 토론하여 해결책을 강구하소서. 그리고 환관과 궁첩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소서. 그러면 오늘날의 끊임없는 재변이 우리 동방 백성들의 복이 되고 종사의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40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92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辛未/行護軍李景義上疏, 略曰:

今日之事, 出於不得已, 而情雖可恕, 跡則難掩。 明明之天, 安敢望察其可恕之情, 而恕其難掩之跡乎? 殿下亦嘗惕念於此, 而傷痛於中, 不能一刻安于心矣。 殿下是心, 孰不知之? 實諸臣不忠之罪也。 爲宰相者失財成之道, 爲帥臣者無禦侮之策, 上下恬嬉, 架漏度日, 務樹私黨, 交相朋比, 行私蔑公。 貪風又熾, 傾危之徒, 彈冠而起; 恬靜之士, 斂手而退。 好黨議者毋論彼此, 皆是忘君負國之輩, 跳梁奔競於勢利之途, 無一人勇往直前, 擔當國事。 當此垂亡之國, 有何所欲而縱恣至此乎? 殿下居深宮之中, 何以知外廷爻象耶? 言念及此, 不覺拊心痛哭。 臣不敢知殿下亦嘗體天, 而好惡用舍, 一聽於天, 無一毫矯誣違拂之私耶。

又曰:

殿下自丁丑以後, 在之心已忘之矣。 苑囿池閣, 遊覽不已; 技藝花石, 羅列而進, 此亦殿下不得已而爲之耶? 尙方之臣, 爭務浮靡, 以爲取媚之地; 內需之官, 射利招尤, 以爲迎合之計, 如此之輩, 殿下有何所取, 宥其罪, 寵其身乎? 太和二年大旱, 先儒以爲, 崇廣宮室, 侈靡服御之應。 此事不幸近之, 臣竊痛之。 宮闈事禁, 非外人所知, 街談巷議, 猶有所云云。 此, 時平無事之日, 昏庸之主所不爲也, 殿下今日尙忍爲之耶? 臣於是說始聞而疑, 終信而驚, 痛哭流涕, 直欲碎首於殿陛之下, 而不可得也。 伏願殿下, 以不得已者, 恐懼於心, 益盡修省之道, 惕然反本, 改過遷善, 進君子退小人, 去驕奢、崇節儉, 好惡一出於天, 至於有罪罔赦, 無罪洞釋, 罷苑囿戲玩之具, 袪尙方內需之藏, 殿下坐便殿, 招群臣, 而自責躬、自刻勵, 使嘉言罔伏, 群策畢擧, 則天人一理, 感應無間, 豈但滂沱之應哉?

又曰:

臣於賤疾將攝之中, 粗得調養之方矣。 昔呂祖謙初因養病之術, 卽悟養心之法, 積累涵養, 大得其效。 不但療病, 終成心學之功, 貴賤雖殊, 致效則一也。 殿下苟於靜攝之中, 淸心寡慾, 着力操存, 治心養病, 俱得其妙, 則安知今日玉候之不寧, 不爲他日美疢之歸乎? 伏願殿下, 時於臥內, 引接儒臣, 人心之邪正, 時政之得失, 至於召災之由, 應天之道, 無不討論講劘, 毋使宦官宮妾, 得干於其間, 則今日無疆惟恤, 實我東方生民之福, 宗社之休也。

上嘉納之。


  • 【태백산사고본】 40책 40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92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