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인 조흥빈이 고변하여 권대진 등 16인을 잡아 국문하다
옥천인(沃川人) 조흥빈(趙興賓)이 정원에 나아가 고변하였다. 상이 그 글을 빈청(賓廳)에 내리는 한편, 금부 도사를 보내 권대진(權大進)·권계(權繼)·권락(權絡)·권순(權純)·정담(鄭潭)·양천식(楊天植)·양정식(楊廷植)·이찬희(李贊希)·정후엄(鄭厚淹), 박선검(朴先儉)·박후검(朴後儉) 등 16인을 잡아오게 하고,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국문하였다. 흥빈이 공초(供招)하기를,
"부근 마을에 사는 출신(出身) 권대진이란 자가 지난 기사년011) 부터 요승(妖僧) 두 사람 및 무뢰한들과 왕래하며 회합을 가졌는데, 거동이 수상했습니다. 언젠가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나의 상(相)으로 볼 때 앞으로 아주 귀하게 될 것이며 우리 집의 터도 좋아서 오(午)·미(未)년 사이에 부원군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모두 그가 이상한 모의를 하고 있다고 의심하였으나 그 단서는 예측하지 못하였습니다.
지난 경오년012) 1월에 대진의 아들 낙이 술이 취한 채 신의 집에 와서 신의 아들 조완(趙浣)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지금 한창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극심해지고 있으며 천변(天變)도 참혹하니 시사(時事)를 알 만하다. 지금 호남과 영남에 8대장이 있는데 동시에 군대를 일으켜 대사를 도모하려 한다. 네가 나와 같이 행동하면 부귀를 얻을 것이니, 절대 전파시키지 말고 남몰래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의 아들 완은 의심을 살까 두려워하여 부드러운 말로 대답해 두었습니다. 낙이 간 뒤에 신이 동생 조희빈(趙熙賓)과 함께 대진을 찾아가 물어 보았더니, 대진이 말하기를 ‘우리 집 검은 말이 흰색으로 변했는데, 참기(讖記) 가운데에 백마장군에 관한 설이 있으니, 이야말로 우리 집이 일어나는 좋은 징조이다.’ 하고, 8대장에 관한 이야기는 감추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완이 권락·권계와 왕래하면서 물어보니 그들이 말하기를 ‘양천식·양정식 및 이찬희 등이 모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도당들이 매우 많다. 그런데 먼저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병사를 일으켜 왜적들이 쳐들어온다고 하면 우리 아버지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왜적을 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곧장 경성을 치기로 약속이 되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영남의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은 생김새가 기이하고 두 어깨에 해와 달의 모양이 있는데, 이 사람을 추대하여 인군으로 삼을 것이다. 이 사람은 가야산(伽倻山) 아래에 사는데, 이름은 담(潭)이고, 【 담(潭) 자는 잘못 되었다. 그 뒤 적(賊)의 공초(供招)에서 모두 정한(鄭澣)이라고 하였다.】 나이는 임오생(壬午生)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천식과 이찬희란 자가 그와 왕래하며 모의하였는데, 모두가 승려였다가 환속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약속하기를 ‘전일에 실패한 무리들은 모두 문서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나 우리들은 다만 상면해서 약속했으니, 혹시 붙잡힌 자는 죽는다 하더라도 나머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어서 일어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공청 감사(公淸監司) 정효성(鄭孝成)이 또 공주인(公州人) 한설(韓渫)이 고변한 것을 치계하였는데, 대체로 조흥빈이 고변한 내용과 같았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양병(楊丙)이라고 하는 자는 바로 양천식이며, 양팽(楊彭)은 바로 양정식이다. 병 등은 세 번이나 그 이름을 바꿨는데, 10년 동안에 세 번이나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했다.’ 하고, 또 ‘문일광(文日光)·이찬희와 정인홍(鄭仁弘)의 조카인 정류(鄭溜)·정회(鄭澮)·정유(鄭渝) 및 호서 장군(湖西將軍) 김자중(金自重)이란 자가 있는데, 자중은 군사가 일어난 뒤에 장날을 이용하여 난리를 일으켜서 먼저 직산(稷山)·온양(溫陽)·천안(天安) 등지의 수령들을 베고 그 군사를 탈취해 기세를 돋군다고 하였다. 양팽은 「정담이 말하기를 『나라를 얻은 뒤에는 도읍을 진잠(鎭岑)이나 신도(新都)로 옮겨야겠다.』고 하였다.」’ 하였다. 고변자 한설이 공초하기를,
"한임생(韓壬生)은 바로 나의 서제(庶弟)로서 팽이(彭伊)나 병이(丙伊)와는 이부동모(異父同母)의 형제간입니다. 임생이 승려 자장(慈藏)에게 글을 배워 공주(公州) 묘각사(妙覺寺)에 기거하였는데, 기사년 8월에 집에 와서 비밀히 말하기를 ‘병이와 팽이가 대진·희찬과 함께 내가 거처하던 승방에 모였는데, 밤이 깊은 뒤에 서로 역적을 모의하는 것을 깊이 잠든 체하고 엿들었다.’ 하였습니다.
그 해 10월에 병이가 찾아와 말하기를 ‘기미년 사이에 지리산에 가서 글을 읽던 중 어느날 이인(異人)을 보게 되었다. 성은 정(鄭)이고 이름은 담(潭)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과연 신도의 주인이 될만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떠나면서 나에게 시를 주었는데, 그 시에
‘탑전에 올라 앉아 남쪽을 제압하고
권세의 저 위엄 북두성을 두르리라.’
