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순하라는 내용의 황제의 글과 그에 대한 의논
홍서봉·김신국·이경직 등을 오랑캐 진영에 파견하였다. 홍서봉 등이 한의 글을 받아 되돌아왔는데, 그 글001) 에,
"대청국(大淸國)의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朝鮮)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고유(誥諭)한다. 짐(朕)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 나라의 군신(君臣)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짐은 그대 나라와 그 동안 털끝만큼도 원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대 나라가 기미년002) 에 명나라와 서로 협력해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해쳤다. 짐은 그래도 이웃 나라와 지내는 도리를 온전히 하려고 경솔하게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동(遼東)을 얻고 난 뒤로 그대 나라가 다시 명나라를 도와 우리의 도망병들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치는가 하면 다시 저 사람들을 그대의 지역에 수용하여 양식을 주며 우리를 치려고 협력하여 모의하였다. 그래서 짐이 한 번 크게 노여워하였으니, 정묘년003) 에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때 그대 나라는 병력이 강하거나 장수가 용맹스러워 우리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짐은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끝내 교린(交隣)의 도를 생각하여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우호를 돈독히 하고 돌아갔을 뿐이다.
그런데 그 뒤 10년 동안 그대 나라 군신은 우리를 배반하고 도망한 이들을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명나라 장수가 투항해 오면 군사를 일으켜 길을 막고 끊었으며, 우리의 구원병이 저들에게 갈 때에도 그대 나라의 군사가 대적하였으니, 이는 군사를 동원하게 된 단서가 또 그대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가 우리를 침략하기 위해 배[船]를 요구했을 때는 그대 나라가 즉시 넘겨 주면서도 짐이 배를 요구하며 명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는 번번이 인색하게 굴면서 기꺼이 내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명나라를 도와 우리를 해치려고 도모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신이 왕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국서(國書)를 마침내 못보게 하였다. 그런데 짐의 사신이 우연히 그대 국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준 밀서(密書)를 얻었는데, 거기에 ‘정묘년 변란 때에는 임시로 속박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의에 입각해 결단을 내렸으니 관문(關門)을 닫고 방비책을 가다듬을 것이며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로운 인사들이 각기 책략(策略)을 바치게 하라.’고 하였으며, 기타 내용은 모두 세기가 어렵다.
짐이 이 때문에 특별히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대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실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단지 그대 나라의 군신이 스스로 너희 무리에게 재앙을 만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집에서 편히 생업을 즐길 것이요, 망령되게 스스로 도망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 일체 없도록 하라.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반드시 사로잡고 성 안이나 초야에서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자는 조금도 침해하지 않고 반드시 정중하게 대우할 것이다. 이를 그대 무리에게 유시하여 모두 알도록 하는 바이다."
하였다. 상이 즉시 대신 이하를 인견하고 이르기를,
"앞으로의 계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겠는가?"
하니, 홍서봉이 대답하기를,
"저들이 이미 조유(詔諭)란 글자를 사용한 이상 회답을 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한(漢)나라 때에도 묵특의 편지에 회답하였으니, 오늘날에도 회답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회답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 처리하소서."
하였다. 상이 각자 마음속의 생각을 진달하게 하였으나 모두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신의 뜻은 영의정·좌의정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고, 김상헌이 아뢰기를,
"지금 사죄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노여움을 풀겠습니까. 끝내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해 올 것입니다. 적서(賊書)를 삼군(三軍)에 반포해 보여주어 사기를 격려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한이 일단 나온 이상 대적하기가 더욱 어려운데, 대적할 경우 반드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첩(城堞)을 굳게 지키면서 속히 회답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상헌은 답서의 방식을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고 하면서 끝까지 극력 간하였는데, 최명길은 답서에 조선 국왕(朝鮮國王)이라고 칭하기를 청하고 홍서봉은 저쪽을 제형(帝兄)이라고 부르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이야말로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이다. 위로 종묘 사직이 있고 아래로 백성이 있으니 고담(高談)이나 하다가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하라. 예판은 여전히 고집만 부리지 말라."
