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중초본]71권, 광해 5년 10월 9일 계사 4번째기사
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전 영의정 이덕형의 졸기
전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졸하였다. 【이때 죄를 주자는 논계는 이미 중지되었는데, 덕형은 양근(楊根)에 있는 시골집에 돌아가 있다가 병으로 졸하였다. 덕형은 일찍부터 공보(公輔)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는데, 문학(文學)과 덕기(德器)는 이항복(李恒福)과 대등하였으나, 덕형이 관직에서는 가장 앞서 나이 38세에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임진년 난리 이래 공로가 많이 드러나 중국 사람이나 왜인들도 모두 그의 성명(聲名)에 복종하였다. 사람됨이 간솔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부드러우면서도 능히 곧았다. 또 당론(黨論)을 좋아하지 않아, 외구(外舅)인 이산해(李山海)가 당파 가운데서도 지론(持論)이 가장 편벽되고 그 문하들이 모두 간악한 자들로 본받을 만하지 못하였는데, 덕형은 한 사람도 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주 소인들에게 곤욕을 당하였다. 그가 졸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252면
- 【분류】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