하였습니다. 지난해 봄에 팽이가 신을 보러 왔기에 비밀리에 묻기를 ‘너의 형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나의 형이 「우리들은 동방에서 일어나는데, 동방은 푸른 색에 속하니 너의 전복(戰服)도 푸른색으로 하라.」 하였다.’ 하였습니다. 함께 모의한 자를 보면 보성(寶城)에 문일광(文日光), 옥천(沃川)에 권 천총(權千摠)이라는 자가 있으며, 경기에는 홍계남(洪繼男)의 둘째 아들이 있는데 그를 대장으로 삼는다고 하였고, 찬희와 자중(自重)도 모두 동모했다 합니다. 그리하여 지난달 거사하려고 술사를 데리고 경성에 가 보았더니, 궁궐이 그야말로 길지(吉地)에 있고 왕기(王氣)가 아직 쇠하지 않아 경솔하게 움직이지 못하겠기에 그만두고 돌아왔는데, 그 길로 계룡산(鷄龍山)으로 내려가 지남철로 택지(擇地)한 뒤 도읍을 정할 계책을 세웠다 합니다. 권의립(權義立)과 권인립(權仁立)은 바로 대진(大進)의 아들로서 힘을 다해 그 일을 도왔으며, 팽이의 친구인 정후엄(鄭厚淹), 찬희의 동생 이수남(李守男), 찬희의 가까운 친척인 조이남(曺二男) 등이 모두 흉모에 참여하였습니다."
하였다. 임생(壬生)의 공초는 대개 한설의 고변과 내용이 같았는데, 대진의 아들이라고 하던 인립은 바로 권계(權繼)였으며, 의립은 바로 권락(權絡)이었다. 정후엄(鄭厚淹)이 공초하기를,
"이 음모는 모두 찬희에게서 나왔습니다. 찬희가 처음에 대진의 막내 아들에게 말하여 그의 아비 대진에게 이야기하게 하기를 ‘이 일은 처음에 주선하기가 어려우나 나는 군사를 거느린 자이니 그 때에 당하여 우리 측을 위해서 싸울 수 있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선검(先儉)과 후검(後儉)도 찬희 및 양가(楊哥)란 자와 【 바로 천식(天植)이다.】 대진의 집에 모여 유숙하며 모의하였습니다."
하고, 권계(權繼)는 공초하기를,
"정후엄이 와서 말하기를 ‘양가란 자가 이 일을 앞장 서서 주도하였는데, 경상도에 내려가 군사를 모집했으므로 영남에 공모한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가(鄭哥)란 자의 몸에는 해와 달의 모양이 있고, 덕산(德山)에 조가(趙哥)란 자가 있는데 옛날 최영(崔瑩)과 같은 자라고 하였으며, 찬희의 족속으로 공주(公州)에 사는 김가 성을 가진 자가 전에 파총(把摠)을 지냈는데, 역시 모의에 참여했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권순(權純)은 공초하기를,
"대진이 숙부라고는 하나 서로 자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또 나는 글도 모르고 무예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일에 참여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대진의 종인 영이(永伊)는 공초하기를,
"환속한 양가란 자가 대진을 찾아와 말하기를 ‘침착하여 장수가 될 만한 자는 권 천총(權千摠)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듣건대, 남원(南原)에서 도적이 일어나자 천총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국가에 사태가 발생했으니,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의 병사와 중로에서 회합하여 곧바로 경성을 향하겠다.’ 하였답니다. 옥천(沃川)에 사는 서인 임생, 출신(出身) 박남(朴男)·주명세(周名世)·남신록(南信祿), 신선(新選) 전금세(全今世)도 다 모의에 참여하였습니다."
하고, 선검(先儉)은 공초하기를,
"기사년에 자칭 관상을 잘 본다는 어떤 승려가 대진의 집에 와 관상을 보고 매우 좋다고 하였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철 끝 무렵에 또 와서 말하기를 ‘경오년의 운수가 좋았으나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이 뒤에 어찌 좋은 기회가 없겠는가. 너는 과연 백마장군이다.’고 하였답니다. 이 말은 대진에게서 들은 것입니다."
하고, 천식(天植)은 공초하기를,
"무진년 봄에 정읍(井邑) 내장산(內藏山) 절에 있을 때 김안국(金安國)이란 자가 불공을 드리러 제문(祭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끝에 ‘집에 계신 늙으신 부모님 길러준 그 은혜 아직도 못 갚았는데, 권력 투쟁도 한계가 있는 법이거늘 지금까지 임금의 은혜 받지 못했네. 나이 삼십이 다 되는데 장한 뜻 아직 펴지 못했네. 그러나 오랜 세월 가노라면 황하수도 다시 맑아지겠지. 그 때 되면 태평성대 이루어져 백성들도 편안하리라. 천안(天顔)을 뵈오니 그대를 가상하게 여기는 임금의 은총이 내려지고, 높은 벼슬에 임명되니 역사에 이름 남겨지리. 부처님이시여, 어떻게 될지 모를 나의 길, 닥쳐올 일들을 알려 주소서. 이 때문에 향불을 받들어 불전에 올리나이다.’ 하였습니다. 이 글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져 그 뜻을 물으니, 안국이 ‘대북(大北)·소북(小北)이 다 모여 대사를 거행하려고 한다. 그리고 정한(鄭澣)이라는 이인(異人)이 있는데 머지않아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너는 나와 일을 함께 하기만 하면 된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안국과 함께 정한의 집에 갔는데, 그 곳에서 ‘탑전에 올라 남쪽을 누르고[坐榻南藩壓]’라는 싯귀를 보았습니다.
