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 대왕의 행장
소경 대왕(昭敬大王)의 행장(行狀)은 다음과 같다.
"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휘(諱)인데 공희왕(恭僖王)의 손자이고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岹)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 정씨(鄭氏)는 영의정 세호(世虎)의 따님인데 가정(嘉靖) 임자년008) 11월 11일 한성(漢城) 인달방(仁達坊)에서 왕(王)을 낳았다. 왕은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 났으므로 항상 예법을 따르기를 좋아하였다. 어릴 적에 공헌왕(恭憲王)이 일찍이 두 형과 아울러 함께 불러들여서 자신이 쓰고 있던 관(冠)을 벗어 차례로 쓰게 하여 하는 행동을 살펴보았었다. 차례가 왕에게 이르자 왕이 꿇어앉아 사양하기를 ‘군왕께서 쓰시던 것을 신자(臣子)가 어떻게 감히 머리에 얹어 쓸 수 있겠습니까.’ 하니, 공헌왕이 경탄(驚歎)하기를 ‘그렇다. 마땅히 이 관을 너에게 주겠다.’ 하였다. 인하여 임금과 아버지가 누가 더 중하냐고 묻고 글자로 써서 대답하게 하니, ‘임금과 아버지는 똑같은 것이 아니지만 충(忠)과 효(孝)는 본래 하나인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공헌왕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장성하자 하성군(河城君)에 봉하였다.
가정 을축년009) 공헌왕이 환후가 있게 되었는데 세자(世子) 이부(李暊)가 이미 졸서(卒逝)하여 저사(儲嗣)를 정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수상(首相) 이준경(李浚慶) 등이 건의하여 여러 조카들 가운데서 미리 선발하여 저사로 삼을 것을 청하니, 공헌왕이 드디어 왕을 명하였다. 그리하여 입시해서 약수발을 들게 하였고 이어 특별히 유사(儒士)를 가려서 사부(師傅)로 삼아 보도(輔導)하게 하였으며 돌보아 사랑하는 것이 특별히 두터웠으므로 국내(國內)의 인심이 모두 왕에게로 예속되었다.
융경(隆慶) 원년(元年) 정묘년010) 에 공헌왕이 훙서(薨逝)하니, 대신들이 왕비가 받든 유명 교서(遺命敎書)에 의거 왕을 맞이하여 오게 되었다. 이때 왕이 막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복(服)을 입고 사제(私第)에 나가 있었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굳게 사양하였다. 그리하여 신하들이 옹대(擁戴)하면서 재촉한 뒤에야 출발하였다. 이때 한림원 검토관(檢討官) 허국(許國), 병과급사중(兵科給事中) 위시량(魏時亮)이 나와서 목종 황제(穆宗皇帝)의 등극 조서(登極詔書)를 반하하기 위해 막 국경으로 들어 오다가 국군(國君)이 새로이 훙서하였는데 저사가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 매우 걱정하였었다. 조서를 반하하는 날 왕의 의표(儀表)가 단정하고 장중하며 예도(禮度)가 한아한 것을 보고서는 서로 눈을 둥그렇게 뜨고 상탄(賞歎)하기를 ‘동방(東方)에 참 주인이 나왔다.’ 하였는데, 이때 왕의 나이가 겨우 16세였다. 배신(陪臣)을 보내어 중국 조정에 부음(訃音)을 고하고 또 승습(承襲)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황제가 태감(太監) 요신(姚臣)·이경(李慶)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와서 조선 국왕으로 봉하고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채폐(綵幣)를 하사하였다. 왕은 즉시 우의정 정응두(丁應斗) 등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다.
왕이 사위(嗣位)한 처음 마음을 가다듬고 잘 다스려지기를 도모하여 학문에 정진했으므로 날마다 서연(書筵)에 나아가 경사(經史)를 토론하면서 밤중이 되도록 잠을 자지 않았다. 당시의 명유(名儒) 이황(李滉)이 관직에서 해면되어 고향에 돌아가 학도(學徒)들을 모아 학문을 강론했는데 전왕(前王) 때부터 누차 불렀으나 오지 않았었다. 왕이 정성과 예폐(禮幣)를 극진히 하여 나오도록 돈유(敦諭)하였고 발탁하여 이공(貳公)에 제수하였다. 이황이 자신을 알아준 데 대해 감격하여 소장을 올려 치도(治道)에 대한 여섯 가지 조항을 진달하고 나서 또 《성학십도(聖學十圖)》·《서명고증(西銘考證)》을 찬술하고 정자(程子)의 《사물잠(四勿箴)》을 손수 써서 올렸는데, 왕은 겸허한 마음으로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고 모두 선사(繕寫)하여 병풍을 만들어 좌우에 두게 한 다음 아침 저녁으로 관성(觀省)하였다. 그리고 수시로 소대(召對)를 열어 종용히 치도(治道)에 대해 강론하는 등 예우(禮遇)가 융중하였으므로 지치(至治)를 이룰 것을 기약했었다. 그러다가 이황이 사망(死亡)하기에 이르러서는 마음 아프게 애도하여 마지 않으면서 ‘이황이 남긴 글자 하나 말 한 마디도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수집하여 간행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본국(本國)은 예로부터 문헌(文獻)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으나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학문에 대해서는 전해온 것이 드물었다. 그런데 고려의 정몽주가 처음으로 끊어진 학문을 창도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본조(本朝)에 이르러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 등이 서로 계속하여 일어나 도의(道義)를 강명하고 경전(經傳)을 발휘하였다. 왕은 이들이 사도(斯道)에 큰 공이 있다는 것으로 제일 먼저 명하여 제사를 지내주고 무덤을 지키게 하였으며 벼슬과 시호를 추증(追贈)하고 그 자손들을 녹용(錄用)하게 하는 한편, 유신(儒臣) 유희춘(柳希春)에게 명하여 그들의 행적을 찬차(撰次)하게 하고 이를 《유선록(儒先錄)》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어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을 간행하게 하였으며, 또 《하씨소학(何氏小學)》에 명물(名物)과 도수(度數)를 가장 상세하고 세밀하게 기록하였으므로 초학자(初學者)에게 편리하다는 것과, 본조에서 찬술한 《삼강행실(三綱行實)》은 윤기(倫紀)를 부식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아울러 간행할 것을 명하였다.
해조(該曹)에 하교하기를 ‘근래 사유(師儒)의 선발에 있어 모두 문사(文詞)만을 숭상하는데 덕을 연마하고 도학에 밝은 선비에 이르러서는 적격자를 볼 수가 없다. 이런 때문에 학사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이 모두 문예(文藝)만을 익혀 과거(科擧)에 급제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을 뿐 절문(切問)·근사(近思)에 대한 학문을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사습(士習)이 이러하니 뒷날 성취한다고 한들 장차 볼 만한 것이 뭐가 있겠는가. 서울이 이러하니 외방은 미루어 알 수 있다. 학문과 행실이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이 있으면 발탁하여 방면(方面)을 맡기는 직임을 제수하여 풍화(風化)에 대한 권한을 부여한 다음 각 고을을 순행하면서 권장하고 가르치게 해야 한다. 윤기를 돈후하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단서가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학문하는 방법은 《소학》보다 먼저해야 할 것이 없다. 입학(入學)할 때 반드시 《소학》을 강시(講試)하게 한다면 어려서 배우는 사람들이 스스로 지향해야 할 방향을 알게 될 것이니, 이에 의거 학행(學行)을 신칙케 하라.’ 하고, 또 유일(遺逸)들을 천거하여 나오게 하는 것을 신정(新政)의 제일의 과제로 삼으라고 하교하였다. 이리하여 역말로 징사(徵士) 조식(曺植)·성운(成運) 등을 불러 차례에 구애없이 발탁 서용하였는데, 혹 달려올 수 없는 사람은 간절하게 장유(奬諭)하였다. 기타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이 연마된 것으로 소문이 나서 전후 발탁 기용된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백의(白衣)로서 경재(卿宰)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있기까지 하였다.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현사(賢邪)를 진퇴시키는 기미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르기를, ‘간당비(奸黨碑)가 세워지자 변경(汴京)이 폐허가 되었고 위학적(僞學籍)이 완성되자 남송(南宋)이 망하였는데, 끝에 가서 후회했지만 또한 미칠 수 없었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대간(臺諫)이 선조(先朝) 때의 간신(奸臣)인 남곤(南袞) 등이 사림(士林)을 해친 죄를 논하면서 관작(官爵)을 삭탈시킬 것을 청하였다. 어떤 이가 일이 이미 지나간 것이라는 것으로 말을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남곤을 죄주려고 하는 이유는 조광조(趙光祖)의 도학(道學)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며 또 한때의 추향(趨向)을 확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고 드디어 죄주었다. 또 고 유신(故儒臣) 김종직(金宗直)의 자손들을 녹용(錄用)하고 충신인 종실(宗室) 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의 관작을 추증하라고 명하였다. 왕이 선(善)을 드러내고 악(惡)을 증오한 것이 이런 유(類)였다.
이 해에 목종 황제(穆宗皇帝)가 황태자를 책봉하고 나서 한림원 검토관 성헌(成憲), 예과 급사중 왕새(王璽)를 보내어 조칙(詔敕)을 반강하였으므로 배신(陪臣)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가서 진하하게 하였다.
일찍이 어떤 강관(講官) 하나가 나아와서 아뢰기를, ‘지금 조정에는 권간(勸奸)이 없고 나라에는 변경(邊警)이 없으니, 바로 좋은 정치를 행할 때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그 말은 그렇지가 않다. 맹자(孟子)가 전국 시대를 당하여서도 제후들에게 왕도 정치를 권했었으니, 국가가 전쟁을 하고 일이 많다고 해도 어찌 좋은 정치를 할 수 없는 때가 있겠는가.’ 하였다.
기사년011) 가을 공헌왕(恭憲王)의 삼년상을 끝마치고 반성 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 박씨(朴氏)를 맞이하여 비(妃)로 삼았다.
6년 임신012) 에 한림원 편수(編修) 한세능(韓世能), 이과 급사중(吏科給事中) 진삼모(陳三謨)가 지금 황제의 등극 조서를 반강했는데 왕이 우의정 박순(朴淳) 등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가서 진하하였다. 그때 가뭄이 매우 심하여 왕이 피전 감선(避殿減膳)하면서 금중(禁中)에서 비를 빌 적에 하루 종일 규(圭)를 잡고 뜰에 서 있으면서도 해이한 기색이 없었는데 드디어 단비가 내렸다. 또 천변을 인하여 대신이 사면을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자신의 허물을 태형(台衡)013) 에게 전가시켜 재변에 응할 수 있겠는가. 내가 누구를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이겠는가. 한(漢)나라 때 임금이 정승을 파직시켜 천견(天譴)에 답한 것을 군자들이 비난하였다.’ 하고, 이어 수필(手筆)로 구언(求言)하는 하교를 내렸는데 모두 백여언(百餘言)이나 되었으며 그 내용은 자신을 허물하고 도와주기를 요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태학(太學)의 유생(儒生)들이 소장을 올려 불교(佛敎)를 배척하니, 왕이 수찰(手札)을 내려 답하기를 ‘남에게 모범이 되는 자리에 있으면서 강론하는 것은 도의(道義)이고 기대하는 것은 정주(程朱)여야 하는 것으로 의당 더욱 마음을 새롭게 하고 기욕(耆慾)을 참아내어 가면서 열과 성을 다하여 공부해야 한다. 그리하여 경·의(敬義)를 마음속에 지니고서 마음과 행동을 아울러 배양함으로써 뒷날 참된 유사(儒士)가 되어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면서 위로는 임금을 돕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은택을 끼쳐 정치를 융성하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한다면 오도(吾道)가 쇠퇴하고 이단(異端)이 융성하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다. 반드시 태무(太武)처럼 사문(沙門)을 베고 불사(佛寺)를 허는 짓을 할 것이 뭐 있겠는가.’ 하였다.
