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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10권, 광해 즉위년 11월 9일 임진 2번째기사 1608년 명 만력(萬曆) 36년

사복시가 진강 목장의 폐지에 대해 다시 의논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다

사복시가 아뢰기를,

"비변사가, 지난번 경기 감사 심열(沈悅)의 장계가 사리에 맞다고 하여, 진강 목장(鎭江牧場)의 절반을 잘라 담장을 둘러 쌓아 백성들에게 농사를 지어 먹도록 허락하고, 그곳에 치고 있던 말들을 길상(吉祥)북일(北一)의 두 목장에 옮겨 방목시키는 일에 대해 본 사복시의 제조들이 회동하여 처결해 주라는 일을 재가받아 공문을 보내 왔었습니다.

요즈음 의논들이 강화가 다급하고 어려울 때 병화를 피할 만한 곳이라고들 하는데, 고려 때의 일로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백성의 살림이 탄탄해지게 하고 식량을 저축하는 일은 지금의 시급한 일이기 때문에, 목장의 철거를 청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시종하는 높은 벼슬아치들 중에 계략과 지혜가 있는 자들도, ‘믿을 수 있는 피난처로 만들 수 있다면, 일에는 경중이 있으므로 목장을 없애고 수백 필의 관마(官馬)를 내버린다 하더라도 큰 손실은 아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 나라는 일을 시작했다 그만두는 등 일정하지 않아 끝과 시작이 너무도 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리하여 급하면 일에 착수하여 행여 뒤질세라 법석이고 느긋해지면 잊고 맙니다. 지난 갑오124) ·을미125) 년간에 강도(江都)에 힘을 들이기를 애쓰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데도, 얼마 되지 않아 폐허가 되도록 내버려둔 채 다시금 수습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10여 년이 지났는데, 오늘날 수선(修繕)하려는 일 역시 옛날 버릇을 답습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진강 목장의 형편은 물과 초지(草地)가 매우 좋아 예로부터 말들이 잘 번성하는 지역으로 일컬어졌고 빼어난 기량과 잘 달리는 말들이 또한 많이 생산되었는데, 길상은 바로 그 뒤쪽에 있는데도 꽉 막아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한 것은 그만한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지금 만일 진강 목장의 절반만 가로질러 경작지로 만들고 만다면 농사를 지어 얻어지는 수익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고, 만일 진강의 말 모두를 길상으로 옮겨 방목시킨다면 새로 옮겨간 말들과 그전의 말들이 뒤섞여 살아야 하므로, 반드시 공간이 비좁아 수용키 어려운 걱정이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북일에 있어서는 마니산 밑 외진 곳에 있고 물과 초지도 좋지 못해 전부터 말이 잘 번식되지 않았는데, 이는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니 결코 다른 목장의 말을 옮겨다 방목시켜 모두다 손상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원래부터 살던 백성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힘써 농사를 지어 착실히 식량을 보충시키게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여러 가지의 폐단들은 생각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말세가 되어 나라의 기강이 죄다 무너져서 사사로운 인정이 크게 설치고 있으니, 한 번 개간을 허락하는 길이 열리면 서울의 강성한 세력을 가진 집안들이 불법으로 입안(立案)을 받아내 북새를 떨며 마구 점령하고, 마음껏 농사를 지어 배로 실어내어 이익을 독점하는 자료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속수 무책으로 구경만 할 것이고 목장의 말들은 제자리를 잃어 모두 죽게 되어, 국가의 곡식을 저축코자 한 계획과 말을 치려던 정책은 한꺼번에 다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설사 권반(權盼)이 길이 부사로 있는다 하더라도 힘에 눌려 빼앗기는 걱정을 면하기 어려울 터인데, 하물며 부사의 자리를 이어받는 자들마다 반드시 적임자를 얻을 수 없는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조종조에서 목장의 설치를 가장 중시해 왔는데, 단지 《여지승람》에만 기록하지 않고 또 그림을 그려 족자로 만들어 금중(禁中)에 두고 한가할 적에 열람하도록 대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종 대왕(宣宗大王)126) 은 이 사실을 깊이 알고 시종 신중히 지키며 떼어준 곳이나 개간한 곳들을 일체 인정해 주지 않으면서, 여러 차례 준엄한 교지(敎旨)를 내려 조금도 봐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정유년127) 봄에는 진강 목장이 난리를 겪고 여지없이 무너진 것을 진념하시어, 사복시 제조 윤두수(尹斗壽)와 사복시 정 정사호(鄭賜湖)의 파견을 허락해서 달려가 살펴보게 한 다음 목장의 담장을 개축하여 예전처럼 방목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계사가 《등록(謄錄)》에 실려 있으니 상고할 수 있습니다.

신들은 본 목장의 형편을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으나 가벼이 폐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백성들에게 경작하게 허락한다는 것이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비변사로 하여금 다시 의논해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78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366면
  • 【분류】
    교통-마정(馬政)

○司僕寺啓曰: 備邊司頃因京畿監司沈悅狀啓事宜, 欲將鎭江場截半限築, 許民耕食, 而以其牧馬移放吉祥北一兩場, 會同本司提調處置事, 啓下移文矣。 近者論議, 頗以江華爲急, 難避兵之所, 麗朝之事, 亦可驗矣。 寬民力、峙糧餉, 委爲今日之急務, 故至於請撤。 侍從名官之有心計、才智者, "爲保障可恃之地, 則事有輕重, 雖廢牧場捐棄數百疋官馬, 亦未爲太損。" 但我國之事, 作輟無常, 終始相懸。 急則就之, 恐或後; 緩則去之, 置諸相忘。 往者甲午乙未年間, 致力江都, 不爲不勤, 而曾未幾時一任渙散, 不復收拾。 又過十餘年, 則在今繕修之擧, 亦安在其不踵前習乎? 鎭江爲場, 水、草甚好, 古稱畜馬繁庶之地, 逸才駿足, 亦多産出, 而吉祥在其後, 隔絶而不相通者, 其意有在。 今若橫截鎭江之半而已, 則耕種蒙利, 不至大段, 若以鎭江之馬, 沒數移放於吉祥, 則新舊雜處, 必有狹窄難容之患。 至於北一, 則僻在摩尼山底, 水、草不美, 自前馬不蕃息, 衆所共知, 決難移放他場之馬, 以致一倂損傷也。 雖然必使元居之民, 力穡其中, 以爲實補餉之地, 則他餘弊端, 固不暇恤。 而末世國綱蕩然, 私情勝, 一開許墾之路, 京城豪勢之家, 冒受立案, 紛紜橫占, 恣意作農, 以爲卜專利之資。 則居民束手而傍觀, 場馬失所而就盡, 國家積穀之策、牧馬之政, 一擧兩失矣。 設使權盼長爲府使, 猶難免侵逼之患, 況繼之者, 未必每每得人乎? 祖宗朝家重牧場之設, 不但載諸《輿誌》, 又爲繪畫簇子, 置諸禁中, 以備燕閑之覽。 故先宣宗大王深知此事, 終始謹守, 凡有折受、耕墾等處, 一切不准, 屢下嚴峻之敎, 不少假借。 曾於丁酉春, 軫念鎭江之經亂壞了, 許遣寺提調尹斗壽、寺正鄭賜湖, 馳往看審, 使之改築場城, 牧如舊。 其時啓辭, 在謄錄可考。 臣等雖未及目覩本場形勢, 而亦知其不可輕廢, 且念許民耕食之爲虛套。 請令備邊司更議施行。 傳曰: "允。"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78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366면
  • 【분류】
    교통-마정(馬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