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목 왕후를 장사지내며 지은 지문과 애책문. 대제학 장유가 짓다
인목 왕후(仁穆王后)를 장사지냈는데 그 지문(誌文)에,
"인목 왕후의 산릉(山陵)에 흙을 덮는 일이 완성되자, 상이 신 유(維)가 사액(詞掖)085) 의 장관(長官)이라 하여 현궁(玄宮)의 지문(誌文)을 지으라고 명하시기에, 신이 명을 받고 황공스러웠으나 스스로 직책의 일을 생각해 보건대 감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왕후의 성은 김씨(金氏)로서 선계는 신라(新羅) 왕족에서 나왔다. 그 뒤에 바른 말로 간하다 죄를 입고 시염성(豉鹽城)으로 귀양간 이가 있어 자손들이 인하여 관향을 삼았는데 뒤에 연안부(延安府)로 고쳤다. 시조(始祖)는 김섬한(金暹漢)인데 고려의 사문 박사(四門博士)이며, 4대를 지나 도(濤)에 이르러서는 문장과 절행이 있어 황조(皇朝)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동창부(東昌府) 안구현 승(安丘縣丞)에 제수되었고, 동쪽으로 돌아와서는 벼슬이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이르렀으며, 또 4대가 지나 충정공(忠貞公) 김전(金詮)에 이르러서는 영의정 벼슬을 하여 청백(淸白)으로써 소문났는데, 왕후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증조의 휘(諱)는 안도(安道)인데 현령(縣令)으로 좌찬성을 증직하였으며, 조부의 휘는 오(祦)인데 사정(司正)으로 영의정을 증직하였으며, 아버지의 휘는 제남(悌男)인데 문과(文科)로 벼슬길에 나아가 대각(臺閣)을 역임하고, 천조랑(天曹郞)으로서 작위가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올랐는데, 광산 부부인(光山府夫人) 노씨(盧氏) 장사랑(將仕郞) 게(垍)의 딸에게 장가들어, 만력(萬曆)086) 갑신년087) 11월 병술(丙戌)에 왕후를 낳았다.
왕후는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의인 왕후(懿仁王后)가 승하하고 선묘(宣廟)가 계비(繼妃)를 뽑을 적에, 왕후로 뽑히어 임인년088) 7월 13일에 왕비로 책봉되어 사신을 보내 황조(皇朝)에 고명(誥命)을 청하니,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고명·관복(冠服) 및 채폐(綵幣) 등의 물품을 내려 주었다. 왕후가 이미 중전(中殿) 지위가 정해지자 스스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항상 장공예(張公藝)의 백 번 참는다는 대답을 흠모하여 백인(百忍)을 써서 창문벽에 걸어 놓고서 스스로 성찰하였다. 겨울철에는 위졸(衛卒)들이 추위에 고생하는 것을 염려하여 때때로 동옷·가죽모자를 만들어서 그들에게 하사하곤 하니, 선묘가 일찍이 칭찬하기를 ‘내전(內殿)의 인자함은 비록 옛날의 어진 왕비일지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갑진년089) 에 군신(群臣)들이 휘호(徽號)를 소성(昭聖)이라고 올렸다. 무신년090) 에 선묘(宣廟)가 승하하자 슬퍼하여 야윔이 예에 지나쳐, 3년을 다하도록 포최(布縗)를 벗지 아니하고 채소와 과일을 잡수지 아니하였다. 경술년091) 에 또 휘호를 정의(貞懿)라고 올렸다.
