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에 대한 영의정 유성룡의 상소문
영의정 유성룡이 차자를 올려 시무(時務)에 대해 진술하였다. 그 대략에,
"‘깊은 근심 속에서 성명(聖明)한 지혜가 열리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국가가 흥기된다.’ 하였습니다. 대개 평화로운 시대에는 인심이 무사안일을 즐기고 세속의 선비들이 천박한 식견에 빠지며 또 편협한 의논이 명실을 어지럽히고 대체를 파괴하여 비록 선견지명이 있어도 늘 신용을 받지 못하고 시대를 구제할 계책이 있어도 항상 시행되지 못하다가, 결국 패멸(敗滅)당하고 난 뒤에야 인심이 두렵게 여겨 지난 일의 실수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앞날을 위한 계책을 잘 도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천명(天命)이 다시 이어지고 국맥(國脈)이 다시 견고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오래도록 지속된 나라의 경우에도 혹 중간에 쇠퇴해졌다가 다시 떨쳐서 천 년, 백 년 동안 안정을 유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깊은 근심과 많은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야말로 어찌 나라를 일으키고 성명을 계발하는 밑받침이 되기에 부족하다 하겠습니까. 이는 곧 전하께서 얼마나 뜻을 더욱 가다듬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아, 요즘 국가가 당하는 화란은 우리 나라가 생긴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이미 있지 않았던 화란을 당하였고 보면, 이를 구제하는 것도 평범하게 조치하여 소기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으리라고 하는 점은 분명합니다. 비유하건대 마치 고황(膏肓)에 걸린 병은 입에 맞는 부드럽고 순한 약으로는 다스릴 수 없고 반드시 대약(大藥)이나 신단(神丹)을 써서 장(腸)과 위(胃)에 쌓인 고질을 씻어버리고 원기를 길러 낸 뒤에야 비로소 회생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형편이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국가가 당초에 왜적이 물러가고 서울이 수복되었을 때에 자강책(自强策)을 급히 세워 곡식을 저장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며 전쟁의 피해를 수습하는 등 매일 매일 겨를없이 계획을 세우고 조치했더라면 이미 1년이 지난 지금쯤에는 필시 조금이나마 두서가 잡혀 이를 바탕으로 더욱 분발해서 중흥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외에는 다른 계책이 없는데, 중외의 신하들은 장구한 생각을 깊이 가지고 짧은 시간도 아껴쓰면서 일을 도모해 보려고는 하지 않고 모두가 게으름을 부리고 시일만 낭비한 채 왜적 토벌은 전적으로 명나라 군사에게만 맡겨두고는 자기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전연 강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군정(軍政)이 아직 개선되지 못하고 군량 대책도 수립되지 못했으며 민심은 수습되지 않은 채 온갖 일들이 어지럽게 얽혀 전도되고 있는 상황이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것과 같은데, 어렵게 살아남은 백성들에게는 손톱만큼도 다시 힘이 남아 있지 않으니, 진실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오늘날의 급선무 역시 많은 말이 필요없습니다. 오직 백성을 편하게 하는 정사를 급히 실시하여, 사방 백성들로 하여금 그 소문을 듣고 재생할 희망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또 임기응변의 조치를 취해 군량을 서울에 모아 놓고 그 식량으로 날래고 용감한 군사들을 모집하여 주야로 훈련시킴으로써 모두 절제 있는 군사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외국의 침략도 방어할 수 있고 국내의 변란도 소멸시킬 수 있어 국가의 형세가 반석처럼 안정될 것입니다.
