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간원에서 이성구와 현즙·인천 현감 한급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성구만 파직시키다
사간원(司諫院)이 아뢰기를,
"옛날 사우[祠]를 건립하여 제사를 모셨던 것은 덕있는 이를 숭배하고 어진 이를 본받자는 뜻이었습니다. 만약 사문(斯文)에 공로있는 자가 아니라면 그를 제사모실 경우 밝은 세상에 부끄러움이 될 뿐만 아니라 후세에 웃음거리가 될 염려도 있습니다.
이항복(李恒福)으로 말하면 살아있을 때도 그럴싸한 공로가 없었고 죽은 후에도 잊지 못할 만한 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서궁(西宮)에 대해 정청(庭請)하던 날 터놓고 반대의사를 발표하여 〈자기 스스로 명교(名敎)에서 이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죄를 얻은 사람으로서 〈털끝만큼도 취할 것이 없는 자인데,〉 전 남도 병사(南道兵使) 현즙(玄楫)과 영평 판관(永平判官) 이성구(李聖求)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여 그가 귀양살이했던 곳에다 사당을 세우기도 하고 자기 사는 고을에다 사우를 건립하기도 하였으니, 그야말로 임금을 무시하고 공론을 멸시한 죄가 어찌 이에 더할 수가 있겠습니까. 현즙과 이성구를 파직시키고 영원히 서용하지 마소서.
〈그리고 인천 현감(仁川縣監) 한급(韓昅)은 몸에 중병이 있어 관아 일을 폐지한 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백성들은 그의 얼굴도 볼 수가 없고 폐단만 날로 더해가고 있습니다. 차관(差官)과 조사(詔使)가 연거푸 올 시기에 하루도 관아를 비워서는 안 될 일이니, 그도 파직을 명하소서.〉"
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이항복은 일개 평범한 재상에 불과한 위인으로 성명의 시대에 죄를 얻어 귀양살이로 쫓겨나기까지 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 그의 관작을 종전대로 인정한 그 자체가 벌써 오은(誤恩)이었던 것입니다. 신들이 듣기에 그가 귀양살이했던 북청(北靑)과 그가 묻혀 있는 포천(抱川)에서 그를 위해 모두 서원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 일을 주장했던 자들을 징계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현즙·이성구를 모두 파직시키고 영원히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현즙과 〈한급에〉 대하여는 천천히 결정하기로 하고, 이성구는 아뢴 대로 처리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항복과 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은 모두 선조조(宣祖朝)의 대신들이다. 폐주(廢主) 초기에 백성들의 신망을 걸머지고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던 자들이었는데, 〈얼마 못 가서 모두 면직되었다. 대군(大君)의〉 계축년 옥사때 덕형은 의분에 북받쳐 할말을 다하다가 불측의 죄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걱정 끝에 죽었으며, 정조와 윤인이 폐모론을 들고 나왔을 때 원익이 맨 먼저 차자를 올렸었는데, 그때 폐주(廢主)는 그를 미친 소리라고 〈화내고는〉 그를 홍천(洪川)으로 내쫓았다. 항복은 〈일국의 촉망을 한 몸에 지니고 있던 숙덕(宿德)으로서〉 노원(蘆原)에 물러나 있었는데 흉도들의 유일한 시기의 대상이었고, 〈세상에서는 그를 태산교악처럼 여겨 모두 오성 상공(鰲城相公)이라고 불렀지 감히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폐모론 수의(收議)가 있던 날 바른 말로 간했다가 북청(北靑)으로 귀양을 갔다. 〈그때 그 사실을 바로 지적한 봉사(封事)에 대하여 사람들 모두가 무릎을 치며 탄복하기를 ‘오성이 과연 그 일을 해냈구나.’ 하면서 길거리마다 감탄하는 소리였고, 급기야 귀양을 가게 되자〉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여유있게 길을 떠나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결국 귀양살이하던 곳에서 죽자 북청과 포천에서 모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모셨던 것인데, 묵은 감정을 그대로 갖고 있던 흉도들이 지금 이렇게 아뢰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즙은 종전부터 궁액(宮掖)과 서로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이 아뢴 내용대로 따르지 않고 성구만이 죄를 얻고 〈돌아오지 못했다. 이 세 사람들이 했던 일은 천고에 빛나고 있고 정사년에 세웠던 절의는 그 중에서도 더더욱 돋보이는 일이었는데 흉도들이 이렇게까지 깎아내리고 있으니, 이따위 인간들에게 무엇을 또 나무랄 것인가〉
- 【태백산사고본】 54책 54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341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 풍속-예속(禮俗)
○司諫院啓曰: "古之立祠而享者, 乃所以崇德象賢(也)。 苟非有功於斯文, 則奚但有愧於昭代, 抑恐貽笑於後世也。 李恒福乃一詼諧之人也。 生無可觀之功, 死乏可尙之德, 至於西宮庭請之日, 顯有左袒之志, (自脫於名敎,) 得罪於朝廷, (固無一毫可取之事。) 前南道兵使玄楫, 永平判官李聖求, 阿其所好, 或立祠於謫所, 或建宇於鄕里, 其無君父、蔑公議之罪, 至此甚矣。 請玄楫、李聖求罷職不敍。 (仁川縣監韓昅, 身有重病, 久廢坐衛, 民不見面, 弊惟日甚, 當此差官詔使疊到之日, 不可一日曠官, 請命罷職。)" 司憲府啓曰: "李恒福尋常一宰相, 而得罪於明時, 至於竄黜, 身死之後, 復其官爵, 亦是誤恩。 臣等竊聞謫所北靑, 葬所抱川, 皆爲立書院云, 主張之人, 不可不懲。 請玄楫、李聖求, 竝命罷職不敍。" 答曰: "玄楫、(韓昅,) 徐當發落, 李聖求, 依啓。"
(史臣曰:) "李恒福 與 李元翼、李德馨, 皆 宣祖朝大臣也。 廢主初年, 以民望位三公, (未幾俱免。 大君) 癸丑之獄, 德馨慷慨抗論, (攸)得罪不測以憂死。 造、訒之倡廢論也, 元翼首先上箚, 廢主以爲妄言(怒), 貶之洪川。 恒福 (以宿德重望), 退處蘆原, 爲兇徒所側目。 (於一世倚以爲喬岳, 皆謂鰲城相公, 不敢名。) 廢母收議之日, 直辭諫正, 竄于北靑 。 (上封事直斥人, 無不擊節歎服曰: ‘鰲城果爲此着矣。’ 道路咨嗟, 及其竄也,) 怡然就道, 無幾微見色, 道路流涕, 竟卒于謫所。 北靑、抱川, 俱立廟以祀。 兇徒宿怒未釋, 乃有此啓, 而玄楫自前交通宮掖, 故王不從, 獨聖求得罪, (不能返。 三人事業, 彪炳千古, 而丁巳立節, 尤卓卓可觀, 兇徒之貶駁, 至此於兇徒, 又何誅焉?")
- 【태백산사고본】 54책 54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341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 풍속-예속(禮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