또 소장을 올려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을 문묘(文廟)에 종제(從祭)하게 해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여겨 감히 경솔히 허락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그 일이 중한 것이기 때문인데 절로 의정(議定)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섯 신하를 높임에 있어서는 그들의 학문을 높이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 것이다. 제생(諸生)들은 모두 영재(英才)를 지니고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들이니 의당 수시로 부지런히 힘써 서로 강마(講磨)하면서 다함께 대유(大儒)가 되어 나의 부족한 점을 힘을 다해 보좌해 주는 것이 바로 내가 기대하는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유신(儒臣)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문산(文山)014) 의 《지남록(指南錄)》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비분 강개하여 참고 끝까지 다 읽을 수가 없었다. 대저 문산은 백이(伯夷)·숙제(叔齊) 이후 한 사람으로 만세 인신(人臣)의 표상인데, 우리 나라 정몽주의 절의(節義)와 문장(文章)이 문산과 그 아름다움을 나란히 할 수 있으니, 그의 문집(文集)도 아울러 속히 인출(印出)하여 반포하라.’ 하고, 이어 상신(相臣) 노수신(盧守愼)에게 서문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유신(儒臣) 이이(李珥)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찬술하여 올리니, 왕이 매우 가상히 여겨 포장(褒奬)하고 즉시 간행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왕이 병을 앓다가 오랜 뒤에야 나았으므로 예조가 누차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람의 병은 거의 반드시 섭생(攝生)을 잘못한 소치에 연유되지 않은 것이 없다. 지난번 뜻밖에 병을 얻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가 다시 소생함으로써 대신들에게 걱정을 끼쳤고 군하들을 놀라게 했으므로 바야흐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잘못을 뉘우치기에 겨를이 없는데 어떻게 뻔뻔스레 하례(賀禮)를 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을해년015) 에 공헌 왕비(恭憲王妃) 심씨(沈氏)가 훙(薨)하자 예관(禮官)이 《오례의(五禮儀)》에 의거하여 졸곡(卒哭)이 지난 뒤에는 의당 현관(玄冠)·오각대(烏角帶)를 해야 한다고 하니, 지평 민순(閔純)이 상소하기를 ‘삼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상법(喪法)으로 귀천(貴賤)에 관계없이 똑같은 것입니다. 의당 주자(朱子)의 의논을 따라 흰 모자에 베로 싼 각대(角帶)를 써야 합니다.’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이 귀일되지 않자 왕이 결연히 행하여 거상(居喪)을 한결같이 예제(禮制)에 따랐다. 삼년상을 마치는 동안 한번도 웃는 일이 없었다. 정축년016) 11월 영정 왕비(榮靖王妃) 박씨(朴氏)가 훙(薨)하자, 예조가 아뢰기를 ‘마땅히 숙질(叔姪) 사이의 복(服)을 따라 자최 기년복(齊衰期年服)을 입어야 합니다.’ 하고, 상신 박순(朴淳) 등은 아뢰기를 ‘왕께서 영정 왕비와는 조손(祖孫)의 의가 있으니, 계체(繼體)의 중함에 의거 의당 삼년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니, 왕이 그 의논에 따라 드디어 삼년상을 입기로 결정하였으며, 장사를 지내고 제사를 받드는 것을 어김없이 예법대로 행하였다.
이에 앞서 간신(奸臣)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년017) 사이에 윤임(尹任)·유관(柳灌) 등을 모함하여 살해하고 녹훈되기에 이르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오랠수록 더욱 원통하고 통분스럽게 여겼으나, 왕은 일이 선조(先朝) 때에 있었다는 것으로 경솔히 고치려 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아울러 관작을 회복시키고 녹훈을 삭제하니, 중외가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임오년018) 8월 황태자가 탄생하자 황제가 한림원 편수관 황홍헌(黃洪憲), 공과 급사중 왕경민(王敬民)을 보내어 와서 조서(詔書)를 반하하니, 즉시 배신(陪臣)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가서 진하(陳賀)하게 하였다.
병술년019) 10월 성절사(聖節使)로 간 배신 윤자신(尹自新)이 회동관(會同館)에 있으면서 잘못하여 불을 내자 왕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사신(使臣) 이하를 잡아다 국문하여 정죄(定罪)하고 나서 즉시 배신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가서 진사(陳謝)하니, 황제가 왕의 충신(忠愼)함을 가상히 여겨 칙서(敕書)를 내려 장유(奬諭)하고 이어 망의(蟒衣)와 채단(綵段)을 하사하였다.
정해년020) 에 일본이 사신을 차견하여 성의를 바쳐 왔다. 이때 평수길(平秀吉)이 임금의 자리를 찬탈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왕이 하교하기를 ‘일본이 군주를 폐기 추방하였으니 바로 찬탈하고 시해한 나라이다. 따라서 그 나라의 사신은 접대해서는 안 되니, 마땅히 대의에 의거 개유(開諭)하여 물리쳐야 한다.’ 하고, 정신(廷臣)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니, 모두들 교화의 밖에 있는 나라는 예의에 의거 책할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왕이 마지 못해 억지로 따랐다. 왕이 의리를 지키는 근엄함이 이와 같았다.
무자년021) 에 사은사 유홍(兪泓)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는데, 종계(宗系)를 개정(改正)하였고 아울러 악명(惡名)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하여 《대명회전(大明會典)》 1부(部)를 예부(禮部)에서 제본(題本)을 올려 준허(准許)받아 급송(給送)하였고 황제가 칙서를 내려 포유(褒諭)하였다.
이에 앞서 국조(國祖)인 강헌왕(康獻王)이 본국(本國)의 반적(叛賊)인 윤이(尹彝)·이초(李初)에 의해 중국 조정에 무고(誣告)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 내용에 강헌왕을 시역신(弑逆臣)인 이인임(李仁任)의 후사(後嗣)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이 무고한 내용이 황명 조훈(皇明祖訓)과 《대명회전》에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 왕의 7대조(七代祖)인 공정왕(恭定王)에서부터 전왕(前王) 때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진주(陳奏)하여 그것이 무고임을 변해(辨解)하였는데 진주할 적마다 번번이 고치라는 허락을 받았으나 고쳐진 내용을 아직껏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었다.
왕이 즉위함에 이르러 개연히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국계(國系)가 무함을 받은 지 2백여 년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편안히 천지 사이에서 먹고 자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의당 사신을 잘 가려 보내어 혈성(血誠)을 다하여 진주하게 함으로써 기어이 변해하여 밝혀야 한다.’ 하고, 이에 만력 원년022) 에 배신 이후백(李後[浚]白) 등을 보내었다. 3년 을해에는 배신 홍성민(洪聖民) 등을 보냈고, 6년 무인에는 배신 김계휘(金繼輝) 등을 보냈고, 12년 갑신에는 배신 황정욱(黃廷彧) 등을 보내어 계속 주문(奏文)을 가지고 가서 진청(陳請)하게 하였다. 주문을 봉진할 때마다 왕이 반드시 사신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준청(准請)을 얻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 하였는데, 그 올바르고도 간곡한 말은 천지를 감동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통쾌하게 소설(昭雪)된 것을 보게 되었다.
왕이 신하들에게 하교하기를 ‘경들의 힘을 의뢰하여 오늘날 이런 경사가 있게 되었으니, 황은(皇恩)이 망극하다. 옛날 임금은 조업(祖業)을 중흥시키고 구물(舊物)을 광복시키는 것을 더없이 큰 일로 여겨 왔으나 이것은 외물(外物)에 불과한 것이다. 어찌 오늘날 수백 년 동안의 지극한 통분을 소설하여 이륜(彝倫)이 순서를 찾게 되고 동한(東韓)이 다시 세워지게 된 것만이야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조선(祖先)들에게 할 말이 있게 되었다.’ 하고, 드디어 직접 종묘 사직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하교하기를 ‘오늘 직접 보전(寶典)을 받들고 삼가 태묘(太廟)에 고하게 되었으니,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사령(大赦令)을 내려 백성들과 함께 경사를 같이 누려야 한다. 그리고 새로이 경명(景命)을 받아 이미 종묘와 사직에 고하였는데 부자(夫子)023) 는 바로 이륜의 주인이니, 내가 마땅히 직접 제사하여 이륜이 다시 순서를 되찾았음을 고해야 한다.’ 하고, 드디어 문묘(文廟)에 제사지냈다. 또 유홍 등 일행과 승문원 제조 등에게 태평관에서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도록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예경(禮經)》에 ‘임금이 의복을 하사하면 그 의복을 입고서 하사한 데 대해 배사(拜謝)한다.’고 했는데, 옛사람들이 임금이 하사한 물품에 대해 반드시 이를 입는 것은 임금의 은혜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해 황제가 하사한 망의(蟒衣)를 와탑(臥榻) 위에 올려놓고 주야로 북쪽을 향하여 삼가 축수하면서 황공스러워 감히 입지 못했었다. 이제 삼가 선왕(先王)을 배알하게 되었으니, 내가 이 망의를 입고 조선(祖先)들을 뵈려 한다.’ 하였다.
19년 신묘024) 평수길이 또 현소(玄蘇) 등을 파견하여 본국에 글을 보내어 왔다. 그 내용에 상국(上國)을 침범하려고 한다면서 길을 빌려 달라고 협박하였는데 언사(言辭)가 패려스럽고 오만하여 신자(臣子)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왕이 대의에 의거하여 그 사자(使者)를 쫓아버리고 즉시 배신 김응남(金應南)을 차견(差遣)하여 일본의 흉모에 관한 정상을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왜적이 상국을 침범하겠다는 말을 유구국(琉球國)에 유포하였고 또 거짓으로 조선도 이미 굴복하였다고 하였는데 유구국에서 그 내용을 천조(天朝)에 보고하였다. 병부(兵部)가 요동(遼東)으로 하여금 본국에 이자하여 사실 여부를 묻게 했는데 김응남의 사행(使行)이 마침 이런 때에 있게 된 것이다. 천조에서 본국의 자문을 보고서 비로소 왜노(倭奴)의 거짓스럽고 오만하고 흉패스런 정상을 알게 되었다. 황제가 칙서를 내려 포유(褒諭)하고 이어 백금(白金)과 채폐(綵幣)를 특별히 넉넉하게 하사하였다. 왕은 칙서를 받고 감격하여 신민(臣民)에게 대사령을 내리고 즉시 배신 한응인(韓應寅) 등을 차견하였는데, 일본의 서계(書契)와 사정(事情)을 갖추 알아가지고 특별히 가서 진주(陳奏)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온 나라의 신민들과 함께 성지(城池)를 보수하고 변방의 대비를 정칙(整飭)함으로써 지키고 방어할 계책을 세웠다.
20년 임진025) 년간에 왜적이 온 나라의 군대를 죄다 동원하여 가지고 와서 마구 쳐들어와 유린하였는데 그 형세가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았다. 이들이 상국을 침범하려는 흉계를 세운 것이 진실로 하루 이틀에 한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오래 전부터 흉모를 품고 있다가 기회를 노려 발동한 것이다. 본국은 대대로 태평을 누려 왔으므로 백성들이 전쟁을 모르고 지내오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미친 왜구를 만났는데, 반격을 가하였으나 지탱하지 못하고 남쪽 지방의 주군(州郡)들이 서로 잇따라 함몰되었다.
왕이 장사들을 나누어 보내어 요충지를 끼고 지키게 하는 한편 도민(都民)들에게 엄히 하유하여 성(城)을 나가는 일이 없도록 금하였다. 그리고 애통해 하면서 자신을 죄책하는 하교를 내려 팔로(八路)의 근왕병(勤王兵)을 부름으로써 죽음으로 지키면서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이일(李鎰)의 군대가 상주(尙州)에서 무너져 조령(鳥嶺)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신립(申砬)이 또 충주(忠州)의 달천(㺚川)에서 패배하기에 이르러서는 대적(大賊)이 승세를 타게 되었으므로 그 예봉을 당할 수 없게 되었다. 왕은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알고 이에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 왜적이 천조를 침범하려고 모의하였으며, 실로 천하의 흉적인 것이다. 우리가 당연히 천조를 위하여 국경을 사수해야 하지만 형세가 중과 부적이어서 전혀 상대하여 맞설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미 흉봉(凶鋒)을 힘써 막아내어 왜적의 진로를 차단할 수 없다면 차라리 가까이 있는 부모의 나라로 귀의하여 성천자(聖天子)에게 호소, 왕사(王師)를 빌어다가 이 흉적을 치는 것이 낫다.’ 하고, 이어 서쪽으로 파천(播遷)할 계획을 결정하였다. 이어서 요동 도사(遼東都司)에 이자(移咨)하여 각 아문(衙門)에 신보(申報)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전주(轉奏)하게 하였다.
이때 왕비 박씨(朴氏)가 아들이 없어 저위(儲位)를 정하지 못했었다. 4월 27일 신하들이 모두들 아뢰기를 ‘저사(儲嗣)를 세워서 위의(危疑)스런 인심을 진정시켜야 합니다.’ 하니, 왕이 대신을 불러서 이르기를 ‘뒷일을 부탁하는 것은 본디 예속되어 있는 데가 있으나 단지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광해군은 총명하고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나이도 이미 장성하였으니, 백성들의 기대에 따라 저사로 정한다.’ 하자, 신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칭하하기를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입니다.’ 하였다. 28일 광해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이때 국사가 창황하여 미처 사신을 보내어 주문(奏聞)하지 못하고 먼저 자문(咨文)을 보내어 요동에 알린 다음 중국 조정에 전주(轉奏)하게 하였다.