지난날 조정에서는 태평한 시대의 타성에 젖어 군정(軍政)을 닦지는 않고 민병(民兵) 수천 명만으로 서울에 상번(上番)토록 하였으나 모두 시골 농사꾼들로서 전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해조(該曹)에서는 면제해 주는 조건으로 마구 거둬들이는 일만 일삼아 포물(布物)을 많이 징수해 사용(私用)으로 삼는 반면 실제로 군사를 조련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변을 당하자 마치 고삐 풀린 말처럼 오합지졸들이 제멋대로 사방에 흩어져 다시 모아들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변고를 당한 뒤에도 오히려 지난날의 규례를 징계하여 고치지 않고 그 전철을 그대로 밟으면서 구태의연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습니다. 또 사방이 모두 이미 결딴이 나버려서 상번(上番)할 의무가 있는 제색군(諸色軍)이 백에 한 사람도 오지 않아 서울이 텅텅 비고, 다만 대신 번을 서는 굶주린 군사 2백∼3백 명 정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늘을 뒤덮을 듯한 기세를 가진 강적을 꺾고 이미 쇠퇴해진 나라를 진흥시키려 한다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요즈음 훈련 도감의 군사에 소속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 응모자도 점차 늘어나고 있는데, 먹일 식량이 없어 제한하는 바람에 많이 모을 수가 없으니 결과적으로 아무런 보탬이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대개 식량이 부족하면 사람을 모아들일 수 없고 사람을 모아들이지 못하면 군사도 훈련시킬 수 없는 것이니, 이는 필연의 형세입니다. 지금 국고가 텅텅 비어 경비로 쓸 것 외에는 다시 남은 저축이 없으니, 아무리 군사를 훈련시켜 적을 방어하려 해도 계책이 나올 데가 없습니다.
이에 신이 깊이 생각해 보고 온갖 방도를 헤아린 끝에 겨우 한 계책을 얻었습니다. 평상시 상번하는 기병(騎兵)의 수는 도합 2만 3천 7백여 명인데 각각 3명씩의 보인(保人)이 있으니 모두 9만여 명이 되며, 상번하는 보병(步兵)의 수는 1만 6천 2백여 명인데 각각 보인 1명씩이 있으니 모두 3만 2천여 명이 됩니다. 이들을 합치면 12만 2천 명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평상시에 상번하는 기병과 보병 2색(色)의 군호(軍戶)와 봉족(奉足)의 숫자가 됩니다. 그리고 상번하는 갑사(甲士)의 수는 4천 6백 40명인데 각각 2명씩의 보인이 있으니 1만 3천 9백 20명이고, 상번하는 정로위의 수는 2천 1백 61명인데 각각 봉족 2명씩이 있으니 합치면 6천 4백여 명이며, 상번하는 별시위의 수는 1천 1백 19명인데, 역시 봉족 2명씩이 있으니 도합 3천 3백여 명입니다. 여기에는 타색(他色)의 군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밖에도 각사(各司)의 노비들이 있습니다. 신이 지난 기묘년 겨울에 형방 승지로 있으면서 그 원수(元數)를 살펴보니 모두 3만 7천여 명이었는데 그 뒤에 공천(公賤)의 역(役)이 힘들지 않으므로 점차 증가되어 그 수가 3만 7천 명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밖에 또 각사의 제원(諸員)이 도합 2천 1백 77호(戶)인데 각각 봉족 2명씩이 있고, 각사의 조례(皁隷)가 도합 3천 6백 28명인데 각각 봉족 1명씩이 있으며, 또 장악원에는 악공(樂工) 7백 명과 악생(樂生) 3백 명이 있는데 각각 봉족 2명씩이 있으니 그 수를 모두 합치면 또한 3천명이 됩니다. 이것이 곧 평상시 각색 명수(名數)의 정액(定額)입니다. 그 사이에 유망(流亡)한 자에 대해 보충하지 못한 곳이 있기는 하나 대략은 이와 같습니다.
지금은 병란을 겪은 후이므로 평상시의 정액으로 계획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남아 있는 자가 얼마 안 될 것으로 생각되나, 전라도·충청도 및 경상좌·우도의 조금이나마 완전한 군읍(郡邑)과 강원도·황해도·경기도 등처에는 남아서 역(役)을 하는 자가 거의 10만 명에 이르거나 그 이상일 것입니다. 만약 이들의 상번(上番)을 면제해 주고 1인당 쌀 한 섬씩 받아들여 군량을 삼게 한다면 그 수량이 장차 10만여 석에 이를 것인데, 쌀·좁쌀·보리·콩·팥을 막론하고 그 수량을 채워 납부하게 한다면 매우 가벼워져서 인심이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서울에 사방의 날래고 용감한 군사를 모집해야 합니다. 이 일 역시 사족(士族)·서얼(庶孽), 공천(公賤), 사천(私賤), 유역(有役)·무역(無役)을 막론하고 다만 용맹스러운 힘이 있는 자 1만 명을 얻은 뒤 5영(營)에 분산시키고 영마다 2천 명씩 법에 의해 조련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서울에 항상 1만 명의 정병(精兵)이 있게 되어 근본이 튼튼해질 것이니, 우리의 막강한 힘으로 가볍게 적을 제어할 수 있는 형세를 얻게 될 것입니다.
