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평청을 혁파하다
상평청(常平廳)을 혁파하였다.
이보다 앞서 호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이 경연 석상에서 상평청을 혁파하고 거기에 저장된 물화는 호조로 옮기자고 청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윤방이 아뢰기를,
"신은 국가의 재정은 한 곳에서 나와야 된다고 봅니다. 본청에서 쓰다 남은 물화를 호조로 옮기자는 뜻으로 재차 계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경연 신하가 아뢴 말은 바로 신의 뜻입니다."
하고, 김상용(金尙容)도 아뢰기를,
"신의 소견도 최명길의 견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계사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기민을 구호할 물화를 다른 용도에 쓰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하다. 본청의 물화로 쌀을 사 들여서 비축해 두었다가 뒷날 구호곡으로 쓰도록 하되, 그 수량을 서계한 다음 따로 쌓아 두도록 하고 절대 함부로 쓰지 말라."
하였다. 호조가 또 아뢰기를,
"많은 미곡을 창고를 설치하여 쌓아 두었으나 처리할 방도가 아직 서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수년 동안만 흉년이 들지 않아도 그 쌀은 썩어서 먹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대전(大典)》을 살펴보건대, 호전(戶典)에 ‘서울과 지방에 상평창을 설치하여 곡식이 귀할 때는 값을 올려서 베를 사들이고 곡식이 흔할 때는 값을 낮추어서 베를 판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제도는 한(漢)나라 대사농(大司農) 경수창(耿壽昌)에게서 창출되어 당(唐)나라 유안(劉晏)이 뒤이어 시행한 제도로, 실로 백성에게 편리한 제도입니다. 조종조 때 이 제도에 따라 법령을 제정한바 창고의 터전이 아직 남아 있으나 중간에 폐지하여 시행되지 않았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금 이 기회를 타서 다시 창고를 설치하여 본청에 쌓여 있는 은화로 쌀을 사 들여서 쌓아 두었다가 풍흉을 보아 그 값의 고하를 결정하여 백성에게 이익을 준다면, 영원한 제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국가가 이미 돈을 사용하는 규정을 정하였고 주점(酒店)과 전시(錢市)가 있으며, 또 수미(收米)와 결포(結布)를 수량에 따라 돈으로 대납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법령이 구비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이 아직도 돈이 귀한 줄을 몰라서 돈을 가지고 저자로 나갔다가 제값을 받지 못하기가 일쑤이니, 이것은 조정의 법령이 일정치 못하여 백성들이 법령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입니다. 지금 상평청에 쌓여 있는 은화는 모두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물화이므로, 이것을 전량 돈으로 만든다 해도 국가에는 손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돈 주조하는 일을 본청에 맡겨서 본청의 물화로 공인(工人)을 고용하여 돈을 주조하기도 하고 값을 주고 돈을 사들이기도 하는 한편, 미곡을 거두어들여서 비축해 두었다가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에게 돈을 바치고 쌀을 사가도록 하되 쌀값에 비하여 3분의 1을 더 쳐주어서 백성을 구제하는 의도를 보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돈의 편리한 점을 알게 되어서 마침내는 반드시 널리 시행되어 구황(救荒)과 화폐의 사용이 둘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보다 더 편리한 계책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599면
-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재정-창고(倉庫) / 금융-화폐(貨幣)
○丁丑/罷常平廳。 先是, 戶曹判書崔鳴吉於筵中, 請罷常平廳, 而移其所儲於戶曹, 上令大臣議之。 尹昉曰: "臣以國家財用, 當出于一。 以本廳用餘, 移送該曹之意, 再申陳請, 而未蒙允許。 今筵臣所陳, 卽臣之意。" 金尙容亦以爲: "臣之所見, 與崔鳴吉無異。 依啓辭, 施行爲當" 云。 上下敎曰: "飢民賑救之物, 用之於他事, 似涉未妥。 以本廳物貨, 貿米儲置, 爲他日賑救之資, 而書啓其數, 別令積置, 切勿擅用。" 戶曹又啓曰: "許多米穀, 設倉留儲, 而處置之道, 未有方便。 數年之間, 幸無凶歉, 則其米腐爛, 而不可食矣。 竊見《大典》 《戶典》有云: ‘京外置常平倉, 穀貴則增價而貿布, 穀賤則減價而賣布。’ 此法出於漢大司農耿壽昌, 而唐 劉晏繼而行之, 實爲便民之政。 祖宗朝倣此設法, 倉基尙在, 而中廢不行, 事實可惜。 今因此會, 復令設倉, 以本廳所儲銀貨, 貿米留儲, 觀歲豐凶, 高下其價, 以利民生, 則可爲永遠之制。 仍念國家已定用錢之規, 旣有酒店、錢市, 又有收米、結布, 量數代錢之令, 其法不可謂不備, 而民間猶不知錢之爲貴, 持錢向市, 價輒不售, 此由朝廷法令無常, 民不信上而然也。 今此常平廳所儲銀貨, 皆是無中生有之物, 雖以此, 盡歸諸用錢之資, 於國家, 未爲損財。 臣等之意, 欲以鑄錢事, 屬於本倉, 以本廳貨物, 或雇工鑄錢, 或折價買錢, 一面收儲米穀, 遇有凶年, 許民納錢買米, 視米價增其三分之一, 以示救民之意, 則民知錢之爲 利, 而終必大行, 救荒行錢, 可以兩濟, 計無便於此矣。』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599면
-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재정-창고(倉庫) / 금융-화폐(貨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