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노추의 답신에 좋은 말로 응변하도록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신들이 본사 여러 신하들의 헌의를 보니, 상경(常經)을 지키고 권도를 행하는 것과 붙들어 두고 단절하지 않는다는 뜻에 있어서는 대체로 동일한 양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대제학 이이첨(李爾瞻)의 헌의는 ‘명나라에 품윤을 하지 않고 대국의 원수와 사사로이 서로 화친을 맺는다는 것은 신하로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고 하였고, 유희분(柳希奮)의 헌의 또한 ‘너희들이 만약 지난 일을 깊이 사과하고 명나라로 귀순한다면 양국의 옛 호의를 서로 길이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변방 장수에게 글을 만들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이 두 신하의 헌의가 서로 다른데 저희로서는 감히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몰라 주상의 재가를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번 노추 서신의 회답에 무슨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단 말인가. 하루 이틀 하다가 7, 8일이 경과하도록 결정하지 못하였으니, 흉적이 ‘아직도 국왕이 모르고 있는가.’라고 할 것이다. 우리 나라의 일처리가 민첩하지 못함이 대부분 이러하다. 예조 판서가 헌의한 뜻은 삼척 동자도 아는 것인데 내 비록 혼미하고 병들었으나 어찌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다만 이 적이 국가를 건립하여 원년을 내걸고 유첩(諭帖)에 짐(朕)이라고 칭하였으니, 흉악하고 교활함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므로 사납게 날뛰는 기세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변방 신하에게 말을 꾸며서 잘 회답하게만 하는 것은 실제로 화친을 맺는 뜻이 아니니, 이 헌의는 아마도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
병조 판서의 헌의는, 다른 말은 좋으나, ‘깊이 사과하고 귀순하라.’는 등의 말 뜻은 비록 아름답지만 저 적들이 듣고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말을 제기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대신 및 이상의(李尙毅)·김신국(金藎國)·최관(崔瓘)·권반(權盼) 등의 헌의도 좋으나, 단지 ‘부모가 명령하면 자식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뒷날 다시 거사하는 일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만약 ‘전쟁을 그치고 사이좋게 지내며 각기 국토를 지키자.’고 한다면 〈바로 전조(前朝)에서 군주가 현명하고 신하가 선량하여 변수에 대응하는 등의 일을 솜씨있게 한 것과 같지만,〉 중국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어떻게 여길지 알 수 없다. 나의 뜻은 지금 이 노적이 비록 매우 사납게 날뛰지마는 진실로 솜씨있게 변수에 대응한다면 충분히 전조처럼 재앙을 막고 국가를 지켜 병화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혼미하고 병들었는데 어떻게 대책을 세워 그 사이에서 응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으니 어떻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추의 서신 중에 누구를 도왔다는 설은 이제와서 제기하여 답할 수는 없고, 오직 박엽(朴燁)의 뜻으로 답하기를 ‘건주(建州)에서 말하는 조부를 죽인 한이란 바로 우리 나라를 왜란에서 구하여 준 은혜와 같은데, 건주에서 원한으로 원한을 갚는 것이나 우리 나라에서 은혜로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동일한 의리이다. 명나라에 서 입혀준 덕을 내세우며 군병을 징발하니, 우리 같은 속국이 어찌 감히 변명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건주에서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전쟁에서 패배한 장교를 차인으로 내보내니 매우 기쁘다. 