대개 1만 명의 병력에 소요되는 1년의 양식은 4만 4천 석인데, 가령 다시 수천여 석을 방출해서 날마다 1인당 3승(升)씩 주어 가족까지 보호하게 하더라도 부족하게 될 걱정은 없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수만 석은 특별히 군자(軍資)로 저축하여 군사를 먹일 수요로 하고, 호조의 경비와는 무관하게 한다면 3년 뒤에는 저축량이 몇 배나 되어 군량으로 이루 다 쓸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입니다. 진실로 식량이 넉넉하고 군사가 강하다면, 무엇을 한들 이루지 못할 것이며 어떤 적인들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1만 명의 군사에 대해서도 두 번(番)으로 나누어 영마다 5천 명만 상주하게 하고 나머지 5천 병력은 경기 지방의 비옥하고 한가히 비어 있는 땅에 옮겨 농기구·농우(農牛)·종자 등을 대폭 구비해 준 다음, 마치 조조(曹操)가 허하(許下)에 둔전하던 법004) 처럼 나누어 둔전하며 농사를 짓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절반은 자기가 먹고 절반은 관에서 징수한다면 식량을 마련하는 길이 날로 넓어지고 군대에 응모하는 자들이 서로 잇따라 구름처럼 모여들 것입니다.
대개 삼대(三代)005) 에는 평상시의 농부가 유사시엔 곧 군사로 전환되었는데, 당(唐)나라 초기의 부병제(府兵制)006) 역시 옛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선유(先儒)들이 훌륭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변고가 날로 생겨나고 화란이 번다하게 일어나자 병(兵)과 농(農)을 구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당(唐)나라 중엽에서부터 송(宋)·원(元)·명(明)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를 변경하지 못한 채 병은 농을 보호하고 농은 병을 기르게 하였으니, 이는 그 형세가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의 상번하는 제도 역시 당나라 부병제의 유의(遺意)를 본받아 오늘날에 이른 것인데, 모두 전진(戰陣)에는 하나도 쓸모없는 농사꾼들이라서 형편에 따라 변통하여 적당하게 쓸 수 밖에 없으니 이 또한 그 이치라 하겠습니다.
외방(外方)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지난번에 진달한 진관설(鎭管說)007) 에서 이미 대강(大綱)을 열거하였습니다. 대강이 일단 수립이 되면 절목(節目)은 자연히 따라오게 마련입니다만, 다시 대략만 말씀드릴까 합니다. 병법(兵法)으로 보면 가장 먼저 부대를 나누어 관할하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런 뒤에야 조리가 정연하게 서게 되고 호령이 두루 통해 조발(調發)하는 데에 어긋남이 없게 되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장관(將官)들을 보면 대소 고하를 막론하고 다 통솔하는 군사가 있는데, 평상시에 마음을 다해 훈련시켜 두었다가 일단 위급한 일이 있게 되면 이들을 징용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각처의 장수들이 그들의 군사를 합쳐 인솔하여 모두 한곳으로 집결시킨 뒤에 전장에 나아가는데 그 군졸들 역시 자기 장수에 오래도록 예속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면서도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 감히 구차한 생각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끓는 물이나 뜨거운 불에 뛰어들게 한다 하더라도 어찌 무너져 흩어질 염려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나라의 경우는 그렇지 못해서 군졸이 장수에게 예속되지 않고 장수는 병졸들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멀리 떨어져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하다가 일단 위급한 상태가 발생하면 농촌이나 민가에서 군사들을 모아들이고 있는데, 그저 어리둥절해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부유한 사람은 재물을 바쳐 빠지려 하고 장정들은 놀라 흩어져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가 하면, 이른바 색리(色吏)나 도훈도(都訓導) 등은 이러한 시기를 틈타 작폐를 하면서 공갈 협박하고 침해하는 등 못할 짓이 없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조금이라도 전투에 참여할 만한 사람들은 다 빠져 나가버리고 자력으로 모면하지 못한 가난한 백성들만 구차하게 그 수를 채우게 되는데, 이들마저 미처 지경을 지나기도 전에 도망해버려 전쟁터에 이를 무렵이면 다 없어지고 마니 이것이 오늘날의 실정입니다.