다시 청주(淸州)로 내려가 출신(出身) 조철(趙澈)을 보았는데, 이 자는 8대장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자에게 간 이유는, 안국이 전에 조가란 자가 거사를 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 자의 관상을 보아두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안국이 또 ‘순창(淳昌)의 양시태(楊時泰)도 함께 거사하기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진년에 정한의 집에서 돌아오다가 찬희와 함께 대진의 집에 갔는데, 대진이 ‘내 조카 집의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고 우리 집의 검은 말이 흰색으로 변했다.’고 하기에, 내가 바로 말하기를 ‘그대가 바로 백마장군이구나.’ 하였습니다. 대진이 또 ‘무진년 3월에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마침 고변하는 일이 있어 일으키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정한 등이 처음에 유효립(柳孝立)의 무리와 결탁하고 모의하였으나 효립 등이 잡혀 죽을 적에 정한만이 면하게 된 것은 달리 연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8월에 또 일어나려고 하였으나 한회(韓會)의 옥사(獄事)로 인하여 정한의 도당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한회와 약속하기로는, 북쪽 지방에서 변란이 일어나면 정한 등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어나기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안국이 처음에 정한을 보고서 그의 뜻을 탐지할 목적으로 자기의 이름을 양후영(楊後瑩)이라 하고 그를 보며 말하기를 ‘최영(崔瑩)의 후신이 이제 또한 있다.’고 하자, 정한이 ‘북쪽 지방에 변란이 일어나면 우리들이 남쪽에서 일어나겠다. 남쪽 지방에 변란이 일어날 때에도 마찬가지로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안국의 승명(僧名)은 회옥(懷玉)이며, 양시태는 안국의 친구로서 공모한 자입니다. 대개 정한·김안국·문일광·권대진·양시태·조철 등이 근간을 이루고 있으나, 그 가운데 정한이 주동자입니다. 그리고 정한의 형인 정숙(鄭潚)의 아들 정부(鄭榑)도 동모하였습니다."
하고, 권락(權絡)은 공초하기를,
"지난해 2월 조완(趙浣)의 집에 갔더니 조완이 한사코 만류해서 함께 잤는데 조완이 ‘변란이 있게 되면 너와 함께 뛰어들겠다.’ 하였습니다. 그 뒤 정후엄과 동행하다가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환속한 승려인 것 같았으며, 정후엄이 ‘이 사람은 풍수지리를 잘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자에 대해서는 완의 아비 조홍빈도 ‘그 승려는 사람의 관상까지도 잘 본다.’고 하였는데, 그가 바로 병이(丙伊)였습니다. 병이는 ‘좋은 기회가 필시 멀지 않아 있을 것이다. 조가(趙哥)란 자가 북쪽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성사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고, 정한(鄭澣)은 공초하기를,
"기사년에 양천식이 왔기에 문일광과 함께 정부(鄭榑)의 집에서 잤습니다. 이때 천식이 먼저 ‘탑전에 올라 남쪽을 누르고……’ 하는 시를 지었고, 나도 백설(白雪)이란 시를 지었습니다. 지난해 천식이 또 와서 말하기를 ‘금년은 국운이 가장 불길하여 무슨 일이 있을 것이고 15년 뒤에도 불길한 일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천식과 회옥이 말하기를 ‘평안도에 냇물과 못이 마르고 재변이 많으니 5월 사이에 병화(兵禍)가 있을 것인데, 7월 이내에 철병하지 않으면 변란이 있게 될 것이다. 전주(全州)의 이일명(李一命)과 김대해(金大海)는 다 쓸 만한 자들이다.’ 하였습니다."
하고, 문일광(文日光)은 공초하기를,
"약재를 구하러 정부의 집에 갔더니 승려 사성(師聖)과 승윤(勝允)이 자리에 있었는데, 자칭 바둑을 잘 둔다고 하기에 두 판을 두고 헤어졌습니다. 그 뒤에 또 정부의 집에 갔더니 그 두 승려가 자리에 또 있었는데 ‘진인(眞人)을 보지 못하였더니 가까이에 있지 아니한가.’ 하며, 이어 ‘머나먼 길 눈이 쌓여 막혔네.[長途阻積雪]’라는 시귀를 지어 주었습니다."
하고, 정부(鄭榑)는 공초하기를,
"무진년 봄에 거창(居昌)에서 집에 돌아왔는데, 어느 승려가 찾아 왔기에 누구냐고 물으니 ‘지리산에서 왔는데 산수 구경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누구를 찾아보려고 왔다.’ 하였으므로 그대로 유숙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승려가 말하기를 ‘지리산 아래에 가기(佳氣)가 있으니 신인(神人)이 나오게 되어 있다. 예전부터 허교(許喬)의 손자나 허의(許懿)의 아들 가운데 신인이 있다고 들었기에 찾아보려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8일 초저녁에 두 승려가 찾아 왔는데 그 중 하나는 전에 보지 못했던 자라서 이름을 물었더니, 태허(太虛)라고 하였습니다. 밥을 먹이고 유숙케 했는데, 이튿날 문일광도 왔기에 정한의 집으로 가서 잤습니다. 그 승려에게 나와 일광과 한의 관상을 보게 하자, 승윤(勝允)이 ‘정한의 상이 가장 좋다. 귀 아래에 줄줄이 반점이 있으니, 이것이 좋은 상인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일광이 나에게 ‘승윤의 손바닥에 붉은 반점이 있는데, 이것이 매우 기이하다.’고 하였습니다. 사성이 ‘전주에 이일명이란 자가 있는데, 그 자는 시운을 타고 태어났다.’고 하였으며, 또 ‘양시태란 자가 있는데, 양후영과 동성(同姓)으로서 또한 시운을 타고 태어난 자이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 7월 사이에 승윤이 환속하여 양천식이라 칭하고 와서는 정한과 밀담을 나누며 ‘전라도 영웅과 사귀고 싶다.’고 하였으며, 한은 또 ‘홍가(洪哥)란 자의 손아귀에 군사 1천여 명이 있는데, 이 내용을 박희집(朴禧集)에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회옥이 또 말하기를 ‘어느 곳에 김자중(金自重)이란 자가 있다.’고 하기에, 그가 있는 곳을 물으니, 자칭 자기의 이름이라고 하면서 김자중이라고 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교생(校生) 박희집(朴禧集)이 공초하기를,
