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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7권, 인조 2년 12월 17일 정유 4번째기사 1624년 명 천계(天啓) 4년

윤방·신흠 등이 대동법의 개폐를 주장하자, 이원익은 의논대로 처리하자고 답변하다

삼도 대동청(大同廳)이 아뢰기를,

"크고 작은 고을을 막론하고 1결(結) 당 쌀 5두(斗)씩 받아들이면, 본읍(本邑)의 수요(需要)와 각영(各營)의 비용과 각종 진상(進上)하는 방물(方物)을 모아 이 5두로 충당하여 지출하고도 1석이 남습니다. 이렇게 하면 서울로 상납하는 9두 외에 외방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5두 뿐으로, 모든 역(役)이 그 속에 포함되어 다시 소란스럽게 징수할 필요가 없으니, 일이 매우 편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듣건대 본도(本道)에서 연분(年分)을 성책(成冊)하여 지금 가까스로 끝냈는데, 갑자년 조의 제반 요역(徭役)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징수하지 못했으므로 감사(監司)가 이 법을 갑자년 조부터 소급해서 시행했으면 한다 합니다. 일체 감사들의 말에 따라 시행하여 효과를 내도록 독려하는 것이 합당한데,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좌의정 윤방(尹昉)이 의논드리기를,

"앞서 등대(登對)했을 때 신이 대동법을 민간이 불편하게 여기니 마땅히 혁파해야 한다는 뜻을 극력 진달했었는데, 성상께서 하교하시기를 ‘조가(朝家)의 정령(政令)을 자주 고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니, 갑자년 조에 한하여 시행하면서 사세를 살펴 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지금 혁파할 수 없다면 본 고을의 수요까지도 아울러 참작하여 더 마련함으로써 민간의 출역(出役)이 균등하지 못하게 편중되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 또한 폐단을 구제하는 한 가지 길이 될 것입니다. 이 일은 당초 영상 이원익(李元翼)이 빠짐없이 상량(商量)했던 것이니, 비록 병중에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이미 그 편리 여부에 대해 헤아리고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하문하시어 처리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신흠(申欽)이 의논드리기를,

"대동법의 제도에 대해서는 신은 입법(立法)할 때 참여하지 못했고 그 뒤 정승의 직에 있게 되었을 적에는 과조(科條)와 절목(節目)이 이미 계하(啓下)되고 반포된 상황이었으니, 신으로서는 실로 그 이해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조가(朝家)의 큰 정책에 대해 감히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외방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듣건대 민간이 모두 한꺼번에 납부하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먼 외방은 경기와 달라 부자의 전결(田結)이 매우 많은데, 10결을 소유한 자는 10석을 내야 하고 20결을 소유한 자는 20석을 내도록 되어 있으니, 이런 식으로 될 경우 전결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고통스럽게 여길 것은 당연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소민(小民)은 편하게 여기는데 달갑지 않게 여기는 쪽은 호족(豪族)들이다.’고 합니다. 이 말이 근사한 듯 하기는 합니다만, 대가(大家)와 거족(巨族)이 불편하게 여기며 원망을 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쇠퇴한 세상에서 우려스러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신은 원래 민간의 사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타의 곡절은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한 조목에 대해서만은 항상 염려해 왔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이러한 폐단에 대해서는 당초 입법할 때 필시 강구했을텐데 그대로 놔두고 시행하려 했던 것은 영구히 행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 반드시 있어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호남은 불편하게 여기고 호서에서는 14두로 마련하려 한다고 하는데, 알 수 없습니다마는 이것이 민정(民情)에서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방백이 일시적으로 계획해서 나온 것입니까? 실로 그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모르겠는데, 그 편리 여부를 안 다음에야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실로 14두가 편리한지의 여부를 알지 못하므로 감히 의논을 드리지는 못하고, 우선 평소 마음에 간직하고 있던 생각을 진달드리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영상 이원익에게 묻도록 하였다. 이원익이 답변드리기를,

