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이덕형이 돌아와 평택·직산·아산·신창·예산 등지의 상황을 보고하다
영의정 이덕형이 【〈그의 처부(妻父)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의 장례에 참여하는 일로 예산(禮山)에 갔다가 이날 조정으로 돌아와 숙배(肅拜)한 뒤 이 아룀이 있었다.〉 】 아뢰기를,
"신이 〈정세가 절박하여 멀리 떠날 것을 아뢰고 휴가를 청원하였는데, 성상의 은혜로 후하게 허락을 해주셨으며, 또 추위를 막는 물품까지 내려주셨으므로, 신은 매우 황송하고 감격스러워 이틀 길을 하루 만에 달려 갔다가 하루를 지내고 즉시 돌아왔습니다.〉 지나던 평택(平澤)·직산(稙山)·아산(牙山)·신창(新昌)·예산(禮山) 등의 길에서 주민들이 길을 막으며 호소하였는데, 흉년에 굶주리는 민망하고 절박한 상황은 기전(畿甸)의 고을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기전 고을의 경우는 급재(給災)·급진(給陳)해 주었지만 그곳에는 지난 해에 거둬들인 세금에 의거 거두게 하였고, 기전 고을의 경우는 제역(諸役)을 감해 주었는데 그곳에는 쌀을 거두는 일과 일체의 잡역(雜役)이 몰려들었으니, 주민들이 원통하다고 부르짖는 것은 진실로 그럴 만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각 고을에 조금 남아있는 곡식마저도 기전 고을을 진구(賑救)하는 밑거리로 삼으려고 하니, 내년 봄에 이르러 그곳의 주민들이 굶주린다고 호소하며 먹여주기를 바란다면 또 앞으로 어느 곳의 곡식을 옮겨다 구제하겠습니까. 그곳의 곡식을 빼앗아다 이곳에 주는 것은 치우친 처사인 듯합니다. 이것은 대체로 당초 하삼도(下三道)를 총괄하여 논의하면서 경기(京畿)와 연접한 지역의 흉년이 심하게 든 것을 헤아리지 못해 이와 같이 마련하게 된 것이었으니, 지금 고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신이 직접 전야(田野)가 황폐해진 상황을 보았고, 또 백성들이 호소하는 글을 접수했는데 모두들 ‘궁궐이 이미 완성되었는데도 은가(銀價)로 포(布)를 거둔다. 포는 억지로라도 내놓을 수 있지만, 쌀로 환산하는 데 이르러서는 운반하여 바치는 즈음에 복정(卜定)한 숫자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민간의 곡식이 금(金)과 같은 시기에 강제로 쌀을 거두니, 참으로 큰 염려이다.’ 하고, 또 ‘기인(其人)·조례(皂隷)·조군(漕軍)·수군(水軍)의 폐단은 모두 오늘날 백성을 병들게 하는 고질적인 폐단인데, 수군이 더욱 심하다. 번외(番外)에 한번 경역(京役)을 당하게 되면 으레 월리채(月利債)로 포 30여 필(疋)을 써야 하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 그전보다 더 많아지고 있으니, 빨리 이런 폐단을 변통하여 친족과 이웃에 징수하는 괴로움을 조금 늦춰주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날마다 와서 부르짖는데 참으로 차마 듣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8, 9년 전에 신이 일찍이 남방(南方)을 순력(巡歷)하였는데, 그때의 민심과 정경은 이와 같이 심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근래에 우려가 되는 갖가지 양상들이 절박하게 조석에 달려 있는 듯한데, 그 까닭을 자세히 캐보면 단지 흉년이 그렇게 되도록 한 것만은 아닙니다. 민간의 폐단이 날마다 불어나고 달마다 성해지고 재물을 강제로 빼앗고 거두는 것이 한이 없어서입니다. 성상께서 정치를 행하는 처음에 백성들이 바야흐로 눈을 닦고서 기대하고 있는데, 곁눈질하며 서로 원망하는 것이 이와 같은 데 이르렀으니, 참으로 근심할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충청도 초면(初面)에 해당하는 고을에 대한 진구 대책 및 앞 항의 각 폐단을 바로잡을 일을 해조에 분부하여, 선혜청과 회동하여 상세히 논의해서 잘 조처하는 일은 늦출 수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수령을 신중히 가려 뽑아야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말인데, 이번에 돌아오면서 보고 더욱 이것이 제일가는 절실한 업무임을 알았습니다. 몇 해 전부터 조정이 이 일에 대하여 심각하게 유념하지 않은 듯하니, 조가(朝家)가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모든 명령이 모두가 헛된 일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고락은 오직 수령이 현명한가 현명하지 않은가에 달려 있으니, 수령을 잘 가려서 뽑지 않으면 조정에서 법을 세우고 경계하며 유시하는 것이 끝내는 보탬이 없게 됩니다. 민심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데는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며, 민심이 따르고 배반함과 국가가 편안하고 위태함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성명(聖明)께서는 유념하여 살피시기 바랍니다. 이미 듣고 본 것이 있기에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이 추위를 무릅쓰고 탈없이 빨리 다녀 왔으니, 참으로 매우 위로가 된다. 지난날의 조그마한 하사품에 대하여 어찌 그리도 사례를 하는가.〉 아뢴 내용을 살펴 보고서 가엾고 측은함을 견딜 수 없었다. 경들이 해관(該官)에 분부하여 좋은 쪽으로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라."