"금년 정월에 홍성징(洪聖澄)이 집에 와서 ‘천재와 시변(時變)이 겹쳐 일어나니 세상 일을 알 만하다. 영천(榮川)에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가 많고 경기에도 있는데, 너도 같이 일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길에서 박흔(朴訢)과 유지수(柳之燧)를 만났는데, 그들이 ‘영천의 홍성징이 의기가 많아 장수가 될 만하다고 들었다. 한번 보고 싶으니 혹시 오거든 꼭 소식을 알려 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창녕인(昌寧人) 성지도(成至道)는 ‘형혹성(熒惑星)이 남두(南斗)에 들어 갔고 시운(時運)마저 불길하다.’고 하였으며, 박흔은 ‘요즘 각 고을의 천총(千摠)들을 대부분 전에 경력이 있는 자로 차출하니 나도 천총이 될 것이다. 만약 은혜와 의리로 맺어두면 누구인들 따르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징은 ‘강화도에는 군사 1백 명만 보내도 폐주를 모셔 올 수 있다.’고 하였으며, 여후망(呂後望)은 또 ‘고령(高嶺)에서 귀양살이할 때, 첨사 정여린(鄭汝麟)이 어느 날 밤 함께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박승종(朴承宗)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 지금 비록 이 직책에 임명되긴 하였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고, 홍성징(洪聖澄)은 공초하기를,
"전에 박광선(朴光先)의 집에 갔더니, 말하기를 ‘귀양살이하는 사람을 자주 이배(移配)시키니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떠나올 때 회양 부사(淮陽府使) 조찬한(趙纘韓)을 보았는데,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내가 지금 벼슬을 하고 있긴 하나 옛 임금을 잊을 수는 없다. 박로(朴𥶇)도 옛 임금을 그리는 마음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금년 봄에 희집(禧集)의 집에 갔더니, 말하기를 ‘지난 겨울 나의 할아버지를 적소(謫所)로 찾아가 뵙고, 인하여 귀양살이하는 심지청(沈之淸)을 만나 나의 옷을 벗어주면서 「언제나 옛 임금을 복위시킬 것인가.」 하니, 지청이 「우리가 얼마나 여기에 있겠는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여후망(呂後望)을 보았더니 ‘최내길(崔來吉)이 귀양사는 사람을 박대하는데, 어느 때나 이 놈을 죽일 것인가.’ 하였으며, 정여린(鄭汝麟)도 ‘내가 북병사만 되면 내 뜻을 펼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희집은 또 ‘성주(星州)의 박흔은 바로 지수의 6촌인데 나와 일을 같이 한다.’고 하였으며, 또 ‘성지도(成至道)는 점술에 능한데, 이괄(李适)의 난 때에 국운이 불길한 것을 점치고 이괄을 맞이하려고 떠났다가 3일만에 다시 성상의 팔자(八字)를 점쳐 보니 너무 좋아 머지 않아 회복되겠기에 돌아왔었다. 요즘 또 국운이 불길한 것을 점쳤기 때문에 합천(陜川) 사람들과 거사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작별하면서 희집이 또 말하기를 ‘성주(星州) 초군(哨軍)의 경우는 정담(鄭澹)이 천총(千摠)이 되었으니, 마병(馬兵) 2개 초(哨)를 강화(江華)에 보내 옛 임금을 모셔와야 하겠다. 다만 아들이 없으니 인성군(仁城君)013) 의 아들로 동궁을 삼아야 할 것이다. 전라도에서는 정여린(鄭汝麟)과 고용후(高用厚) 숙질간이 모두 우리를 따를 것이다.’ 하면서 용후의 시를 외웠습니다. 그 시는
‘대궐의 주인 새로 바뀌었는데
신하인 나는 아직도 살아 있네.
강촌에 나 홀로 돌아오고 보니
이 몸의 벼슬이 부끄럽기만 하네.’
이었는데, 이는 옛 임금을 생각한 시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꼭 박흔을 찾아보라고 하기에 돌아오는 길에 들렀더니, 흔이 말 한 마리를 주면서 ‘정인홍의 조카 중에 호남에 귀양간 자가 있는데 그 사람의 아들이 나에게 준 말이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성지도(成至道)는 공초하기를,
"기사년 겨울에 희집의 집엘 갔더니 희집의 5촌숙부인 종형(宗衡)과 서숙(徐淑)·성람(成欖)·송지술(宋知述)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희집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일광과 지수 및 합천 사람들과 거사를 꾀하고 있는데, 요즘 형혹성(熒惑星)이 남두(南斗)에 들어갔으니, 이것은 무슨 조짐인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사략(史略)》에 「형혹성이 남두에 들어가면 천자가 대궐에서 도망친다.」고 하였는데, 내가 아는 것은 그저 이 정도이다.’고 하였습니다. 희집이 ‘오랑캐들도 천상(天象)에 나타나는가?’ 하고, 또 ‘주상의 팔자는 어떠한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내가 전에 점을 쳐 보고 아주 좋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거사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였는데, 희집은 말하기를 ‘호란이 발생하면 일이 쉽게 성공할 것이다.’고 하면서, 술을 마시고 헤어졌습니다."
하고, 양환(梁桓)은 공초하기를,
"지수의 동생 지환(之煥)과 나의 첩의 집이 서로 가까워 절친하게 지낸 관계로 그들이 모의했던 일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창녕(昌寧)의 성지도는 점술에 능한데, 자기의 상에 대해서 스스로 말하기를 ‘구레나룻이 미간까지 뻗쳤으니, 당상과 가선대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이 수염이 상당히 길었기 때문에 감히 모의를 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성람은 폐조 때에 급제하였는데 반정 후에 삭과(削科)되었으므로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성주(星州)의 여효증(呂孝曾), 창녕(昌寧)의 성창리(成昌履) 및 박흔·정부·정니(鄭柅)·유지수 등이 천식과 정부의 집에서 함께 자면서 모의했습니다."
