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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정초본]71권, 광해 5년 10월 9일 계사 4번째기사 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전 영의정 이덕형의 졸기

전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졸하였다. 【이때 죄를 주자는 논계는 이미 중지되었는데, 덕형은 양근(楊根)에 있는 시골집에 돌아가 있다가 병으로 졸하였다. 덕형의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이다. 그는 일찍부터 공보(公輔)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는데, 문학(文學)과 덕기(德器)는 이항복(李恒福)과 대등하였는데, 31세에 대제학에 제수되었고 38세에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임진년 이래 공로가 많이 드러나 그의 명성이 중국과 오랑캐들에게도 알려졌다. 일찍이 선위사(宣慰使)로 있었을 때에는 왜인들에게 크게 존경받았으나 임진왜란에 이르러 적의 기세가 날로 급박해지자 조정에서는 이덕형으로 적의 정세를 탐지하고 세력을 늦추도록 보내려 하였다. 이덕형이 명을 듣자마자 즉시 출발하므로 선조(宣祖)가 이에 감읍하였다. 가마가 평양에 도달하자 적장 현소(玄蘇)가 이덕형을 뵙기를 구하니 사람들이 이를 크게 위태롭게 여겼다. 이덕형이 한척의 배[單舸]로 찾아 가면서 조금의 두려워하는 낯빛이 없었다. 갑진록(甲辰錄) 호성공(扈聖功)에 이덕형의 충성과 노고가 기록되었음에도 봉작을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계축년 옥사가 일어나자 수상(首相)으로 흉배들에게 협박받았다. 비록 옥사에 성실히 참여했지만 친구를 대하면서 말이 시사에 미치면 눈물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고, 식음을 전폐하는 데 이르렀다. 차자로 영창대군의 원한을 논하면서 말이 조리가 없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병통으로 여겼고, 오히려 이 때문에 죄를 받았다. 사람됨이 간솔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부드러우면서도 능히 곧았다. 또 당론(黨論)을 좋아하지 않아, 외구(外舅)인 이산해(李山海)가 당파 가운데서도 지론(持論)이 가장 편벽되고 그 문하들이 모두 간악한 자들로 본받을 만하지 못하였는데, 덕형은 한 사람도 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주 소인들에게 곤욕을 당하였다. 그가 졸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 하였다. 】


  • 【정족산사고본】 17책 71권 4장 B면【국편영인본】 광해군일기32책 252면
  • 【분류】
    인물(人物)

    ○前領議政李德馨卒。 【時, 請罪之啓已停, 德馨歸在楊根村舍, 病卒。 德馨字明甫, 號漢陰。 早有公輔之望, 文學、德器, 與恒福齊名。 三十一拜大提學, 三十八登台輔。 壬辰以來, 多著勞勩, 名聞華夷。 嘗爲宣慰使, 大爲倭人所敬蒙。 及壬辰之難, 賊鋒日迫, 朝廷欲遣德馨, 探視賊情, 以緩賊勢。 德馨聞命卽行, 宣廟爲之感泣。 及駕至平壤, 賊將玄蘇求見德馨, 人多危之, 德馨單舸赴會, 略無懼色。 甲辰錄扈聖功, 德馨忠勞當錄, 德馨牢讓不受封。 癸丑獄起, 以首相爲凶輩所脅迫, 雖黽勉隨參, 而對親舊言及時事,未嘗不爲之垂淚, 至於廢食。 箚論永昌冤, 語有周章, 人病之, 猶以此被罪。 爲人簡而不刻, 柔而能正。 又不好黨, 婦翁李山海, 在黨人中持論最偏, 門下皆姦豪不法, 而德馨一無所親, 以此數爲小人所困。 聞其卒, 遠近嗟惜。 反正後追賜祭謚。】


    • 【정족산사고본】 17책 71권 4장 B면【국편영인본】 광해군일기32책 252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