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 윤선도의 상소문
진사(進士)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임금이 아랫사람들을 통제하는 방도로는 권강(權綱)을 모두 쥐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도 이르기를 ‘오직 임금만이 상도 줄 수가 있고 벌도 줄 수가 있다.’고 하였으며, 송(宋)나라의 진덕수(眞德秀)도 말하기를 ‘임금된 자가 어찌 하루라도 권위의 칼자루를 놓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뜻깊은 말입니다. 신하된 자가 참으로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쥐게 되면 자기의 복심(腹心)을 요직에 포열(布列)시켜 상과 벌[威福]을 자기에게서 나오게 합니다. 설령 어진 자가 이렇게 해도 안 될 일인데, 만약 어질지 못한 자가 이와 같이 한다면 나라가 또한 위태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훌륭하신 상께서 위에 계시어 임금과 신하가 각기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 있으니 이러한 자가 없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신이 삼가 예조 판서 이이첨(李爾瞻)의 하는 짓을 보니 불행히도 이에 가까우므로 신은 삼가 괴이하게 생각합니다.
신은 하찮은 일개 유자(儒者)로서 어리석고 천박하여, 비록 도성 안에 살지만 외방에 사는 몽매한 백성과 다를 바가 없으니, 조정의 일에 대해서는 백 가지 가운데 한 가지도 알지를 못하지만, 단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가지고 성상께 우러러 진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유념해 주소서.
신이 삼가 보건대, 근래의 고굉(股肱)·이목(耳目)·후설(喉舌)을 맡은 관원들과 논사(論思)·풍헌(風憲)·전선(銓選)을 담당하고 있는 관원들은 이이첨의 복심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간혹 그들의 무리가 아니면서 한두 사람 그 사이에 섞여 있는 자들은, 반드시 그 사람됨이 무르고 행실이 줏대가 없으며 시세를 살펴 아첨이나 하며 세상 되는 대로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대각의 계사에 대해서 전하께서는 반드시 대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옥당의 차자를 전하께서는 반드시 옥당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전조(銓曹)의 주의(注擬)를 전하께서는 반드시 전조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풍지(風旨)를 받들어 그렇게 하기도 하고 그의 지휘를 받아서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비록 옳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에게 물어본 뒤에 시행합니다.
관학 유생(館學儒生)에 이르러서도 그의 파당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관학의 소장(疏章)이 또한 겉으로는 곧고 격렬하지만 속은 실제로 아첨하며 빌붙는 내용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기 때문에 자기 편이 아닌 자는 비록 사람들의 중망을 받고 있는 자라도 반드시 배척하고, 자기와 뜻이 같은 자는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기는 자라도 반드시 등용합니다. 모든 일을 이렇게 하고 있는데, 비록 하나하나 거론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미루어 보면 다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가 권세를 멋대로 부리고 있는 것이 또한 극도에 이르렀다고 하겠습니다.
그가 비록 보필(輔弼)의 임무를 맡은 지위에 있지는 않으나 전하께서 믿고 맡기셨다면, 그는 마땅히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를 당(唐)나라의 이필(李泌)이나 육지(陸贄)와 같이 해야 하는데, 도리어 나라를 저버리기를 이렇게 하니, 신은 매우 통분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상께서는 깊은 궁궐에서 지내기 때문에 그가 이토록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가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어질다고 여겨서 맡겨 의심을 하지 않고 계시는 것입니까? 만약 어질다고 여겨서 의심을 하지 않으신다면, 신이 비록 어리석으나 분변을 해 드리겠습니다.
신이 들으니, 임금은 어진이가 없으면 정치를 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훌륭한 임금이 위에 있더라도 임용된 신하가 불초한 사람이면 정치를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堯)가 임금으로 있는데도 곤(鯀)의 치수(治水)가 공적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면 임용된 신하가 어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임용된 신하가 불초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을 잘 다스려지는 때라고 보십니까, 혼란한 때라고 보십니까?
지난번에 해의 이변이 거듭 나타나고 지진이 누차 발생하였으며 겨울 안개가 사방에 가득했었으니, 이는 모두 재변 가운데에서도 큰 재변이었습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그 형체가 보이지 않으면 그 그림자를 살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런 재변이 오늘날의 그림자라고 생각합니다. 태양은 모든 양(陽)의 종주(宗主)로서 임금의 표상이기 때문에, 일식(日食)이 하늘 운행의 상도(常度)인데도 《춘추(春秋)》에 일식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기록하였고, 전(傳)에는 ‘첩부(妾婦)가 그 지아비를 누르거나 신하가 임금을 저버리거나 정권(政權)이 신하에게 있거나 오랑캐가 중국을 침범하는 형상이니, 모두가 음(陰)이 왕성하고 양(陽)이 미약한 증거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흰무지개가 해를 궤뚫는 참혹함은 일식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재변은 까닭없이 생기지 않는 것이니, 어찌 그 이유가 없겠습니까.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大學衍義)》에서 ‘충신의 마음은 오히려 임금이 재변을 두려워하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이니 위상(魏相)이 역적(逆賊)의 발생과 풍우(風雨)의 재변을 한 선제(漢宣帝)에게 고한 것이 이것이고, 간신의 마음은 오히려 임금이 재변을 두려워할까를 염려하는 것이니 양국충(楊國忠)이 장맛비가 농사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하여 당(唐) 명황(明皇)을 속인 것이 이것이다. 대개 임금이 하늘의 재변을 두렵게 여기면 반드시 자신의 허물을 찾아보고 반드시 폐정(弊政)을 반성하여 고치며 반드시 소인을 제거하니 이것은 충신에게는 즐거운 일이고 간신에게는 불편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씀이 이렇게 다른 것이다. 근래에 왕안석(王安石)이 드디어 하늘의 재변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말을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령 이이첨이 충신이라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이이첨이 간신이라면 오늘날의 재변을 혹 다른 나라에 전가시키거나 혹 다른 일의 증험이라고 하거나 혹은 두려워할 것이 없는 일이라고 곧바로 말할 것입니다. 신도 또한 높고 멀어 알기 어려운 일을 가지고 그에게 책임을 돌리기는 어렵기 때문에 신은 많은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날 변방의 방비가 허술한 점이 많아 나라의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아랫백성들이 원망을 품어 방본(邦本)이 튼튼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인심이 매우 투박해져서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고 풍속이 아주 무너져 염치가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위로는 벼슬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아래로 시정배에 이르기까지 신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선비들에 대해서는 신이 함께 지내며 함께 만나는 자들이니 신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책과 붓을 가지고 공부를 하러 다니는 자들이 한갓 이록(利祿)이 있다는 것만 알 뿐이고 인의(仁義)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과거(科擧)는 선비들이 처음으로 벼슬에 나가는 길인데, 모두들 빨리 진출할 마음을 품고 서로들 구차하게 합격할 꾀를 씁니다. 차술(借述)을 하여 권세있는 자에게 빌붙고 주사(主司)에 교통하였다는 말을 사람들이 모두 공공연하게 꺼리지 않고 하고들 있습니다. 아비는 아들을 가르치고 형은 동생을 면려하며 친구들끼리 서로 불러다가 온통 이렇게 하고들 있으면서 돌이킬 줄을 모릅니다. 간혹 백 명 가운데에 한두 명이 이와 반대로 하면 도리어 비웃고 비난을 합니다. 심지어는 자기와 다르게 한다고 화를 내어 욕하고 헐뜯는 자도 있습니다. 아, 사기(士氣)는 나라의 원기(元氣)인데 이 지경이 되었으니, 통탄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처음 임금을 뵐 때에 이와 같다면 뒷날 조정에 벼슬을 하게 되었을 때에 벼슬을 얻고자 근심하고 그 벼슬을 잃을까 근심하는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건대, 아비와 임금을 시해하는 역적이 없다면 그만이거니와 있다면 반드시 이 무리에게서 나올 것이며, 자신을 버리고 나라에 몸바칠 신하가 없다면 그만이거니와 있다면 반드시 이 무리에게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선유(先儒)의 시에 이르기를 ‘이런 사람을 등용하고 이런 도를 시행하니 어느날 태평의 시대가 올지 알지 못하겠구나.[所用是人行是道 不知何日可昇平]’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일찍이 이 시를 읊으며 천장을 쳐다보고 탄식을 하였습니다.