따라서 모든 도내에 진관법(鎭管法)을 실시하여 크고 작은 군현(郡縣)의 형세가 서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게 해야 합니다. 또 한 읍 내에서 특별히 그 지방 품관(品官) 가운데 생각이 있고 스스로 자기 몸을 아껴 감히 범법하지 않을 자를 선발하여 그로 하여금 각면의 군사 뽑는 일을 주관하게 하고, 건장한 자와 허약한 자를 분류해 뽑아 상·중·하 3등으로 가려낸 뒤 수령이 친히 점열(點閱)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뽑힌 사람들로 하여금 빠진 자를 고발하게 하되 몇 명 이상이 되면 군사 뽑은 자를 효시(梟示)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상시에는 법을 설치하여 훈련시키다가 유사시에는 곧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터로 인솔해 가게 하되, 병졸들이 도망하고 흩어져서 정예롭지 못한 폐단이 있을 때에는 모두 그 당사자가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군정(軍政)이 조금이나마 맑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상등 군졸은 차례대로 전쟁에 나가게 하고 중등과 하등 백성들에게 군량을 공급하도록 하면 일이 모두 사전에 정해져서 사태에 직면하여 소동하는 폐단이 없게 되고 이서(吏胥)들이 농간을 부리는 폐단도 없어져 실이나 노끈이 연결되듯 질서가 정연하여 다시는 지난날처럼 두서가 없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난번 계사(啓辭)에서 대략 그 내용을 드러내어 이미 사방에 알렸었는데, 그 후에 듣건대 아직도 군사를 뽑는 일에 조리가 없어서 온갖 민폐만 일으킬 뿐 이른바 쓸 만한 병졸은 하나도 전쟁에 나간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폐습의 제거가 이처럼 어려우니, 탄식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저 있는 토지를 활용해서 재물을 생산한다면 이루 다 재물을 쓸 수 없을 것이고 넉넉한 재물을 이용하여 사람을 모집한다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모여들 것이며, 백성이 하고 싶어하는 바를 따라 공을 도모한다면 이뤄지지 않는 공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지난날에 이른바 ‘일은 그 질서를 얻어야 조리가 있어 문란하지 않게 되고 어떤 대상이든 그 근본을 다스려야 힘이 적게 들고 공이 많아진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종류를 두고 한 말입니다.
신은 또 듣건대 난리를 평정하여 정상을 되찾게 하는 방법이 충분한 식량과 군사에 있다고는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민심을 얻는 근본은 달리 구할 수 없고 다만 요역(徭役)과 부렴(賦斂)을 가볍게 하며 더불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 주는 데 있을 따름입니다.
