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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23권, 광해 1년 12월 30일 정축 1번째기사 1609년 명 만력(萬曆) 37년

친제와 망궐례의 중복에 대해 좌의정 이항복이 건의하다

〈맑았다.〉 〈예조 낭청이〉 좌의정 이항복의 〈뜻으로〉 【사람됨이 체격이 크고 훤칠하며 풍도(風度)와 기국(器局)이 참으로 재상감이었다. 넓은 아량을 지녀 규각(圭角)이 드러나지 않으며 청표(淸標)와 덕망(德望)이 세상에서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었다. 정승에서 체임된 뒤 6, 7년 동안 한가하게 지내면서 출입을 끊고 날마다 과정(課程)을 정하여 독서하였으므로 문장과 식견이 그전보다 월등해졌다. 일찍이 대사마(大司馬)가 되어서는 무사(武士)로 적체된 자에 대하여 그 재주를 시험해서 차례로 뽑아 기용하면서 개인적인 부탁은 따라주지 않았으므로 공도(公道)가 크게 넓혀졌기에 근래의 병조 판서 가운데 제일이라고 칭송하였다. 청탁하고 관절(關節)하는 것이 오늘날 진신(搢紳) 사이의 고질화한 폐단인데 혼자 그런 일을 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도 감히 개인적인 일을 구하지 못하였으므로, 식견이 있는 좌상에게 덕을 입은 적이 없다는 말이 당시에 떠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너그러웠고 실없는 농담을 좋아하였으며, 시의(時議)와 부침(浮浸)하고 순례적으로만 봉공(奉公)하면서 자신의 역량과 재주로도 오히려 국사(國事)를 떠맡지 않았으므로 더러는 녹봉만 지키며 숫자나 채우는 신하에 가깝게 여겼다. 그러나 식견이 있는 사람은 그의 지혜를 칭찬하였으니, 그것은 대체로 오늘날에는 어떻게 하기 어려운 형세임을 깊이 알았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이귀(李貴)에게 장난으로 말하기를 "공자(孔子)와 나와 그대는 도(道)가 각기 다르니, 공자는 써주면 도를 행하고 버리면 감추고, 그대는 써줘도 행하고 버려도 행하고, 나는 써줘도 감추고 버려도 감춘다." 하였으니, 그의 뜻을 알 만하다. 】 아뢰기를,

"금년 겨울은 추위가 심하지 않아 살갗이 견고하지 않으므로 며칠만 갑자기 추워지면 시환(時患)이 크게 유행하니, 바로 원기를 조용히 간직하며 단단히 보호해야지 바깥 바람을 쐬어 천시(天時)의 유행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삼가 듣건대, 정조(正朝)에 장차 영모전(永慕殿)에서 친제(親祭)를 행하고 인해서 인정전(仁政殿)에서 망궐례(望闕禮)를 행한다고 하셨습니다. 친제를 거행하는 것이야 극도로 우려되고 민망하지만 한결같이 억제하고 막기만 하는 데에는 감히 못할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망궐하는 의식에 이르러서는 대체(大體)로 논한다면, 좋은 날에 명나라 임금의 만세를 부르는 것은 정말 번방(藩邦)의 큰 경사입니다. 그렇지만 삼년상 중에는 간혹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진실로 크게 해로움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노래부르고 곡하는 일을 같은 날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길례(吉禮)와 흉례(凶禮)를 아울러 행하는 것은 예가(禮家)에서 금하는 사항입니다. 먼저 경사에 참석한 뒤에 조문하는 것도 옛사람은 오히려 불가하다고 말하였습니다. 더구나 같은 날 새벽에 최복(衰服)을 벗고 면복(冕服)을 입어 애곡(哀哭)을 하고서 곧 이어 경사에 참여한다면 예로 헤아려 보건대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리고 단지 기력(氣力)으로만 말한다면, 서관(庶官)이나 위사(衛士)의 미천한 신분이라 하더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바가 있을 터인데, 더구나 오래도록 조섭 중에 있는 옥체로 하루아침에 이 일을 행하게 된다면 다행히 당장에는 무사하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뒷날 여러 가지 병의 근원이 될 것이니, 그 아랫사람의 마음으로는 민망하고 염려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로 보나 저로 보나 결단코 행하기 어려우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예경(禮經)을 참고하고 반복해서 헤아려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하거나 온당하지 못한 점이 없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연하게 한 가지 옳은 생각을 갖게 되었으므로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아뢰는 뜻이 또한 옳으니 따르겠다고 답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478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의식(儀式) / 왕실-행행(行幸) / 왕실-국왕(國王) / 풍속-예속(禮俗)

    己酉十二月三十日丁丑晴。(禮曹郞廳以)左議政李恒福 (意)【爲人魁梧, 風度器局, 眞宰相也。 恢恢有量, 不露圭角, 淸標德望, 爲世所重。 遞相之後, 居閑六七年, 杜門讀書, 日有程課, 文章、識見, 比前有加。 曾爲大司馬, 武士積滯者, 試其才藝, 次第取用, 不循私囑, 大恢公道, 近來兵判, 稱爲第一。 請托關節, 今爲搢紳間痼弊, 而獨不爲之, 人不敢干以私。 時, 有識左相, 無蒙德之語。 然過於寬弘, 好爲詼諧, 與時浮沈, 循例奉公, 以其力量、才局, 猶不擔當國事, 或近於持祿具臣。 而識者稱其智, 蓋深知今日有所難爲之勢也。 嘗戲謂李貴曰: "孔子及吾與汝, 道各異焉, 孔子用則行, 舍則藏, 君用亦行, 舍亦行, 吾用亦藏, 舍亦藏"云, 其意可見。】 啓曰: "今年冬, 寒不嚴, 人之腠理不固, 數日猝寒, 時令大行, 正宜閉藏固護, 不可觸冒外氣, 以犯天時之行也。 伏聞正朝, 將行永慕殿親祭, 仍有仁政殿望闕禮。 擧動親祭之擧, 雖極憂悶, 一向抑遏, 有所不敢。 至於望闕之禮, 以大體論之, 則令節呼嵩, 固是藩邦大慶。 然三年之內, 則雖或有所不能者, 固無大害。 古者歌、哭不同日, 故吉凶竝行, 禮家所禁。 先慶後弔, 古人猶曰‘不可’。 況一晨之內, 釋、服冕哀哭而卽繼以慶, 揆之以禮, 似涉不便。 而只以氣力言之, 雖在庶官、衛士之賤, 有所難堪, 況於玉體久在靜攝之中, 一朝當此, 則雖幸而無事於目前, 必爲日後諸病之根, 其於下情, 不勝悶慮。 以彼以此, 決難行之, 乞令禮官參以禮經, 反覆商確, 毋令一毫未盡不便。 (偶有一得, 不敢不啓。)" 答曰: "啓意亦然, 當從之。"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478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의식(儀式) / 왕실-행행(行幸) / 왕실-국왕(國王) / 풍속-예속(禮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