당초에 광해(光海)가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 스스로 덕망을 잃은 줄 알고 있다가, 영창 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게 되자 더욱 시기심을 품어, 이미 왕위를 물려받고서도 오히려 옛날 감정을 가져 왕후를 대우함에 있어 다시는 자식의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간신 이이첨(李爾瞻) 등이 그 시기를 틈타 뜻을 펴, 먼저 유언 비어로써 틈을 얽어 남몰래 사형수(死刑囚)를 사주하여 옥중(獄中)에서 고변(告變)하도록 하여, ‘연흥(延興)이 영창(永昌)을 끼고서 장차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하여, 없는 죄를 꾸며서 옥사(獄事)를 만들어 연흥이 세 아들 한 사위와 더불어 모두 살해당하였으며, 영창은 겨우 여덟 살이라서 왕후가 항상 그를 품속에 품고 있었는데 광해가 빼앗아다 죽였고, 노부인(盧夫人)은 제주(濟州)로 귀양보냈다. 이첨(爾瞻)이 그의 무리들을 사주하여 앞장서서 말하기를 ‘모후(母后)의 도리가 이미 끊어졌으니 마땅히 폐위해야 한다.’고 하도록 하여 백관들을 위협하여 정청(庭請)하자, 선조(先朝)의 옛 신하 이항복(李恒福)·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 등 5, 6인이 유독 바른 의론을 가지고서 ‘춘추(春秋)의 의리에 자식이 어머니를 원수삼지 아니한다.’고 말하니, 광해가 비록 더욱 화를 냈지만 그래도 감히 갑자기 무도한 짓을 하지 못하고, 마침내 서궁(西宮)에 유폐하여 문을 폐색하고 경비하여 겨우 물과 불만을 유통시켜 군색하고 곤욕스러움이 수만 가지였다. 왕후가 원통하고 괴로움이 뼈에 사무쳐 항상 자결하려고 하다가, 모신 사람들의 보호에 힘입어 다행히 보전하게 되었으니, 아, 어찌 차마 형언할 수 있겠는가.
강상(綱常)이 끊어져 인류(人類)가 금수(禽獸) 지경에 빠진 지 장차 1기(紀)가 되려던 차에, 천계(天啓)092) 계해년093) 3월에 이르러 금상(今上)094) 이 대의(大義)를 걸고 일어나 내란을 평정하고 왕후를 받들어 복위시키니, 왕후가 하교하여 광해의 죄악을 낱낱이 들어 책망하고 그를 폐위하여 강화(江華)로 추방하고, 금상에게 명하여 대위(大位)를 바르게 하여 선묘(宣廟)의 왕통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상이 이미 임금 자리에 오르자, 왕후를 높여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삼고 휘호(徽號)를 더 올려 명렬(明烈)이라고 하였으며, 연흥 부원군의 관작을 복직시키고 예를 갖추어 개장(改葬)하였으며, 사신을 보내 해도(海島)에서 노부인(盧夫人)을 맞아오도록 하여 인륜이 다시 바르게 되니, 서울과 지방이 크게 기뻐하였다. 왕후가 항상 시중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몸이 온갖 환난을 만나 모진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성손(聖孫)이 종사(宗社)를 다시 편안하게 하여 나를 물불 속에서 구출하고, 나의 부모와 형제의 원수를 갚아 나로 하여금 만년의 존귀하고 영화스러운 복을 누리게 하였으니, 어찌 천행(天幸)이 아니겠느냐. 나는 죽어도 유감이 없다.’고 하였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핍박하므로 상이 공주(公州)로 행행(行幸)하자, 왕후가 글을 내려 8도에 효유하여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는 마음들을 안정시켰다. 왕자 이공(李珙)이 광해 시대를 당하여 폐묘(廢母)하자는 의논에 부회(傅會)하여 말이 몹시 도리에 어긋났었는데도, 왕후는 오히려 그를 위하여 용서해 주었고, 공의 모역(謀逆) 사실이 발각됨에 이르러서는 조정 신하들이 법에 의하여 처형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차마 죽이지 못하자, 왕후가 하교(下敎)하여 종사의 대계(大計)와 역적을 토벌하는 대의(大義)로써 효유하여 말이 엄절하니, 공이 마침내 법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갑자년095) 과 경오년096) 에 상이 두 번이나 풍정(豊呈)을 올리니, 왕후가 전쟁과 흉년으로 국가가 피폐한 까닭으로 누차 사양하여 즐거이 받아들이지 않다가, 상이 지성으로 굳이 청한 뒤에야 허락하였다. 10년 동안에 양궁(兩宮)이 인자하고 효도하여 간격이 없이 화기 애애하니, 사방에서 감동하여 기뻐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숭정(崇禎)097) 임신년098) 여름에 왕후가 병으로 누운 지 한 달이 지나 더욱 위독하여, 6월 28일 갑오(甲午)에 인경궁(仁慶宮)의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하니, 춘추(春秋)가 49세였다. 유사(有司)가 시법(諡法)을 의논하되,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하는 것[施仁服義]을 인(仁)이라 하고, 덕(德)을 펴고 의를 지키는 것[布德執義]을 목(穆)이라 한다고 하여, 드디어 존시(尊諡)를 인목(仁穆)이라고 올리고, 또 휘호(徽號)를 광숙 장정(光淑莊定)이라고 올렸다. 이해 10월 초6일 경오(庚午)에 목릉(穆陵)의 동쪽 산등성이의 갑좌 경향(甲坐庚向) 자리에 장사지냈는데, 그것이 목릉에 가까워 부장(祔葬)과 같기 때문이다. 인하여 목릉으로 칭하였다.