30일에 적군의 침공에 대한 보고가 더욱 다급해지자 왕이 도성을 나아가 서쪽으로 갔는데, 한편으로는 왕자들을 나누어 보내어 사방으로 가서 의병을 불러 모으게 하였으며, 세자는 왕을 따라갔다.
평양(平壤)이 함락되기에 이르러서는 왕이 나아가 의주(義州)에 머물게 되었는데, 세자에게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따르게 하였다. 약간의 신료(臣僚)들을 동남쪽으로 내려 보내어 호남과 기전(畿甸)의 성세(聲勢)가 통해지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평양을 출발하여 황해도를 거쳐 동쪽으로 강원도 이천현(伊川縣)에 이르렀는데 지나는 곳마다 격서(檄書)를 보내어 의병을 불러 모으면서 대의에 의거 효유(曉諭)하였다. 그러자 달아났던 백성들이 소문을 듣고 떼 지어 모여들었고 모두 의리에 의거 분발할 것을 생각하여 다투어 일어나서 왜적을 죽였다.
8월에 왕이 배신 정곤수(鄭崑壽) 등을 보내어 천조(天朝)에 적의 정세를 진주(陳奏)하고 군대를 청하여 왜적을 치게 하도록 하였다.
9월에 황제가 행인(行人) 설번(薛藩)을 보내어 칙서를 내려 위유(慰諭)하기를 ‘그대의 나라는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키면서 평소 공순한 충성을 바쳐왔으며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이 훌륭하여 낙토(樂土)라고 일컬어졌다. 근래 듣건대 왜노가 창궐하여 마구 침릉(侵凌)하면서 왕성(王城)을 함락시켰고 평양을 점거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원근(遠近)이 소요스러운 가운데 국왕이 서쪽 바닷가로 피난을 떠나 초망(草莽) 속을 헤매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판탕된 것을 생각하니 짐의 마음이 그지없이 측은하다. 어제 급박함을 고하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미 변신(邊臣)에게 신칙하여 군대를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제 특별히 행인사(行人司)의 행인 설번(薛藩)을 차견하여 칙서를 가지고 가서 그대 국왕에게 유시하게 하였다. 그대는 마땅히 조종(祖宗)이 대대로 전하여 온 기업(基業)을 생각하여야 하니, 어떻게 차마 하루아침에 경솔히 포기할 수 있겠는가. 속히 수치를 씻고 흉적을 제거하여 광복(匡復)할 것을 극력 도모해야 한다.
다시 해국(該國)의 문무신(文武臣)들에게 전유(轉諭)하노니, 각기 임금에게 보답하려는 마음을 굳게 지니고 복수(復讐)하는 의리를 크게 분발하도록 하라. 짐이 이제 문무 대신 2원(員)을 차견하여 요양(遼陽) 각진(各鎭)의 정예병 10만을 이끌고 가서 왜적의 토벌을 돕게 하였으니, 해국(該國)의 병마(兵馬)와 함께 전후에서 협공하여 힘써 흉적을 섬멸함으로써 하나도 남김이 없게 하도록 기약해야 한다.
짐이 천명을 받아 중화(中華)와 사이(四夷)의 군주가 되었으므로 지금 만국이 모두 평안하고 사해(四海)가 안정되었는데, 저 소추(小醜)들이 준동하여 감히 횡행하고 있다. 따라서 다시 동남 바닷가의 제진(諸鎭)과 아울러 유구(琉球)·섬라(暹羅) 등 나라에 선유(宣諭)하여 군대 수십만을 모아서 함께 일본을 쳐서 바로 소굴로 공격해 들어가게 하겠다. 고래 같은 흉적이 목을 바쳐 해내가 안정된다면 작상(爵賞)과 무전(茂典)을 짐이 어찌 아끼겠는가.
대저 선세(先世)의 국토를 회복하는 것이 대효(大孝)인 것이고 군부의 환란을 급급히 구원하는 것이 지충(至忠)인 것이다. 해국(該國)의 군신(君臣)들은 본디 예의를 잘 알고 있으니 반드시 짐의 마음을 우러러 몸받아 구물(舊物)을 광복함으로써 국왕으로 하여금 개가(凱歌)를 연주하면서 도성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이어 종묘 사직을 잘 보존하고 장구히 번병(藩屛)을 지켜 짐이 멀리 있는 작은 나라를 돌보아 사랑하는 뜻에 위안이 되게 하라.’ 하였다. 왕이 의주에 있으면서 백관들을 거느리고 강가에서 맞이하였는데 목이 쉬도록 통곡하였다. 좌우도 애통해 하였으며 신하들도 모두 울었다. 왕이 칙사에게 말하기를 ‘왜노가 장차 상국(上國)을 침범하려 했으므로 소방(小邦)이 의리에 의거 절교했다가 이런 상패(喪敗)를 당했습니다. 조정에서 왜노의 서계를 보았다면 이 왜적의 정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11월에 황제가 특별히 백금(白金) 2만 냥을 하사했는데 왕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배수(拜受)하여 호종하는 신하들과 진중(陣中)의 장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왕이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피난하는 사람들이 산골짝에서 굶어 죽고 있으니, 매우 딱한 일이다. 각도(各道)의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구제하여 살리게 하라.’ 하였다.
12월에 황제가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등을 보내어 요(遼)·광(廣) 지방의 군대 4만 명을 이끌고 나아가게 하여 왔다. 왕이 정성을 다하여 맞이하여 위로하고나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황제의 망극한 은혜를 입어 대인(大人)을 만나게 되었으니, 소방(小邦)의 실낱같은 국명을 대인에게 부탁합니다.’ 하니, 제독이 왕의 충간(忠懇)스러움을 보고 안색에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21년 계사026) 정월에 제독이 본국의 군병들을 함께 거느리고 평양의 왜적을 크게 격파하니,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천병(天兵)이 지금 승승 장구하고 있지만 왜노들은 그지없이 사납고 수길(秀吉)은 흉악하고 간교하다. 만일 제도(諸道)에 널려 있는 왜적을 모두 모아 항거할 계책을 세운다면 승부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이제 한번 승첩한 것 때문에 기뻐서 경하하는 것은 또한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달에 의주에서 평양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었는데, 떠날 적에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주민(州民)들에게 효유하여 부역을 모두 견감시키고 또 전조(田租)를 면제하게 하였다. 이어 서쪽으로는 황도(皇都)를 향하여 망궐례(望闕禮)를 행한 다음 출발하였다.
정주(定州)에 이르니 세자(世子)가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와서 맞이 하였다. 왕이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급선무는 천병(天兵)의 군량을 마련하는 것이다. 내가 필마(匹馬)로 천병들의 뒤에서 책응(策應)하면서 잇따라 나오는 천장(天將)들에 대해서도 또한 머물러 접대하려 하니, 세자는 안주(安州)에서 나아가 한편으로는 책응하고 한편으로는 독운(督運)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구도(舊都)인 평양의 백성들 가운데 왜적에게 함몰되어 죽은 사람들을 아울러 모두 거두어 땅에 묻고 표목(標木)을 세워 백골이 노출되는 일이 없게 하라.’ 하고, 또 명하기를 ‘군량과 기계를 전수(轉輸)해 올 적에 이를 호위하는 사람은 조절해서 숫자를 감하여 힘써 간략하게 하고 제공하는 음식도 3, 4 그릇을 넘지 말게 하라.’ 하였다.
4월에 관군(官軍)이 서울을 수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하들이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는 위로해야 할 일이요, 하례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신민(臣民)들을 거느리고 망궐례를 행하여 황은(皇恩)에 사례해야 한다.’ 하였다. 이어 기로(耆老)와 인민(人民)들로 하여금 동시에 망궐례를 행하게 하여 함께 황은에 감격해 하는 의리를 알게 하였다.
6월에 왕이 영유(永柔)를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였는데 거주하는 백성들이 소장을 올려 머물기를 청하니, 왕이 수찰(手札)을 내려 답하기를 ‘지금 내가 떠나는 것은 그대들을 버리고 가려는 것이 아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서울의 백성들이 살곳을 잃고 굶주림에 허덕이면서 날마다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내가 빨리 가지 않으면 구제할 수 없으니, 서울 백성들이 나를 기다리는 것이 그대들이 머물기를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고, 이어 술을 먹여 보내었다.
이때 경외(京外)에 기근이 들었는데 왕이 하교하기를 ‘도성 백성들이 내가 가까이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니, 그들이 돌아오기 바라는 마음이 어떻겠는가. 가까운 고을의 곡식을 풀어 배로 경강(京江)으로 운송하게 하라. 그래도 부족할 경우에는 즉시 승지를 보내어 경창(京倉)의 곡식을 풀어 진구(賑救)하게 하라.’ 하였다. 왕이 나인(內人)들이 소고기를 구워 먹는 것을 보고 하교하기를 ‘소가 아니면 논을 갈 수가 없는데 사람으로서 소를 죽이고 있으니, 너무도 차마 못할 짓이다. 지금은 나라가 판탕된 즈음이어서 엄하게 금하여도 오히려 번식시키기에 부족할까 염려스러운데 더구나 기탄없이 도살(屠殺)하는데야 말해 뭐하겠는가. 나인은 이미 무겁게 처벌하였다. 본 고을의 수령은 잘 금단하지 못하였으니 감죄(勘罪)하게 하라.’ 하였다.
일찍이 행행(幸行)하는 도중에 가지고 있던 궁자(弓子)를 잃어버렸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를 습득하였다. 본관(本官)에서 그를 잡아가두고 아뢰니, 왕이 이르기를 ‘이미 잃어버렸으니 습득한 사람이 있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하고, 즉시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이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열복하였다.
이여송이 왕의 필법(筆法)이 정묘(精妙)하다는 말을 듣고 매우 간절히 요구하자, 왕이 병들었다고 핑계하여 사양하고 나서 이르기를 ‘내가 제독(提督)에 대해 머리에서 발끝까지 가루가 된다고 해도 사양하지 않아야 될 점이 있다. 그러나 나는 형해(形骸)만 보존되어 있을 뿐 신혼(神魂)은 이미 떠나간 지 오래여서 붓을 휘둘러 글자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대개 그 은미한 뜻은 잗단 기교를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이다.
9월에 왕이 서울로 돌아왔다. 근신(近臣)을 시켜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게 하였으며, 또 내주(內廚)에서 날마다 공궤하는 쌀을 감손시켜 특별히 나누어 주게 하였다. 도성의 백성들 가운데 왜적에게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주었고 시신을 거두어 묻어 주었다. 또한 하서(下書)를 두루 보내어 팔도에 통유(通諭), 공부(貢賦)를 헤아려 감면하고 공헌(貢獻)은 모두 폐하게 하였으며, 충신·효자·열녀를 방문(訪問)하여 표창하고 기록하게 하였다.
이어 예조에 하교하기를 ‘상란(喪亂)를 당한 뒤로 도성 백성들 가운데 죽은 자를 어찌 한정할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살아 남은 백성의 과반이 흰 상복(喪服)을 입었을 것으로 여겼으나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에 이르러 살펴보니, 도성 백성들이 거리를 꽉 메웠는데도 상복을 입은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이는 반드시 난리를 겪은 뒤 윤기(綸紀)가 폐추되어서 그런 것이니,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다. 각부(各部)로 하여금 규검(糾檢)하게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5월에 왕이 배신(陪臣)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가서 방물을 바치고 진사(陳謝)하게 하였는데, 황은을 받기에 이르러 서울을 수복하였다.
11월에 황제가 행인사(行人司)의 행인(行人)인 사헌(司憲)을 보내어 칙서를 내리기를 ‘지난번 왕이 대병(大兵)을 이끌고 왜노를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옛 서울로 돌아가서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쳐 진사하였으니, 짐의 마음에 매우 가상스럽고 기쁘게 여긴다. 나라를 회복한 중대한 일임을 생각하니 통상적인 보문(報問)을 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이제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칙유(敕諭)를 내리고 겸하여 대홍망의(大紅蟒衣) 2습(襲), 채단(綵緞)으로 된 표리(表裏) 넷을 하사하고 짐이 왕을 위하여 멀리에서 위로하는 마음이 곡진하다는 뜻을 보인다.’ 하였다. 왕은 즉시 배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진사(陳謝)하였다.
왕이 서울로 돌아온 뒤에 제일 먼저 서적을 거두어 모아 운각(芸閣)에 저장하라고 명하였다. 또 직접 문묘(文廟)에 제사지내려 하니, 예관이 아뢰기를 ‘성전(聖殿)이 모두 소각되었고 또한 위판(位版)도 없으니, 제사를 지낼 장소가 없습니다.’ 하자, 왕이 하교하기를 ‘나의 의견은 그와 다르다. 대저 신(神)이 천하에 있는 것이 물이 땅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있지 않은 데가 없다고 여긴다. 귀신에게는 일정한 제향이 없는 것으로 공경을 극진히 하게 되면 귀신이 여기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지내기도 하였다. 어찌 반드시 나무로 만든 신주를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나의 의견은 학궁(學宮) 곁에다 제단을 축조하고 그 위에다 위차를 만든 다음 몸소 나아가 제사지냄으로써 한편으로는 선성(先聖)의 영령을 위안하고 또 한편으로는 전쟁중에도 윤기(倫紀)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고 싶다.’ 하였다.
