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류 이하를 인견하고, 녹훈의 타당 여부를 논의한 후 이성부 등을 삭제하다
상이 김류 이하를 문정전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녹훈한 것은 취사(取捨)에 있어 과연 타당함을 잃었을 염려가 없는가? 이 일은 매우 중대하므로 반드시 십분 흡족하게 하여야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이는 국가의 막중한 일이기 때문에 훈신이 일제히 모여서 의논하여 결정하였습니다. 그 당시 홍제원에 가서 모인 사람들은 모두 사생을 걸고 같이 일하였으므로 이들은 다 참여되어야 하겠습니다만, 2백여 인을 다 올릴 수는 없기 때문에 상의를 거쳐서 마감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이흥립은 임시해서 참여하였으나 흥립을 얻고 나서야 뭇 사람들의 마음이 결정되었으므로 그의 공이 가장 크기 때문에 제1등에 올렸습니다. 구굉은 가장 먼저 모의에 참여하여 신경진과 왕래하면서 계획을 세웠으므로 그의 공도 크기 때문에 또 그 다음에 올렸습니다. 심명세는 참여한 것이 늦었으나 힘을 많이 썼기 때문에 또 그 다음에 올렸습니다. 이괄은 당초 결의한 사람은 아니지만 거사하던 날 칼을 잡고 갑옷을 입고 나서서 뭇 사람의 마음을 고동시켰고 부오(部伍)를 나누어 군용(軍容)을 갖추는 데는 이괄의 공이 컸기 때문에 2등의 맨 앞에 올렸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중로는 가장 먼저 모사에 참여하였고 그 공도 큰데 어찌하여 네 번째로 올랐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외방에 있었기 때문에 힘을 다한 노고가 없는 데다 또 군병을 제대로 이끌고 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장신은 늦게 알기는 하였으나 장단(長湍)을 왕래하였고 또 흥립을 추천하였기 때문에 역시 2등으로 하였고, 장유가 아니었다면 흥립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장유는 그 위에 놓았습니다. 그 밖의 여러 사람은 대개 훈신의 자제로서 모두 처음에 모사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녹훈에 참여된 것입니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유순익은 기미를 먼저 알고 분병조(分兵曹)로서 경운궁에 입직하여 장수들과 내응을 약속하였으므로 그 공이 녹훈할 만하기 때문에 참여된 것입니다."
하고, 김류는 아뢰기를,
"유순익·홍효손은 사람들을 압도시킬 수 있는 인망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경유는 어째서 밑으로 내려졌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경진의 말에 ‘나의 아우는 지난해에야 비로소 알았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되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기는 하나 장돈의 밑에 둔다는 것은 너무 낮은 듯하다. 박효립은 무슨 공이 있는가?"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박효립·박유명은 신이 평산(平山)으로 갈 적에 데리고 갔던 별장으로서 밖에서는 장돈이, 안에서는 두 박이 서로 표리의 형세를 이루어 가장 많은 힘을 썼습니다. 거사 전날 밤에도 유명은 편지를 가지고 밤을 새워 장단에 보고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서가 제때 군사를 발동하여 올 수 있었으므로 그의 공이 매우 큽니다."
하였다. 신경진이 아뢰기를,
"이서가 그날 몸소 대군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큰 일을 제대로 이룰 수 있었습니다. 상시의 모의에도 가장 많은 힘을 기울였는데 이름이 신의 밑에 있으니, 신은 실로 미안합니다."
하고, 이귀는 아뢰기를,
"경진이 몸은 멀리 나가 있었으나 신들을 부추겨서 큰 일을 이루어 낸 것은 경진의 힘이었습니다."