국가에서 받아들이는 전세(田稅)는 십일세(什一稅)008) 보다 가벼워서 백성들이 무겁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전세 이외의 공물 진상이나 각 절기 때마다 바치는 방물(方物) 등으로 인해 침해당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당초 공물을 마련할 때에 전결(田結)의 수로써 균일하게 배정하지 않고 크고 작은 고을마다 많고 적음이 월등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1결(結)당 공물값으로 혹 쌀 1, 2두(斗)를 내는 경우도 있고 혹은 쌀 7, 8두를 내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 10두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에게 불공평하게 부과되어 있는데 게다가 도로를 왕래하는 비용까지 가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관청에 봉납(捧納)할 때는 또 간사한 아전들이 조종하고 농간을 부려 백 배나 비용이 더 들게 되는데, 공가(公家)로 들어가는 것은 겨우 10분의 2, 3에 불과할 뿐, 나머지는 모두 사문(私門)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진상에 따른 폐단은 더욱 심하게 백성을 괴롭히는 점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당초에 법을 마련할 때는 반드시 이와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시한 지 백 년이 지나는 동안에 속임수가 만연하여 온갖 폐단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곧바로 변통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다시 소생할 가망이 없고 나라의 저축도 풍부히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신은 늘 생각건대 공물을 처치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도내 공물의 원수(元數)가 얼마인지 총 계산하고 또 도내 전결의 수를 계산하여 자세히 참작해서 가지런하게 한 다음 많은 데는 감하고 적은 데는 더 보태 크고 작은 고을을 막론하고 모두 한가지로 마련해야 되리라 여겨집니다. 이를테면 갑읍(甲邑)에서 1결당 1두를 낸다면 을읍·병읍에서도 1두를 내고, 2두를 낸다면 도내의 고을에서 모두 2두를 내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백성의 힘도 균등해지고 내는 것도 한결같아질 것입니다.
방물 값 또한 이에 의거해서 고루 배정하되 쌀이든 콩이든 그 1도에서 1년에 소출되는 방물의 수를 전결에 따라 고르게 납입토록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결마다 내는 것이 그저 몇 되 몇 홉 정도에 불과하여 백성들은 방물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진상할 때에도 이런 식으로 모두 쌀이나 콩으로 값을 내게 해야 합니다.
이상 여러 조건으로 징수한 것들은, 전라도는 군산(群山)의 법성창(法聖倉)에, 충청도는 아산(牙山)과 가흥창(可興倉)에, 강원도는 흥원창(興元倉)에, 황해도는 금곡(金谷)의 조읍창(助邑倉)에 들이도록 하고, 경상도는 본도(本道)가 소복(蘇復)될 동안엔 본도에 납입하여 군량으로 하고, 함경도·평안도는 본도에 저장하고, 5개 도의 쌀과 콩은 모두 경창(京倉)으로 수송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 관청에 공물과 방물을 진상할 때 물건을 따져서 값을 정하는 것은 마치 제용감(濟用監)에서 모시·베·가목(價木)을 진헌하던 전례와 같이 해서 유사(有司)로 하여금 사서 쓰게 하고, 만약 군자(軍資)가 부족하거나 국가에서 별도로 조도(調度)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공물과 방물을 진상하는 수를 헤아려 재감(裁減)해야 합니다. 그러면 창고 안에 저장되어 있는 쌀과 콩을 번거롭게 환작(換作)하지 않고도 한량없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명나라에서는 외방에서 진상하는 일이 없이 다만 13도(道)의 속은(贖銀)을 광록시(光祿寺)에 두었다가 진공할 물품을 모두 이것으로 사서 쓰고, 만약 별도로 쓸 일이 있을 경우에는 특명으로 감선(減膳)하여 그 가은(價銀)을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먼 지방 백성들이 수레에 실어 운반하는 노고를 치르지 않는데도 사방의 공장(工匠)이 생산한 온갖 물품이 경도(京都)에 모여들지 않는 것이 없어 마치 깊은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것처럼 무엇이든 얻지 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경사(京師)는 날로 풍부해지고 농촌 백성들은 태평스럽고 편안한 마음으로 직업에 종사한다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제도이니 우리 나라도 본받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보통 때 국가 경창(京倉)에는 군량이 거의 40만 석에 이르렀는데도, 의논하는 자들은 오히려 양식이 적다고 걱정하였는데, 지금은 다만 양식이 수천 석뿐이어서 조석으로 위태로우며 2, 3개월 동안의 먹을 양식도 비축한 것이 없으니, 급박한 사세가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옛날에 월(越)나라는 재물을 생산하고 백성을 모은 다음에 훈련시켰고, 훈련을 시킨 다음에 원수를 갚았습니다. 