하고, 유지수(柳之燧)는 공초하기를,
"정부와 양환이 항상 집에 왕래하였습니다. 어느 날 부가 말하기를 ‘천식이 사람의 관상을 잘 보고 풍수설도 아는데, 정한과 금산(金山)을 왕래하면서 함께 역적 모의를 하고 있으니, 너는 그 사람과 생사를 같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양환은 말하기를 ‘어떤 승려가 호서(湖西)에서 왔는데 「진인(眞人)이 이 부근에 있어 찾아 보려고 한다.」 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이태경(李泰卿)의 일을 이야기하자, 부도 말하기를 ‘호남과 호서에 이일명(李一命)·권대진(權大進)이란 자가 있는데 같이 모의할 만하다. 영남에서는 최현(崔睍)이 모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현이 천식을 보고 영웅이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박희집의 동생 박경집(朴慶集)은 ‘허완(許完)·정여린(鄭汝麟)·김신국(金藎國) 형제들은 유효립(柳孝立)과 같이 일했는데 법망에서 빠졌다.’ 하였습니다."
하고, 이일명(李一命)은 공초하기를,
"나는 본래 천식과 절친했는데, 천식이 일반 사람들의 옷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기에 환속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큰일을 거행하려는 자가 있는데 내가 그 자를 따라야 하겠다. 전일 경상도에 가서 성인을 찾아보았는데, 성인이 남쪽에서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 때 내가 다시 올테니 너희도 준비하고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하고, 이정(李侹)이 공초하기를,
"일찍이 천식과 절친했는데, 천식이 ‘정한의 생김새가 웅대하고 훤칠하여 끝내는 귀인이 될 것이다. 대진은 그 집의 검은 말이 흰색으로 변하였으니 이것은 좋은 징조이다. 박흔은 경상도에서 병사를 모으게 되어 있다. 배상룡(裵尙龍)은 침착해서 큰일을 도모할 만하다. 그래서 모두 모의를 함께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고, 박광선(朴光先)은 공초하기를,
"홍성징이 와서 ‘내가 신라(新羅)를 세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한두 고을을 쳐부순다면 조정이 반드시 놀라 두려움에 떨 것이다. 그런데 호군(犒軍)할 주미(酒米) 15석을 마련했는데도 군사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한스럽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들은 모두 복주(伏誅)되었다. 국청이, 권순(權純)은 이미 모의의 내용을 알고 있었으니 율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상이 용서할 만한 정상이 없지 않으니, 3천리 밖으로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대신·금부·양사를 인견하고 옥사의 상황을 하문하니, 여러 신하가 역변을 모의한 흔적이 의심할 것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역적의 두목을 죽였으니 끝까지 다 다스릴 필요는 없다."
하고, 그 뒤에 또 하교하기를,
"이 무리들이 뜻을 잃어 앙앙불락한 나머지 서로 난을 일으키려 하였으니, 그 심사가 괘씸하고 그 죄도 죽여야 마땅하다. 다만 그들이 끌어댄 말들을 보면 진실과 거짓이 서로 섞여 있으니, 맹렬한 불길 속에 옥석을 구분할 수 없게 될까 하는 이 점이 매우 두렵다. 더구나 요즘 한재(旱災)가 무척 혹심한데, 이것은 무고한 자가 원통하게 죽는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많이 죽여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기보다는 조금 늦추어 그들 스스로 새로워지게 해 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들의 괴수는 이미 전형(典刑)에 복주되었으니, 나머지 조무라기들을 죽일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리고 한창 씨뿌리고 경작할 이 절기에 계속 잡아들인다면 필시 놀라 흩어져 농사를 망칠 염려가 있으니, 자세히 헤아려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국청이, 박종형(朴宗衡)·서숙(徐淑)·성람(成欖)·송지술(宋知述)·오익환(吳益煥) 등도 역적을 따른 정상이 있다는 이유로 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백성들이 원망하고 배반하는 것은 내가 임금답지 못한 탓으로서 위를 쳐다보고 아래를 굽어봐도 부끄럽고 두렵기만 할 뿐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겠다. 이 무리들은 모두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와 다름이 없으니, 묻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 옥사에서 승복(承服)하여 정형(正刑)에 처한 자는 정한 이하 30여 인이었으며, 장하(杖下)에 죽은 자는 양시태 등 10여 인이었으며, 유배된 자는 고용후 등 6인이었으며, 방면된 자는 최현·박로 등 50여 인이었다. 최현이 방면될 적에 상이 하교하기를,
"지난해 야대(夜對)할 때에 마침 미진하게 처치한 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그때 입시하여 극력 간쟁해 마지않았으므로 내가 꽤나 괴롭게 여겼다. 그런데 그 뒤에 생각해 보니, 참으로 나를 아끼는 자였다. 이번에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필시 초심(初心)은 저버리지 않았을 것이니 용서하여 방면하라."