왕후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계축 화변(癸丑禍變)으로부터 3년 동안 밥을 먹지 아니했고, 복(服)을 벗고서는 다만 미음죽만을 먹었으며, 이미 복위(復位)되고서도 오히려 어육(魚肉)을 먹지 아니하였다. 상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간곡하게 권한 뒤에야 비로소 평상시의 수라를 회복하였으니, 대개 소밥을 먹은 지 전후 통틀어 17년이었다. 검소한 것을 편안히 여겨 평생에 금수(錦繡)와 주취(珠翠)를 사용한 적이 적었고 항상 명주비단만을 입었을 뿐이며, 선묘(宣廟)에게 누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대우함에 있어 은의(恩義)를 곡진히 하였고, 내외 종족(宗族)들에게 돈목하여 친소간에 각각 마땅하게 하였다. 종들을 부림에 있어서도 은혜와 위엄이 겸하여 지극하기 때문에, 비록 유폐되어 곤욕스러움에 오랫동안 있었어도 좌우에 한사람도 감히 두 마음을 품은 자가 없었다. 왕후가 영창 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와 정명 공주(貞明公主)를 낳았는데, 영창은 흉화(凶禍)로 일찍 죽고 공주는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에게 하가(下嫁)하여 3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아, 왕후의 성실하고 그윽한 아름다운 덕으로서 불행하게도 인륜의 변을 만나온 집안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는데, 마침내 금용(金墉)099) 의 화를 모면하였던 것은 우리 성상께서 사직을 안정시킨 한번의 거사에 힘입은 것이다. 전에는 울다가 뒤에 웃어 다시 국양(國養)의 융성함을 누린 지 겨우 10년이 되었는데, 강릉(岡陵)과 같은 장수(長壽)를 하늘이 마침내 인색하게 하였으니, 아, 애통하다. 오직 그 아름다운 덕음(德音)이 없어지지 아니한 것들을 정석(貞石)100) 에 새기어 능묘에 세워, 장차 동관(彤管)으로 기록한 것과 더불어 영원히 오래도록 전하게 될 터이니, 아, 훌륭하도다."
하였는데, 이 지문(誌文)은 대제학 장유(張維)가 지은 글이다. 애책문(哀冊文)에,
"숭정(崇禎) 5년 임신년101) 6월 28일 갑오(甲午)에, 소성 정의 명렬 광숙 장정 인목 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仁穆王后)가 인경궁(仁慶宮)의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하시자, 이해 10월 초6일 경오(庚午)에 장차 목릉(穆陵)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하니, 이는 예입니다. 그림 그려진 찬궁(欑宮)이 막 열릴 적에 그 의장이 이미 도열되어, 봉조(鳳旐)102) 가 드리워지고 용순(蘢楯)103) 이 준비되었는데, 귀찮은 안개가 끼어 차가웁고 새벽바람이 처절함을 돋웁니다. 