하고, 이서도 아뢰기를,
"당초 맨 먼저 큰 계획을 세워서 시종 분발하여 이 일을 성사시킨 것은 실로 경진의 공입니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맨 먼저 일을 모의한 공으로 말한다면 이서와 경진이 우선이어야 하고, 힘을 쓴 공으로 말한다면 자점·기원·명길 세 사람이 가장 공이 큽니다. 그리고 이귀가 평산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 모의도 무산되었을 것이거니와, 당시에 예측할수 없는 화가 닥쳐왔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충의(忠義)의 마음에 동요가 없이 뒤에 인심을 고무시키고 군졸을 분발시켜 마침내 큰 일을 성사시킨 것은 역시 이귀의 힘입니다. 신의 공은 모두 여러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하고, 이귀는 아뢰기를,
"신은 자점·기원·명길 등과 처음 이 일을 모의하였으나 이들은 다 서생(書生)이어서 힘이 될 수 없었습니다. 김류가 이 일을 추진한다는 소문을 들으면서 군중의 마음이 자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그날 김류를 대장으로 추대하여 군중의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김류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큰 일을 이룩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이미 결정된 일이니 여러 말 할 것이 없다. 장단 사람으로서 공훈에 참여된 자는 몇 명인가?"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네 사람인데, 이의배(李義培)는 신의 매서(妹婿)인데 별장으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올라왔고, 이기축(李起築)은 신의 얼속(孼屬)이며 송시범은 신의 군관으로 모두 김류·이귀의 처소에 왕래하며 편지를 전달하였고, 강득은 장단 파총으로서 군병을 거느린 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밖에는 다시 녹훈할 만한 사람이 없는가? 오늘날의 일은 오직 장단의 병력이 힘이 되었는데도 공훈에 참여된 자가 네 사람뿐이니,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정승택(鄭承澤)·조집(趙集)·권득수(權得壽)는 모두 신의 군관으로서 각기 공로가 있습니다만 두 대장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최명길은 아뢰기를,
"원훈(元勳)이 있으니 신 같은 무리는 감히 간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각기 제집에 있으면서 몰래 서로 모의한 자들이야 그 공의 경중을 어떻게 자세히 알 수 있겠습니까. 이시백과 이시방은 드러난 공로가 있으므로 사람들의 이의가 없습니다만 그 나머지 자제들은 수효가 너무 많아 한 집안에서 공신이 서너 명이나 되기도 하니, 이는 복된 것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길의 말이 매우 옳다. 이러한 일은 반드시 명백히 처리한 뒤에야 뭇 사람들의 마음이 흡족하여 원망이 없게 될 것이다. 윤숙이 참여된 것은 어째서인가?"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윤숙은 구인후와 함께 행장을 꾸려 가지고 올라와서 선봉이 되려다가 중로에서 일이 중지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도로 내려갔습니다. 그날에는 참가하지 않았더라도 그 마음을 보아 올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음을 보아서 올린다면 몸소 그 일에 참여하고도 오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원망이 없겠는가. 한여복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자, 이귀가 아뢰기를,
"한교의 조카인데, 백금(百金)을 내어놓아 비용에 보태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성부는 그날 비로소 알았는데 어떻게 높은 등급에 참여되었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선봉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상을 주는 데 인색하여 이렇겠는가. 다만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이 참여된다면 참여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참여하지 못한 자가 반드시 원망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장단에서 미리 안 사람이 가장 가상한데 이서와 함께 일한 사람이야 어찌 성부만 못하겠는가. 김연은 어떤 사람인가?"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자점의 아들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최혜길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신의 아우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해는 무슨 공인가?"
하니, 경진이 아뢰기를,
"미리 알기는 하였으나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해는 신의 아들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원량은 그날 모임에 참여하였는가?"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인심을 고무시켜 모두가 심력을 기울이게 한 데는 원량의 공이 컸습니다."
하고, 명길은 아뢰기를,
"가장 유명한 인사로서 시종 힘을 써서 대의를 밝혔습니다. 성상께서 잠저에 계실 적에 누가 성상을 알았겠습니까. 원량은 확고부동하여 거사 전일 신에게 ‘우리는 썩은 선비여서 힘을 쓸 수가 없는데, 지금에 달려간다면 이는 공을 탐내는 것이 될 뿐이다.’ 한 것도, 아마 오늘날의 논공이 있을까 싶어서 그처럼 겸퇴한 것인 듯합니다."
하고, 김류는 아뢰기를,
"원량과 이후원은 그 심정이 오직 공훈에 참여될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그 취지가 가상하다 할 만하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장만이 서쪽으로 갈 적에 신이 평산에서 만났는데, 신이 시사(時事)에 대해 언급하자 장만은 신의 말이 매우 옳다고 하였고, 의거의 소식을 듣고 나서는 매우 기뻐하였으며, 계획을 세운 것도 많습니다."