이이첨이 임금의 총애를 저토록 오로지 차지하고 있고 나라의 정치를 저토록 오래도록 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재변이 저러하고 나라의 형세가 저러하고 백성들의 원성이 저러하고 풍속이 저러하고 선비들의 습속이 저러하니, 이자가 과연 어진 자입니까, 어질지 못한 자입니까?
옛날 한 원제(漢元帝) 때에 석현(石顯)이 권세를 멋대로 휘둘렀는데 경방(京房)이 한가한 여가에 원제를 뵙고 묻기를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은 왜 위태해졌으며 등용한 사람은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이 밝지 못하였고 등용한 자들은 간교한 아첨꾼들이었다.’ 하였습니다. 경방이 묻기를 ‘간교한 아첨꾼인 줄을 알고서 등용하였습니까, 아니면 어질다고 여긴 것이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질다고 여긴 것이다.’ 하였는데, 경방이 묻기를, ‘그렇다면 오늘날 어떻게 그들이 어질지 못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가 혼란스럽고 임금이 위태했었던 것을 가지고 알 수가 있다.’ 하였습니다. 경방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어진이를 임용하면 반드시 잘 다스려지고 어질지 못한 이를 등용하면 반드시 혼란이 오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유왕과 여왕이 어찌하여 이를 깨닫고서 다시 어진이를 구하지 아니했으며 어찌하여 끝내 불초한 사람을 임용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지러운 시대의 임금은 자기의 신하를 모두 어질다고 여긴다. 만약 모두 깨닫는다면 천하에 어찌 망하는 임금이 있겠는가.’ 하자, 경방이 아뢰기를, ‘제 환공(齊桓公)과 진 이세(秦二世)도 또한 일찍이 이런 임금에 대해서 듣고는 비난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렇다면 수조(竪刁)와 조고(趙高)에게 정치를 맡겨 정치가 날로 어지러워졌는데도 어찌하여 유왕과 여왕의 경우를 가지고 헤아려서 깨닫지를 못하였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직 도(道)가 있는 자라야 지난 일을 가지고 앞날의 일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경방이 인하여 관(冠)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그 당시의 재변에 대한 일 및 도적을 금하지 않고 있는 일과 형벌받은 사람이 시장에 가득한 일 등을 모두 말하고, 아뢰기를 ‘폐하께서 보시기에 오늘날이 다스려지는 시대입니까, 혼란한 시대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혼란한 때이다.’ 하자, 경방이 아뢰기를 ‘현재 임용한 자가 누구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나 다행히 저 시대보다는 낫다. 또한 이 사람 때문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하였는데, 경방이 아뢰기를 ‘지난 시대의 임금들도 또한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아마도 뒷시대에서 오늘날을 보는 것도 오늘날 옛 시대를 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도 또한 ‘다행히 저 시대보다는 낫다. 또한 이 사람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하실 것입니까? 신은 밝으신 전하께서는 반드시 한 원제의 소견과 같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가 이미 불초하기가 이와 같고 권세를 독차지하고 멋대로 휘두른 것이 저러하니 말류의 폐단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화란이 이를 바를 신은 감히 점치지 못하겠습니다.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은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일상적인 이야기거리입니다. 그런데도 이이첨이 또한 감히 변명을 하고 있으니 신은 삼가 통분스럽게 생각합니다. 자표(字標)로 서로 호응하였다거나 시권(試券)에 표식을 하였다거나 장옥(場屋)에 두사(頭辭)를 통하였다거나 시험의 제목을 미리 누출하였다는 등의 말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어찌 다 믿을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난해 식년시의 강경(講經) 시험에는 높은 점수를 받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심지어 10획을 넘고도 과거에 떨어진 자까지 있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러한 때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난 시대에 공부를 하던 자들은 힘을 다하지 않는 때가 없었는데도, 높은 점수를 받은 자가 이렇게 많은 때가 있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선비들의 습속이 옛날과 달라서 사람들이 열심히 글을 읽는 때가 적은데도 도리어 이와 같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자표로 서로 호응하였다는 일은 반드시 없었으리라고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올해의 별시 전시(別試殿試)의 급제자 가운데에는 고관(考官)의 형제와 아들과 조카 및 그들의 족속으로서 참방한 자가 10여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전시가 비록 상피하는 법규가 없다고는 하나 예로부터 어찌 한 과방 안에 상피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합격한 자가 이렇게 많은 때가 있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이이첨과 황정필(黃廷弼)이 비록 말을 잘한다고는 하나, 상피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이 급제한 경우를 찾아서 증거를 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시권에 표식을 했거나 장옥에 두사를 통한 일이 또한 반드시 없었으리라고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반궁(泮宮)의 시험은 정해진 시각이 있어서 성화와 같이 급하므로, 예로부터 비록 재능이 출중하고 공부를 가장 많이 하여 물이 솟구치고 산이 솟아나는듯이 글을 지어 마치 누군가 도와주는 자가 있는듯이 빠른 자라고 하더라도 으레 대부분은 한 편의 글을 간신히 지어내고, 혹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마무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당대에 재능이 있다는 이름을 독차지하고 한 과방의 장원이 되는 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지은 작품은 사람들의 마음에 차지 않으며 혹 염(簾)을 어긴 구절도 많고 혹 지우고 고친 글자가 많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이 금년의 반시(泮試)를 보니, 글제를 내걸었다가 금방 파하였는데도 명지(名紙)에 즉시 글을 지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오늘날의 시험장에 일찍이 예전에 없었던 이토록 탁월한 인재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듣지 못하였으며, 설령 밖에서 때에 임하여 지어서 들여왔다면, 귀신이 도와주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렇게 민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뒤에 들으니, 그 작품들이 자못 훌륭하여 논란을 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치로 헤아려 보건대 참으로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글제를 미리 유출시켜 집에서 지어오게 하였다는 말이 또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진사 민심(閔𦸂)은 바로 신의 아비와 같이 급제한 사람의 아들인데, 이이첨의 당류이며 신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자입니다. 