하였다. 예조가 역적을 토멸한 경사로써 종묘에 고하고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다만 사면령을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백관에게 가자(加資)하고, 고변한 조흥빈은 당상관으로 승진시키고 한설은 6품의 실직(實職)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4책 24권 8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414면
- 【분류】변란-정변(政變) / 사법-재판(裁判)
- [註 011]
○丁未/沃川人趙興賓, 詣政院告變, 上下其書于賓廳, 遣禁府都事, 拿權大進、權繼、權絡、權純、鄭潭、楊天植ㆍ廷植、李賛希、鄭厚淹、朴先儉ㆍ後儉等十六人以來, 設鞫廳鞫之。興賓供稱: "近村有出身權大進者。 自己巳年間, 與妖僧二人及無賴之徒, 往來聚會, 蹤迹詭秘。 嘗言于衆中曰: ‘吾相極貴, 吾家地理亦吉。 午未年間, 當爲府院君’ 云, 皆疑其有異謀, 而莫測其端。 庚午正月, 大進之子絡, 醉到臣家, 密言于臣之子浣曰: ‘方今民怨日極, 大變亦慘, 時事可知。 今湖嶺有八大將, 同時起兵, 將圖大事。 汝若同我,富貴可致, 幸勿傳播, 潛自裝束’ 云。 臣子浣, 恐其致疑,答以溫言。絡旣去, 臣與弟熙賓, 往見大進問之, 則言: ‘吾家黑馬變白。 讖記中有白馬將軍之說, 是乃興家之祥也’ 云,而諱不言八將之說。 其後浣與權絡、權繼往來, 問之則云: ‘楊天植ㆍ廷植及李賛希等, 爲謀主而徒黨甚多。 約先起兵於湖嶺間, 稱以倭來, 則渠父與諸人, 名以討賊起兵, 直擣京城’ 云。 且言: ‘嶺南有鄭姓人, 相貌奇異, 兩肩有日月狀。 當推此人爲主, 而居在伽倻山下, 其名則潭, 【潭字誤。 厥後賊招, 皆稱鄭澣。】 其年則壬午生’ 云。 楊天植、李賛希者, 往來謀議, 而皆是以僧還俗者云。 渠輩相約以爲: ‘前日見敗之徒, 皆以文書發覺。 吾輩則只面約, 雖或被捉者死, 而餘存者當繼起’ 云。" 公淸監司鄭孝成, 又以公州人韓渫所告馳啓, 大槪與興賓所告同, 而其中 "楊丙卽天植, 楊彭卽廷植也。 丙等三變其名, 十年之間, 三爲僧, 三退俗。" 又有 "文日光、李賛希, 鄭仁弘之姪鄭溜、鄭澮、鄭渝及湖西將軍金自重者, 而自重則當於起軍之後, 因場市作亂, 先斬稷山、溫陽、天安等倅, 奪其軍, 以助聲勢云。"楊彭云: "鄭潭以爲: ‘得國後, 當移都鎭岺、新都’ 云。" 告者韓渫供稱: "壬生卽渠之孽弟, 而彭伊、丙伊之異父同母兄弟也。 壬生學書于僧慈藏, 居公州 妙覺寺。 己巳年八月, 來到其家, 密語曰: ‘丙、彭, 與大進、賛希等, 來會于所居僧房, 夜深後相與謀逆, 渠陽爲熟睡而聞之’ 云。 其年十月, 丙伊來見言: ‘己未年間, 往智異山讀書, 一日得見異人, 姓鄭名潭, 此果新都主人也。’ 將行, 以詩贈之曰: ‘坐榻南藩壓, 威權繞北斗’ 云云。 前年春, 彭伊來見臣, 密問: ‘汝兄所爲者, 何事?’ 云, 則答以 ‘吾兄以爲: 「吾等起於東方, 東方屬靑, 汝之戰服, 亦須用靑色。 云。’ 所與同謀者, 則寶城 文日光、沃川 權千摠、京圻則有洪繼男第二子爲大將, 而賛希、自重, 皆與同謀。 前月欲擧事, 與術士,到京中見之, 則宮闕正在吉地, 王氣未衰, 不可輕動, 故還寢, 而仍往雞龍山, 泛鐵相宅, 以爲定都之計。 義立、仁立, 卽大進之子, 而力贊其事。 鄭厚淹, 彭伊所親; 李守男, 賛希之同生; (曹二男)〔曺二男〕 , 賛希之切族, 而皆參兇謀云。" 壬生所供, 槪與上同, 而大進子仁立, 卽繼也; 義立, 卽絡也。 鄭厚淹供稱: "此皆出於賛希。 賛希初言于大進末子, 使言于其父大進曰: ‘此事初雖難辦, 吾是領兵者, 臨時, 豈無倒戈之便乎? ’ 先儉、後儉, 亦與賛希及楊姓者, 【卽天植。】 會大進家, 留宿謀議云。" 權繼供稱: "鄭厚淹來言曰: ‘楊姓者首倡此事, 往慶尙道募兵, 嶺南多有同謀者’, 而有鄭哥, 身有日月狀云, 德山有趙哥, 其人如古之崔瑩云。 賛希之族金姓者, 在公州, 曾爲把摠, 亦與同謀云。" 權純供稱: "大進雖是叔父, 而不能頻數相見。 且不文、不武, 有何預知之事乎? 云。" 大進奴永伊供稱: "還俗人楊姓者, 來見大進曰: ‘深沈可爲將帥者, 莫如權千摠。’ 云。 