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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8권, 인조 3년 3월 4일 임자 2번째기사 1625년 명 천계(天啓) 5년

지사 정경세가 공주의 제택에 관한 일 등을 논하며 왕에게 아량을 가지라고 아뢰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지사(知事)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신이 마음속으로 온당치 못하게 여기는 것이 있는 바, 감히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사이 전하께서 대간을 대함에 있어 조금도 허심탄회하게 받아주시는 아량이 없으십니다. 만일에 들어줄 수 없는 일이라면 간곡하게 타이르셔도 될 것인데, 어찌 반드시 엄준한 말로 곧은 기개를 꺾으신단 말입니까.

공주의 제택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대신들이 전하를 친애하여서 그런 논계를 한 것입니다. 어찌 전하께서 친족을 친애하시는 뜻을 이간하려는 것이 있었겠습니까. 지난 광해조 때 공주가 혼인 시기를 넘기게 되자 온 나라 신민들이 모두 울분을 품었었습니다. 이번에 성상께서 화목하게 지내시려는 의리에 대하여 조정 신하들이 누군들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흉년이 들고 병란이 있은 뒤에 너무도 사치스럽게 제택을 지어, 역군을 모집하고 역사를 감독하느라 폐해가 여염에 미치고 목재와 석물의 운반이 사방 거리에 잇달았습니다. 이에 도로에서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폐조 때의 궁궐 역사를 다시 보는 것처럼 여기고 있는데, 대간이 어찌 아무 말없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수사 노비를 복호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신도 또한 일찍이 진달했었습니다. 지난 번에 성상께서 ‘해조가 내수사 노비를 원수처럼 본다.’고 분부하셨는데, 신료들이 내수사 노비를 원수처럼 본 적이 없는데 어째서 이런 분부를 내리셨습니까. 선조 대왕께서 즉위하신 초에 내탕금(內帑金)을 내어 서실(書室) 하나를 지으시자 옥당이 차자를 올려 간언했는데, 선조께서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어떤 대신이 ‘전하의 지혜는 간하는 말을 막을 수 있고 말씀은 잘못을 꾸밀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곧 주(紂)와 같다는 말이었는데도 선왕께서 죄주지 않으셨으니, 임금의 포용하는 아량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왕께서도 말년이 되자 크게 초년과 같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지 겨우 2∼3년밖에 안 되었는데도 이미 처음과 같지 않으시니, 신은 참으로 근심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주의 제택은 자전께서 지어 주는 것이고 영안위(永安尉) 자신이 세우는 것이 아니다. 내가 공가(公家)의 것으로 지어 주어야 마땅한데, 국가의 저축이 고갈되어서 그러지 못하였으므로 마음에 매우 미안하였었다. 이번에 자전께서 이 논계를 들으시고서 역사를 정지시키셨으니, 내가 더욱 마음이 편치 않다."

하였다. 검토관 나만갑(羅萬甲)이 아뢰기를,

"신하된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으면 어찌 감히 진달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인성군(仁城君)이 나갈 때 옥교(屋轎)를 탔다고 합니다. 비록 귀한 왕자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죄인인데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광해는 폐출된 임금인데도 가교를 타지 못했는데 어찌 인성군만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가 호송하고 도사(都事)가 배행한 것도 타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이 신중히 해야 할 것은 상벌입니다. 지난 번 소방(疏放)할 때 폐모론(廢母論)을 전담하고 권간에게 붙었던 자는 방면되고 한 차례 정청(庭請)에 참여한 사람은 방면되지 못했으니, 이는 해괴한 일입니다. 윤휘(尹暉)처럼 탐학스럽고 아첨한 죄인이 사면되었는데도 대각(臺閣)이 논하지 않았으니, 신은 대각의 기풍이 점점 전일만 못하여 사정이 앞선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685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주생활-가옥(家屋)

○上晝講《孟子》資政殿。 知事鄭經世曰: "臣心有所未安者, 敢不盡言乎? 近日殿下之待臺諫, 略無虛受之量, 事若不可從, 則委曲開諭可也, 何必以嚴辭峻旨, 摧折直氣哉? 公主第宅一事, 蓋臺臣愛殿下而發此論, 豈有欲間殿下親親之意耶? 往在光海朝, 公主婚嫁過時, 一國臣民, 皆懷憤鬱。 今者聖上敦睦之義, 廷臣孰不感歎, 但歲飢兵亂之餘, 營第太侈, 募軍董役, 弊及閭里, 搬運木石, 絡繹四街。 道路觀者, 皆以爲復見廢朝時宮闕之役, 臺諫安得默然而已。 內奴復戶之弊, 臣亦曾陳達矣。 頃者自上有該曹仇視內奴之敎, 臣僚何至仇視內奴, 而乃有此敎乎? 宣祖大王卽位初年, 出內帑構一書室, 其時玉堂上箚以諫, 則宣廟不聽。 有一臺諫曰: ‘殿下智足以拒諫, 言足以开非。’ 此乃指紂之辭, 而先王不以爲罪, 可見聖人包容之量矣。 然猶先王末年, 大不如初年。 今殿下則卽位纔二三年, 已不如初, 臣實憂之。" 上曰: "公主第宅, 方自慈殿造給, 非永安尉之所自建也。 予當自公家, 營建以給, 而因國儲蕩竭, 不果焉, 心甚未安。 今者慈殿, 聞此論, 至使停役, 予益不安于心矣。" 檢討官羅萬甲曰: "人臣有懷, 何敢不達乎? 今者仁城之出去, 駕以屋轎云, 雖曰王子之貴, 今爲罪人, 安得如是乎? 光海以廢君, 亦不得駕轎, 則何獨於仁城如此哉? 至於監司護送都事陪行, 亦未妥矣。" 又曰: "人君之所愼者, 賞罰而已。 頃者疏放之時, 擔當廢論, 附托權奸者, 至被放釋, 一番隨參者, 亦不蒙赦, 此可駭也。 以尹暉貪虐縱臾之罪, 亦在放赦之中, 而臺閣不論, 臣謂臺閣之風, 漸不如前日, 而私情太勝也。"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685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주생활-가옥(家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