대신에게 하교하기를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다. 우리 나라는 인재가 작은데다 수용하는 방법도 과거에만 달려 있다. 글을 지어 올리게 하는 과거보는 마당에서 어떻게 사람의 재능을 다 발휘하게 할 수 있겠으며 따라서 호걸스런 선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 넓은 세상에 우뚝한 재능과 특이한 행실이 있는 선비가 임하(林下)에서 속절없이 늙어가는 일이 어찌 없겠는가. 옛사람의 말에 「대신은 인재를 천거하는 것으로 임금을 섬긴다.」 하였다. 옛날 안영(晏嬰)은 자기의 복신(僕臣)을 천거하였고 사안(謝安)은 형의 아들을 천거하였다. 진실로 적격자라면 미천하다는 것으로 혐의해서는 안 되고 친척이라는 것으로 회피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발탁 기용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각기 천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기 지방의 백성이 적곡(糴穀)을 독촉하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으로 가전(駕前)에서 정소(呈訴)하니, 왕이 하교하기를 ‘유사(有司)는 기전(畿甸)의 들판을 보지 않았는가. 쑥대가 눈에 가득한데 어떻게 차마 세금을 재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왕이 정릉동 행궁에 있었는데 하루는 해관(該官)에게 하교하기를 ‘오래도록 여염(閭閻)에 거처할 수 없으니, 즉시 전의 궁성(宮城) 안에다 간략하게 초가를 하나 짓고서 그리로 옮겨 거처하고 싶다. 옛날 위(衛)임금은 조수(漕水) 가에 초막을 짓고 거처하였으니, 옛날에도 초가를 짓고 거처한 경우가 있었다. 지금이 진실로 어떠한 때인데 큰 궁궐에 거처하려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명나라 장수 가운데 왕궁을 건립하자고 말하는 이가 있자, 왕이 이르기를 ‘큰 원수를 아직 갚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집을 지을 수 있겠소이까.’ 하니, 그 장수가 탄복하였다.
23년 을미027) 왕이 배신을 보내어 왕세자의 책봉에 대해 주청(奏請)하니, 황제가 칙서를 내리기를 ‘조선국 광해군(光海君) 이혼(李琿)에게 칙유(敕諭)한다. 앞서 해경리관(該經理官)이 제본(題本)을 올려 일컫기를 「왜적들이 도망하여 돌아갔으므로 속국(屬國)이 이미 수복되었다. 광해군은 청년으로 기국이 영특하여 신민(臣民)들이 모두 복종하고 있으니, 의당 선발하여 충의 배신(忠義陪臣)이란 직함을 주어 전라·경상 지방에 주차(駐箚)하면서 방어(防禦)에 대해 경리(經理)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해부(該部)에서 의논하여 복주(覆奏)하기를 「칙서를 내려 편의한 대로 일을 이룩하도록 책임지워야 한다」고 하였다. 이제 특별히 그대를 명하여 전라·경상의 군무(軍務)를 총괄하여 감독하도록 명하노니, 전량(錢糧)을 저축하여 장사(壯士)들을 불러 모으고 모든 요새지의 설치, 군기의 비치, 군병의 훈련, 요해처의 수비 등등의 일에 대해 일체 편의에 따라 처리할 것을 허락한다.
이어 배신 권율(權慄)을 감독하여 이끌고 마음을 다해 협의하여 경리하라. 그대는 의당 분발하여 어떻게든 이루려는 뜻을 지니고 일을 잘 조처하여 보존되기를 도모하여야 할 것은 물론, 안으로는 다친 사람들을 치유하여 일어나게 하고 밖으로는 전비(戰備)를 정비하여야 한다. 따라서 널리 만전을 기할 수 있는 방책을 거행하여 영구히 뒷일이 잘 되기를 도모함으로써 나의 번리(藩籬)를 견고하게 하고 그대의 종묘·사직을 평안하게 하라.
성공이 있기를 기다려 특별히 의논하여 조처하겠으니, 혹시라도 이 명명(明命)을 어겨 좋은 기회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 사기(事機)를 그르치고 나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는 삼가 받들지어다. 이런 이유로 칙유한다.’ 하였다. 왕이 배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가서 진사(陳謝)하게 하였다.
이때 대관(臺官)이 수신(帥臣)을 탄핵하였는데 왕이 수교(手敎)를 내리기를 ‘옛날에는 원수(元帥)가 출동할 때 문을 부수고 나아가게 하고 수레바퀴를 밀어주어 보냈으며, 군중에서 품명(稟命)할 경우에는 「여기에 장군이 있다. 따라서 과인이 감히 여기에서 통제할 수 없다.」고 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더벅머리에 용렬한 인간들도 모두 원수의 단점에 대해 논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끝내는 오만하게 꾸짖으면서 억지를 부리니, 지금에 원수를 대우하는 것은 옛날 원수를 대하던 것과는 다르구나.’ 하니, 논자들이 드디어 중지하였다.
25년 정유028) 왜적이 한산도(閑山島)를 습격하여 격파하고서 군대를 출동시켜 다시 침략하여 왔는데, 그 선봉이 이미 서울을 핍박하였다. 이때 제독(提督) 마귀(麻貴)가 외롭고 약한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있었으므로 군정(軍情)이 두려워 술렁거렸으나 왕은 기운을 가다듬고 성을 순시하는 등 굳게 지키면서 동요하지 않았다. 경리(經理) 양호(楊鎬)도 또한 평양에서 급히 달려와서 원조하니,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맞이하였으며, 왜적과 함께 하늘 아래 살 수 없다고 맹세하였다. 이어 경리와 함께 강가에서 군대를 시찰하였으며 단기(單騎)로 강을 건너가 웅거하여 지킬 수 있는 형세를 헤아리기에 이르니, 인심이 이를 힘입어 진정되었다. 드디어 천병(天兵)과 협력하여 충청도 경계에서 적의 선봉을 크게 격파하여 물리쳤다. 경리가 삼로(三路)의 대군(大軍)을 통솔하여 도산(島山)에 나아가 주차(駐箚)하기에 이르러서는 왕이 필마(匹馬)로 종군(從軍)하여 직접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싸우기 위해 수첩(手帖)을 보내어 간청한 것이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경리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중지하였다.
우리 나라의 병제(兵制)는 대략 당나라의 부병(府兵)제도를 모방하여 나누어 쉬게 하고 순번으로 방수(防戍)하게 하여 병농(兵農)이 서로 의지하게 되어 있는 탓으로 나라를 지키기에는 편의하지만 적을 방어하는 데는 항상 단점이 있었다. 왕이 척계광(戚繼光)이 찬술한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보고서 그 법제를 매우 좋아하여 특별히 훈련 도감을 설치하였는데, 대신 1원(員)에게 명하여 영솔하게 하였다. 무변(武弁)인 중신(重臣)을 가려서 대장으로 삼고 용감하고 정예로운 장정들을 초택(抄擇)해서 나누어 부오(部伍)에 예속시킨 다음 배양하여 훈련시키게 했는데 상당히 조리가 있었다.
이때 남쪽 변방은 오로지 주사(舟師)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왕이 수찰(手札)로 수신(帥臣)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주사에 대해 힘을 쏟고 있으므로 군대를 부산(釜山)으로 집결시키고 있다. 육지의 요새지에 웅거하는 것과 다른 적로(賊路)의 요충지에 이르러서는 모두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다. 이는 전일 수전(水戰)의 승첩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싸움에는 상세(常勢)가 없는 것이어서 뜻밖의 변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전의 일만을 원용하여 준례로 삼을 수 있겠는가.
당초 흉적이 부산을 침구하여 와서 곧바로 북쪽을 향하여 쳐올라 올 적에도 우리 주사가 바다에 널려 있었으나 꺼리지 않았고 호남 지방에서 후면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도 돌아보지 않았었으니, 어떻게 전례를 거론할 수 있겠는가. 우리 나라의 형세는 연해변이 1천여 리(里)나 되니, 이는 참으로 이른바 산지(散地)로 삼면으로 적을 받는 나라이다. 왜적은 매우 교활한데 만일 우리 나라의 군대가 부산에 모여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첩보를 통하여 알게 되면 오도(五島)에서 바람을 이용하여 돛을 올리고 출동하여 순식간에 천리를 달려와 곧바로 호남을 향함으로써 우리 군대의 뒤로 나와 포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군대가 적군에게 막히게 되어 호남·호서로부터 해서·관서에 이르기까지 연해 일원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될 것인데, 그것을 누가 막아낼 수 있겠는가. 따라서 주사(舟師)를 부산에만 집결시킨 채 중병(重兵)을 호남에 배치하지 않고 육지의 험하고 좁은 요지를 지키지 않는 것은 올바른 계책이 아닌 것 같다.’ 하였다.
일찍이 강관(講官)에게 이르기를 ‘본심을 보존시키는 데는 요점이 있는 것이다. 일상 생활하는 사이에 천 가지 만 가지 일들이 잇따라 눈앞에 닥쳐오게 되는데 이때에 확연(廓然)히 대공 지정한 마음으로 사리에 따라 응하여 닥쳐온 외물(外物) 때문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된 뒤에야 고요하게 하려면 고요해지게 할 수 있고 움직이게 하려면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간사하고 망령스런 생각이 구름처럼 인다면 이를 없애려 해도 없앨 수가 없는 것이다. 대저 마음은 고인 물처럼 조용하게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하였다. 이때 괴이한 물건이 있었는데 명나라 장수가 우리 나라의 점장이를 찾아 보고서 길흉을 점쳤다. 왕이 이르기를 ‘하늘이 품물을 만들어 낼 적에 정상적인 모양을 갖추지 못한 것을 괴이하다고 하는 것이니, 괴이한 것은 정상적인 데서 어긋난 것이다. 정상이라는 것은 이치인 것이니 사람의 일이 사리에 어긋나게 된 것은 모두 그에 따라 흉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상점(象占)이 이렇게 환한데 점치기를 기다릴 것이 뭐 있겠는가. 저 일개 점장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27…년029) 왜적이 모두 물러갔다. 왕이 배신(陪臣)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가서 진사(陳謝)하게 하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위유(慰諭)하고 이어 채단(綵緞)과 표리(表裏)를 하사하였다. 이해에 중국에서 건청궁(乾淸宮), 곤녕궁(坤寧宮)을 영건(營建)했는데 왕이 배신을 보내어 공역(工役)을 돕기 위한 방물(方物)을 진헌하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포유(褒諭)하고 이어 백금과 망의를 하사하였다.
정시(庭試)를 설행하여 선비들에게 책문(策文)을 시험보였다. 고관(考官)에게 하교하기를 ‘잠깐 시제(試製)를 보니 장(莊)·노(老)의 말을 쓴 사람이 있었다. 삼분(三墳)·팔색(八索)이 있은 이래 본받을 만한 글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장생(莊生)의 정도에 어긋난 이야기를 쓴단 말인가. 이제는 금단해야 한다.’ 하였다.
28년030) 왕비 박씨(朴氏)가 훙서(薨逝)하였다. 병화(兵火)가 있을 때 왕의 책봉받은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아울러 모두 보존하지 못하고 잃어버렸다. 왕이 배신을 보내어 전례에 의거하여 보사(補賜)해 줄 것을 주청(奏請)하였는데, 다음해 정월에 배신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올 적에 황제가 칙서를 내리고 고명과 면복을 보사하였다. 칙서의 내용은 ‘짐은 생각건대 왕자(王者)가 위태로움을 부지시키고 폐기된 것을 수거(修擧)하는 것은 더없이 후한 인자함인 것이고 국가의 기강을 확립시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는 예(禮)보다 더 중대한 것이 없다고 여긴다. 예(禮)는 일의 수치스러움을 충분히 진작시킬 수 있고 나라의 수치스러움을 충분히 흥기시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장(文章)과 물채(物采)라도 감히 폐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대 조선국은 본래 예교(禮敎)를 돈독히 하여 충경(忠敬)을 독실히 힘썼으므로 내가 은혜를 베풀고 가상히 여기는 데 걸맞게 해 왔다.