반시(泮試)가 있기 며칠 전에 신의 친구 전 첨지(僉知) 송희업(宋熙業)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는 신의 《사문유취(事文類聚)》를 빌려보고자 하였습니다. 신이 전체를 빌려주고 싶지가 않아서 몇째 권을 보고자 하는지를 물었더니, 청명절(淸明節)이 들어 있는 권이었습니다. 그 권이 마침 신의 서실(書室)에 있었기 때문에 갖다가 주었습니다. 민심이 말하기를 ‘다른 권도 보고자 합니다. 전질을 빌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기에 신이 그 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굳이 물었더니, 민심이 말하기를 ‘등촉부(燈燭部)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것이 들어 있는 권은 친가(親家)에 있으니 어떻게 합니까?’ 하였더니, 민심이 ‘사람을 시켜서 갖다 주십시오.’ 하였는데, 신이 ‘찾으러 보낼 사람이 없습니다.’고 하자, 민심이 ‘제가 가서 찾아 오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안방에 보관되어 있어서 외부 사람이 찾을 수가 없습니다.’고 하니, 민심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대가 내 말을 타고 가서 가져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신이 ‘지금 다른 손님을 대하고 있으므로 갈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더니, 민심이 이에 망연자실하여 일어나서 가려고 하지를 않더니 오랜 뒤에 어찌할 수가 없자 단지 그 권만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에 간신히 가져올 수가 있었는데, 뒷날 반궁의 시험장에 들어갔더니, 바로 유류화(楡柳火)라는 제목이 걸려 있었습니다. 《사문유취》에서 찾아보니 이것은 청명절에 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등촉부에도 볼 만한 글이 많이 있었습니다. 신이 비로소 이상하게 여기며 마음 속으로 말하기를 ‘성상께서 친림하시어 임금의 위엄이 지척에 있는데도 감히 미리 유출했던 제목을 출제하였으니,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이첨이 이렇게까지 되었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시험장에 들른 일이 있은 뒤에 신이 신의 7촌 아저씨인 유학(幼學) 윤유겸(尹唯謙)을 만났는데 민심의 일에 대한 말이 나오니, 유겸이 말하기를 ‘반시를 시행하기 며칠 전에 어떤 친구가 나에게서 이 두 권을 빌려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 성명을 물어 보았더니, 역시 이이첨의 당류였습니다.
신은 성품이 소루하고 게을러 교유(交遊)를 끊고 출입을 삼가고 있으므로 세간의 일에 대해서 귀머거리나 장님과 같은데도 신이 들어서 아는 바가 이와 같고 보면,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일들을 보았겠습니까. 그리고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길에 나도는 말들이 또한 근거가 있는 말일 듯합니다.
이이첨의 네 아들이 모두 미리 시험 문제를 알아내거나 차작(借作)을 하여 과거에 오른 일에 대해서,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말을 하고 있습니다. 대개 그 네 아들이 혹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재주와 명망이 없는데도 잇따라 장원을 차지하기도 하였고 혹은 전혀 문장을 짓는 실력이 없는데도 과거에 너무 쉽게 오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이첨의 도당들이 이미 과거를 자신들의 소유물로 삼았다면, 이이첨의 아들들에 대한 일은 많은 말로 논변할 것도 없기 때문에 신은 다시 운운하지 않겠습니다.
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인정상 박절함을 면치 못하고 또한 잗단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만, 과거가 이토록 공정치 못한 것은 국가에 관계되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이이첨이 관작(官爵)으로써 벼슬아치들을 끌어모으고 과거로써 유생들을 거두어들여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므로 온 세상이 그에게로 쏠려들어가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합니다.
옛날에 제(齊)나라의 전씨(田氏)가 큰 덕(德)은 없어도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푸는 일이 있자030) 안자(晏子)가 경공(景公)에게 간하기를 ‘대부의 집안에서 베푸는 혜택은 나라 전체에 미쳐서는 안 되고, 대부는 군주의 이익을 자신이 취하지 않는 법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관작과 과거를 가지고 혜택을 베푸는 것이 어찌 쌀을 나누어주며 혜택을 베푸는 것과 같겠으며, 벼슬아치와 유사(儒士)들이 귀의하는 것이 어찌 일반 백성들이 귀의하는 것과 같겠습니까.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에서 말하기를 ‘전씨의 화근은 경공의 시대에는 그래도 막을 수가 있었지만 이미 세월이 오래 지나게 되어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분변해야 옳은 일을 어찌 일찍 분변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아,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
이원익(李元翼)은 우리 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며, 이덕형(李德馨)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에 몸바친 사람이며, 심희수(沈喜壽)는 비록 대단한 재능과 덕망은 없습니다만 우뚝하게 소신을 가지고 굽히지 않은 사람이니 또한 종묘 사직에 공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이첨이 모두 삼사(三司)를 사주하여 끊임없이 논집해서 잇따라 귀양을 보내고 내쫓게 하였습니다. 다행히 성상께서 온전하게 돌보아 주시어 금부에 내리려던 계책을 이루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은 집안을 단속하지 못하고 몸가짐을 엄하게 하지 않으니 참으로 하찮고 용렬한 자들입니다. 이이첨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도, 바른 말로 논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쟁집하지 아니하니, 참으로 겁많고 나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모두 나라의 훈척(勳戚) 중신(重臣)으로서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하고 안위(安危)를 함께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이첨이 원수처럼 보고서 반드시 중상(中傷)을 하려고 하니, 그 의도가 흉참합니다. 그가 겉으로 화호(和好)를 하면서 혼인을 맺고자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가 박승종과는 본디 혼인(婚姻)한 집안인데도 서로 잘 지내지 못하니 어찌 이익이 없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대개 유희분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기는 권세가 없어서 유희분을 두렵게 여기고 있는 것처럼 하여 우호를 맺으려는 태도를 보이려는 것입니다. 그 계책이 참으로 교묘합니다.