厥後聞, 南原盜起, 千摠喜曰: ‘國家已有事, 吾當領軍, 與南原兵, 會于中路, 直向京城’ 云。 沃川居庶孽壬生, 出身朴男、周名世、南信祿, 新選全今世, 皆預其謀云。" 先儉供稱: "己巳年, 有僧自稱善相人, 來大進家, 觀其相曰: ‘甚好。’ 去冬末又來言: ‘庚午是吉年, 今已過矣。 然此後, 豈無好時乎?汝果是白馬將軍’, 大進以此言之云。" 天植供稱: "戊辰春,居井邑 內藏山寺, 有金安國者以供佛, 持祭文來。 其文曰: ‘鶴髮在堂, 尙不報劬勞之德; 龍鬪有數, 迄未蒙眷顧之恩。年將三十秋, 壯懷未展期。 臻一千載, 河水再淸。 時逢太平之日, 民有鼓腹之秋。 獲覩天顔, 有玉音於嘉汝之恩; 得拜丹墀, 題姓名於竹帛之上。 告以倘來之迷塗, 指以未知之機事。 故將香火, 仰瀆威神’ 云。 見此文而怪之, 問其意, 則安國曰: ‘大小北皆會, 將擧大事, 而又有異人, 此則鄭澣也。 不久當有好事, 汝可同我’ 云。 遂偕往鄭澣家, 乃見坐榻南藩壓之詩。 轉往淸州, 見出身趙澈, 澈則八大將之一也。 蓋以安國曾言: ‘趙也擧事’ 云, 故要看其相, 而往也。安國又云: ‘淳昌 楊時泰, 亦與同事。’ 且戊辰年, 自澣家還, 與賛希, 往大進家則曰: ‘吾姪子家, 雌鷄化雄, 吾家黑馬變白’ 云。 吾卽曰: ‘君是白馬將軍也。’ 大進又曰: ‘戊辰三月, 欲起兵, 而適値告變, 不能發。’ 蓋澣等初與孝立輩連謀, 而孝立等之死, 澣得獨免者, 各有派脈故也。 前年八月, 又欲發, 而因韓會之獄, 澣黨多死, 故未發矣。 初, 與韓會相約, 北方有變, 則澣等當乘此機而發矣。 安國初見鄭澣, 欲探其意, 以渠之名爲楊後瑩而見之曰: ‘崔瑩後身, 今亦有之’ 云, 則澣曰: ‘北方有變, 則吾輩當從南而起; 南方有變, 亦如之’ 云。 安國僧名懷玉, 楊時泰, 則安國之所相親, 而同謀者也。 蓋鄭澣、金安國、文日光、權大進、楊時泰、趙澈等, 乃其根柢也, 鄭澣爲謀主, 澣之兄潚之子榑, 亦同謀云。" 權絡供稱: "前年二月, 往趙浣家, 則固留同宿, 仍言: ‘有亂則當與若同赴’ 云。 其後與鄭厚淹同行, 路遇一人, 似是還俗僧。 厚淹曰: ‘此人善相地’ 云。 浣之父興賓又言: ‘其僧且善相人’ 云, 乃丙伊也。 丙伊曰: ‘好時必不遠。 有趙姓人, 起於北方, 則可以成事’ 云。" 鄭澣供稱: "己巳歲, 天植來見, 與文日光同宿於鄭榑家。 天植先作詩曰: ‘坐榻南藩壓’ 云云, 渠又作白雪之詩。 前年天植又來言: ‘今年國運最不吉, 當有某事, 十五年後, 又當有不吉之事’ 云。 天植、懷玉又曰: ‘平安道川澤枯渴, 多有災變,五月間當有兵禍。 七月之內, 若不撤兵, 則當有變亂。 全州 李一命、金大海, 亦皆可用’ 云。" 文日光供稱: "爲覓藥材, 往鄭榑家, 僧人師聖、勝允在座。 自言善奕, 對着二局而罷。 其後又往榑家, 則兩僧又在坐言曰: ‘未得見眞人, 無乃在近否?’ 仍贈以長途阻積雪之詩云。" 鄭榑供稱: "戊辰春, 自居昌還家, 有僧來謁。 問之則曰: ‘來自智異山, 而非爲遊山, 有欲訪見者矣。’ 因留宿。 僧曰: ‘智異山下有佳氣, 神人當出。 故曾聞許喬之孫, 許懿之子有神人, 以此欲訪見之’ 云。 其後八日初昏, 兩僧來見, 一則曾所未見, 問其名則曰太虛, 饋飯留宿。 翌日文日光亦來, 往宿于澣家。 榑與日光、澣, 使僧相之, 勝允曰: ‘澣相最好。 耳下有疊疊痕, 此好相也。’ 其後日光謂榑曰: ‘勝允之手, 掌有赤痕, 此甚奇’ 云, 師聖曰: ‘全州有李一命者, 其人應時而生, 又有楊時泰者, 楊後瑩之同姓, 亦是應時之人’ 云。前年七月間, 勝允還俗, 稱楊天植而來, 與鄭澣密語, 欲交結全羅道英雄, 云。 澣又曰: ‘洪姓者手下, 有軍千餘人, 此意言于朴禧集’ 云。 懷玉且言: ‘一處有金自重者’ 云, 問其在處, 則自言吾名, 欲以金自重稱之云。" 校生朴禧集供稱: "今正月, 洪聖澄來到其家曰: ‘天災時變層出, 時事可知。 榮川多有與我同心者, 京畿亦有之。 汝亦宜同事’ 云。 其後路遇朴訢、柳之燧則曰: ‘聞榮川 洪聖澄, 多有義氣, 可爲將帥。 願一相見, 如或來, 須相報知’ 云。 且昌寧人成至道曰: ‘熒惑入南斗, 時運且不吉。’ 朴訢曰: ‘近來各邑千摠, 多差以前銜, 吾當爲千摠。 若結以恩義, 孰不從乎?’ 聖澄曰: ‘江華則只送兵百人, 可以奉還廢主’云。 呂後望且言: ‘謫在高嶺時, 僉使鄭汝麟, 夜與同坐, 墮淚曰: 「吾受朴承宗厚恩。 今雖授此任, 常有爲國之心」 云’" 洪聖澄供稱: "曾往朴光先家則曰: ‘謫客數被移配, 何以堪之?’ 