지난번 병화가 있은 이래 초망(草莽)속을 헤매었으므로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이 거의 탕진되기에 이르렀다. 짐이 그대를 위하여 흉특한 요기(妖氣)를 깨끗이 씻어내고 국토를 회복시켜 주었는데, 이는 진실로 나의 군대와 무신(武臣)들의 힘이었지만 또한 그대가 예(禮)를 지킨 효험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군려(軍旅)를 어떻게 잘 경리할 수 있었겠으며 정령(政令)이 어떻게 잘 시행될 수 있었겠는가. 일을 사리에 따라 행하지 않으면 크게 뒤틀리게 되는 것인데 오늘날의 이 승첩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대가 고명과 면복을 피난하는 즈음에 잘 보수(保守)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사신을 보내어 와서 고하고 처음처럼 보사(補賜)해 줄 것을 청하였다. 대저 위를 섬기고 아래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런 용의(容儀)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니, 중화의 위의(威儀)를 회복하려는 뜻을 짐은 기꺼이 허락하는 바이다. 이리하여 상방(尙方)에 신칙하여 망의를 만들어 주고 이어 고명을 내리게 하였으니, 그대는 삼가 받들지어다. 짐은 예(禮)를 남에게 가차(假借)하지 않는 것이 신조이니, 그대는 물품이 하찮다고 하여 예를 폐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초(楚)나라 임금은 남루한 옷을 입고도 초나라를 계도하였고 위(衛)나라 임금은 대포(大布)를 입고서도 위나라를 중흥시켰고 월(越)나라 임금은 와신 상담하면서 패국(覇國)을 이룩하였다. 이는 모두 국왕의 오늘의 사정에 맞는 일이니, 힘써서 나의 명(命)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는데, 왕이 즉시 배신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가서 진사(陳謝)하게 하였다.
해관(該官)이 왕에게 흠사(欽賜)한 면복의 장단(長短)이 몸에 맞지 않아 개조(改造)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우리 황상(皇上)이 하사한 것이니, 마땅히 어김이 없이 입어야 한다. 어떻게 감히 개조할 수 있겠는가. 내가 임진년에 창황히 서쪽으로 파천할 적에 궁중의 물건은 모두 다 버렸으나 오직 황상이 하사한 망룡의는 손수 찾아서 꺼내어 가지고 갔는데 이는 내가 죽을 때 반드시 이 옷을 입고 생을 끝맺음하기 위해서였다. 그 옷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으므로 때로 혹 펼쳐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린다.’ 하였다.
3월에 황제가 황태자를 책립(冊立)하고 한림원 시강(侍講) 고천준(顧天俊), 행인사 행인(行人) 최정건(崔廷健)을 차견하여 칙서를 내리고 아울러 왕과 왕비에게 채폐(綵幣)로 무늬 놓은 비단을 하사하였다. 왕이 배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진하하였으며, 또 배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사은하였다. 예조에 하교하기를 ‘전대(前代) 제왕의 분묘와 충현들의 묘소를 아울러 수리하여 봉식(封植)하게 함으로써 덕을 높이고 어진이를 드러내는 의리를 돈독하게 하라.’ 하였다.
이 해에 왕이 영돈녕부사 김제남(金悌男)의 따님인 김씨(金氏)를 계비(繼妃)로 책봉하고 나서 배신을 보내어 계비의 고명과 면복을 주청하였다.
31년031) 배신이 연경에서 돌아오면서 황제의 칙유(敕諭)를 받들어 가지고 왔는데, 그 내용은 ‘주문(奏文)을 보니, 왕이 이미 김제남의 딸을 맞이하여 계실(繼室)로 삼고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을 청하였으므로 특별히 청한 대로 윤허한다. 이에 그대 김씨를 책봉하여 조선 국왕의 계비로 삼고 아울러 고명·관복·채폐(綵幣) 등의 물건(物件)을 하사한다. 이를 차견하여 보내온 배신에게 주어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으니, 도착하는 대로 수령(收領)하도록 하라. 왕은 의당 삼가 은혜로운 하사품을 받고 영원히 충정(忠貞)을 바쳐 짐이 총애하는 뜻에 부합되게 하라. 삼갈지어다.’ 하였다.
32년032) 배신을 보내어 바다에 표류되었던 인민(人民) 57명을 압해(押解)하면서 주문(奏文)을 갖추어 아뢰니, 황제가 모두 칙서를 내려 포장하고 면려하였으며 아울러 백금(白金)과 무늬 있는 비단을 하사하였다.
34년033) 2월 황손(皇孫)이 탄생하자 황제가 한림원 수찬 주지번(朱之藩)과 예과 좌급사중 양유년(梁有年)을 보내어 칙서(敕書)와 조서(詔書)를 내리고 아울러 왕과 왕비에게 채폐와 무늬놓은 비단을 하사하였다. 왕이 즉시 배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진하하고 또 배신을 차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가서 진사(陳謝)하게 하였다.
35년034) 모월(某月) 배신을 보내어 바다에 표류한 인민 1백 19명을 압해(押解)하면서 주문을 갖추어 아뢰니, 황제가 즉시 칙서를 내려 포유(褒諭)하고 이어 백금·무늬놓은 비단·채단을 하사하였다.
왕이 화란을 당한 이래 걱정과 피로가 쌓여 병이 생겼으므로 왜적이 물러간 뒤에 조속히 전위(傳位)하려 했었다. 그리하여 10년 동안 병을 조리하여 오면서 간곡한 하교를 내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사양하고 여러 신하들이 한사코 말린 탓으로 마지못해 정사를 청리하기는 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선위(禪位)할 계획을 끝내 풀지 않고 있었다. 정미년035) 봄부터 왕의 병이 더욱 위독해졌는데 겨울에 이르러서는 그 증세가 더더욱 위태롭게 되었다. 세자가 주야로 시침(侍寢)하면서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목욕 재계하고 향불 피우면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하늘에 빌었다. 왕은 세자가 병이 생길까 우려하여 누차 중지하라고 하유하고 항상 침전(寢殿) 곁에서 유숙(留宿)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무신년036) 초하루에 정릉동 행궁의 정침(正寢)에서 훙서(薨逝)하였다. 춘추는 57세이고 재위(在位)는 42년이다. 임종(臨終)에 손수 유교(遺敎)를 써서 세자의 손을 잡고 건네주었으며 이어 국사를 임시로 맡으라고 명하였다.
왕은 총명하고 강하고 굳세며 검소하고 공순하고 자애로웠으며 성효(誠孝)를 하늘에서 타고났고 영지(英智)가 뛰어났다. 유술(儒術)을 높이고 도(道)를 중히 여겼으며 배우기를 좋아하고 의리를 즐겼다. 사대(事大)하는 정성은 지극한 본성에서 나왔으므로 조서를 맞이하고 배표(拜表)하는 의식과 정지(正至)와 성절(聖節)에 망궐(望闕)하는 예법을 모두 경건하고 정성스럽고 정백(精白)한 마음가짐으로 엄숙하게 일을 진행하였다. 화란을 당하여 떠돌면서나 질병과 극심한 곤궁을 당하여서나 혹시라도 폐기한 적이 없었고 또한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었다.
방물을 봉진(封進)할 적마다 반드시 몸을 씻어 깨끗이 하고 재계한 다음 손수 점검하여 살펴보았는데 분명하게 계칙하면서 더없이 경건히 하고 신중히 하였다. 혹 물력(物力)이 넉넉하지 못한 탓으로 마음에 미진한 점이 있으면 사신이 돌아올 때까지 한 시각도 잊지 않았으며, 궁중에서 한 가지 진미(珍味)를 얻으면 반드시 안상(案床) 위에 올려놓고 서쪽을 향하여 절하면서 축원하기를 ‘우리 황제께 진헌하고 싶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하였으니, 우러러 받드는 정성이 효자가 부모를 사모하는 것 같은 뿐만이 아니었다. 평상시 기거할 때나 신하들을 대하여 말할 적에는 첫번째도 황은(皇恩)이 망극하다고 하였고 두 번째도 황은이 망극하다고 하면서 한결같이 대양(對揚)할 것을 생각하는 것을 마치 좌우에 있는 것처럼 하였다.
병란(兵亂)이 발생한 이후 천조(天朝)의 문무 장관(將官)으로서 전후 나온 사람이 부지기수였지만 위로 원융(元戎)에서부터 아래로 군정(軍丁)에 이르기까지 공경과 성심을 극진히 하여 각기 접대하는 예(禮)를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궁벽한 산골 여염(閭閻)도 꺼림없이 출입하였고 비바람과 추위·더위에도 전혀 정폐(停廢)한 적이 없었다. 하루에 접우(接遇)하는 것이 혹 서너 곳에 이르렀는데 시종(侍從)하는 신하들은 모두들 견디지 못할 것 같이 하였으나 왕은 일초도 태만하거나 소홀히 하는 기색이 없었다.
금년 정월에 배신(陪臣)이 조서(詔書)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왕의 병이 이미 위급한 상황이었는데도 오히려 서교(西郊)로 나아가 영접하지 못한 것을 통한스럽게 여겼다. 칙서가 궁중에 이르자 억지로 일어나서 손을 씻은 다음 사람을 시켜 부축하게 하여 꿇어앉아서 몸소 스스로 봉안(奉安)하였으며 서쪽을 향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리하여 병이 더욱 위독하게 되었는데 이는 지극한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억지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영정 왕비(榮靖王妃) 박씨(朴氏)와 공헌 왕비(恭憲王妃) 심씨(沈氏)를 친어미같이 섬겨 안색을 부드럽게 하여 받들고 뜻을 봉양함에 있어 성의를 곡진히 하였으며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는 예(禮)를 10년을 하루처럼 하였다. 만일 질병이 있으면 몸소 약이(藥餌)를 보살피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였으며 상(喪)을 당했을 적에는 애훼(哀毁)가 지나쳤으며 장사는 한결같이 예제(禮制)에 따라서 하였다.
우애(友愛)도 하늘에서 타고났는데 두 형을 공경히 대우하고 한 누이동생을 자애롭게 돌보아 주었다. 일생토록 이런 우애가 조금도 쇠하지 않았으며 조카들을 자신의 소생처럼 돌보아 감싸주었다.
성품이 본디 간약(簡約)하여 번거롭고 화려한 것을 즐겨하지 않았으며 성색(聲色)과 사냥, 멋대로 놀고 사치를 부리는 오락에 대해서는 하나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음식은 맛있는 것을 중히 여기지 않았고 옷은 항상 빨아서 입었으므로 비빈(妃嬪)과 궁인(宮人)들도 또한 감히 사치스런 옷을 입지 못하였으니, 백성들의 고통을 힘써 돌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운 겨울과 여름 장마에 매양 백성을 걱정하는 생각을 하였으며 비용을 절약하여 아꼈고 근본을 힘써 농사를 중히 여겼으므로 궁중에서 쌀낱을 땅에 버리지 못하게 하면서 이르기를 ‘이는 모두 농부들의 신고(辛苦)가 낱알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먹고 있는 것도 이미 만족스러운 것인데 더구나 감히 마구 없애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풍화를 숭상하고 예의를 중히 여겼으며 염치를 면려하고 상벌을 신중히 하였다. 백성들의 목숨을 아껴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인 적이 없었으며 곤충(昆蟲) 같은 하찮은 미물이라도 또한 살상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사람이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여염(閭閻)의 하천(下賤)일지라도 반드시 온전히 살리려 하여 약물(藥物)의 하사를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이 하였으며, 매양 옥사를 판결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딱하게 여기고 슬프게 여겨 살릴 방도를 찾았다.
삼가 성헌(成憲)을 지켜 진실로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면 분분하게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대간(臺諫)을 예우(禮遇)하여 비록 과격한 말을 하여도 항상 너그러이 포용하였다. 즉위한 이래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혹 파출(罷黜)시킬 벌을 시행할 일이 있어도 번번이 스스로 새로운 마음가짐을 지니도록 허락하였으며, 엄하게 하면서도 너그럽게 하고 분명하게 하면서도 지니치게 살피는 일은 하지 않았다. 어려운 일을 통제하고 의심스러운 일을 대처함에 있어 과단성과 영발력이 있었으니, 대대로 나지 않는 호걸스런 군주이다. 평상시에는 종용하면서도 온화한 의용(儀容)을 지녔고 침착하게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부지런히 면려하였으니, 경서(經書)를 연구하여 독실하게 행하는 선비와 같았다. 변방의 계책을 세우고 적을 헤아려 성패(成敗)를 결산(決算)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의 의표(意表)를 훨씬 벗어났으므로 손가락을 꼽아 으뜸이 될 만하였다.