옛날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쥐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세신(世臣)과 공족(公族) 및 재능과 공덕(功德)이 자기보다 나은 자를 제거한 뒤에 감히 자기 마음대로 권세를 부렸습니다. 전항(田恒)과 조고(趙高)와 이임보(李林甫) 및 기타 소인들의 일에서 분명하게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김제남은 반역을 한 정상이 분명하여 덮어 가릴 수가 없었으니, 하늘과 땅과 귀신과 사람이 모두 함께 죽인 자입니다. 이원익 등이 풍병이 들어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무슨 마음으로 역적을 비호하고 우리 성상을 저버리겠습니까. 이이첨 등이 호역(護逆)이라는 두 글자로 하나의 큰 그물을 만들어서,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며 그들과 더불어 함께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자가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을 가지고 때려잡았습니다. 이 이름이 한번 더해지면 해명할 말이 없으며 벗어날 계책이 없게 됩니다. 소인(小人)이 선류(善類)를 함정에 밀어넣는 것은 그 계책을 씀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아, 두려운 일입니다.
홍무적(洪茂績)·정택뢰(鄭澤雷)·김효성(金孝誠) 등도 이 그물에 걸려 세상에 큰 누(累)가 되었고 영원히 언로(言路)가 막혔습니다.
원이곤(元以坤)은 어떠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세상의 기휘(忌諱)를 범하면서 남들이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감히 말한 자입니다. 그러나 신이 그 상소의 사연을 보았더니, 그의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두려움에 차 있었고 패기도 없고 정신도 나약하여, 강직한 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닌 듯하였습니다. 더구나 ‘명예를 훔친 낙양의 소년’이라는 말은 길에 흘러다니는 말인데, 성상께 진달하기까지 하였으니, 그것이 이이첨이 말을 꾸며 스스로 해명을 할 기화가 된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시사를 말한 초야의 사람이 형장을 받기까지 한다면 뒷날 위망이 눈앞에 닥치는 일이 있더라도 누가 목숨을 버려가면서 말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언자(言者)에게 비록 광망(狂妄)한 잘못이 있더라도 성인(聖人)은 죄를 다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대(銀臺)의 계사와 대간의 논열이 마침내 형구를 씌워 옥에 가두고 고문을 하여 형장을 받게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이임보(李林甫)가 어사(御史)에게 넌지시 일러 봉장(奉璋)을 죽이게 한 것031) 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신이 이른바 후설과 이목을 맡은 관원이 모두 그의 복심이라고 한 것을 이것을 가지고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복심을 요직에 포진시킨 것은 어떤 방법으로 하였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옛 전례에 당하관의 청망(淸望)은 모두 전랑(銓郞)의 손에서 나오며, 당상관의 청망도 완전히 전랑의 손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더라도 전랑이 막으면 의망할 수가 없습니다. 전랑의 직임이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와 같기 때문에 반드시 널리 공론을 모아서, 한 시대의 명류(名流)로서 명망과 실상을 함께 갖춘 자를 힘써 얻어서 전랑을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아무도 사사로움을 부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홍도(朴弘道)와 박정길(朴鼎吉)은 이이첨에게는 골육과 같은 자들이고 대엽(大燁)에게는 천륜(天倫)을 함께한 형제와 같은 자들인데, 이이첨이 이 두 사람을 전랑에 배치하였습니다. 박홍도는 조금이라도 자기의 뜻에 맞지 않으면 곧바로 물리쳤습니다. 또 그의 아들 대엽과 익엽(益燁)을 잇따라 전랑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전랑의 중요성은 앞에서 진달한 바와 같은데, 참으로 이이첨의 골육과 같은 자 및 진짜 골육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전후의 전랑들은 반드시 모두 그의 골육과 같은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박홍도와 박정길이 골육과 같고 형제와 같은데 전랑에 배치하였다는 말은 신이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이대엽이 집의로 있을 때에 올린 계사 가운데에 이러한 말이 있었으니 이는 성상께서도 보신 바입니다. 전랑들이 모두 그의 골육과 같은 자들이거나 진짜 골육이라면 전조(銓曹)가 주의(注擬)한 사람들이 모두 그의 복심이라는 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건대, 무릇 과거의 고관(考官)들도 또한 모두 자기의 복심으로 임명하였을 것입니다. 관학의 유생들이 모두 그의 도당이 된 것은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과거로 그들을 수합하였기 때문입니다. 황정필(黃廷弼)의 상소의 사연은 한(漢)나라 사람들이 왕망(王莽)의 공덕을 찬양한 것과 다름이 없을 듯합니다. 신은 차마 보지 못하겠습니다.
아, 이이첨의 도당이 날로 아래에서 번성하고 전하의 형세는 날로 위에서 고립되고 있으니, 어찌 참으로 위태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전하를 위하여 말을 하는 자가 없습니다. 아, 우리 나라의 3백여 개의 군(郡)에 의로운 선비가 한 사람 도 없단 말입니까. 유희분과 박승종과 같은 자들은 의리상 휴척을 함께해야 하는데도 오로지 몸을 온전히 하고 처자를 보호할 마음으로, 임금의 위망을 먼 산 보듯이 보며 구제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가 큽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야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어리석은 신이 앞뒤로 올린 글을 자세히 살피시고 더욱 깊이 생각하시어, 먼저 이이첨이 위복을 멋대로 농단한 죄를 다스리시고 다음에 유희분과 박승종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다스리소서. 그 나머지 이이첨의 복심과 도당들에 대해서는, 혹 당여를 모조리 제거하는 율법을 시용하기도 하고 혹 위협에 못이겨 따른 자들을 용서하는 율법을 사용하기도 하소서. 그러면 종묘 사직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춘추》 전(傳)에 이르기를 ‘만연되면 제거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미 만연되었으니 제거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조심하고 조심하소서.
신이 비록 어리석으나 흰색과 검은 색도 분변 못하는 자는 아니니, 어찌 이런 말을 하면 앙화가 뒤따른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더구나 홍무적(洪茂績) 등은 이이첨의 죄상을 조금도 지적하지 않았는데도 바다 밖으로 귀양을 갔고, 원이곤(元以坤)은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조금 진달하였다가 화를 당하여 옥에 갇혔습니다. 신이 말한 것은 모두 선배들이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서 온 나라에서 한 사람도 감히 말하지 않은 것이니, 신이 당할 앙화의 경중은 앉아서 알 수가 있습니다.