애손(哀孫) 주상 전하가 붙들어잡고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으므로 상심하여 사모함이 더욱 새로워, 기나긴 가을이 영원히 적막할 것을 비통하게 여기고 깊은 밤이 새지 않을 것을 애통스럽게 여기어 동관(彤管)을 가진 이에게 명하여 아름다운 덕행을 찬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 밝은 조정에서 수신(修身) 제가(齊家)하여 교화가 이루어지니, 참으로 하늘이 배필을 만들어 왕후의 규범이 따라서 정숙하였습니다. 증사(曾沙)104) 가 영기(靈氣)을 기르고 찬란한 무성(務星)이 정기를 쏟아, 훌륭한 왕비를 특별히 탄생시켜 성명(聖明)의 덕을 짝하였습니다. 즐거움은 종고(鍾鼓)에 있고 법도는 금옥(金玉)에 빛나, 예를 실행하여 몸을 삼가고 시(詩)를 나열하여 규칙을 바르게 하였습니다. 갓끈과 면류관 덮개가 결손된 것이 없고 가는 갈포(葛布)나 거친 갈포를 싫어함이 없으니, 이 왕후의 가르침에 힘입어 임금의 덕이 더욱 빛났습니다. 그런데 운이 양구(陽九)105) 에 모이고 몸이 온갖 환난을 당하여, 창오(蒼梧)에서 임금의 수레가 멀리 떠나가니 반죽(班竹)에 눈물이 젖었습니다.106) 강회(康回)107) 가 몹시 성내어 우리 중전을 폐위하니, 금용(金墉)에 한번 갇힌 이상 대수(大隨)108) 를 누가 엿볼 수 있었겠습니까. 머리털을 자르고109) 의뢰할 데가 없었는데,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품속에서 빼앗아가 죽게 하였으니 부모도 몹시 불쌍하고 형제도 몹시 가여워하였습니다. 인륜이 땅에 떨어져 나라의 운명이 아슬아슬하였는데, 1기(紀) 동안 원통한 마음을 품어 씀바귀를 냉이처럼 달게 여기셨습니다. 그러자 천도(天道)가 순환하여 성손(聖孫)이 의리를 들고 일어나 서궁(西宮)이 자물쇠가 열리고 동조(東朝)110) 가 복위되었습니다. 사랑과 효도에 차이가 없고 존귀하고 영화로움이 겸하여 극에 달하였으며, 물건을 갖추어 봉양하니 정사에 관여치 않으면서 스스로 한적하게 생활하였습니다. 큰 교화가 흠뻑 젖고 오복(五福)이 퍼져, 강릉(岡陵) 같은 수명을 수많은 백성들이 함께 축원하였습니다.
그런데 풍상(馮相)111) 이 요기(妖氣)을 보고하고 태사(太史)의 점이 흉하여, 무지개가 계백(桂魄)112) 을 휘감고 화성이 헌성(軒星)으로 들어가자, 열병(熱病)에 갑자기 걸려 유로(兪盧)113) 의 의술(醫術)이 다하고, 표어(飆馭)114) 가 머무르지 않아 성산(星算)115) 이 영원히 끝났습니다. 후한 복이 떨어지고 자운(紫雲)116) 이 걷히니, 온갖 무리가 허둥지둥 놀라고 삼광(三光)117) 이 어두워졌습니다. 아, 슬픕니다. 하늘의 마음을 물어보기 어려운데 신(神)의 이치를 뉘라서 자세히 알겠습니까. 어진 사람이 꼭 오래 사는 것은 아니고 착한 사람이 간혹 상서(祥瑞)를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세 조정(朝廷)에서 영화를 누린 것은 얼마 안 되는데, 10년 동안 유폐되어 곤욕을 치른 것은 어찌 그리도 길었습니까. 속세의 누적된 잡일을 싫어하여 참다운 생을 아득한 데에 의탁하였나 봅니다. 요수(瑤水)118) 에서 서왕모(西王母)를 심방하고 은하수에서 천손(天孫)119) 을 방문하여, 옥난간의 하늘꽃을 구경하고 취굴(聚掘)120) 의 특이한 향기를 남겼습니다. 아, 슬픕니다.