본디 유술(儒術)을 좋아하며 부지런히 힘써 게으르지 않았으며 날마다 연신(筵臣)을 접견하여 경전(經傳)을 강독하면서 고금의 일을 토론하고 깊고 은미한 뜻을 파헤쳤는데, 논한 것이 선유(先儒)의 전주(箋註)보다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에 신하들이 감히 한마디도 덧붙일 수가 없었다. 방에다 향불을 피우고 좌우에 도서(圖書)를 비치해 놓았으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혼자 있는 곳에서도 태만한 용의(容儀)가 없었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서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제자 백가(諸子百家)와 의약(醫藥)·잡류(雜流)의 책에 이르기까지 그 뜻을 환히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이단(異端)을 공척하여 단절하고 궤론(詭論)을 배척하였으며 제생(諸生)에게 엄히 효유하여 장자(莊子)·노자(老子)·불교(佛敎)의 용어를 쓰지 못하도록 엄금하였는데, 이는 이교(異敎)의 글에 대해 그 근원을 환히 갈파하여 그것이 매우 근리(近理)하지만 진리(眞理)를 크게 혼란시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만년(晩年)에는 《주역(周易)》을 좋아하여 혼란한 때를 당하여서도 강독하는 것을 중지하지 않았다. 항상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계사전(繫辭傳)을 읽노라면 나도 모르게 손발이 흔들리면서 춤을 추게 된다.’ 하였다.
호령을 내리고 교서를 반포함에 있어 상세히 써서 절로 문장을 이루었으며 당초에 마음속으로 다잡아 생각하지 않았어도 번번이 전훈(典訓)이 되었으며 책을 읽을 적에는 열 줄을 한꺼번에 읽었고 한번 열람한 것은 모두 기억하였다. 날마다 만기(萬機)를 청리하노라면 온갖 정무(政務)가 번다하기 그지없는데도 칼날로 헝클어진 실을 베듯이 지체되는 일이 없이 재결(裁決)하였다. 형옥(刑獄)의 법률(法律)에 관한 번거로움과 전곡(錢穀)의 문부(文簿)에 관한 세세한 일에 이르러서도 한마디로 판결을 내리지만 털끝만큼도 사리에 어긋나는 것이 없었으므로 군하(群下)들이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직무의 수행을 성심껏 하였다.
아, 왕은 불세출의 자질을 타고나서 큰일을 하려는 뜻을 지니고 높이 천고의 성대(聖代)를 우러러 보고 마음을 가다듬어 지치(至治)를 이룩함으로써 기어이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하여 옛날보다 더 융성한 성대함을 이룩하려 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왜적의 변을 만나 의리를 지키다가 화란(禍亂)을 당하였으므로 왕은 스스로 뜻만 지니고 실천에 옮겨보지 못했다는 것으로 일생 동안 의분에 북받쳐 개탄하였다. 하늘을 감동시키는 지극한 정성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고 천하에 말할 수 있기 때문에, 황상(皇上)의 불세(不世)의 은혜를 받아 선대 종계(宗系)의 오랜 잘못을 깨끗이 씻고 나라를 빛낸 공렬을 후세에 전하게 되었으며, 하늘을 무너뜨릴 듯이 강성한 왜구를 물리치고 국가를 재조(再造)하는 공적을 이룩하였으니, 종방(宗祊)에 우뚝한 공이 있고 국가를 중흥시켜 빛낸 업적이 있다. 아, 위대하다. 슬픈 일이다." 【호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지어 올렸다. 고부사(告訃使) 이호민(李好閔)이 중국에 가지고 가서 시호를 청하였다. 】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273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註 008]가정(嘉靖) 임자년 : 1552 명종 7년.
- [註 009]
가정 을축년 : 1565 명종 20년.- [註 010]
융경(隆慶) 원년(元年) 정묘년 : 1567 명종 22년.- [註 011]
기사년 : 1569 선조 2년.- [註 012]
6년 임신 : 1572 선조 5년.- [註 013]
태형(台衡) : 정승을 가리킴.- [註 014]
문산(文山) : 문천상(文天祥)의 호.- [註 015]
을해년 : 1575 선조 8년.- [註 016]
정축년 : 1577 선조 10년.- [註 017]
을사년 : 1545 인종 1년.- [註 018]
임오년 : 1582 선조 15년.- [註 019]
병술년 : 1586 선조 19년.- [註 020]
정해년 : 1587 선조 20년.- [註 021]
무자년 : 1588 선조 21년.- [註 022]
만력 원년 : 1573 선조 6년.- [註 023]
부자(夫子) : 공자(孔子).- [註 024]
19년 신묘 : 14591 선조 24년.- [註 025]
20년 임진 : 1592 선조 25년.- [註 026]
21년 계사 : 1593 선조 26년.- [註 027]
23년 을미 : 1595 선조 28년.- [註 028]
25년 정유 : 1597 선조 30년.- [註 029]
27…년 : 1599 선조 32년.- [註 030]
28년 : 1600 선조 33년.- [註 031]
31년 : 1603 선조 36년.- [註 032]
32년 : 1604 선조 37년.- [註 033]
34년 : 1606 선조 39년.- [註 034]
○禮曹啓曰: "慈殿進香於殯殿時, 祝文頭辭令禮官定奪。 臣等之意, 則祝文頭辭王妃姓氏敢昭告云云, 似爲宜當。" 傳曰: "知道。" ○昭敬大王行狀:國王姓李氏, 名恭僖王之孫, 德興君 岹之第三子也。 母鄭氏, 領議政世虎之女, 以嘉靖壬子十一月十一日, 生王於漢城之仁達坊。 王生而質美動好率禮。 幼時, 恭憲王嘗竝與二兄召入, 脫所御冠令以次着觀所爲。 次及於王, 王跪而辭曰: "君上之御, 臣子何敢掛頭?" 恭憲王驚嘆曰: "然。 當以此冠遂給汝也。" 因問君與父孰重, 令書字以對則曰: "君親雖曰不同, 忠孝本無異 二致。" 恭憲王大奇之。 旣長封河城君。 嘉靖乙丑, 恭憲王有疾。 世子暊旣卒, 儲嗣未定。 首相李浚慶等建議, 請預選於諸姪中。 恭憲王遂命王。 入侍醫藥, 仍命別擇儒士爲師傅輔導之, 眷愛特厚, 國內人心咸屬焉。 隆慶元年丁卯, 恭憲王薨。 大臣以王妃奉遺命敎迎王以入。 王方服母喪居私第, 涕泣固讓。 群臣擁戴迫而後乃行。 時, 翰林院檢討許國、兵科給事中魏時亮來頒穆宗皇帝登極詔, 方入境, 聞國君新喪, 未有儲嗣, 甚以爲憂。 及頒詔之日, 見王儀表端莊、禮度閑雅, 相與旋目賞歎曰: "東方眞主出矣。" 時, 王年纔十六矣。 遣陪臣告訃于朝, 且請承襲。 翌年正月, 皇帝遣太監姚臣、李慶, 齎詔封爲朝鮮國王, 欽賜誥命冕服綵幣。 王卽遣右議政丁應斗等奉表謝恩。 王嗣位之初, 銳意圖治專精學問, 日御書筵討論經史, 夜分不寢。 時名儒李滉解官歸鄕, 聚徒講學, 自前王時屢召, 未至也。 王致誠盡禮敦諭起之, 擢爲貳公。 滉感激知遇疏陳治道六條, 又撰《聖學十圖》、《西銘考證》, 手寫程子 《四勿箴》, 以進。 王虛心嘉納命, 皆繕寫爲屛, 置諸左右, 朝夕觀省。 不時召對從容講道, 禮遇隆重, 期臻至治。 及滉亡傷, 悼不已敎曰: "滉之隻字片言皆可傳後, 其令有司裒集刊行。" 本國舊稱文獻之邦, 而其於格致誠正之學, 則罕有傳焉。 自高麗 鄭夢周始倡絶學, 至本朝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等相繼而起, 講明道義, 發揮經傳。 王以此人等大有功於斯道, 首命賜祭守塚, 贈官與諡錄其子孫, 命儒臣柳希春等撰次其行名曰‘《儒先錄》。’ 仍命刊行《近思錄》、《心經》, 且以《何氏小學》名物、度數最爲詳密, 便於初學, 本朝所撰《三綱行實》可以扶植倫紀, 竝命刊行。 敎該曹曰: "近來師儒之選, 皆尙文詞, 至於德修學明之士, 則未見其人。 以此黌舍游學之士, 則皆以習文藝決科第爲業, 未聞爲切問近思之學。 士習如此, 他日成就將何所觀? 京中如此, 外方可知。 有學行堪爲師表之人, 擢授方面之任, 以付風化之權, 巡行列邑, 勸課敎誨。 厚倫成俗端在於此。 且爲學之方, 莫先於《小學》。 入學時, 必令講試《小學》, 則幼學之士, 自知向方, 以此申飭學行。" 又敎以薦進遺逸爲新政第一。 遂馹召徵士曺植、成運等, 不次超敍, 或不能赴, 則獎諭勤懇。 其他以經明行修著稱者, 前後擢用甚多, 至有白衣陞卿宰者。 嘗於筵中論賢邪進退之機曰: "奸黨碑立, 而汴京墟, 僞學籍成, 而南宋亡。 雖悔於終, 亦無及矣。 可不戒哉?" 時, 臺諫追論先朝奸臣南袞等戕害士林之罪, 請削官爵。 人或以事在旣往爲言。 王曰: "欲罪南袞者, 所以追慕趙光祖之道學, 且以定一時之趨向也。" 遂罪之。 且命錄用故儒臣金宗直子孫, 追贈忠臣宗室朱溪君 深源官爵。 其彰善癉惡類此。 是年, 穆宗皇帝冊封皇太子, 遣翰林院檢討成憲、禮科給事中王璽頒降詔勅, 遣陪臣奉表陳賀。 嘗有講官進言曰: "今者朝無權奸, 國無邊警, 正此爲治之日也。" 王曰: "此說不然。 孟子當戰國之時, 勸諸侯以王道。 國家雖戰爭多事, 豈有不能爲治之時哉?" 己巳秋, 恭憲王三年喪畢, 納潘城府院君 朴應順女朴氏爲妃。 六年壬申, 翰林院編修韓世能、吏科給事中陳三謨頒今皇帝登極詔。 翌年, 王遣右議政朴淳等奉表陳賀。 時, 旱災切迫, 王避殿減膳禱雨禁中, 執圭立庭終日不懈, 遂致甘霖。 