진덕수가 《대학연의》에서 말하기를 ‘간신(奸臣)이 나라의 권세를 독차지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언로(言路)를 막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위에서 고립되어 밖의 일을 보지 못하게 한 뒤에 그 욕망을 멋대로 부리는 것이다. 그래서 크게는 나라를 찬탈하고 작게는 권세를 잡고 정치를 멋대로 하여 못하는 짓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선(正先)이 죽자 조고(趙高)가 정치를 멋대로 하였고032) 왕장(王章)이 죽음을 당하자 왕봉(王鳳)의 권세가 더욱 치성해졌으며033) 두진(杜璡)이 쫓겨나자 이임보(李林甫)가 전횡을 하였다.’034)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또한 신이 평소 알고 있던 바입니다. 옛날에 일을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임금이 용납을 하고 죄를 주지 않으면 간신이 반드시 간교한 꾀로 모함을 하여, 혹 다른 일을 가지고 몰래 중상을 하여 죽이기도 하고 혹 귀양을 보내놓고는 그곳 수령을 시켜서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이것 또한 신이 평소 염려하던 바입니다. 성인(聖人)께서 말을 공손하게 하라는 경계를 하셨고 몸을 보전하는 방도를 일렀으니, 이 뜻을 신이 또한 조금은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위태한 말을 이렇게 하는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신의 집안은 3대 동안 국가의 녹을 먹었고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만약 나라에 위급한 일이 일어나면 국난(國難)에 달려나가 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간신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이 이러하고 나라가 위태롭기가 이러한데, 남쪽과 북쪽의 오랑캐들이 이런 틈을 타서 침입해 온다면, 비록 난리를 피하여 구차스럽게 살고자 하더라도 또한 좋은 방책이 없을 것이며 꼼짝없이 어디 도망갈 곳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 보탬도 없는 곳에서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오늘날 전하를 위해서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신의 말을 옳게 여기신다면 종묘 사직의 복이요 백성들의 다행일 것이며, 비록 옳지 않다고 여기시어 신이 죽게 되더라도 사책(史冊)에는 빛이 나게 될 것입니다. 신은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다만 신에게는 노쇠하고 병든 늙은 아비가 있는데, 이 상소를 올리는 신을 민망하게 여겨서 온갖 말로 중지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이치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세히 말씀을 드리고 또한 임금과 신하 사이의 큰 의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의 아비는 금지시키고자 하면 나라를 저버리게 될까 염려되고 그대로 들어주자니 아들이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쌍하여 우두커니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상소를 올림에 미쳐서는 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용감하게 결단을 내리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지경에 이르고 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인자하신 성상께서는 비록 신에게는 무거운 벌을 내리시더라도 신의 늙은 아비에게까지는 미치지 않도록 하시어, 길이 천하 후세의 충신과 효자들의 귀감이 되게 하소서. 참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바라는 바입니다.
신이 진달할 말은 이것뿐만이 아니나 글로는 뜻을 다 말씀드리지 못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아뢰는 바입니다. 전하께서 왕좌에 계시면서 조용한 시간에 《대학연의》의 변인재(辨人才) 등의 조항을 가져다가 마음을 비우고 자세히 읽어보시면 군자와 소인의 정상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조정의 격례(格例)를 알지 못하여 말이 대부분 차서가 없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였다. 그 뒤에 양사의 합계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윤선도를 외딴 섬에 안치(安置)하라. 윤유기(尹惟幾)는 윤선도와는 전혀 다르니 단지 관작을 삭탈하기만 하여 시골로 내려보내라."
하였다. 【〈윤선도는 윤유기의 양자(養子)이다. 윤유기는 본래 이이첨의 당류였으나 이이첨이 거두어 써주지 않았다. 윤선도의 상소가 들어가자 왕이 자못 의혹을 하였는데, 이이첨이 밤낮으로 호소하며 애걸하였기 때문에 이에 풀려났다. 윤유기는 본디 명류(名流)들을 질투하였고, 또 김제남의 옥사를 두고 억울한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역모를 한 정상은 길가는 사람들도 안다고 하는 말을 하였다. 사람들이 이 때문에 하찮은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윤선도는 이 상소 때문에 온 나라에 명망이 높아졌다.〉 】
-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52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536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과학-천기(天氣)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역사-고사(故事) / 변란-정변(政變) / 사상-유학(儒學)
- [註 030]옛날에 제(齊)나라의 전씨(田氏)가 큰 덕(德)은 없어도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푸는 일이 있자 : 제나라 때에 이자(釐子) 전걸(田乞)이 제 경공을 섬겨 대부가 되었는데,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거둘 때에는 작은 말[斗]을 사용하고 창고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줄 때에는 큰 말을 사용하여 백성들에게 덕(德)을 베풀어 민심을 얻었다. 안자(晏子)가 그렇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누차 간하였으나 경공은 따르지 않았다. 마침내 제나라는 전씨 집안의 후손인 전화(田和)라는 사람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나라를 잃었다. 《사기(史記)》 권46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좌전(左傳)》 소공(昭公) 26년.