"대동법은 실로 신이 품하여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당초의 생각은 방납(防納)을 방지하고 부역을 균등하게 하여 중외의 폐해를 구제하려고 한 것인데, 절목(節目)을 반포하고 난 다음에는 불편하다는 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분분하게 나왔고, 게다가 지난해에는 수재(水災)와 한해(旱害)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비록 정고(呈告) 중이긴 하지만 역시 깊이 염려가 되어 요원(僚員)들에게 통지하는 한편 차자로 진달하여 다시 의논하기를 청했던 것인데, 상께서 다시 의논하는 것을 윤허하지 않으셨으므로 드디어 그대로 시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외방에서 상소를 계속 올리면서 불편한 점을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법을 만드는 목적은 백성을 편케 하기 위해서인데, 민정(民情)이 이러합니다. 국가의 일은 한두 사람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신이 이미 필경 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도 알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어찌 당초의 소견만 고집하며 대중의 생각을 막아버릴 수 있겠습니까. 요즘 이런 뜻으로 다시 요원 및 본청(本廳)에 통지했는데, 신의 뜻은 이러할 뿐입니다. 본청으로 하여금 사정을 참작하여 상량해 보고 상신(相臣)에게 품의(稟議)하여 즉시 혁파하든 갑자년 조만 시험해 보든 간에 대중의 의논을 모아 좋은 쪽으로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다른 도의 예대로 시행하고, 더 마련한 5두(斗)의 쌀은 거두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662면
  • 【분류】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三道大同廳啓曰: "邑無大小, 每一結捧米五斗, 本邑所需各營所用及各樣進上方物, 皆以此五斗磨鍊支用, 而餘萬石矣。 如是則京上納九斗外, 外方所捧則只是五斗, 諸役皆在其中, 更無徵捧之擾, 事甚便當, 而且聞本道年分成冊, 今纔畢勘甲子條, 凡干徭役, 時未徵捧, 監司欲以此法, 自甲子條爲始行之云。 一依監司所言施行, 責其成效宜當, 命議于大臣。" 左議政尹昉議曰: "前日登對時, 臣極陳民間不便大同當罷之意, 自上下敎, 以朝家政令屢改未穩, 限甲子條施行, 觀勢爲之矣。 今若不得罷, 則竝與本邑所需, 參酌加磨鍊, 使民間出後, 無偏重不均之弊, 亦救弊之一道。 當初此事, 領相李元翼商量備至, 雖在病中, 必已度其便否, 更賜下問而處之宜當。" 右議政申欽議曰: "大同之制, 臣於立法之時, 不得與聞。 及忝相職, 則科條節目, 已爲啓下頒布矣, 臣實未知其利害便否, 而朝家大叚施爲, 不敢妄自涇渭矣。 厥後因自外方來者聞之, 則民間皆以一時輸納爲苦云。 大抵遠方, 與京畿不同, 富者田結甚多, 有十結者當出十石, 有二十結者當出二十石, 循此以上, 愈多愈苦。 或言小民則便之, 其不欲者, 在豪右之家云。 此言似爲近理, 而但大家、鉅族, 若不便而生怨, 則此亦衰世之可憂。 臣素不諳民事, 故其他曲折, 未能詳知, 而每以此一款爲慮, 旋念此等弊端, 當初設立時, 必已講究, 而猶且建置者, 必有長策可以行之永久也。 今聞湖南以爲不便, 而湖西則欲以十四斗磨鍊云, 未知出於民情乎, 出於方伯之一時計畫乎? 實未知便否如何, 知其便否然後, 可以磨鍊。 臣實未知十四斗之爲便爲否, 不敢獻議, 姑以此所蘊於平日者仰陳。" 上使問于領相李元翼, 元翼對曰: "大同之法, 臣實稟而行之, 初意欲以杜防納均賦役, 以救中外之弊, 而節目頒布之後, 不便之說, 不勝其紛紜。 上年又値水旱, 臣雖在告, 亦深以爲慮, 通于僚員, 且陳箚請更議, 而自上不許更議, 故仍遂行之。 到今外疏沓至, 多言其不便, 設法本爲便民, 而民情如此。 國家事, 非一二人可以主張, 臣旣不知畢竟可行與否, 豈可執初見, 而遏群情乎? 近以此意, 復通于僚員及本廳, 臣之意止此而已。 請令本廳, 參商事情, 稟議于相臣, 或卽罷、或試甲子條, 集群議從長處之。" 答曰: "依他道例施行, 加磨鍊五斗米, 勿捧可矣。"


  •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662면
  • 【분류】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