又因天變大臣乞免。 王曰: "推咎台衡以應災變? 吾誰欺? 欺天乎? 漢之人君以罷相塞天譴, 君子譏之。" 仍以手筆下求言之敎, 首尾百餘言, 無非引咎求助之意。 太學儒生上疏闢佛。 王手札答之曰: "在首善之地, 講論者道義也, 期待者程 朱也, 宜益動心忍性, 切磋琢磨。 敬義夾持表裏交養, 爲他日眞儒, 立於朝端, 上輔寡君, 下澤斯民, 使治隆而俗美, 則吾道之衰, 異端之盛, 不足慮也。 何必如太武誅沙門、毁佛寺之爲哉?" 又上疏請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等從祭文廟。 答曰: "難愼而不敢輕許者, 只緣其事重也, 自有議定之日。 且尊五臣莫如尊其學也。 諸生無非英才好學之彦, 宜懋時敏相與講磨孜孜, 共成大儒, 勉輔不辟, 是予所望。" 嘗敎儒臣曰: "予嘗讀文山 《指南錄》, 悲涼慷慨, 不忍終篇。 夫文山, 夷、齊後一人, 而已爲萬世人臣之表, 准我國鄭夢周節義文章, 可與文山儷美, 其文集竝速印出頒布。" 仍命相臣盧守愼作序以進。 儒臣李珥撰進《聖學輯要》。 王深加嘉獎, 卽命刊行。 時, 王有疾, 久而乃瘳。 禮曹累請陳賀。 王曰: "人之疾殆, 未必不由於失攝之致。 頃者不意得病, 危而復蘇, 貽憂大臣, 驚動群下, 方且祗懼悔罪之不暇, 豈可偃然受賀乎?" 乙亥, 恭憲王妃沈氏薨, 禮官據《五禮儀》卒哭後當用玄冠, 烏角帶。 持平閔純上疏以爲: "三年通喪, 無貴賤一也。 宜從朱子之議, 用白帽布裹角帶。" 廷議不一。 王乃斷然行之, 居喪一遵禮制。 終三年未嘗啓齒。 丁丑十一月, 榮靖王妃 朴氏薨, 禮曹以爲: "當從叔姪之服, 服齊衰期年。" 相臣朴淳等以爲: "王於榮靖王妃有祖孫之義, 以繼體之重, 當服三年。" 王從其議, 遂定爲三年喪, 治葬奉祭式禮莫愆。 先是奸臣李芑、尹元衡等於乙巳年間, 謀殺尹任、柳灌等, 至於錄勳, 群情久愈冤憤。 王以事在先朝不欲輕改, 及是竝命復官削勳。 中外咸快。 壬午八月, 皇太子誕生, 皇帝遣翰林院編修黃洪憲、工科給事中王敬民來頒詔書, 卽遣陪臣奉表陳賀。 丙戌十月, 聖節陪臣尹自新在會同館失火。 王驚駭不已, 使臣以下竝拿鞫定罪, 卽遣陪臣奉表陳謝。 皇帝以王忠愼可嘉降勅獎諭, 仍賜蟒衣綵段。 丁亥, 日本差使臣來款。 時, 平秀吉簒君自立。 王敎曰: "日本廢放其主, 乃簒弑之國。 不可接待其使, 當以大義開諭却之。" 命廷臣雜議, 皆以爲化外之國不可責以禮義。 王雖黽勉許之, 而其守義之嚴如此。 戊子, 謝恩使兪泓回自京師, 宗系改正, 竝惡名昭雪。 《會典》一冊禮部題准給送, 皇帝降勅褒諭。 先是, 國祖康獻王被本國叛賊尹彝、李初誣告于中朝, 以康獻王稱爲弑逆臣李仁任之後。 《皇明祖訓》及《大明會典》俱錄其誣語。 自王七代祖恭定王以至前王, 累世陳奏以辨其誣, 每奏輒蒙許改, 而所改之辭尙未昭示。 及王嗣服慨然發嘆曰: "國系受誣二百餘年, 何可偃然食息於覆載之間乎? 宜極擇使价血誠奏籲, 以期昭辨。" 乃於萬曆元年, 遣陪臣李後[浚] 白等, 三年乙亥, 遣陪臣洪聖民等, 六年戊寅, 遣陪臣金繼輝等, 十二年甲申, 遣陪臣黃廷彧等, 節續齎奏陳請。 每當封奏, 王必戒使臣曰: "不得準請, 則毋還也。" 其危辭懇語, 可以感動天地。 至是始得快覩昭雪。 王敎群臣曰: "賴諸卿之力, 今日得有此事, 皇恩罔極。 古之人君, 莫大於中興祖業、匡復舊物, 然此不過外物耳。 豈如今日得雪數百年至痛, 使彝倫攸敍東韓再造? 予可以有辭于祖先矣。" 遂親行告祭于宗廟社稷。 敎曰: "今日親奉寶典, 祗告太廟, 志願畢矣。 可大赦與臣民同其慶。 且新受景命已告廟社, 夫子乃彝倫之主, 予當親祭以告彝倫復敍之意。" 遂祭文廟。 且命兪泓等一行及承文院提調等賜宴于太平館以勞之。 又敎曰: "禮曰‘君賜衣服, 服以拜賜。’ 古人於君賜之物, 必服之者, 所以榮君恩也。 上年帝賜蟒衣置之臥榻之上, 夙夜拱北竊祝, 而惶恐不敢服。 今將祗見先王, 予欲服此以覲祖先。" 十九年辛卯, 平秀吉又遣玄蘇等, 致書本國。 聲言欲犯上國, 脅以假途, 言辭悖慢, 非臣子所忍聞。 王據以大義斥絶其使, 卽差陪臣金應南將, 日本兇謀情節移咨禮部。 先是, 倭賊以犯上國之言, 流布於琉球國, 且誣稱朝鮮亦已屈服。 琉球以其言聞于天朝。 兵部使遼東移咨本國, 問其是否, 金應南之行, 適及於此時。 天朝見本國咨文, 始知倭奴誣慢兇悖之狀。 皇帝降勅褒諭, 仍賜白金綵幣特優。 王奉勅感激, 大赦臣民, 卽差陪臣韓應寅等備將日本書契及事情另行陳奏。 方與一國臣民繕修城池, 整飭邊備, 以爲守禦之計。 二十年壬辰, 賊乃空國而來, 長驅蹂躪, 勢如破竹。 是其射天之計固非一日, 蓄謀藏兇乘時以發。 本國累世昇平, 民不知兵, 一朝猝遇狂寇, 翦焉不支, 南中州郡相繼摧陷。 王分遣將士扼守要衝, 嚴諭都民, 禁無出城。 下哀痛罪己之敎, 徵八路勤王之兵, 以示效死勿去之義。 及至李鎰之師, 潰於尙州, 而鳥嶺不守, 申砬之兵, 又敗於忠州之㺚川, 大賊乘之, 其鋒不可當。 王知大勢已去, 乃謂群臣曰: "此賊謀犯天朝, 實天下之賊也。 我當爲天朝死守封疆, 而惟其衆寡之勢, 萬不相敵。 旣不能力抗兇鋒遮截賊路, 則無寧歸近父母之邦, 上訴於聖天子乞王師, 以討此賊耳。" 遂定西遷之計。 仍移咨遼東都司, 申報各衙門, 使之轉奏。 于時王妃朴氏無子, 儲位未定。 四月二十七日, 群臣皆以爲: "宜建儲嗣以鎭危疑。" 王召大臣謂之曰: "後事之託, 固有所屬, 而特未遑耳。 光海君聰明仁孝, 好學不倦, 年旣長成, 可從民望, 定爲儲嗣。" 諸臣咸頓首稱賀曰: "宗社、臣民之福也。" 二十八日, 以光海君爲王世子。 時, 國事蒼黃未及專奏, 先令咨報遼東, 轉奏朝廷。 三十日, 賊報益急, 王乃出城西行, 分遣諸子號召四方。 世子從王以行。 及平壤失守, 王進駐義州, 乃令世子奉廟社主從。 以若干臣僚前往東南, 庶通湖、甸聲勢。 乃觸冒危險, 出平壤歷黃海東至於江原道 伊川縣, 所過傳檄召, 募諭以大義。 奔竄之民, 聞聲坌集, 皆思奮義爭, 起而殺賊。 八月, 王遣陪臣鄭崑壽等陳奏賊情于天朝, 請師討賊。 九月, 皇帝遣行人薛藩降勅慰諭曰: "爾國世守東藩, 素效恭順, 衣冠文物號稱樂土。 近聞倭奴猖獗, 大肆侵凌, 攻陷王城, 掠占平壤。 生民塗炭, 遠近騷然。 國王西避海濱, 奔越草莽。 念玆淪蕩, 朕心惻然。 昨傳告急聲息, 已勅邊臣發兵救援。 今特差行人司行人薛藩齎勅諭爾國王。 當念爾祖宗世傳基業, 何忍一朝輕棄? 亟宜雪恥除兇, 力圖匡復。 更當轉諭該國文武臣民, 各堅報主之心, 大奮復讎之義。 朕今專遣文武大臣二員統率遼陽各鎭精兵十萬, 往助討賊, 與該國兵馬前後夾攻務期勦滅凶殘, 俾無遺類。 朕受天命, 君主華夷, 方今萬國咸寧, 四溟安靜。 蠢玆小醜輒敢橫行。 復東南邊海諸鎭竝宣諭琉球、暹羅等, 國集兵數十萬, 同征日本直擣巢穴。 務令鯨鯢授首海波晏然, 爵賞、茂典, 朕何愛焉? 夫恢復先世土宇, 是爲大孝; 急救君父患難, 是爲至忠。 該國君臣素知禮義, 必能仰體朕心, 光復故物, 俾國王奏凱還都。 仍保宗廟社稷, 長守藩屛, 庶慰朕恤遠字小之意, 欽哉!" 王在義州率百官迎于江上, 失聲慟哭。 哀動左右, 群臣皆哭。 王謂勅使曰: "倭奴將犯上國, 小邦抗義斥絶, 罹此喪敗。 朝廷若見倭奴書契, 則可知此賊情狀矣。" 十一月, 皇帝特賜白金二萬兩。 王拜受感泣, 分賜扈從諸臣及陣上將士。 王謂近臣曰: "避亂之人, 槀死山谷, 極爲可哀。 其令各道守臣救活。" 十二月, 皇帝遣提督李如松等領遼、廣兵四萬出來。 王盡誠迎勞涕泣而言曰: "蒙皇上罔極之恩, 得見大人, 小邦一縷之命, 惟托於大人。" 提督見王忠懇爲之動色。 二十一年癸巳正月, 提督協率本國軍兵, 大破平壤之賊。 王謂群臣曰: "天兵今雖乘勝長驅, 倭奴剽悍, 秀吉兇狡。 若悉聚諸道之賊, 以爲抗拒之計, 則勝負未可知。 今以一捷動色相慶, 不亦可憂乎?" 是月, 自義州進向平壤, 將行登門樓曉諭州民, 盡減徭役, 且賜田租。 西向皇都行望闕禮而發。 到定州, 世子奉廟社主來迎。 王敎曰: "今日急務, 只在天兵糧餉。 予欲以匹馬策應於天兵之後, 而續來天將亦當留待, 其令世子前進安州一以策應、一以督運。" 仍敎曰: "平壤舊都之民, 陷賊而死者, 竝皆收瘞, 立標, 俾無暴露之骨。" 且命: "轉輸糧械, 扈衛之人切宜減數務令簡約, 供膳毋過三四器。" 四月, 聞官軍收復京城, 群臣請賀。 王曰: "此可慰而不可賀也。 但當率臣民行望闕禮, 以謝皇恩而已。" 仍令耆老、人民一時行禮, 與知感激皇恩之義。 六月, 王發永柔向京城。 居民等上疏請留。 王手札答之曰: "今予之行, 非欲棄爾等而去也。 但聞京城之民, 飢餓失所, 日望予至。 非予遄進, 不足以救之, 都民之望予, 何以異於爾等之欲留乎?" 仍饋酒以送。 時, 京外饑荒, 王下敎曰: "都民聞予近住, 其望之之心爲如何哉? 其發近邑之粟, 船運京江。 若不足則卽遣承旨, 發京倉以賑之。" 王見內人炙食牛肉, 敎曰: "非牛不能耕田, 人而殺牛, 不仁甚矣。 目今蕩敗之際, 雖嚴禁猶懼不足以孶息, 況屠殺無忌乎? 內人則已爲重究。 本邑守令不爲禁斷, 其令勘罪。" 嘗於行中失落所御弓子, 有人得之。 本官囚繫以聞, 王曰: "旣已失之, 則有得之者無怪。" 卽命放之。 聞者咸悅。 提督李如松聞王筆法精妙, 求之甚懇。 王辭以疾曰: "予於提督, 磨頂放踵有所不辭。 但形骸徒存, 而神魂已脫, 揮筆成字誠所難能。" 竟不許。 蓋其微意不欲以小技示於人也。 九月, 王還京城。 令近臣發倉實, 以賑飢民, 且減內廚日供之米, 特分給之。 都民之死於賊者, 設壇致祭, 收瘞。 亦遍下書通諭八道, 量減貢賦, 盡廢貢獻, 忠臣、孝子、烈女訪問褒錄。 仍敎禮曹曰: "喪亂之後, 都民之死者, 何限? 意其遺民過半縞素, 及入城之日, 見都民塡塞, 而未有服喪者。 此必亂後倫紀墮廢而然, 所關非輕。 其令各部糾檢。" 先於五月, 王遣陪臣表獻方物以謝, 迄蒙皇恩, 收復京城。 十一月, 皇帝遣行人司行人司憲降勅曰: "昨者王以大兵驅倭出境, 還歸舊國, 上表進方物來謝。 朕心深用嘉悅。 念玆復國重事, 不可照常報問。 今特遣使降諭兼賜大紅蟒衣二襲、彩段四表裏, 以示朕惓惓爲王遙慰之意。" 王卽遣陪臣上表、陳謝。 王還都之後, 首命收聚書籍, 藏于芸閣。 且欲親祭文廟, 禮官以爲: "聖殿燒盡, 亦無位板, 行祭無所。" 王敎曰: "予見則異於是。 