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인조실록 8권, 인조 3년 2월 26일 을사 2번째기사 1625년 명 천계(天啓) 5년

대신과 간원이 인경궁을 훼철하자는 등의 논을 올리다

간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정명 공주(貞明公主)의 저택을 본가(本家)에서 경영하여 짓는다고는 하지만 공역(功役)에 있어서는 백성을 수고롭힘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공사(公私)간에 재물이 바닥이 난 때에 50칸이 넘어서는 안 되는 제도를 어기고 있으니, 국법상 금단해야 마땅할 것인데, 더구나 백성을 번거롭게 하면서까지 공사를 진행하는 경우이겠습니까. 저번에 운반하는 일을 지체시켰다는 이유로 해당 관원을 파직하기까지 하였으므로 신들이 바야흐로 온당치 못하다는 뜻을 논계하려 하였는데, 성상께서 바로 뉘우치시고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셨으니 이것이야말로 훌륭하신 덕에서 우러나온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뉘우치시게 된 계기에 공주 저택의 간가(間架)의 수도 감하시어 국법을 엄하게 하소서.

이번 조사(詔使)의 행차야말로 우리 동방의 큰 경사이니 은명(恩命)을 받들어 영접함에 있어서 온 나라의 힘을 다 쏟는다 하더라도 어찌 고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근년 이래로 해마다 곡식이 여물지 못하고 목화 농사도 크게 망쳤으므로 백성의 힘이 고갈되어 죽음을 면할 겨를도 없는데, 허다하게 써야 할 물건들을 어떻게 조치하여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나라 전체가 절박하게 돌아가는 황급한 상황을 생각하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서늘해지며 간담(肝膽)이 찢어지는 듯 합니다. 진정 조금이라도 백성의 힘을 펼 길이 있다면, 국가에 중요한 관계가 있는 물건이라 하더라도 출연(出捐)하여 보조해 주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쓸 데가 없고 손해만 있는 경우이겠습니까.

신들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인경궁(仁慶宮)은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10년을 경영해 왔으니, 반정(反正)한 뒤에 즉각 훼철(毁撤)했어야 마땅한데, 지금까지 그대로 두어 한갓 수직(守直)하는 폐단만 끼치고 있습니다. 창롱(窓櫳) 등 철물(鐵物)을 태반이 도둑 맞았는가 하면 쓰다 남은 목재와 기와도 날마다 썩어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따라서 지금 전각(殿閣)을 훼철하여 쓰다 남은 목재와 기와를 합쳐 화매(和賣)하고 집터를 본 주인에게 돌려 준다면,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열복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영접하는 비용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니, 유사에게 회부하여 따로 상명(詳明)하고 근실하고 염근(廉謹)한 사람을 가려 화매하는 일을 주관하게 하소서.

연서역(延曙譯)의 관사를 번번이 기읍(畿邑)으로 하여금 다급할 때에 임박하여 경영하게 하므로 갑절이나 공력을 허비하게 되어 애달프기 짝이 없으니, 낭무(廊廡) 두어 칸을 훼철한 뒤 그 목재와 기와를 줌으로써 잔약한 백성에게 조금이라도 폐해를 덜어 주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군(大君)과 공주가 살 저택은 해조에서 영선(營繕)하는 것이 고례(古例)이다. 이번에 그 집을 개인의 재력으로 짓고 있어 내 마음에 미안하게 여겨졌는데, 공가(公家)의 물력이 고갈되었기에 감히 해사에 말을 하지 못했다. 본가(本家)에서 스스로 영조(營造)하는 일은 조금도 국가와 관계가 없는데, 그대들이 매양 이 일을 논하여 나의 친친(親親)하는 도리를 이간하려고 하니, 그 의도를 실로 헤아릴 수가 없다. 만일 다시 논계하면 해조록 하여금 그전의 준례대로 지어 주도록 하겠다.