한 임금이 사모함에 백관들이 피눈물로 울어, 보좌(黼座)121) 가 철거되어 의려(倚廬)122) 가 되고 주류(珠旒)가 마질(麻絰)로 변하였습니다. 남긴 선패(仙珮)123) 는 정지해 있고 엄연한 영의(靈衣)124) 는 그냥 진열해 놓았는데, 합문(閤門)에 달이 비춰 처량하고 바람에 발[簾]이 울어 소슬합니다. 엄숙한 궁궐을 떠나 위험스런 서리 내린 들을 밟고서, 가고 또 가 구름을 타고 가셨으니 슬픔 중에 보다 더 슬픈 것은 영원히 이별하는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백호(白虎)125) 에서 정기가 솟아오름에 청오(靑烏)126) 로 능묘자리를 합당하게 잡아 은해(銀海)127) 가 깊디 깊고 주구(珠丘)128) 가 두리둥실합니다. 구의(九疑)129) 에 의로운 무덤이 가련하지만 삼릉(三陵)130) 이 산기슭을 연한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향불을 침전(寢殿)에서와 마찬가지로 올리고 상설(象設)131) 을 빈 골짜기에 마련하였으니 저승과 이승이 한 이치로 알기에 영령이 막히지 않을 줄로 느낍니다. 아, 슬픕니다. 하늘의 조화는 무궁하고 짧은 생명은 끝이 있어, 한 기운이 굴신(屈伸)함에 따라 온갖 만물들이 함께 죽게 됩니다. 무엇이 오래도록 영원히 남는가 하면 오직 덕음(德音)이라야만 없어지지 아니하고, 비록 좋은 자질을 가진 이의 아름다운 행실일지라도 오히려 서경(書經)과 시경(詩經)에서 증거하여 믿기 때문에 완염(琬琰)132) 에 의탁하여 공덕을 기재하고 한청(汗靑)133) 에까지 아울러 기록하여 분명히 전하였습니다. 아, 슬픕니다.’"
하였는데, 이 애책문은 대제학 장유가 지은 글이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499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註 085]사액(詞掖) : 승문원(承文院)의 별칭. 또는 문사(文詞)를 담당한 관서를 두루 이르는 말.
- [註 086]
만력(萬曆) :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註 087]
갑신년 : 1584 선조 17년.- [註 088]
임인년 : 1602 선조 35년.- [註 089]
갑진년 : 1604 선조 37년.- [註 090]
무신년 : 1608 선조 41년.- [註 091]
경술년 : 1610 광해군 2년.- [註 092]
천계(天啓) :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註 093]
계해년 : 1623 인조 원년.- [註 094]
금상(今上) : 인조를 가리킴.- [註 095]
갑자년 : 1624 인조 2년.- [註 096]
경오년 : 1630 인조 8년.- [註 097]
숭정(崇禎) :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註 098]
임신년 : 1632 인조 10년.- [註 099]
금용(金墉) : 성(城) 이름. 진(晋)나라 양후(楊后)가 추방당하여 여기에서 거주하였다. 《독사방흥기요(讀史方興紀要)》.- [註 100]
정석(貞石) : 단단한 비석.- [註 101]
임신년 : 1632 인조 10년.- [註 102]
봉조(鳳旐) : 봉황새가 그려진 기.- [註 103]
용순(蘢楯) : 용이 그려진 영구차.- [註 104]