出來時, 見淮陽府使趙纉韓, 則墮淚而言曰: ‘吾今雖仕宦, 不能忘舊主, 而朴𥶇亦多戀舊主之心’ 云。 今年春, 往禧集家則言: ‘去冬往覲祖父謫所, 仍見謫客沈之淸,解衣給之曰: 「何時復舊主乎?」 之淸曰:「吾輩亦幾何在此?」, 又見呂後望則曰: ‘崔來吉薄待謫客, 何時殺此漢乎?’ 鄭汝麟亦曰: ‘吾若得北兵使, 可以伸吾志’ 云。 禧集又言: ‘星州 朴訢, 卽之燧之六寸, 而與我同事’ 云。又曰: ‘成至道善占術。 适變時, 占國運不吉, 將欲迎賊, 發行三日, 又占聖上八字, 則極吉, 恢復不遠, 故還歸矣。 近來又占, 國運不吉, 故與陜川人等將擧事’ 云。 臨別又言: ‘星州哨軍, 則鄭澹爲千摠, 當以馬兵二哨, 送于江華, 奉舊主出來, 而但無子, 當以仁城之子爲東宮矣。 全羅道則鄭汝麟、高用厚叔姪, 皆當從之。’ 仍誦用厚詩云: ‘北闕更新主, 小臣餘此生。 江村獨歸處, 身上愧簪纓。’ 是戀舊主之詩也。 且言必須往見朴訢, 故來路果見之, 則訢以馬給之曰: ‘仁弘之姪, 有謫湖南者。 其子以此馬給我’ 云。" 成至道供稱: "己巳冬, 往禧集家, 則禧集之五寸叔宗衡及徐淑、成欖、宋知述皆來會。 禧集曰: ‘吾輩與 日光、之燧及陜川人同謀擧事。 近來熒惑入南斗, 此何象耶?" 答曰: ‘《史略》云:「熒? 腎恤皺軗 天子下殿走」 云。 所知, 只此而已。’ 禧集曰: ‘虜亦應天象耶?’ 又曰: ‘主上八字如何?’ 答曰吾嘗推占, 知爲極吉, 似難擧事。’ 禧集曰: ‘若有胡亂, 事可易成。’ 仍與飮酒而罷云。" 梁桓供稱: "之燧之弟之煥, 與其妾家相近, 往來親切。 所謀之事, 曾所預知。 昌寧 成至道善占術, 自言其相: ‘髯及於眉間, 則當爲堂上嘉善, 而近來其髯頗長, 故敢生兇謀。’ 成欖廢朝時及第, 而反正後削科,有怨國之心。 星州 呂孝曾、昌寧 成昌履及朴訢、鄭槫、鄭柅、柳之燧等, 與天植, 同宿于鄭榑家, 而結謀云。" 柳之燧供稱: "鄭榑、梁桓常往來其家。 一日, 榑曰: ‘天植善相人,亦曉風水。 與鄭澣往來金山, 共謀兇逆, 汝可與其人, 同死生’ 云, 桓則曰: ‘有僧自湖西來言: 「眞人在近地, 將欲訪見」 云。’ 又以李泰卿之事言之, 榑亦言: ‘湖南、湖西有李一命、權大進者, 可與同謀。 嶺南則崔睍爲謀主。 睍見天植, 稱爲英雄’ 云。 朴禧集之弟慶集則曰: ‘許完、鄭汝麟、金藎國兄弟, 與柳孝立同事, 而網漏’ 云。" 李一命供稱: "本與天植極切, 天植乞製給俗衣曰: ‘吾有所爲之事, 欲還俗矣。’ 問其爲何事則曰: ‘有擧大事者, 吾當往從之。 頃往慶尙道, 訪見聖人。 聖人當自南而起。 其時吾當更來, 汝等須整理而待之’ 云。" 李侹供稱: "曾與天植相切, 天植曰: ‘澣相貌魁碩, 終爲貴人。 大進則其家黑馬變白, 此眞瑞也。 朴訢則當於慶尙道聚兵。 裵尙龍則沈重可謀大事, 故皆同兇謀云。" 朴光先供稱: "洪聖澄來言: ‘吾以復立新羅爲號, 打破一二縣邑, 則朝廷必震恐。 且備犒軍酒米十五石,而以未得軍兵爲恨’ 云。" 竝伏誅。 鞫廳以爲: "權純旣已知情, 宜伏其律。" 上以不無可恕之道, 命流三千里。 上引見大臣、禁府、兩司, 問以獄情, 諸臣對以逆狀無疑。 上曰: "旣殲渠魁, 不必窮治。" 其後又下敎曰: "此輩失志怏怏, 相與思亂, 其心可惡, 厥罪當誅, 但援引之辭, 眞贗相雜,火炎之烈, 玉石難辨, 此甚可懼也。 況近日旱災甚酷, 此豈非無辜冤死而然也? 其與多殺而致傷和氣, 莫若小緩而開其自新也。 渠魁旣伏典刑, 其餘枝, 倘似不必盡誅。 當此耕種之節, 連續拿來, 則必有駭散失農之患, 商量以啓。" 鞫廳以朴宗衡、徐淑、成欖、宋知述、吳益煥從逆之狀, 請拿問, 答曰: "民之怨叛, 由予不辟。 俯仰慙懼, 無以爲心。 此輩皆與脅從無異, 竝勿問。" 是獄, 承服正刑者, 鄭澣以下凡三十餘人; 斃於杖下者, 楊時泰等十餘人; 定配者, 高用厚等六人; 放送者, 崔睍、朴𥶇等五十餘人。 崔睍之被釋也, 上下敎曰: "頃年夜對時, 適有處置未盡之事。 此人適入侍, 力爭不已, 予頗苦之。 厥後思之, 眞是愛我者也。 今雖被罪, 必不負初心, 分揀放送。" 禮曹請以討逆之慶, 告廟、陳賀, 上只命頒赦, 加百官資, 陞授告變人趙興賓堂上, 韓渫六品實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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