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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42권, 《선조실록》 수정에 참가한 채유후의 후기(後記)

《선조실록》 수정에 참가한 채유후의 후기(後記)

채유후(蔡𥙿後) 후기(後記)

삼가 살피건대 역대에서 역사를 수찬하는 자는 모두 당시의 기거주(起居注)를 근거하고 간혹 여러 사서(史書)의 기록을 간추려 채록하며 그가 직접 보고 기록한 것을 덧붙였는데도 오히려 어긋나고 잘못된 것이 많았기 때문에 《강목(綱目)》에도 《고증(考證)》·《집람(集覽)》·《집람정오(集覽正誤)》의 설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중에 사사로이 좋아하고 미워하거나, 공변되지 못하게 시비한 것이거나, 심지어 굽은 것을 곧다고 하거나, 정(正)을 사(邪)라고 하거나, 제현(諸賢)을 무함하거나 일세를 더럽게 먹칠한 부분에 대해서는 바로잡지 않을 수 없었으니, 송(宋)나라 범충(范冲)의 사서(史書)가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우리 《선조실록(宣朝實錄)》의 찬수는 오로지 적신(賊臣)의 손에서 나와 사관의 문자를 몰래 삭제하고 근거없는 설화를 만들어내어 거짓으로 헐뜯는 등, 멋대로 비방하기에 온 힘을 쏟아 드디어는 제신(諸臣)으로부터 조정의 일에까지 미쳤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계해년 반정(反正)001) 에 미쳐 연신(筵臣)과 상신(相臣)이 번갈아가며 개수(改修)하기를 청하였으나 국가에 일이 많아 이 일을 수행할 여가가 없었으므로 식자(識者)들이 모두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던 중 계미년에 이르러 대제학 이식(李植)이 상소하여 속히 수정해서 별도로 한 질(帙)을 완성한 뒤 사고(史庫)에 부장(附藏)할 것을 청하니, 선왕(先王)002) 께서 마침내 영의정 김유(金瑬)에게 그 일을 관장토록 명하였는데, 실제로는 이식이 주관하였다. 그리하여 사관의 시정기(時政記)와 주서(注書)의 일기(日記)를 모두 수합하고 그중 유실되거나 누락된 것은 가정에 보관되어 있는 통보(通報) 및 야사 잡기와 여러 사람의 장지(狀誌)에서 찾아내어 보충하고 재정리함으로써 《고증》·《집람》·《집람정오》를 편찬한 뜻에 부응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을 마치기도 전에 이식이 먼저 죽으니 이 일도 드디어 오랫동안 중단되고 말았다.

금상께서 즉위하신 지 9년 만인 정유년에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상에게 그 일을 마칠 것을 청하니, 드디어 경덕궁(慶德宮)의 승정원에 개국(開局)하고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에게 이를 총관케 하는 한편 윤순지(尹順之)·이일상(李一相) 및 신(臣) 유후(𥙿後) 등에게 나누어 명하였는데, 한결같이 이식이 지은 범례에 의거하여 곧 이를 완성하였다. 대개 개수한 뜻은 모두 이식의 소에 드러나 있으므로 다음에 아울러 수록하여 후고(後考)에 대비한다. 돌아보건대 우리 선묘(宣廟)는 42년 동안 재위하셨는데 이식이 수정한 것은 정묘년003) 에서부터 병신년까지 30년간이고, 이번에 속찬(續纂)한 것은 정유년에서부터 무신년까지 12년간이다.

우리 동방의 문헌이 많았지만 제가(諸家)의 기록이 대부분 전후의 변란에 일실(佚失)되었다. 그러나 정유년 이전은 그래도 보존된 것이 있었으므로 이식이 편수한 것은 꽤나 상세히 갖추어진 것 같다. 하지만 이 이하는 연대가 조금 떨어지고 서적 또한 적은데, 무사(誣史) 중 특히 근거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유기(遺記) 및 이목(耳目)이 미치는 바의 사실만을 가지고 이를 증변(證辨)하면서 끝내는 ‘《실록》을 살펴보건대’로 예(例)를 삼았다. 그 나머지 제신들이 무고되고 모욕을 당한 것에 대해서는 일일이 거론하여 말끔히 씻어내지는 못하였으나, 그 사람의 처음과 끝을 살피면 그의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니, 보는 사람이 자세히 살필 일이다.


  • 【태백산사고본】 8책 42권 2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705면
  • 【분류】
    정론(政論) / 역사-편사(編史) / 역사-사학(史學)

○臣謹按, 歷代修史者, 皆據當時起居注, 間採諸乘所載, 參以所覩記, 而尙多乖舛訛謬, 故《綱目》亦有證覽正誤之說。 若其秪徇私好惡, 滅了公是非, 甚至持曲作直, 指正爲邪, 構陷諸賢, 汚衊一世者, 則不得無釐正之擧, 卽范冲之史是已。 況我宣廟實錄之撰修, 耑出於賊臣之手, 潛削史氏文字, 做作無根說話, 誣毁而肆詆之, 不遺餘力, 遂自諸臣而及於朝政, 豈不痛哉, 豈不痛哉? 及癸亥反正, 筵臣、相臣交請改修, 國家多故, 未遑此事, 識者皆以爲恨。 至癸未, 大提學李植上疏, 請速加修正, 別成一帙, 附藏史庫, 先王遂命領議政金瑬領其事, 而李植實主之。 史官時政記與注書日記, 竝入裒聚, 其有放失闕漏者, 則搜取家藏通報及野史雜記、諸人狀誌, 塡補裁刪, 要附於證覽正誤之義。 未訖功而先卒, 事亦遂閣者久矣。 今上卽位之九年丁酉, 右議政沈之源請於上, 以畢其役, 遂開局于慶德宮之承政院, 以領敦寧府事金堉領之, 分命尹順之李一相及臣𥙿後等, 一依李植所著凡例, 踵而成之。 蓋以改修之意, 具著於李植之疏, 竝錄于左, 以備後考。 顧惟我宣廟在位四十二年, 李植所修正, 自丁卯止丙申三十年, 而今玆續纂, 自丁酉止戊申十二年也。 吾東方文獻, 非不盛矣, 而諸家記錄, 多佚於前後變亂。 然丁酉以前, 則尙有存者, 之所修, 頗似詳備。 此以下, 則年代稍遠, 書籍亦尠, 秪就誣史中尤無據者, 以若干遺記及耳目所逮之實, 而證辨之, 遂以按實錄爲例。 其餘諸臣之被誣受垢者, 則不能盡擧而湔洗之, 然察其人之始終, 而可定其是非, 觀者詳之。


  • 【태백산사고본】 8책 42권 2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705면
  • 【분류】
    정론(政論) / 역사-편사(編史)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