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승지 김상헌 등이 정인홍의 차자는 선현을 무함한 사특한 글이라고 아뢰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우찬성 정인홍의 차자를 보건대,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일찍이 자기 스승인 고(故) 징사(徵士) 조식(曺植)의 병통을 논한 일과 고 징사 성운(成運)을 단지 ‘청은(淸隱)’이라고만 칭한 것을 가지고, 화를 내면서 당치 않게 헐뜯었다는 등의 말을 하는가 하면 이말 저말을 주워모아 한껏 지척을 하였고, 선정신 이언적(李彦迪)까지 언급하면서 그를 마치 원수보듯 하였습니다.
아, 인홍은 그의 스승을 추존하려다가 저도 모르게 분에 못이겨 말을 함부로 한 나머지, 도리어 그 스승의 수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들이 일찍이 듣건대, 이황은 조식과 더불어 비록 왕래하며 상종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소절(素節)을 허여하고 그의 훌륭한 점을 취한 것이 자못 깊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서찰 가운데 ‘내가 그와 더불어 신교(神交)를 나눠온 지 오래이다.’ 하였고, 또 ‘평소 흠모하기를 깊이 한 바이다.’ 하였고, 또 ‘오늘날 남방(南方)의 고사(高士)로는 유독 이 한 사람을 꼽는다.’ 하였으며, 성운에 대해서도 ‘청은(淸隱)이 훌륭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심이 일도록 하는데, 지금 사람들이 그의 고매한 점을 그다지 알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점은 이황의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식 또한 일찍이 이황에게 서신을 보내 ‘평소 존경해 온 마음이 하늘에 있는 북두칠성만큼 크다.’고 하였습니다. 조식이 이황을 성심으로 흠모한 정도가 이만큼 깊었는데도, 인홍은 그만 ‘이황이 엉뚱하게 헐뜯었다.’고 하면서, 이구(李覯)와 정숙우(鄭叔友)가 맹자(孟子)를 헐뜯고032) 양웅(揚雄)이 안자(顔子)를 논했던 일033) 에다 비하기까지 하였으니, 누가 봐도 심하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노장(老莊) 사상이 학문의 병통이 되었고 중도(中道)로서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한 것은, 그의 치우친 점과 병통이 되는 점을 논한 것에 불과할 따름이지, 조식이 벼슬을 하지 않은 일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대현(大賢)으로 비록 성인(聖人)에 가까운 백이(伯夷)와 유하혜(柳下惠) 같은 사람일지라도 오히려 편협하고 공순치 못한 병통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중용(中庸)의 지극한 덕은 성인이 아니고서는 잘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선유(先儒)가 백이를 칭하여 ‘조금은 노자(老子)와 비슷하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염계(濂溪)의 졸부(拙賦)034) 는 황노(黃老)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단지 그 일단(一段)의 근사한 점을 말한 것으로서, 엉뚱하게 헐뜯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홍이, 만일 이황이 그의 스승과 더불어 혹 서로 좋게 지내지 못한 점이 있었던 것을 이유로 이렇게 흡족하지 못한 얘기를 하였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그는 본정(本情) 이외에 스스로 허다한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 차자 중에 이른바 ‘식견이 투철하지 못했다.’느니, ‘사의(私意)가 덮어 가리웠다.’느니 한 것은, 정작 자신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종묘에 올려 배향하는 전례(典禮)로 말하자면, 바로 일국(一國)의 공론(公論)이자 공론(共論)인 것입니다. 유선(儒先)이 일생동안 갈고 닦은 조예의 실상에 대해서는, 신들이 모두 말학(末學)으로서 비록 쉽게 논변할 수 없는 바이나, 그 유풍(流風)과 유운(遺韻)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 있습니다. 세속의 풍습을 크게 변화시키고 선비의 추향(趨向)을 일신하여 안정시켰으니, 이치를 밝히고 도를 호위한 공적이 동방의 주자(朱子)로 칭송을 받고 있는 것도 진정 부끄럽지 않은 일입니다. 위로 조정의 벼슬아치부터 아래로 초야의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다들 그의 덕이 숭상할 만하고 그의 공이 인정할 만하다고 하여 종사(從祀)하기를 청한 지가 40년이 넘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즉위하심에 이르러 시원스레 공의를 따라 서둘러 사전(祀典)을 행하셨으니, 이야말로 세상에 보기 드문 성대한 일이자, 사문(斯文)의 커다란 행복입니다. 그런데 인홍이 그만 감히 저 혼자만의 치우친 소견으로 앞장서서 비난을 하여 위로 성상을 번독스럽게까지 하였으니, 신들은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대체로 그가 한 말을 살펴보건대, 결코 화평한 심기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여염에서 다투어 따지는 사람처럼 화난 김에 분풀이를 하고자 다른 일까지 들먹거렸습니다. 군자(君子)로서의 다툼은 이와 같아서는 안 될 듯싶습니다. 그 마음에서 나와 그 정사를 해치는 법이니, 한쪽에 치우친 말이 어찌 몹시 밉살스럽지 아니하겠습니까.