夫神之在天下, 如水之在地中, 無所往不在。 鬼神無常享, 惟其致敬, 則神在是矣。 故古人或設壇而祭, 豈必待木主哉? 予意築壇於學宮之側, 設位於其上, 躬進以祀之, 一以慰先聖之靈, 一以重倫紀於干戈之中也。" 敎大臣曰: "爲政在於得人。 我國人才眇然, 其所收用者, 只在科擧。 科擧投牒之場, 安能盡人之才而得豪傑之士哉? 四方之廣, 豈無瓌才異行之士空老林下? 古人曰: ‘大臣以人事君。’ 昔晏嬰薦其僕臣, 謝安擧其兄子。 苟其人也, 不以微賤而嫌, 不以親戚而避。 可合擢用者, 其各薦擧。" 京畿之民, 以催糴爲苦, 呈訴於駕前。 王敎曰: "有司獨不見畿甸之田野耶? 蓬蒿滿目, 何忍催租?" 時, 王寓貞陵洞行宮, 一日敎該官曰: "不可長處閭閻, 卽舊宮城內略構草家, 欲爲移寓。 昔衛君茇舍于漕, 古亦有爲草屋而居之者。 此誠何時欲居大廈乎?" 天將有以營建王宮爲言。 王曰: "深讎未復, 何以家爲?" 天將歎服。 二十三年乙未, 王遣陪臣奏請冊封王世子。 皇帝降勅曰: "勅諭朝鮮國 光海君 諱 琿 。 先該經理官題稱: 「倭衆遁歸, 屬國已復。 光海君, 靑年英發, 臣民服從, 宜令其選帶忠義陪臣, 駐箚全、慶地方, 經理防禦。」 該部議覆請: 「給專勅以便責成。」 今特命爾, 總督全、慶軍務, 積儲錢糧, 號召壯勇, 一應設險、置器、練兵、守要俱許以便宜區處。 仍督率陪臣權慄盡心協理。 爾宜奮身苦志幹蠱圖存, 內起瘡痍, 外修戰備。 博擧萬全之策, 永爲善後之圖, 固我藩籬, 寧爾宗社。 俟有成功, 另議處, 毋或違越明命廢失良時。 致誤事機噬臍何及? 爾其承欽之。 故諭。’ 王卽遣陪臣奉表陳謝。 時, 臺官劾帥臣。 王手敎曰: "古者, 元帥之行也, 鑿門而出, 推轂而遣, 在軍稟命則曰: 「此在將軍。 寡人不敢從中制之。」 今則不然, 使庸人䝂子皆得以議其短, 終乃慢罵而强存之, 今之待元帥, 其異乎古之元帥也。’ 論者遂寢。 二十五年丁酉, 倭賊襲破閑山島張兵再搶, 先鋒已逼京都。 時提督麻貴提孤兵在京城, 軍情危懼。 王厲氣巡城, 堅守不動。 經理楊鎬亦自平壤疾馳來援。 王涕泣迎見, 誓不與賊俱生。 仍偕經理視師江上, 至以單騎渡江相度據守形勢, 人心賴以鎭定。 遂協助天兵, 大翦賊鋒于忠淸之境以却之。 及經理督三路大軍, 進箚於島山也, 王欲以匹馬從戎親冒矢石, 手帖懇請至于再三, 經理終不見許, 而止。 本國兵制, 略倣唐之府兵, 分休立防, 兵農相依, 雖便於守國, 而常短於禦敵。 王見戚繼光所撰《紀效新書》, 甚嘉其制, 別設訓鍊都監, 命大臣一員以領之。 擇武弁重臣爲大將, 抄擇丁壯勇銳, 分屬部伍, 儲養訓鍊, 頗有條理。 時, 南邊專倚舟師。 王以手札敎帥臣曰: "我方致力舟師, 集師於釜山。 至於陸地之據險、他路之要衝, 皆不暇及此。 蓋有見乎前日水戰之捷也。 兵無常勢, 變出意外, 豈可引前事而爲例乎? 當初兇賊入寇釜山, 直擣北上, 舟師橫海而不憚, 湖南議後而不顧, 果何前例? 我國形勢沿海千餘里, 此眞所謂散地而三面受敵之國也。 賊之兇狡特甚, 若諜知我師之屯聚於釜山, 自五島因風掛帆, 一瞬千里直向湖南, 繞出我師之後, 則是我師爲賊所綴, 自湖南、湖西以至海西、關西, 一帶沿海無處不到, 誰得以禦之? 徒聚舟師於釜山, 不置重兵於湖南, 不守睦 陸地之險阨, 恐非計也。" 嘗語講官曰: "存心有要。 日用之間, 千緖萬端交接於前, 廓然大公順而應之, 不以外物之來動其中。 然後欲靜而靜, 欲動而動矣。 不然而邪思妄慮, 有如雲興, 則欲以消遣而不可得, 蓋心如止水難矣。" 時有物怪, 天將求見我國卜者, 以占吉凶。 王曰: "天之賦物不得其常, 是謂之怪, 怪者失其常也。 常者理而已矣, 人事之失其理者, 皆足以應之而受其凶。 象占昭昭豈待占乎? 彼一箇瞽師安能知之?" 二十七年, 倭賊盡退。 王遣陪臣奉表、陳謝。 皇帝降勅慰諭, 仍賜綵幣、表裏。 是年中朝營造乾淸、坤寧宮, 王遣陪臣進獻助工方物。 皇帝降勅褒諭, 仍賜白、金蟒衣。 庭試策士。 敎考官曰: "暫見試製, 有用莊、老語者。 自三墳、八索以來可法之文不爲不多, 安用莊生詖淫之說? 今宜禁斷。" 二十八年, 王妃朴氏薨。 兵火之時, 王之受封誥命、冕服, 竝皆淪失不保。 王遣陪臣奏請照例補賜。 翌年正月, 陪臣回自京師, 皇帝降勅, 補賜誥命、冕服。 制曰: "朕惟王者持危擧廢, 莫厚于仁; 立國安仁 民, 莫大乎禮。 禮者物恥足以振之, 國恥足以興之。 雖文章、物采, 無敢廢也。 爾朝鮮爲國, 素敦禮敎, 懋篤忠敬, 稱我優嘉。 自頃以來越在草莽, 典章、文物幾于蕩然。 朕爲爾洗滌兇妖, 恢還土宇, 固我師武臣力, 亦不可謂非爾秉禮之效。 否則軍旅安經, 政令安行? 順物不守, 事乃大逆, 尙有今玆之捷乎? 爾以誥命、冕服奔逬莫守, 遣使來告, 請得賜如初。 夫事上莅下, 須此修容, 復漢威儀, 朕所矜許。 是用勅尙方製給, 仍錫之誥, 爾尙敬之哉! 朕不以禮假人, 爾毋以菲廢禮。 藍縷啓楚, 大布興衛, 薪膽覇越。 皆王今日事懋哉! 毋忝命。’ 王卽遣陪臣奉表、陳謝。 該官以王之欽賜冕服長短不適體, 請改造。 王曰: "吾皇上之賜, 當服之無斁。 何敢改也? 予於壬辰蒼黃西遷之時, 宮中之物悉棄之, 惟皇上所賜蟒龍衣手索提出, 擬於死時必着此衣而終也。 其衣至今猶在時, 或披見不覺涕下也。" 三月, 皇帝冊立皇太子, 欽差翰林院侍講顧天峻、行人司行人崔廷健降勅, 竝賜王及妃綵幣文錦。 王遣陪臣進表、陳賀, 又遣陪臣進表、謝恩。 敎禮曹曰: "前代諸王墳墓及忠賢之墓, 竝令修治封植以敦崇德象賢之義。" 是年, 王冊領敦寧府事金悌男女金氏爲繼妃, 遣陪臣奏請繼妃誥命、冕服。 三十一年, 陪臣回自京師齎捧到皇帝勅諭曰: "得奏, 王已娶金悌男女爲繼室, 乞賜誥命、冠服, 特允所請。 玆封爾金氏爲朝鮮國王繼妃, 竝賜誥命、冠服、彩幣等件。 就付差來陪臣齎, 回至可收領。 王宜祗承恩錫, 永效忠貞, 以副朕寵賚之意。 欽哉!" 三十二年, 遣陪臣押解漂海人民五十七名, 具奏上聞。 皇帝皆降勅獎勵, 竝賜白金、文錦。 三十四年二月, 皇孫誕生, 皇帝遣翰林院修撰朱之藩、禮科左給事中梁有年降勅若詔, 竝賜王及妃綵幣、文錦。 王卽遣陪臣上表、陳賀, 又差陪臣奉表、稱謝。 三十五年某月, 遣陪臣押解漂海人民一十九名具奏上聞。 皇帝卽降勅褒諭, 仍賜白金、文錦、綵段。 王自禍難以來, 憂勞成疾, 賊退之後, 亟欲傳位。 頤養十餘年間, 懇敎非一。 雖以世子泣辭、諸臣不釋故黽勉聽政, 而內禪之計, 終不弛于懷。 自丁未春, 王疾彌留, 以至于冬, 證益危苦。 世子晝夜侍寢, 衣不解帶, 沐浴焚香, 虔誠祝天。 王慮其生疾, 累諭止之, 常令留宿寢側。 乃於戊申二月初一日, 薨於貞陵洞行宮之正寢。 春秋五十七, 在位四十二年。 臨終手書遺敎, 執世子手而授之, 仍命權署國事。 王聰明剛毅、恭儉慈仁、誠孝出天、英智過人、崇儒重道、好學嗜義。 事大之誠, 出於至性, 迎詔拜表之儀, 正至聖節望闕之禮, 率皆虔誠精白, 肅敬將事。 雖顚沛流離疾病困劇之際, 未嘗或廢, 而亦未嘗少懈。 每封進方物, 必盥濯齋潔, 手自點視, 丁寧戒飭, 極敬極愼。 或因物力未敷有未盡情, 則比使臣之回一刻不能忘, 宮中得一珍味, 則必置之案上, 西向拜祝曰: "欲獻吾皇, 何可得也?" 瞻戴之誠, 不啻如孝子之慕父母。 平居及對群臣語, 一則曰‘皇恩罔極’, 二則曰‘皇恩罔極’. 一念對越如在左右。 兵興之後, 天朝文武將官之前後出來者, 蓋不知其幾, 上自元戎下至軍丁, 無不致敬盡誠, 各盡其接待之禮。 窮閻僻巷, 出入不憚, 風雨寒暑, 罔或停廢。 一日接遇或至三四處, 侍從之臣皆若不耐, 而未見有一毫怠忽之色。 今年正月, 陪臣之齎詔而回也, 王疾已亟, 猶以不得郊迎爲痛。 勅書至宮中, 强起盥手, 扶人拜跪, 躬自奉安, 西向涕泣。 病遂加劇, 蓋出至情, 非强爲也。 事榮靖王妃 朴氏及恭憲王妃 沈氏如事親母, 承顔養志, 曲盡誠意, 朝夕問安之禮, 十餘年如一日。 若有疾病, 則躬視藥餌, 盡誠祈禱, 及其喪也, 哀毁過傷, 一遵禮制。 友愛天至, 敬待二兄一娣。 終身不少衰, 撫恤諸孤如己出。 性素簡約, 不喜紛華, 聲色·游畋之娛、逸豫·侈靡之樂, 無一掛于心。 食不重味, 衣常澣濯, 妃嬪宮人亦不敢服侈靡, 以見勤恤民隱。 冬寒暑雨, 每軫其咨之念, 節用惜費, 務本重農, 宮中粒食不令遺地曰: "此皆農夫粒粒辛苦之物。 安坐而食, 亦已足矣, 況敢暴殄乎?" 尙風化而重節義, 礪廉恥而愼賞罰, 愛惜民命, 未嘗妄殺一人, 雖昆蟲微物, 亦戒其殺傷。 若聞人之有病, 則雖閭閻下賤, 心欲全活賜以藥物, 如恐不及, 每當決獄, 必哀矜惻怛以求生道。 謹守成憲, 苟非大謬, 則不喜紛更, 禮遇臺諫, 雖有過激, 而常示優容。 卽位以來, 朝臣雖或有黜罰, 輒許自新, 嚴而克寬, 明不至察。 御難處疑, 果斷英發, 則爲曠世豪傑之主; 燕居雍容, 沈潛刻厲, 則似治經篤實之儒。 至於籌邊料敵決敗算成, 出人意表效於屈指。 雅向儒術, 孜孜不倦, 日接筵臣, 講讀經傳, 揚確古今, 出入淵微, 所論高出先儒箋註之外, 群臣莫敢贊一辭。 一室焚香, 左右圖書, 雖於幽獨得肆之地, 不設惰慢之容, 凝神端坐, 手不釋卷。 以至諸子百家、醫藥、雜流之書, 無不貫穿瀜洽, 而斥絶異端, 排擯詭論, 嚴諭諸生禁用莊、老、佛語, 蓋於異敎之書, 燭破其源頭, 知其彌近理, 而大亂眞故也。 晩而好《易》, 雖在搶攘, 不輟講讀。 常語筵臣曰: "讀《繫辭傳》, 不覺手舞足蹈也。" 發號施敎, 細書成文, 初不經意而輒成典訓, 觀書十行俱下, 一覽皆記。 雖一日萬機, 庶事叢冗, 而裁決無留, 刃迎縷解。 至於刑獄法律之煩、錢穀文簿之瑣, 一言判剖不爽毫忽, 群下震懾, 率職惟謹。 嗚呼! 王以不世出之資, 抱大有爲之志, 高視千古銳意至治, 期欲挽回世道, 以臻隆古之盛。 不幸遇賊, 守義罹禍, 王自以齎志莫伸, 終身慷慨。 惟其格天之至誠, 可以質之於神明, 有辭於天下, 故用能蒙皇上不世之恩, 雪先系之積誣, 而垂光國之烈, 却滔天之强寇, 而成再造之績功, 在宗祊業煥中興。 嗚呼韙哉! 嗚呼痛哉! 戶曹判書李廷龜製進。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273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註 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