만약 강홍립 등 이하의 군병을 모조리 하나하나 내보낸다면 건주의 사이좋게 지내려는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왕경과 여기의 거리는 수십 일의 길이니 알리려고 오가는 사이에 차인을 오래도록 머물게 하기가 불편하기에 감히 이렇게 먼저 알린다고 하라. 또 하서국으로 하여금 뒤따라 함께 호송하게 하고, 비록 그가 들어가더라도 또한 자신의 뜻으로 파격적으로 후하게 접대하되, 강변의 초가(草家)에 두지 말고 관사로 안내하여 손을 잡고 가슴을 터놓고 술도 권하고 선물도 주어 그들의 환심을 사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옛날에 곽자의(郭子儀)가 회흘(回紇)과 화친을 맺으면서 ‘대당(大唐) 천자 만 년, 회흘 가칸(回訖可汗) 천 년.’이라고만 하였는데 응변(應變)을 잘 하였다고 하였다. 지금도 이러한 예에 의거하여 좋은 말로 접대하여 후일에 사단을 일으키는 단서가 되지 않게 하고, 한편으로는 사유를 갖추어 황제에게 보고하고 경략에게 자문을 발송한다면 명나라에 서도 우리 나라가 곧은 도리를 지켜 속이지 않았다는 뜻을 알 것이다. 군병의 일이란 신속함이 귀중하다. 이 차호(差胡) 등이 만약 조정의 답서를 요구한다면 거절하기도 어려울 것이니, 급히 박엽의 답서를 보내어 다시 그들의 태도를 관찰하는 것이 기의(機宜)에 합당한 것 같다. 자세히 논의하여 선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노추(奴酋)가 정응정 등을 보내 놓고 또 차인을 보내어 서신을 전하였는데,〉 거기에 "천명(天命) 2년에 후금국 칸(後金國汗)은 조선 국왕에게 통유한다." 하였고, 칠종뇌한(七宗惱恨)012) 을 낱낱이 세어 중국 조정을 원망하고, 또 자기를 도와주면 화친을 맺고 전쟁을 그치겠다고 하였다. 호차가 만포(滿浦)의 건너편 강변에 도착하여 초막을 치고 거처하였는데, 왕이 강을 건너 성으로 들어오게 하여 다정하게 접대하고 선물도 주게 하였다. 노사(虜使)가 우리 국경 안으로 들어온 것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111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226면
- 【분류】외교-야(野)
- [註 012]칠종뇌한(七宗惱恨) : 일곱 가지 큰 원한
○己未四月初九日壬戌備邊司啓曰: "臣等竊見本司諸臣獻議, 其守經行權羈縻不絶之意, 大槪一樣, 而唯大提學李爾瞻之議, 以不稟天朝, 而與大邦讎, 私相約和, 爲人臣子, 寧有此理? 柳希奮之議亦以爲: ‘爾若深謝旣往, 歸順天朝, 則兩國舊好, 式相永保, 令邊將措辭。’ 云。 此二臣之議有異, 自下不敢的從, 敢稟睿裁。" 傳曰: "今此胡書之答, 有何難斷之事, 而一日二日, 已過七八日而不決, 兇賊其曰: ‘國王未及聞知乎?’ 我國處事不敏, 類如此矣。 禮判獻議之意, 尺童所知, 予雖昏病, 豈不知之? 但此賊立國建元, 諭帖稱朕, 則兇猾已極, 其桀驁難當之狀, 亦可知也。 只令邊臣措辭善答, 實非約和之意, 此議恐不可用矣。 兵判之議, 他語則好矣, 至如‘深謝歸順’等語, 其意雖美, 非徒伊賊不爲聽從, 似不必提起此語也。 大臣及李尙毅、金藎國、崔瓘、權盼等之議亦好, 但只曰: ‘父母有命, 子不得不從。’ 云, 則似有後日更擧之事。 若曰: ‘息兵和好, 各守封疆。’ 云, 則(乃前朝, 主明臣良, 善於應變等事, 而但) 中朝人聞之, (則)未知以爲如何。 予意今玆奴賊, 雖極桀驁, 苟能善爲應變, 則足以弭禍, 而守國一如前朝, 不被兵禍矣。 顧予昏病, 何以策應於其間乎? 然係國存亡, 安得不言? 胡書中助某之說, 今不可提起, (而答之,) 唯以朴燁之意, 答曰: ‘建州所謂殺祖父之恨, 正如我國救倭兵之感, 建州之以怨報怨, 我國之以恩報恩, 其義一也。 天朝責德徵兵, (如我)屬國, 安敢有辭? 此則建州之所已知也。 戰敗將領差人出送, 甚可喜也。 若姜弘立等以下軍兵, 盡爲(一一)出送, 則可見建州和好之意。 王京此去數十日程, 啓知往來間, 差人久留不便, 敢此先報’, 云云。 且令河瑞國跟同護送, 雖或入往, 又以己意破格厚待, 勿置江邊草家, 而引入官舍, 握手開懷, 酌酒贈物, 期得其歡心可矣。 昔郭子儀, 與回紇盟, 但曰: ‘大唐天子萬年, 回紇可汗千年。’ 以爲善應變。 今亦依此, 以好(言)辭待之, (而已)勿爲日後惹事之端也, 而一邊具由奏聞, 移咨經略, 則天朝亦諒我國以直不諱之意也。 兵事貴速。 此差胡等, 若求朝廷所答, 則拒之亦難, 急送朴燁答書, 更觀其情, 似合機宜。 詳議善處。" (時, 奴酋旣送鄭應井等, 又遣差人致)書稱以: "天命二年, 後金國汗, 諭朝鮮國王。" 枚數七宗惱恨, 歸怨中朝, 且求助己, 約以通和息兵。 胡差至滿浦越邊, 結草幕以處, 王令過江入城, 款待贈物。 虜使之至我境, 自此始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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