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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9권, 인조 3년 4월 11일 무자 4번째기사 1625년 명 천계(天啓) 5년

전 대사헌 정엽의 졸기. 그의 유차

전 대사헌 정엽(鄭曄)이 졸(卒)하였다. 정엽의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인데, 용모가 준수하고 기국이 웅걸했다. 일찍이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 종유하여 조예가 더욱 깊었다. 가정에 있어서는 효우가 돈독하였고 부모를 섬기는 일이나 장제(葬祭) 등은 일체 《가례(家禮)》를 따랐다.

선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안팎의 관직을 두루 거치고 명망이 높이 드러났으나, 성품이 본래 남과 타협하는 일이 적었다. 그래서 기자헌(奇自獻)에게 미움을 사서 폄출(貶黜)되기도 하고 법망(法網)에 걸리기도 하였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광해군도 그의 명망과 행실을 중히 여겨 상당히 등용하였다. 정엽광해의 문란한 짓이 날로 심해지는 것을 보고 힘써 외직으로 나갈 것을 구하였고 인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광해가 누차 벼슬에 나올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인조의 반정을 듣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바로 종사(宗社)를 부지하고 윤기(倫紀)를 바로잡는 의거인데 나같은 졸렬한 자는 다만 떳떳한 분수를 지키는 것이 마땅할 뿐이라고 하고, 조정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광해가 스스로 천명(天命)을 단절 하였으니 뭇 신하들은 또한 곡읍(哭泣)하며 전송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이들은 아연 실색하였고, 훈신(勳臣) 중에서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있었으므로 정엽은 드디어 병을 핑계하고 시골로 돌아갔다.

상은 그가 크게 쓸 만한 인재임을 알고 누차 발탁하였는데, 항상 대사헌 겸 대사성으로 학제(學制)를 제정하고 과업(課業)을 권장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입시하여 최명길(崔鳴吉)에게 자신의 형에게 사정을 둔 일을 면대해서 지척하니, 조정이 숙연해졌다. 그는 또 원자(元子)의 보양관(輔養官)을 겸하여 경회(警誨)하는 일을 간절하게 하니 원자가 경탄(敬憚)해 마지않았다. 원자가 동궁이 된 뒤에는 인하여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겸하였다. 그 뒤 숭정 대부의 품계에 차서를 뛰어 제수되었는데 얼마 안 가서 작고하였으므로 상이 매우 애도한 나머지 세자와 소선(素膳)을 들었다. 그의 손자 정원(鄭援)이 유차(遺箚)를 올렸는데 대략에,

"신은 질병이 침중하여 임금을 배알할 길은 없으나 임금의 잘못과 나라의 걱정이 마음에 걸려 잊기 어려운데 어찌 감히 소회(所懷)를 숨김으로써 큰 성은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백성에게 거두는 것이 절도가 없으므로 원근의 백성들은 탄식하고 있고 군대는 헛되고 장부만 있을 뿐이므로 전수(戰守)에 아무런 계책이 없으며, 기강이 해이해져 모든 직책이 실추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오늘날의 고질입니다만 신이 걱정하는 것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걱정할 것은 오직 전하의 한 마음에 대한 그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강론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이치를 살피는 데에 정밀하지 못한 점이 있고, 사욕을 극복하는 일이 엄격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심을 버리는 데에는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그런 때문에 명령을 내리고 조처를 시행하는 데에 공과 사가 서로 뒤섞이고 하자와 과오가 마구 발생하니 신은 삼가 개탄하는 바입니다.

지금부터는 맹렬하게 허물을 반성하여 자책하시고 중앙과 지방에 고하여 널리 직언을 채취하되, 자신을 깨우치는 일에 언급된 것이라면 과감하게 고치고, 폐단을 개혁하는 일에 언급된 것이라면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하소서. 또한 학문을 강론하는 자리에서나 한가히 계시는 가운데서는 신하들을 소대(召對)하여 백성을 안보하고 군사를 훈련하는 방법을 강론하셔서 먼 장래를 위하는 계책과 자손의 안락을 위하는 모책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상이 이 유차를 보고는 비탄해 마지않았다. 논자(論者)들은 "정엽이 이기고자 하는 병통이 있었고 또 중년에는 재물에 뜻을 두는 일을 면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면
  • 【분류】
    인물(人物)

○前大司憲鄭曄卒。 時晦, 號守夢。儀觀秀偉, 器度峻整。 早有志於爲己之學, 從遊於栗谷 李珥牛溪 成渾之門, 造詣益深。 居家孝友純篤, 生事、葬祭, 一遵家禮。 登第於宣祖朝, 歷敡內外, 聲望茂著, 而性本寡合, 見忤於奇自獻, 或被貶黜, 或扞文罔, 而不少撓。 光海亦重其名行, 頗進用, 見其謬亂日甚, 力求外, 仍歸田里。 光海累責之, 終不起。 聞有靖社之擧, 謂人曰: "此乃扶宗社、樹倫紀之義擧, 而如吾踈拙者, 但當守常而已。" 及赴朝揚言: "光海雖自絶於天, 群臣亦宜哭送", 聽者失色。 勳臣有不悅者, 遂謝病歸。 上知其可大用, 屢加寵擢, 常以大司憲兼大司成, 條定學制, 勸課不怠。 嘗入侍, 面斥崔鳴吉之私於其兄, 朝廷肅然。 又兼元子輔養官, 警誨切至, 元子敬憚之。 元子旣正位東宮, 仍兼右副賓客。 其後超授崇政階, 未幾卒, 上甚悼惜之, 與世子皆進素膳。 其孫, 進其遺箚。 略曰:

臣大病沈綿, 瞻天無路, 而君違、國憂, 耿耿難忘, 何敢隱懷, 以負鴻恩? 目今取民無節, 遠近嗷嗷; 兵擁虛簿, 戰守無策; 紀綱渙散, 衆職解墜。 凡此三者, 今日之痼疾, 而臣之所憂, 猶不在此, 則大可憂者, 其惟殿下之一心乎! 殿下之講論非不勤, 而察理有所未精; 克治非不嚴, 而去私有所未盡, 故宣之命令, 發之施措者, 公私相雜, 疵累橫生, 臣竊慨歎。 請自今赫然雷厲, 引咎自責, 誕告中外, 廣採直言, 言及警躬, 則有改無勉; 言及革弊, 則捨短取長。 亦於講學之筵, 燕閑之中, 召對諸臣, 講論保民、詰戎之道, 以爲經遠之圖, 貽厥之謨。

上覽之, 悲歎不已。 議者謂, 頗有好勝之病, 且中年, 未免經意於貨財云。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