하고, 김류는 아뢰기를,
"장만이 미리 알기는 하였으나 정훈(正勳)에 참여된다는 것은 과합니다. 홍효손은 장단으로 가기로 약속을 하여 놓고서 시기를 남긴 채 오지 않았으니, 법으로 보면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합니다. 이로 말한다면 공과가 서로 같으므로 신은 유순익과 홍효손은 녹훈할 수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박동선(朴東善)은 의거의 소식을 듣고 강개한 나머지 집 종들을 거느리고 광주(廣州)에서 서울로 들어와서 그의 아들 박정과 홍제원에 가서 회동하였습니다만 녹훈에 참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마다 다 녹훈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효손은 김자점과 시종 같이 모의하였으니 말단에 참여시키는 것이 옳겠고, 순익은 여러 의논이 다같이 공이 부족하다고 하니 다시 의논하여 결정하라."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는 한집안의 부자와 같아서 숨김이 없어야 하는데, 외간에서 전하는 말에 신과 김류가 서로 사이가 나쁘다고 합니다. 저번에 이원익(李元翼)을 만났더니, 원익이 ‘사람들이 두 대장 사이가 서로 나쁘다고 하는데 이는 이웃 나라에도 들릴 일이 못 된다. 이 말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가?’ 하므로, 신이 그 말을 듣고 놀라움과 괴이쩍음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는 아마 신과 김류가 다같이 성미가 급해서 처사와 언어 사이에 매번 서로 쟁변하면서 선뜻 굽히려 하지 않기 때문에 혹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인 듯합니다.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이번 시백이 죄를 입을 때만 해도 외간의 논의가 있었으나 김류가 곧장 신에게 찾아와서 그 곡절을 말하였으므로 각기 혐의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고, 김류는 아뢰기를,
"사생을 같이한 사람인데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세속이 부박해서 말 지어내기를 좋아하지만 우리의 정분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니, 외간에서 하는 말은 돌아볼 것이 못 됩니다. 시백이 죄를 입을 때에도 외간 사람들은 두 사람이 서로 사이가 나빠서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으나 신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는 신의 병통이 이귀가 말한 것처럼 자기 뜻만 고집하고 남에게 굽힐 줄 모르는 너무 강경한 성질이 늙도록 없어지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이귀가 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교우의 도리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불화라는 것은 국가의 불행인데 경들이 이처럼 서로 좋게 지낸다니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김류와 이귀는 같은 원훈으로서 위세가 서로 대등하여 빈청에서 감훈(勘勳)하던 날에도 녹훈 대상자를 놓고 각기 다투다가 말이 흥분되어 발끈하고 일어서는 것을 대신이 만류하였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가 놀라와하며 끝내 서로 좋게 지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유순익(柳舜翼)의 녹훈은 이귀의 강력한 주장으로 된 것인데, 사람들의 말에 ‘순익이 공신에 오른 것은 친구의 덕이다.’고 하였다. 이성부·윤숙·이시담·최혜길·신해 등은 처음에는 녹훈에 올랐으나 이때에 와서 모두 삭제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559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乙巳/上引見金瑬以下於文政殿。 上曰: "昨日錄功, 果無取舍失宜之患耶? 此事甚重, 必須十分恰當, 可服人心。" 瑬曰: "此國家莫重之事, 故勳臣齊會議定矣。 其時往會弘濟院者, 皆能決死生同事, 此類似當皆參, 而二百餘人, 不可盡錄, 故相議磨勘。 其中李興立, 雖臨時與知, 得興立然後, 衆心乃定, 其功最大, 故陞爲第一。 