하니, 김상헌이 아뢰기를,
"이렇게 위급한 때를 당하여 신이 또한 무슨 마음으로 한갓 고담이나 하면서 존망을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신은 저 적의 뜻이 거짓으로 꾸미는 겉치레의 문자에 있지 않고 마침내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말을 해올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성구(李聖求)가 장유(張維)·최명길·이식(李植)으로 하여금 답서를 작성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당시 비국 당상이 왕복하는 글을 소매에다 넣고 출납하였으므로 승지와 사관도 볼 수 없었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662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야(野) / 왕실-국왕(國王)
- [註 001]그 글 : 본 기사에 수록된 청의 국서는 같은 일자 승정원일기에 실린 청의 국서와는 내용이 다름.
- [註 002]
기미년 : 1619 광해군 11년.- [註 003]
정묘년 : 1627 인조 5년.○遣洪瑞鳳、金藎國、李景稷等于虜陣。 瑞鳳等受汗書而還。 其書曰:
大淸國寬溫仁聖皇帝, 誥諭朝鮮官民人等。 朕此番來征, 原不爲嗜殺貪得, 本欲常相和好, 爾國君臣, 先惹釁端故耳。 朕與爾國, 從來毫無仇隙, 爾國於己未年, 協相明朝, 起兵害我, 朕尙欲全隣國之道, 不肯輕動干戈。 及得遼東之後, 爾國復助明朝, 招納我叛亡而獻之, 復容彼人於爾地, 給以糧餉, 協謀圖我。 朕赫斯怒, 丁卯義師之擧, 職此故也。 此時, 非爾國兵强將勇, 能退我師也。 蓋朕見生民塗炭, 終惜隣交, 敦和好而歸耳。 邇來十年之間, 爾國君臣, 納我叛亡, 獻之明朝, 明將來投, 興兵堵截, 及我援兵至彼, 爾兵對敵, 是弄兵之端, 又起於爾國。 明朝索船侵我, 爾國隨卽付之, 及朕索船, 欲征明朝, 輒靳不肯發, 是特助明朝, 而圖害我也。 且信使不令見王, 國書竟不開視。 朕之使臣, 偶得爾國王, 與平安道觀察使密書, 云: "丁卯之變, 權許羈縻, 今以正義斷決, 閉關修備。 曉諭列邑, 忠義之士, 各效策略" 云, 其他辭, 難以悉數。 朕以此故, 特擧義兵, 爾等塗炭, 實非予願。 爾國君臣, 自令汝輩遭殃耳。 然爾等安家樂業, 切毋妄自奔逃, 罹我鋒鏑。 若拒者必戮, 順者必懷, 逃者必俘, 其在城、在野, 有傾心歸順者, 秋毫無犯, 必重養之。 諭爾有衆, 咸使聞知云。
上卽引見大臣以下曰: "計將安出?" 瑞鳳對曰: "彼旣用詔諭字, 宜無所答, 而漢時亦報冒頓之書, 今日覆書, 似不當已也。" 金瑬曰: "不可不回答。 請博詢諸臣而處之。" 上令各陳所懷, 率皆依違。 崔鳴吉曰: "臣意, 與領、左相無異。" 金尙憲曰: "今雖謝罪, 豈解其怒? 終必有難從之請。 宜以賊書, 頒示三軍, 激勵士氣。" 鳴吉曰: "汗旣出來, 抵敵尤難, 國必亡矣。" 上曰: "守堞宜固, 回報宜速。" 尙憲以爲: "答書之式, 不可輕議。" 遂力爭之。 鳴吉請於答書, 稱以朝鮮國王, 瑞鳳請稱彼曰帝兄。 上曰: "此誠危急存亡之時。 上有宗社, 下有生靈, 勿爲高談, 以失機會。 禮判亦勿如前固執也。" 尙憲曰: "當此危急, 臣亦何心, 徒尙高談而不顧存亡乎? 臣恐彼賊, 意不在於虛套文字, 終必有難從之言也。" 李聖求請令張維、崔鳴吉、李植撰出答書。 時, 備局堂上以往復之書, 藏諸袖出納, 承旨、史官, 亦不得見。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662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야(野) / 왕실-국왕(國王)
- [註 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