- [註 031]
봉장(奉璋)을 죽이게 한 것 : 당 현종(唐玄宗) 때에 함녕 태수(咸寧太守) 조봉장(趙奉璋)이 간신 이임보의 숨겨진 악행 20조목을 찾아내어 현종에게 아뢰려고 하였는데, 이임보가 어사(御史)에게 넌지시 일러, 조봉장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요망한 말을 한다고 탄핵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당서(唐書)》 권223 간신전(姦臣傳).- [註 032]
정선(正先)이 죽자 조고(趙高)가 정치를 멋대로 하였고 : 《한서(漢書)》 권75 경방전(京房傳)에 "정선(正先)은 진(秦)나라 때의 박사(博士)로서 조고(趙高)의 전횡을 비판하다가 죽었다."고 하였다.- [註 033]
왕장(王章)이 죽음을 당하자 왕봉(王鳳)의 권세가 더욱 치성해졌으며 : 《한서(漢書)》 권76 왕장전(王章傳)에 "경조윤(京兆尹) 왕장(王章)은 성품이 강직하고 바른 말을 잘하였는데, 왕봉(王鳳)의 전횡을 비판하며 글을 올려, ‘일식(日食)의 재변은 왕봉이 정권을 독차지하고 임금의 이목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라고 하였다가, 결국 왕봉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옥중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註 034]
두진(杜璡)이 쫓겨나자 이임보(李林甫)가 전횡을 하였다.’ : 《당서(唐書)》 권223 열전(列傳) 간신(姦臣)에 "이임보(李林甫)가 전횡을 할 때에 보궐(補闕) 두진(杜璡)이 거듭 글을 올려 정치에 대해서 간쟁하였는데, 곧바로 이임보에 의하여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이로부터 간쟁하는 일이 끊기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런 내용들은 모두 《대학연의》에 편집되어 있다.○進士尹善道上疏曰: 大槪請先治李爾瞻, 擅弄威福之罪, 次治柳希奮、朴承宗, 忘君員國之罪。 呈政院。 伏以臣聞, 人君馭下之道, 莫大於總攬權綱。 故《書》曰: "惟辟作福作威。" 宋臣眞德秀之言曰: "爲人君者, 豈可一日失其操柄也哉?" 旨哉, 言乎! 爲人臣者, 苟有專執國柄, 使其腹心, 布列要津, 威福出於己。 設使賢而如此, 猶不可也, 如其不賢而如此, 則國家不亦危乎? 當今聖上臨御, 君君臣臣, 宜無如此之人, 而臣竊見禮曹判書李爾瞻所爲, 不幸近之, 臣竊怪焉。 臣一介腐儒, 旣愚且賤, 雖居城市, 有同遐氓, 其於朝廷上事, 百不知一, 而只以耳目所及, 仰達冕旒。 伏願聖明留神焉。 臣伏見近來爲股肱・耳目・喉舌之官、論思・風憲・銓選之任者, 無非爾瞻之腹心。 間有一二, 非其輩流, 而參錯於其間者, 必其爲人軟熟, 行己脂韋, 相時周容, 隨後波低昂者也。 故凡臺閣啓辭, 殿下必以爲出於臺閣, 而其實出於爾瞻也; 玉堂箚子, 殿下必以爲出於玉堂, 而其實出於爾瞻也; 銓曹注擬, 殿下必以爲出於銓曹, 而其實出於爾瞻也。 或承望風旨而爲之, 或受其指揮而爲之。 雖或事之可者, 必須稟問然後爲之。 至於館學儒生, 無非其類, 故館學疏章, 亦無非陽爲矯激, 而陰實附麗者也。 夫如是, 故異己者則雖物論所重, 而必斥之; 同志者則雖物論所鄙, 而必用之。 凡事稱是, 雖難枚擧, 可以類推, 其爲專擅, 亦云至矣。 渠雖不在輔弼之任, 殿下信之任之, 則渠當盡忠國家, 如唐之李泌、陸贄, 而乃反負國如此, 臣切痛之。 聖明深居九重, 不知其專擅之至此乎? 抑雖知專擅, 而以其爲賢, 委任不疑乎? 如以爲賢而不疑, 則臣雖愚黯, 可以辨之矣。 臣聞, 后非賢罔乂。 雖使聖君在上, 而任用之臣不肖, 則無以爲治。 故以堯爲治君, 而鯀治水不績。 是故, 國家治, 則可知任用之臣賢也; 國家亂, 則可知任用之臣不肖也。 殿下視今日, 爲治耶? 亂耶? 頃者日變疊現, 地震累作, 冬霧四塞, 此皆災異之大者也。 古人云: "不察見其形, 願察其影。" 臣恐此乃當今之影也。 日者, 衆陽之宗, 而人君之表, 故日食乃天行之常度, 而《春秋》每公食必書。 傳曰: "或妾婦乘其夫, 或臣子背君父, 或政權在臣下, 或夷狄侵中國, 皆陰盛陽微之證也。" 況白虹貫日之慘, 不可比諸日食。 變不虛生, 豈無所由然? 眞德秀之言曰: "忠臣之心,猶恐人君不畏災異, 魏相以逆賊、風雨, 告宣帝, 是也; 奸臣之心, 猶恐人君知畏災異, 國忠謂災異霖雨不害稼, 以欺明皇, 是也。 蓋人主畏天災, 則必求己過, 必更弊政, 必去小人, 此乃忠臣之所樂, 而奸臣之所不便也。 故其操術不同如此。 近世王安石, 遂有天災不足畏之語。" 使爾瞻忠也則已, 使爾瞻奸也, 則凡今之災異, 或移之他國, 或證以他事, 或直謂之以不足畏。 臣亦難以高遠難知之事, 歸之於渠, 故臣不敢多談。 但當今邊圉多疎, 而國勢甚危; 下民怨咨, 而邦本不固。 且人心極偸, 世道日下, 風俗大壞, 廉恥板蕩。 上而簪笏之徒, 下而市井之輩, 臣不能詳知其所爲, 而至於士子間, 則臣所游處, 而目相接者也, 臣豈不知乎? 挾冊操筆者, 徒知有利祿, 而不知有仁義。 至於科擧, 乃士子發身之初逕, 而皆懷躁進之心, 競爲苟得之謀。 借述附勢, 交通主司之說, 人皆公言無所忌諱。 