하고, 〈인해서 승정원에 전교하여 해사(該司)로 하여금 빨리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덕형이 진달한 바가 절실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며, 하교한 바도 엄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건마는, 끝내 착실하게 거행되지 않았으니 어째서인가. 상하의 말이 한갓 형식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124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470면
- 【분류】구휼(救恤) / 금융(金融)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己酉十一月二十五日壬寅領議政李德馨 (以其妻父鵝城府院君 李山海歸葬事, 往禮山, 是日還朝肅拜後, 有是啓。)還自湖西啓曰: 臣(情勢所迫, 請告遠出, 聖恩優許, 且錫以禦寒之資, 臣不勝惶悚感激之至, 倍道馳往, 了一日卽還。) 經過平澤、稷山、牙山、新昌、禮山等路, 居民遮道號訴, 其飢荒悶迫之狀, 與畿邑少無異焉。 畿邑則給陳災, 而彼處依上年收稅, 畿邑則蠲減諸役, 而彼處收米與一應雜役叢沓, 民之號冤, 固其所矣。 而又括各邑所有些少之穀, 將以爲賑救畿邑之資, 其到明春, 彼處之民呼飢望哺, 則又將移何粟以救? 奪彼與此, 似乎偏矣。 此蓋當初摠論以下三道, 而不計京畿連境失農之甚, 以致磨鍊如此, 今宜改矣。 臣目見田野窮荒之態, 又接百姓訴狀, 俱稱: "宮闕已完, 而爲銀價收布, 布則可勉出矣, 至於作米, 則輸納之際, 不止于卜定之數。 而當此民間之穀如金之時, 抑勒收米, 實爲大悶。" 又以爲: "其人、皀隷、漕・水軍之弊, 俱是今日病民痼弊, 而水軍爲尤劇焉。 番外一遭京役, 例費月利債布三十餘疋, 此豈可支保者乎? 流散比益甚, 願亟變通此弊, 以少紓族、隣之苦。" 逐日來號, 誠有不忍聽者。 八九年前, 臣曾巡歷南方, 其時民心、景象, 不如是之甚矣。 比來憂虞萬狀, 似迫在朝夕, 細究其故, 非特凶歉使然。 民間弊端, 日滋月盛, 誅求徵斂, 無有紀極。 聖政之初, 民方拭目, 而睊睊胥怨, 乃至如許, 誠可爲於悒矣。 忠淸初面官賑救之策及前項各弊端矯正之事, 分付該曹, 會同宣惠廳, 詳議善處, 似不可緩。 愼擇守令, 人之常談, 而今來見之, 益知此是第一切務。 頃年以來, 朝廷於此事, 似不甚留念, 朝家恤民百令, 俱是虛事。 百姓苦樂, 唯係守令賢否, 守令不能擇, 則朝廷立法、戒諭, 終無益矣。 少慰民心, 莫甚於此, 民心向背, 國家安危。 願聖明留省焉。 旣有聞見, 不敢不達。答曰: "(知卿冒寒無恙, 速爲往還, 良慰良慰。 頃日足些少之賜, 何用致謝?) 啓意省來, 不勝矜惻。 卿等分付該官, 從長議處。" (仍傳于承政院曰: "令該司速爲議處。") ( 史臣曰: "德馨所陳, 不爲不切, 上之所敎, 不爲不嚴, 卒不見着實擧行, 何哉? 上下之言, 徒爲虛文而已。"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124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470면
- 【분류】구휼(救恤) / 금융(金融)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