증사(曾沙) : 한(漢)나라 원후(元后)가 탄생한 지명.- [註 105]
양구(陽九) : 재난.- [註 106]
창오(蒼梧)에서 임금의 수레가 멀리 떠나가니 반죽(班竹)에 눈물이 젖었습니다. : 창오는 산 이름이며 반죽은 아롱진 무뉘가 있는 대나무이다. 순(舜)임금이 순수(巡守)하다가 창오에서 죽자, 그의 왕비 아황(娥皇)·여영(女英)이 소상강(瀟湘江) 대나무에 눈물을 뿌리니, 그 대나무에 아롱진 무뉘가 생겼다는 고사(故事)가 있는데, 이는 선조(宣祖)의 승하에 인목 대비(仁穆大妃)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 것을 견주어 말한 것이다.- [註 107]
강회(康回) : 요(堯)임금의 신하 공공(共工)의 이름인데, 음란 무도하였다. 이는 무도한 광해군을 비유한 것이다.- [註 108]
대수(大隨) : 큰 지하도(地下道). 정(鄭)나라 장공(莊公)이 그의 어머니 무강(武姜)이 모반한 아우 공숙단(共叔段)을 도와준 것을 증오하여, 마침내 무강을 성영(城穎)에 안치하고서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서로 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가, 뒤에 후회하여 영고숙(穎考叔)의 말을 따라 대수(大隧)를 뚫어 놓고 그 속에서 모자(母子)가 서로 만나 보아 옛날로 되돌아간 고사(故事)가 있는데, 여기서는 대수가 전의되어 유폐된 곳을 뜻한다.- [註 109]
머리털을 자르고 : 인목 대비의 친정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구금당하자, 인목 대비가 머리털을 잘라 신표를 보이면서 김제남을 석방해 달라고 하소연한 고사(故事). 《계축일기(癸丑日記)》.- [註 110]
동조(東朝) : 동궁(東宮).- [註 111]
풍상(馮相) : 천문(天文)을 맡은 관직 이름.- [註 112]
계백(桂魄) : 달의 별칭.- [註 113]
유로(兪盧) : 옛날 명의(名醫)인 유부(兪附)와 편작(扁鵲)을 가리킴.- [註 114]
표어(飆馭) : 바람을 타고 간다는 신선 수레.- [註 115]
성산(星算) : 천문(天文)과 산수(算數).- [註 116]
자운(紫雲) : 인자한 마음이 구름처럼 널리 덮인 것을 말함.- [註 117]
삼광(三光) : 해와 달과 별.- [註 118]
요수(瑤水) : 신선이 산다는 곳.- [註 119]
천손(天孫) : 별 이름. 곧 직녀(織女).- [註 120]
취굴(聚掘) : 신선이 산다는 섬 이름.- [註 121]
보좌(黼座) : 임금의 좌석.- [註 122]
의려(倚廬) : 상인(喪人)이 거처하는 곳.- [註 123]
선패(仙珮) : 신선이 평소에 차던 패옥.- [註 124]
영의(靈衣) : 죽은이가 평소에 입던 옷.- [註 125]
백호(白虎) : 묘소의 주산(主山)에서 오른쪽으로 뻗어나간 산.- [註 126]
청오(靑烏) : 풍수학(風水學).- [註 127]
은해(銀海) : 옛날 임금의 능(陵)속에 수은(水銀)을 넣어 강하(江河)와 바다를 상징한 것을 말함. 《한서(漢書)》 초원왕전(楚元王傳).- [註 128]
주구(珠丘) : 구슬이 쌓여 이루어진 구릉(丘陵). 《습유기(拾遺記)》에 "순(舜)임금을 창오(蒼梧)의 들에 장사 지냈는데, 참새와 같은 빙소(憑霄)라는 새가 때때로 청사주(靑砂珠)를 입에 물고 창오의 들로 날아와 떨어뜨려 그것이 쌓여 구릉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인목 대비의 목릉(穆陵)을 이에 비하여 지칭한 것이다.- [註 129]
