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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4일 갑진 9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天啓) 3년

이광정·이귀·김류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광정(李光庭)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광정은 소시부터 청렴 결백으로 자신을 지켜 명류로 알려졌는데, 흉도들이 모후의 폐단을 청할 때 화를 두려워하여 정청(庭請)에 참여했으므로 사론(士論)이 그를 비루하게 여기었다. 이때 박홍구(朴弘耉) 등이 오히려 재상 자리에 있었으므로 드디어 끌어들여 전장(銓長)을 삼으니, 물의가 매우 해괴하게 여기었다.

이귀(李貴)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귀는 사람됨이 호방하였다. 소시부터 강개하며 큰 뜻이 있어 항상 사공(事功)으로 자임하였다. 계축 옥사가 일어났을 때 당시 정승에게 편지를 보내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의 사형을 완화하고 자전을 보호할 것을 청하였으나 당시 정승이 따르지 못하였다. 급기야 폐모론이 일어나자 한교(韓嶠)이이첨에게 보내 화복으로 설득시켰는데 그 말이 몹시 준엄하여 이첨의 기가 꺾였었다. 광해의 무도함이 날로 극심한 것을 보고 늘 분개하며 종사를 부지하고자 하여 동지를 규합하여 은밀히 광복(匡復)을 모의하다가 드디어 김류(金瑬) 등과 함께 중흥의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김류를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김류는 기국이 고매하고 위풍이 호쾌하였으며 소시부터 문장에 능하고 또 병가(兵家)에 통달하여 당시에 중망이 있었다. 광해 당시 폐모의 정청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흉당이 시기하여 삼청동 결의(三淸洞結義)로 지목하기까지 하여 거의 불측한 지경에 빠질 뻔하였다. 이때부터 오랫동안 한산직에 있으면서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는데, 본래부터 장재(將材)의 물망이 있어 그 당시 또한 원수(元帥)의 천망에 들기도 하였다. 평소 시사를 개탄하며 인륜을 확립할 뜻을 두었다가 드디어 이귀·신경진(申景禛)·이서(李曙) 등과 공모하여 의거를 일으킴으로써 여러 사람들이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았고 마침내 정사(靖社)의 공을 이루었다.

홍서봉(洪瑞鳳)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서봉은 위인이 영민하고 문장에 뛰어나 동류에게 추앙을 받았다. 임자년 옥사 때 황혁(黃赫)의 데릴사위로 연좌되어 벼슬에서 쫓겨나 집에 있다가 이 때에 이르러 의거에 참여하여 공이 있었다.

이성구(李聖求)를 사간으로 삼았다. 성구는 젊을 때부터 재주와 명망이 있었고 혼조(昏朝) 때 또한 몸을 더럽히지 않았기 때문에 첫머리에 간직(諫職)에 제수되었다.

유백증(兪伯曾)을 지평으로 삼았다. 백증은 위인이 질박하고 강직하다. 광해 때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았다가 이에 이르러 의거에 참여하여 공이 있었다.

이목(李楘)오숙(吳䎘)을 정언으로 삼았다. 이목은 위인이 강경하고 지론(持論)이 구차하지 않아 포의로 있을 때부터 이미 선비의 명망이 있었다. 광해군 때 흉당에 투신한 옛 동료들이 끌어들여 일을 같이하고자 하여 누차 감언으로 유혹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최후에는 당시 소인들의 꺼리는 바가 되어 탄핵을 받고 기성랑(騎省郞)에서 파직된 후 오랫동안 한직에 정체되었으나 청론(淸論)은 그를 중하게 여기었다. 이에 이르러 간직에 발탁되었다. 오숙은 젊을 때부터 재주가 있었으나 박승종(朴承宗) 부자의 집을 출입하여 팔학사(八學士)의 명목이 있기까지 하였으므로 청의(淸議)가 부족하게 여겼다. 평소 심기원(沈器遠)과 친숙함으로써 이 때에 와서 간직에 제수되었다. 또 그 이름이 정청한 명단 중에 들었었는데, 기원이 상소하여 변론하니, 물의가 자못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조익(趙翼)최명길(崔鳴吉)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조익은 충후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그의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행이 있었고 본래 학문을 좋아하여 경전(經傳)에 전심하였다. 일찍이 혼조 때 전야에 물러가 있음으로써 사림의 추중을 받았는데, 이에 이르러 전랑(銓郞)에 발탁되었다. 명길은 영민하고 재주가 있으며 성품 또한 재치가 있었다. 소시부터 세상 일을 담당할 뜻을 두었었다. 광해조 때 벼슬에서 쫓겨나 집에 있다가 드디어 신경진 등과 의거를 꾀했는데, 기묘하고 은밀한 계책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아울러 정사 원공(靖社元功)에 녹훈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503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以李光庭爲吏曹判書。 光庭自少廉簡自守, 稱以名流, 而當兇徒請廢母后之時, 未免怵禍, 隨參庭請, 士論鄙之。 時弘耉等, 猶據相位, 遂引爲銓長, 物議大駭。 李貴爲吏曹參判。 爲人倜儻, 自少慷慨, 有大志, 常以事功自任。 癸丑獄起, 移書時相, 請緩國舅金悌男刑死, 以保慈殿, 而時相不能從。 及廢母論起, 送韓嶠爾瞻, 諭以禍福, 辭義澟然, 爾瞻爲之氣沮。 見光海無道日甚, 常憤憤欲扶宗社, 糾合同志, 密謀匡復, 遂與金瑬等, 共成中興偉烈。 金瑬爲兵曹參判。 器局峻整, 風儀豪爽, 自少能文章, 且達兵家, 名重一時。 光海時, 不參廢母庭請, 爲兇黨所忌嫉, 至目以三淸洞結義, 幾陷不測。 自是長在散地, 杜門屛居, 而以素有將望, 其時亦擬元帥之薦。 居常慨念時事, 有扶樹彝倫之志, 乃與李貴申景禛李曙等, 合謀擧義, 衆推以爲大將, 遂成靖社之功。 洪瑞鳳爲兵曹參議。 瑞鳳爲人英爽, 文章遒緊, 爲儕流所推, 壬子之獄, 坐黃赫贅壻, 免官居家。 至是, 預義擧有功。 李聖求爲司諫。 聖求少有才望, 在昏朝時, 亦無玷汚, 故首拜諫職。 兪伯曾爲持平。 伯曾爲人撲直, 光海時, 屛居不仕, 至是, 預聞義擧有功。 李楘吳䎘爲正言。 爲人精剛, 持論不苟, 自在韋布, 已有士望。 光海時, 奮要之入於凶黨者, 欲援以同事, 屢以甘言啗之, 終不從, 最爲時奸所忌, 被勑罷騎省郞, 久淹冗官, 淸論重之。 至是, 首擢諫職。 少有才華, 而出入朴承宗父子家, 至有八學士之目, 淸議多短之, 而與沈器遠, 素相善, 至是首拜諫職。 且名在庭請中, 而器遠上疏陳辨, 物議頗不快。 趙翼崔鳴吉爲吏曹佐郞。 忠信重厚, 事親有至行, 素好學問, 專精經傳。 曾在昏朝, 退處田野, 爲士林所推重, 至是, 擢拜銓郞。 鳴吉英敏有才, 性且機警, 自少有擔當世務之志。 光海時,罷官家居, 遂與申景禛等結義, 奇謀密計, 多出其手, 竝錄靖社元功。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503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