그리고 인경궁을 훼철하는 일은 대신들과 의논하여 결정하겠다. 연서역의 관사를 지을 목재와 기와는 해조로 하여금 전일에 훼철한 목재와 기와 중에서 형편대로 제급(題給)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인경궁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창건한 것이니 훼철하자는 논은 정당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창덕(昌德)·창경(昌慶) 두 궁이 모두 완전하지 못하니 이 궁은 그대로 두고 훼철하지 않는 것이 합당할 듯 합니다. 별당(別堂) 등 쓸데없는 곳이라면 헐어서 비용에 보태 쓰도록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신의 의논대로 시행하라. 별당은 많지 않으니 또한 훼철할 것이 없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과거의 역사를 살펴 보건대 공자(公子)나 왕손(王孫)들의 저택이 제도를 벗어나 무도하게 사치스러웠던 경우에는 귀신이 엿보는 재앙을 거의 면하지 못하고 끝내는 전복되고 말았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전(慈殿)이 광해(光海)가 패란한 짓을 할 때에 갖갖 위해(危害)와 모욕을 받았는데, 그때 공주가 이미 혼기(婚期)를 넘겼지만 오히려 상대를 택하는 일도 거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오늘날에 와서야 출합(出閤)하게 되었으니 두려워하고 삼가하는 마음이 반드시 일반 사람들보다 몇 배는 될 것인데, 겨우 한 해가 지나고나자 그만 욕심을 채우려는 뜻이 가득하게 되었다.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도 일에 따라 제대로 몸을 단속하지 못한 채 마침내 산택(山澤)의 이익을 독점하는 짓을 하여 침탈하는 폐해가 여염에까지 미치게 하고, 제언(堤堰)이나 토목 공사에 있어서도 모두 개인적인 일로 민간에 폐해를 끼친 일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투어 심각하게 비난했는데도 자전은 사랑에 빠져 있고 주상은 자전의 뜻을 받들기에만 전념하며 민간이 피해받는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683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종사(宗社) / 정론-간쟁(諫諍) / 외교-명(明) / 건설-건축(建築) / 주생활-가옥(家屋)

○諫院啓曰: "今此貞明公主之第, 雖云自本家營造, 而若其功役則未免於勞民。 當此公私赤立之日, 踰越五十間之制, 其在國法, 宜有所禁, 況可煩民而助成之哉? 頃以搬運之遲, 至罷該官, 臣等方欲論啓其未安之意, 而聖心旋悔, 成命還收, 此實盛德事也。 請因悔端之發, 裁減公主第宅間架之數, 以嚴國法。 今此詔使之行, 實爲吾東之大慶。 其所以承迎恩命者, 雖竭一國之力, 亦何所顧念。 但近歲以來, 年穀不登, 木花大無, 民力竭盡, 救死不暇, 許多費用之物, 何以辦措? 坐想四方遑遑悶迫之狀, 不覺心寒而膽裂也。 苟有少紓民力之道, 則雖國家關重之物, 亦可出捐而補助, 況其無用而有害者乎? 臣等竊念仁慶之宮, 剝民膏血, 經始十年, 反正之後, 卽宜毁撤, 而今尙存之, 徒貽守直之弊。 窓櫳鐵物, 太半偸竊, 用餘材瓦, 日就朽敗。 今若撤毁殿閣, 幷其用餘材瓦而和賣, 還給家基於本主, 則非但民心之悅服, 必有大補於迎接之用, 請付有司, 別擇詳明勤幹廉謹之人, 使之主管和賣之事。 延曙館舍, 每使畿邑, 臨急經營, 倍費功力, 極可矜惻, 請撤給廊廡數間材瓦, 以減殘民一分之弊。" 答曰: "凡大君、公主所居第宅, 自該曹營繕, 古例也。 今者其家, 以私力造成, 予心甚未安, 而公家物力蕩竭, 故不敢言于該司矣。 自本家營造之事, 少無干涉於國家, 而爾等每論此事, 欲間予親親之道, 其心所在, 誠不可測也。 若更爲論啓, 則當令該曹照舊例造給焉。 且仁慶宮撤毁事, 議大臣定奪。 延曙館舍所造材瓦, 令該曹前日撤毁材瓦中隨便題給。" 大臣以爲: "仁慶宮創建, 出於生民膏血, 撤毁之論, 可謂正直, 而但昌德昌慶兩宮皆未完全, 此宮似當仍存勿毁, 而若別堂無益之處, 撤而補用無妨。" 答曰: "依大臣議施行。 別堂不多, 亦不必毁散。"

【史臣曰: "歷觀前史, 公子、王孫第宅過制, 奢泰無度者, 鮮不免於鬼瞰之災, 終至於顚覆, 可不戒哉? 慈殿當光海悖亂之日, 備受危辱, 其時公主年已過筓, 而猶未有擇對之擧。 及至今日, 始乃出閤, 則戒懼之心, 必倍恒人, 而纔逾一年, 便生盈滿之意。 永安尉柱元亦未能隨事謹飾, 遂使山澤之利, 歸於冒占, 侵奪之害, 及於閭閻, 堤堰土木之役, 皆因私事而貽害於民者多矣。 人爭譏切, 而慈殿溺於所愛, 主上專於奉承, 不念民間之受弊, 可勝歎哉?"】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683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종사(宗社) / 정론-간쟁(諫諍) / 외교-명(明) / 건설-건축(建築) / 주생활-가옥(家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