구의(九疑) : 산 이름. 일명 창오산(蒼梧山)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 순(舜)임금의 무덤이 있다. 여기서는 인목 대비의 능이 있는 양주(楊州)의 동구릉(東九陵) 검암산(儉巖山)을 이에 비하여 지칭한 것이다.- [註 130]
삼릉(三陵) : 선조(宣祖) 및 그의 비(妃) 의인 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와 계비(繼妃) 인목 왕후(仁穆王后) 김씨(金氏)의 세 목릉(穆陵)을 말함.- [註 131]
상설(象設) : 죽은이의 생전을 상징하여 설치한 것.- [註 132]
완염(琬琰) : 옥(玉)이름.- [註 133]
한청(汗靑) : 역사책. 옛날에 종이가 없을 적에 댓조각을 불에 구워 즙을 빼내고 푸른 대껍질을 제거한 뒤에 역사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庚午/葬仁穆王后。 其誌文曰:
仁穆王后山陵, 復土告成, 上以臣維, 忝長詞掖, 命撰玄宮之誌。 臣承命悸恐。 自惟職事, 不敢以不文辭。 謹按, 王后姓金氏, 系出新羅王族。 其後有坐直諫, 謫豉鹽城, 子孫因籍焉, 後改延安府。 始祖暹漢, 高麗四門博士。 歷四代至濤, 有文章節行, 登皇朝制科, 宣授東昌府 安丘縣丞, 東還, 官至密直提學。 又四傳而至忠貞公詮, 官領議政, 以淸白聞, 於后爲高祖。 曾祖諱安道, 縣令贈左贊成。 祖諱祦, 司正, 贈領議政。 考諱悌男, 以文科進, 歷官臺閣, 天曹郞, 進爵延興府院君領敦寧府事。 娶光山府夫人 盧氏, 將仕郞垍之女, 以萬曆甲申十一月丙戌, 生后。 幼有異質, 懿仁王后薨, 宣廟選繼妃, 后膺選, 壬寅七月十三日, 冊爲王妃, 遣使請命于皇朝, 神宗皇帝賜誥命、冠服及綵幣等物。 后旣正坤極, 克自敬畏, 常慕張公藝百忍之對, 書揭窓壁, 以自省焉。 冬月念衛卒寒苦, 時製襦衣、皮帽以賜之, 宣廟嘗稱曰: "內殿慈仁, 雖古賢妃, 無以過之。" 歲甲辰, 群臣進徽號曰昭聖。 戊申宣廟昇遐, 后哀毁踰禮, 盡三年不脫布縗, 不進菜果。 庚戌, 又進徽號曰貞懿。 始光海在東宮, 自知失德, 及永昌大君生, 益懷猜忌。 旣襲位, 猶挾舊憾, 待后無復子道。 奸臣李爾瞻等, 乘時得逞, 先以蜚語搆釁隙, 陰嗾死囚, 從獄中上變, 謂延興挾永昌, 將爲亂, 羅織成獄。 延興與三子、一壻, 皆遇害。 永昌甫八歲, 后常置諸懷中, 光海奪取殺之, 盧夫人栫棘于濟州。 爾瞻使其黨倡言, 后母道已絶, 當廢, 脅百僚庭請之。 先朝舊臣李恒福、李元翼、李德馨等五六人, 獨持正議, 謂《春秋》之義, 子不讎母。 光海雖益恚, 猶不敢遽加無道, 遂幽之西宮, 錮門警守, 僅通水火, 窘辱萬狀。 后痛毒切骨, 常欲自裁, 賴侍御者護持, 幸而得全。 嗚呼, 尙忍言哉! 綱常斁絶, 人類淪於禽獸者, 將一紀矣。 至天啓癸亥三月, 今上奮大義、定內亂, 奉后復位。 后下敎, 數光海罪惡廢之, 放于江華, 命今上正大位, 承宣廟之統。 上旣踐阼, 尊后爲大王大妃, 加進徽號曰明烈, 復延興官爵, 備禮改葬, 遣使迎盧夫人于海島, 彝倫復正, 中外大悅。 后常語侍者: "予身遭百罹, 頑命不絶, 得見聖孫, 再安宗社, 拯予水火中, 復予父母、兄弟之讎, 俾予享晩景尊榮之福, 豈非天幸歟? 予死無憾矣。" 李适反, 兵逼京都, 上幸公山, 后下書曉諭八路, 以定危疑。 王子珙, 當光海時, 傅會廢母之議, 辭絶悖逆, 后猶爲之容貸。 及珙謀逆事發, 廷臣請按法, 上不忍加誅。 