父詔其子, 兄勉其弟, 朋友相招, 往而不返, 滔滔皆是。 間有千百中一二反是者, 則反冷笑之, 譏議之。 至於怒其異己, 而誣毁之者, 亦有之。 嗚呼! 士氣乃國家元氣, 而至於如此, 可勝痛哉? 初見君父之時, 乃如此則異日立朝, 其患得患失之心, 爲如何哉? 臣竊以謂 , 弑父與君之賊無則已, 有則必出於此輩; 忘身徇國之臣無則已, 有則必不出於此輩也。 先儒有詩曰: "所用是人, 行是道, 不知何日可昇平。" 臣嘗誦此, 而仰屋竊嘆也。 爾瞻得君, 如彼其專, 行乎國政, 如彼其久, 而災變如彼、國勢如彼、民怨如彼、風俗如彼、士習如彼, 是果賢耶? 否耶? 昔漢 元帝時, 石顯顓權, 京房嘗燕見, 問上曰: "幽、厲之君何以危, 所用何人耶?" 上曰: "君不明而所任者巧侫耳。" 房曰: "知其巧侫而用之耶? 將以爲賢耶?" 上曰: "賢之也。" 房曰: "然則今何以知其不賢耶?" 上曰: "以其國亂而君危, 故知之耳。" 房曰: "若然則任賢必治, 任不賢必亂, 必然之理也。 幽、厲何不覺悟, 而更求賢, 曷爲卒任不肖, 以至於是?" 上曰: "臨亂之君, 各賢其臣。 今令皆覺悟, 天下安得危亡乎?" 房曰: "齊 桓公、秦 二世, 亦嘗聞此君而非笑之矣。 然則任竪刁、趙高, 政日益亂, 何不以幽、厲卜之而覺悟乎?" 上曰: "惟有道者, 能以往知來耳。" 房因免冠頓首, 盡言其時災異, 乃盜賊不禁、刑人滿市等事曰: "陛下視今爲治耶, 亂耶?" 上曰: "亦極亂耳。" 房曰: "今所任用者誰歟?" 上曰: "然幸其愈於彼。 又以爲不在此人也。" 房曰: "前世之君, 亦皆然矣。 臣恐後之視今, 猶今之視昔也。" 今我殿下, 亦將謂"幸其愈於彼。 又以爲不在此人也"歟? 臣謂以殿下之聖明, 必不如漢 元所見也。 渠旣不肖如此, 專擅如彼, 末流之弊, 有不可勝言者矣。 其禍之所止, 臣不敢占也。 至於科擧不公之說, 爲今日不可諱之常談。 而爾瞻亦敢發明, 臣竊痛之。 字標相應、試卷爲標、場屋通頭、預出試題之說, 頗多往來行言。 而人之爲言, 何可盡信? 前年式年之講經也, 畫數多者甚衆, 優過十畫, 而下第者有之。 殿下曾見如此之時乎? 昔日學焉者, 無不盡力之時, 尙未聞多畫者如此之衆。 到今士風不古, 人鮮勤讀之時, 乃反如此, 是豈理也哉? 然則字標相應之事, 不可保其必無也。 今年別試殿試及第, 考官之兄弟、子姪及其他族屬, 多至十餘人云。 殿試雖無相避之法, 自古豈有一榜中, 相避人得中者, 如許之時乎? 臣恐爾瞻之利口、黃廷弼之巧舌, 必不能得相避人及第者, 如許衆多者而爲證也。 然則試卷, 爲標場屋通頭, 亦不可保其必無也。 泮宮之試, 時刻有限, 急於星火, 故自古雖才藝出衆, 積功最多, 水湧山出, 若或相之者, 例多僅得成篇, 或因朋伴之助, 而足之者, 故雖其擅當代之才名, 爲一榜之壯元者, 其所作不滿人意, 或多違簾之句, 或多擦改之字。 而臣今觀泮試, 懸題纔罷, 名紙卽寫者甚多。 當今場屋間, 固未聞振古所無如此卓越之才, 而設使臨時自外製入, 則雖神相鬼輸, 必不能如此其敏捷也。 而況厥後聞之, 其所作頗有富麗, 不可容議者云, 以理揆之, 誠不可知。 然則預題宿構之說, 其亦有所自矣。 進士閔𦸂乃臣父同年之子, 而爾瞻之黨也, 臣所未嘗見面者也。 於其泮試前數日, 請臣之故舊前僉知 宋熙業之書簡而來求見臣之《事文類聚》。 臣不欲盡秩借之, 問其所欲看之卷, 則淸明節付卷也。 其卷適在臣之書室, 取以與之。 𦸂曰: "又欲見他卷, 請盡秩借之。" 臣固問其所要者, 𦸂曰: "燈燭部也。" 臣曰: "此類帙藏在親家, 奈何?" 𦸂曰: "令人取來。" 臣曰: "無人搜出。" 𦸂曰: "吾可往搜乎?" 臣曰: "藏在內裏, 非外客可搜。" 𦸂曰: "子騎吾馬取來如何?" 臣曰: "方對他客, 不可去也。" 𦸂於是, 茫然自失, 不肯起去。 良久無可奈何, 只持其卷而歸。 入場之前, 僅得推來矣, 後日入泮場, 乃逢楡柳火。 考諸《事文類聚》, 則乃淸明節所賜也。 又於燈燭部, 多有可觀之辭。 臣始怪之, 心語口曰: "寶座親臨, 天威不違於咫尺, 而敢出預書出之題, 則無君之心著矣。 爾瞻其至是耶?" 過場之後, 臣見臣之七寸叔幼學尹唯謙, 語及閔𦸂之事, 則唯謙曰: "泮試前數日, 有一友生, 亦借此兩卷於我。" 云。 問其姓名, 則亦爾瞻之黨也。 臣素性疎慵, 絶交遊簡出入, 其於世間事, 有同聾瞽, 而臣之所知, 猶若此則未知他人所見, 復有幾多條件也。 且擧此一隅而反之, 則道路行言, 似亦有所據也。 爾瞻四子, 皆以預題借作等語謀, 取科第事, 擧國皆言之。 蓋以其四子, 或無衆所共知才名, 而連占壯元, 或有全然不文, 而取科第如拾芥故也。 然而爾瞻徒黨, 旣以科第爲己物, 則子弟之事, 不足多辨, 故臣不復云云。 臣言之至此, 固知不免於澆薄, 且涉於瑣屑, 而科擧之不公如此, 關係國家甚大, 此不暇顧也。 爾瞻以官爵籠絡縉紳, 以科第收合儒生, 勢焰薰天, 擧世奔波。 靜言思之, 令人骨驚。 昔齊 田氏, 雖無大德, 而有施於民, 晏子諫於景公曰: "田家施不及於國, 大夫不收公利。" 夫官爵、科第之施, 何如粒米之施; 縉紳儒士之歸, 亦何如蚩氓之歸? 眞德秀曰: "田氏之禍, 在景公世, 猶可爲也, 及其旣久, 則不可爲也。 其可辨之不早乎?" 嗚呼! 豈獨此乎? 李元翼, 我國之司馬光; 李德馨, 一心徇國之人也; 沈喜壽, 雖無大段才德, 而特立不撓, 其亦有關於宗社者。 而爾瞻竝嗾三司, 論執不已, 相繼竄逐。 幸賴聖上曲全, 不售招致廷尉之計耳。 柳希奮、朴承宗, 居家不約, 律己不嚴, 可謂麤庸者也。 見爾瞻之將危國家, 而曾不讜論, 以死爭之, 可謂怯懦者也。 然而同爲國之勳戚重臣, 與國家同休戚、共安危者也。 而爾瞻視以仇敵, 必欲中傷, 其意慘矣。 