具宏預謀最早, 與申景禛往來計議, 其功亦大, 故次之。 沈命世預知雖晩, 宣力居多, 故又次之。 李适雖非當初結義之人, 擧事之日 杖劍披甲, 鼓動衆心, 分署部伍, 布成軍容, 适功爲大, 故居二等之首。" 上曰: "李重老參謀最早, 其功亦多, 而何以居第四?" 瑬曰: "以在外之故, 無奔走之勞。 且不能提兵而來, 故如是。 張紳雖晩知, 而往來長湍, 且得興立, 故亦居二等。 若非張維, 不能動得興立, 故維在其上。 其他諸人, 多勳臣之子弟, 皆自初參謀, 故得參。" 李貴曰: "柳舜翼、先事知幾, 以分兵曹, 入直慶運, 約將內應, 其功可錄, 故得參。" 瑬曰: "柳舜翼、洪孝孫不厭人望。" 上曰: "申景𥙿, 何以居下?" 瑬曰: "景禛言: ‘其弟, 自前年, 始得預知云, 故如是矣。" 上曰: "然矣, 而居張暾之下則似太卑也。 朴孝立有何功?" 貴曰: "朴孝立、朴惟明, 臣帶去平山, 爲別將者也。 外則張暾, 內則兩朴, 互相表裏, 最多宣力。 擧事前夕, 惟明持書, 達夜馳報於長湍, 故李曙得趁期發兵來到, 其功甚大。" 申景禛曰: "李曙其日, 身率大軍, 克成大事, 常時謀議, 宣力最多, 而名在臣下, 臣實不安。" 貴曰: "景禛身雖遠出, 激發臣等, 贊成大事, 景禛之力也。 曙亦曰: "當初首建大計, 終始奮發, 以成此事, 實景禛之功也。 瑬曰: "以言首事之功, 則曙、景禛宜先, 以言宣力之功, 則自點、器遠、鳴吉三人爲最。 且李貴若不爲平山, 則此謀消散, 其時臨不測之禍, 而不撓忠義之心, 其後鼓動奮勵, 終能有成, 亦貴之力也。 臣功皆不及諸人。" 貴曰: "臣與自點、器遠、鳴吉等, 始謀此事, 而是皆書生, 不足倚仗。 及聞瑬爲此事, 衆心有恃, 故其日推爲大將, 鎭定群情, 非金瑬, 豈能成大事?" 上曰: "此是已定之事, 不須云云。 長湍人參勳者幾人?" 曙曰: "四人也。 李義培臣之妹壻, 以別將領軍上來, 李起築臣之孽屬, 宋時范臣之軍官, 皆往來傳札於金瑬、李貴處, 姜得亦長湍把摠, 率領軍兵者也。" 上曰: "此外更無可錄者乎? 今日之事, 惟長湍兵力是仗, 而參功者只四人, 無乃太少乎?" 曙曰: "鄭承澤、趙集、權得壽, 皆臣軍官, 各有功勞, 而兩大將不知, 故不能錄之。" 崔鳴吉曰: "有元勳在, 如臣輩, 不敢干預, 而各在其家, 潛相密謀者, 其功輕重, 豈能詳知? 李時白、時昉有表表功勞者, 人無異議。 其餘子弟輩太多。 一家功臣, 或至三四, 恐非福也。" 上曰: "鳴吉之言甚是。 如此事, 必明白處之, 然後衆心翕然無忿怨之意矣。 尹璛參功, 未知如何?" 瑬曰: "璛與具仁垕, 皆裝束上來, 將爲先鋒, 中路聞事將寢, 還爲下去。 其日雖未來參, 取其心而錄之。" 上曰: "若取其心而錄之, 則身參其事而不見錄者, 豈無怨乎? 韓汝復, 何如人?" 貴曰: "韓嶠之姪也。 出百金以助需用。" 上曰: "李聖符, 其日始知, 何以高參?" 瑬曰: "以爲先鋒故也。" 上曰: "予豈吝賞? 但不可參而得參, 則應參而不與者, 必有怨心。 長湍預知之人, 最爲可嘉。 曙之所與同事者, 豈不愈於聖符乎? 金鍊何人?" 瑬曰: "自點之子也。" 崔惠吉何人?" 鳴吉曰: "臣之弟也。" 上曰: "申垓則何功?" 景禛曰: "雖曰前知, 何功之有?" 垓, 景禛之子也。" 上曰: "金元亮, 其日參會耶?" 貴曰: "鼓動士論, 使皆傾心, 元亮之功多矣。" 鳴吉曰: "最是有名之士, 終始宣力, 以明大義。 且聖上龍潛之日, 孰能知之? 元亮確然不動, 臨事前一日, 謂臣曰: ‘吾是腐儒, 無可效力。 今若往赴, 則只是貪功云。’ 蓋恐有今日之論功, 爲此退托也。" 瑬曰: "元亮與李厚源, 其心惟恐參勳。" 上曰: "然則其志趣可尙。" 貴曰: "張晩西行, 見臣於平山, 臣言及時事, 晩頗以臣言爲是。 及聞義擧, 深以爲喜, 畫策亦多。" 瑬曰: "晩雖預知, 至參正勳, 則過矣。 洪孝孫約往長湍, 愆期不來, 在法當誅。 以此言之, 功過相準。 臣以爲柳舜翼、洪孝孫, 皆不可錄也。 朴東善聞義擧慷慨, 率其家僮, 自廣州入來, 與其子炡, 往會弘濟院, 然而猶不得見參, 豈可人人而錄之乎?" 上曰: "孝孫與金自點, 終始同謀, 則參於末端可也。 舜翼, 群議皆以爲不定, 更爲議定。" 貴曰: "君臣之間, 有同家人父子, 宜無所諱。 外間傳言, 臣與金瑬不相合, 頃見李元翼, 元翼曰: "人謂兩大將不協, 此不可使聞於隣國也。" 此言奚爲而出乎? 臣聞來不勝驚怪。 蓋臣與金瑬, 皆性急, 每於處事言語之間, 互相爭辨, 不肯相下, 或者以此致有云云, 豈有他心哉? 今番時白之被罪, 亦有外議, 而金瑬卽來見臣, 語其曲折, 各無嫌憾之意矣。" 瑬曰: "與之同死生者, 豈有他意? 世俗浮薄, 喜爲造語, 顧在我者如何, 自外至者, 不定恤也。 時白之被罪, 外人疑二人之不相協, 而臣等則不然。 蓋臣之病痛, 如貴所言, 固執己意, 不能屈於人。 剛偏之性, 到老不棄, 貴若不知臣心, 寧保交道?" 上曰: "不協云者, 國家之不幸。 卿等之相好如此, 豈不甚幸!" 金瑬、李貴俱以元勳, 位勢相敵, 賓廳勘勳之日, 各爭所錄, 辭氣忿厲, 或拂衣而起, 大臣挽而止之, 見者駭然, 知其終不能相好。 柳舜翼錄勳, 李貴力主之, 人謂舜翼功臣, 友之德也。 李聖符、尹璛、李時聃、崔惠吉、申垓等, 初皆見錄, 至是竝刪去。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559면
- 【분류】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