后下敎, 諭以宗社大計, 討逆大義, 辭旨嚴截, 珙竟伏法。 甲子、庚午兩年, 上再進豐呈, 后以兵荒國弊, 累讓不肯受, 上至誠固請然後許之。 十年之內, 兩宮慈孝無間, 和氣藹如, 四方無不感悅。 崇禎壬申夏, 后寢疾, 閱月而彌篤, 六月二十八日甲午, 薨于仁慶宮之欽明殿, 春秋四十有九。 有司議謚法, 施仁服義曰仁, 布德執義曰穆, 遂上尊謚曰仁穆; 又上徽號曰光淑莊定。 以是歲十月初六日庚午, 葬于穆陵東岡甲坐庚向之原。 以其近於穆陵, 猶祔也, 因稱以穆陵。 后天性至孝, 自癸丑禍變, 三年不嚥穀粒, 服除, 只啜糜粥。 旣復位, 猶不御魚肉, 上與中宮, 涕泣懇勸然後, 始復常膳, 蓋茹素者, 前後凡十七年矣。 安於儉素, 生平罕御錦繡、珠翠, 恒服紬帛而已。 宣廟有一姊, 遇之曲盡恩義, 敦睦內外宗族, 親踈各適其宜。 至於任使奚隷, 恩威兼至, 故雖久處幽辱, 而左右無一人敢懷二心者。 后育永昌大君 㼁、貞明公主。 永昌凶夭, 公主下嫁永安尉 洪柱元, 生三男一女, 皆幼。 嗚呼! 以后之懿德塞淵, 不幸値人倫之變, 闔門遘酷, 其卒免金墉之禍, 賴有我聖上靖社一擧耳。 先咷後笑, 復享國養之盛, 廑廑十稔, 而岡陵之壽, 天竟靳焉, 嗚呼, 痛哉! 惟其徽音之未沫者, 鑱之貞石, 列于幽墟, 將與彤管所記, 永垂悠久, 猗歟, 盛哉! 大提學張維之詞也。
哀冊文曰:
維崇禎五年歲次壬申六月二十八日甲午, 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仁穆王后薨于仁慶宮之欽明殿, 是歲十月初六日庚午, 將遷座于穆陵, 禮也。 畫欑初啓, 厥儀已列。 鳳旐將蕤, 龍輴戒轄。 苦霧凝而慘慄, 晨飆助其悽切。 哀孫主上殿下, 攀號莫逮, 摧慕彌新。 悲長秋之永閴, 痛厚夜之莫晨。 載命彤管, 俾讃芳塵。 其詞曰; 於赫熙朝, 修齊化成。 寔天作合, 壼範繼貞。 曾沙毓靈, 婺曜垂精。 篤生碩媛, 配德聖明。 樂存鍾皷, 度昭金玉。 服禮飭躬, 陳詩正則。 紘綖罔缺, 絺綌無斁。 賴玆陰敎, 益光乾德。 運鍾陽九, 身丁百罹。 蒼梧駕遠, 班竹淚滋。 康回憑怒, 絶我坤維。 金墉一錮, 大隧誰窺? 截髮無賴, 奪懷見殪。 哀哀父母, 戚戚兄弟。 彝倫墜地, 國命(旒綴)〔綴旒〕 。 一紀茹痛, 荼甘如薺。 天道循環, 神孫奮義。 西宮啓鑰, 東朝復位。 武帳發命, 玉牒歸美。 再享母儀, 肇修人紀。 慈孝無間, 尊榮兼極。 備物致養, 含飴自適。 大化隆洽, 五福敷錫。 岡陵之壽, 兆庶同祝, 馮相告祲, 太史占凶。 虹纏桂魄, 火入軒星。 美疢忽嬰, 兪盧技窮。 飆馭不留, 星算長終。 厚袛震塌, 慈雲欻空。 萬彙錯愕, 三光闇瞢。 嗚呼, 哀哉! 天心難問, 神理疇詳? 仁未必壽, 善或不祥。 三朝之榮享無幾, 十載之幽辱何長? 厭塵世之積蘇, 託眞遊於混芒。 尋王母於瑤水, 問天孫於銀潢。 賞玉闌之天葩, 遺聚窟之異香。 嗚呼, 哀哉! 一人孺慕, 千官泣血。 黼座輟爲倚廬, 珠旒變以麻絰。 委仙珮兮若休, 儼靈衣兮虛設。 月閤扃兮凄淸, 風簾響兮蕭瑟。 違天居之肅穆, 踐霜郊之嵽嵲。 去復去兮乘雲行, 悲莫悲兮終天訣。 嗚呼, 哀哉! 白虎騰精, 靑烏協卜。 銀海深深, 珠丘矗矗。 憐九疑之孤墳, 幸三陵之連麓。 同香火於寢殿, 擁象設於空谷。 知幽明之一理, 感精爽之不隔。 嗚呼, 哀哉! 玄造無窮, 短生有涯。 一氣屈伸, 品物同歸。 孰長存於悠久? 惟德音之罔虧。 雖靈質之潛翳, 尙徵信乎書詩。 託琬琰以載烈, 竝汗靑而昭垂。 嗚呼, 哀哉! 大提學張維之詞也。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499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註 0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