其所以陽爲和好, 要結婚姻者何也? 渠與承宗, 固是婚嫁, 而亦不能相好, 則豈不知其無益也? 蓋欲緩柳之心而圖之。 且欲示人以己若無勢, 畏柳而結好之態也。 其計巧矣。 古之欲專執國柄者, 必先翦滅世臣、公族及其才能、功德出於己者, 然後乃敢肆其志。 田恒、趙高、李林甫及其他小人之事, 班班可考也。 夫金悌男爲逆之狀, 昭不可掩, 天地神人之所共誅者。 李元翼輩, 誠非病風喪心之人, 何心曲護大逆而負我聖上乎? 爾瞻等以"護逆"二字, 爲一巨網, 見有忠國愛君, 不與同惡者, 則便以此打之。 一加此名, 無言可白, 無計可脫。 小人傾陷善類其爲計, 類多如此。 吁! 可畏也。 洪茂績、鄭澤雷、金孝誠亦墮此網, 爲世大累, 永杜言路。 元以坤不知何許人, 而犯一世之忌諱, 敢言人所不敢言乎。 然臣亦得觀其疏辭, 其言畏首畏尾, 氣餒神疲, 似不出於强直也。 況"名竊洛陽年少"之語, 途聽道說之言, 至塵於紸纊之下, 宜其爲爾瞻飾詐自明之奇貨也。 然草野言事之人, 至於受刑, 則後日雖有危亡立至之事, 誰肯捨生而言之? 是故, 言者雖有狂妄之失, 聖人不治, 而銀臺啓辭、臺諫論列, 竟至桎梏圓扉, 拷掠受楚, 此何異於李林甫諷御史, 殺奉璋乎? 臣所謂喉舌耳目, 皆其腹心者, 以此可知也。 其所以得布腹心於要津者, 用何術也? 我國古例, 堂下淸望, 皆出於銓郞, 堂上淸望, 雖非全出於銓郞, 而銓郞沮之, 則不得爲之。 銓郞之任, 不亦重乎? 夫如是故, 必須廣取公議, 務得一代名流, 望實兼備者, 以爲銓郞, 而人莫敢容私焉。 朴弘道、朴鼎吉, 於爾瞻則如骨肉, 於大燁則有同天倫, 而爾瞻置兩人於銓郞。 弘道小有不如意, 則斥之。 且授使其子大燁、益燁相繼入銓郞。 夫銓郞之重, 如前所重陳, 而苟非爾瞻之如骨肉者及眞骨肉, 則不能得之。 以此推之, 則前後銓郞, 必皆如其骨肉者也。 弘道、鼎吉如骨肉、如天倫, 而置諸銓郞之語, 亦非臣所做出。 大燁爲執義時, 啓辭中有此說話, 此乃聖上之所鑑也。 夫銓郞, 皆其如骨肉者及眞骨肉者, 則出於銓郞曹之注擬者, 皆其腹心不難知也。 以此推之, 凡科擧考官, 亦必皆以腹心爲之也。 至於館學儒生, 皆爲其徒黨者何也? 以科第收合故也。 黃廷弼疏辭, 似無異於漢人頌莽功德者。 臣愚不忍見也。 嗚呼! 爾瞻之黨, 日繁於下; 殿下之勢, 日孤於上, 豈不岌岌然危哉? 然而無人爲殿下言之。 嗟呼! 我國家三百餘郡, 曾無一人義士耶? 如柳希奮、朴承宗, 義同休戚, 而惟以全軀保妻子爲心, 坐視君父之危而不救, 其忘君負國之罪大矣。 他人尙何望哉? 伏願聖明細察愚臣前後辭說, 更加睿照, 先正爾瞻擅弄威福之罪, 次治希奮、承宗忘君負國之罪。 其他爾瞻腹心徒黨, 則或用盡除黨與之律, 或用脅從罔治之法。 宗社幸甚。 然《春秋》傳曰: "蔓難圖也。" 今已蔓矣, 圖之實難。 伏願殿下愼之愼之。 臣雖至愚, 亦不至不辨黑白者, 豈不知言發禍隨乎? 況洪茂績等, 略不指斥爾瞻罪狀, 而禦魅海外; 元以坤小陳科擧之不公, 而被榜下獄。 臣之所言, 俱非前輩所陳, 而擧一國, 無一人敢言者也。 其禍之輕重, 可坐而卜也。 眞德秀之言曰: "奸臣擅國, 必先壅塞言路, 使人主孑然孤立於上, 瞢然無覩於外, 然後得以恣其所欲爲。 大而簒國, 小而專政, 無不可者。 故正先死, 而趙高肆, 王章戮, 而王鳳熾, 杜璡斥, 而林甫橫。" 此亦臣之素所知也。 古者言事之人, 君上含容而不之罪, 則奸臣必須傾陷以巧計, 或以他事陰中而殺之, 或竄謫而令守宰殺之。 此臣之素所慮也。 聖人有言遜之戒, 有保身之道, 此義臣亦粗聞之矣。 然而危言若是者, 何也? 臣家三世食祿, 受國厚恩, 脫有緩急, 義不可不赴死於國難。 且念奸臣之誤國如此, 而國家之危亂如此, 南夷北狄乘釁而來, 則雖欲避亂偸生, 亦無善策, 蹙蹙靡所聘。 與其死於無益之地, 無寧今日爲殿下而死乎? 殿下可臣之言, 則宗社之計福也, 生民之福幸也。 雖不以爲可, 而臣至於死, 其於史冊則有光矣。 臣料之熟矣。 但臣有老父, 旣衰且病, 悶臣爲此, 百般喩止。 臣細陳求辨等死之理, 如上面所云, 又陳君臣之大義。 臣父欲禁則恐負國家, 欲聽則悶子就死, 惘然而坐, 默然無語。 逮臣之辭出也, 執臣之手, 涕泣嗚咽。 臣雖勇決, 到此地頭, 能不悲哉? 伏願聖慈雖置臣於重典, 無使延及於老父, 永爲天下後世忠臣、孝子之鑑戒。 不勝血泣祈懇之至。 臣所欲陳者, 不止於此, 而辭不達意, 掛一漏萬。 殿下於細氈之上, 岑寂之中, 試取《大學衍義》辨人才等條, 虛心細翫, 則君子小人之情狀, 尤了然矣。 臣未知朝家格例, 言多不次, 尤不勝惶恐屛營之至。 謹昧死以聞。其後以兩司合啓傳曰: "尹善道, 絶島安置。 惟幾與善道大異, 只削奪官職放歸田里。" (【善道, 惟幾養子也。 惟幾本爾瞻之黨, 爾瞻不爲收用。 善道疏入, 王頗惑之, 爾瞻晝夜讒訴哀乞乃釋。 惟幾本嫉名流, 而又以金悌男獄爲不冤, 故有謀逆之狀, 路人所知之說。 人以此少之。 然善道以此名重一國。】)
-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52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536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과학-천기(天氣)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역사-고사(故事) / 변란-정변(政變) / 사상-유학(儒學)
- [註 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