신들이 처음에 한마디 변론하는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삼가 생각건대, 전하의 성학이 고명하여 능히 통찰하시고 명확히 분변하시어, 더욱 존상(尊尙)하는 도리를 다하심으로써 호오(好惡)의 바름을 보이실 것이라고 예상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봉차(封箚)를 들인 지 벌써 열흘이 지났건만 명확한 분부가 아직껏 내리지 않고 있으니, 사림(士林)은 마음이 아프고 여정(輿情)은 답답하게 여깁니다. 신들이 외람스레 근밀한 자리에 있어, 감히 끝까지 잠자코 있을 수 없으므로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였다. 〈동부승지 김상헌의 글이다. 왕이 그 점을 알고 못마땅한 뜻을 갖자, 상헌이 즉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답하기를,
"사람은 저마다의 소견이 있는 법이니, 굳이 몰아세워 억지로 자기에게 부화뇌동하게 할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 차자를 아직 내리지 않았는데 정원의 계사는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
하였다. 【좌부승지 오윤겸, 동부승지 김상헌이 함께 이 계사를 올렸는데 상헌이 계사를 기초(起草)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고서 크게 노하여 책망을 하려고 하였는데, 상헌이 유씨(柳氏)와 인척이 되는 까닭에 궁중으로부터 전해 듣고는 즉시 병을 이유로 사직하는 소를 올리니, 왕이 그를 체직시켰다. 】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88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618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註 032]이구(李覯)와 정숙우(鄭叔友)가 맹자(孟子)를 헐뜯고 : 이구는 송나라 남성(南城) 사람으로 자는 태백(泰伯), 호는 우강(盱江)이고, 정숙우는 정원(鄭原)을 가리킨다. 이들은 《상어(常語)》와 《예포절충(藝圃折衷)》을 지어 맹자를 헐뜯었다. 이를 비난한 내용이 《주자대전(朱子大全)》에 보인다.
- [註 033]
양웅(揚雄)이 안자(顔子)를 논했던 일 : 양웅은 한나라 성도(成都) 사람으로, 자는 자운(子雲)이다. 그의 저서인 《법언(法言)》 중에 안자(顔子)를 평론한 글이 있는데, 주자는 "양웅이, 안자를 마치 제 몸만을 아낀 흙덩이 같은 사람으로 그르쳐 놓았다."고 비난하였다. 《한서(漢書)》 권87.- [註 034]
염계(濂溪)의 졸부(拙賦) : 염계는 북송의 학자 주돈이(周敦頤)의 호. 그는 처세에 있어 졸(拙)이 교(巧)보다는 우위에 드는 것을 논지로 글을 지었다. 《주원공집(周元公集)》 권2.○政院啓曰: "臣等伏見右贊成鄭仁弘箚子, 以先正臣李滉, 嘗論其師故徵士曺植病痛及故徵士成運只稱‘淸隱’, 因此生怒, 至以誣毁等語加之, 捃摭詆排, 無所不至, 竝及於先正臣李彦迪, 其視之有若仇敵然。 噫! 仁弘, 欲推尊其所師, 而不覺其忿懥所使, 言悖而出, 反爲其所師之羞也。 臣等常聞李滉與曺植, 雖未嘗往來相從, 而許其素節, 取其高處, 則殊不淺淺也。 故其書札中, 有曰: ‘吾與之神交久矣’, 又曰: ‘素所慕用之甚’, 又曰: ‘當今南方高士, 獨數此一人。’ 於成運, 亦曰: ‘淸隱之致, 令人起敬, 惜時人不甚知其高耳。’ 此非但李滉之言爲然, 曺植亦嘗遺李滉書曰: ‘平生景仰, 有同星斗于天。’ 然則曺植之於李滉, 誠心傾慕者, 至於如此, 仁弘乃謂之誣, 毁至以李覯、鄭叔友之毁孟子 揚雄之論顔子比之, 不亦甚乎? 所謂‘老、莊爲祟, 難要以中道’云者, 此不過論其偏處、病處耳, 非指曺植不仕而言也。 自古大賢, 雖以夷、惠之近於聖, 猶未免隘與不恭之病。 蓋中庸之至德, 非聖人, 莫之能也。 先儒稱‘伯夷微似老子’, 又云:‘濂溪拙賦似 黃 老’, 此只言其一段相近處, 不可謂之‘誣毁’。 仁弘如以李滉與其師, 或有不相喩處, 而爲此不足之語云, 則容或有之, 乃於本情之外, 自做許多辭說。 其箚中所謂‘見識之未透, 私意之蔽惑’者, 正自道也。 至於陞享之典, 乃一國公共之論也。 儒先踐履造詣之實, 臣等俱以末學雖不能容易論辨, 而其流風、遺韻, 至今在人耳目。 俗尙大變士趨一定, 明理衛道之功, 見稱爲東方朱子者, 誠不愧也。 上自朝廷搢紳, 下及草野韋布, 咸以爲‘其德可崇, 其功可服’, 從祀之請, 餘四十年矣。 値我聖上, 快從公議, 亟行祀典, 玆實矌世之盛擧、斯文之大幸。 而仁弘, 乃敢以一己之偏私, 倡言非之, 至於上瀆天聽, 臣等尤不勝驚駭焉。 大槪觀其所言, 決非和心平氣之發, 而有若閭閻鬪訟之人, 乘怒肆忿, 故擧他事之爲, 君子之爭, 恐不如此也。 生於其心, 害於其政, 偏跛之說, 豈非可惡之甚者乎? 臣等初無一言而辨之, 竊念殿下聖學高明, 想能洞察, 而明辨之, 益盡尊尙之道, 以示好惡之正。 而封箚之入, 已經旬日, 明旨之降, 尙未快覩, 士林痛心, 輿情懷鬱。 臣等忝在近密, 不敢終默, 然 敢此陳啓。" 同副承旨金尙憲之辭也。 王知之, 有慍意, 尙憲卽辭遞。 答曰: "人各有所見, 不必驅策, 强使雷同。 況厥箚未下, 政院之啓, 無乃太早乎?" 【左副承旨吳允謙、同副承旨金尙憲, 共爲此啓, 尙憲草啓。 王知之, 有慍意, 大怒欲責之, 尙憲與柳氏爲戚, 故從宮禁傳聞之, 卽辭職上辭疾上疏。 王遞之。】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88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618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註 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