진실로 재물을 생산한 다음에 백성을 모으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계책이 있더라도 어느 곳에 시행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의 일은 마땅히 잡된 일은 없애야 하니 부문(浮文)을 생략하고 본실(本實)을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10여 년 동안을 한정해서 오직 군량 생산과 군사 훈련시키는 데에만 힘을 다하고 털끌만큼이라도 다른 일이 그 사이에 뒤섞여 어긋나지 않게 한 뒤에라야 큰 원수를 통쾌하게 갚고 이 어려움을 크게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백성은 이미 극도로 궁해지고 사세는 위급하여 도탄에 빠지고 거꾸로 매달린 듯한 고통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신의 이 말이 실시된다면 나라에는 남은 저축이 있게 되고 백성은 남은 힘이 있게 되어 수년 뒤에는 기세가 촉진되어 하고자 하는 바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밖에 자질구레한 절목(節目)은 그 단서가 매우 많으나 지금 일일이 열거하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을 깊이 생각하시고 국가의 수치를 아직 갚지 못한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시어 민심을 빨리 만회하여 영원히 국가의 맥이 존속되게 하는 근본을 삼으소서. 그리하여 하루하루 재물을 생산하고 군사를 훈련시킬 계책을 생각하여 허름한 옷과 거친 음식으로 생활하며 노심초사하시는 한편 여러 신하들을 독려하여 인순 고식의 습관을 한번 크게 변화시켜서 크게 일을 할 만한 의지를 진작시키소서. 그러면 일세의 유능하고 지혜있는 선비들이 모두 모여들어 국가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맡아 수행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차자를 비변사에 내려 모두 채택해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진관(鎭管)의 법은 사람들이 모두 편리하게 여겼는데도 끝내 시행되지 않았고, 공물 진상을 쌀로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의 뜻이 모두 강구하고 싶어하지 않아 거행되지 못하고 파기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7책 28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4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군사-군역(軍役) / 재정-잡세(雜稅) / 재정-공물(貢物) / 농업-전제(田制) / 역사-고사(故事)
- [註 004]조조(曹操)가 허하(許下)에 둔전하던 법 : 한 헌제(漢獻帝) 때 큰 흉년이 들어 군민(軍民) 모두가 굶주렸다. 이때 조조는 조지(棗祇)·한호(韓浩) 등의 건의에 따라 백성을 모집하여 허하에 둔전을 실시하였는데 여기에서 백만 곡(斛)의 곡식을 수확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사방을 정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무제기(武帝紀) 주(註).
- [註 005]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註 006]
부병제(府兵制) : 농병 일치(農兵一致)의 병제. 농민 가운데 20세 이상의 남자를 뽑아 부병으로 편성한 다음, 농한기에 훈련을 시켜 경비에 임하게 하고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었다. 그 당시 중국 10개 도(道)에 6백 34개의 부를 설치하였는데, 명칭을 절충부(折衝府)라 하고 절충 도위(折衝都尉)·과의 도위(果毅都尉) 등을 두어 그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註 007]
진관설(鎭管說) : 진관은 곧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각도의 군병을 모두 진관에 나누어 소속시켰다가 유사시에는 속읍(屬邑)의 군병을 통솔하고 주장(主將)의 명령을 따르게 하는 제도다. 《서애집(西厓集)》 계사(啓辭)에 자세히 보인다.- [註 008]
십일세(什一稅) : 당년 총 수확량의 10분의 1을 거두던 옛날의 세법.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십일세를 논한 것이 보인다.○領議政柳成龍, 上箚陳時務, 略曰:
殷憂啓聖, 多難興邦。 蓋以治平之世, 人情安於故常; 俗士溺於淺見。 又有狹小褊滯之論, 疑亂名實, 破壞大體, 雖有先事之言, 常患於不見信; 救時之策, 常至於不得施。 至於敗滅之後, 人心危懼, 往事之失, 不得不懲創; 善後之圖, 不得不經營。 天命以此而再續; 國脈以此而更固。 古之享國長久者, 或因中衰而復振, 以至於千百年之安。 以此觀之, 殷憂多難, 豈不足爲興邦啓聖之資也耶? 此則在殿下加之意而已。 嗚呼! 國家近日之禍, 自有東方以來, 所未有也。 旣有所未有之禍變, 則其所以救之者, 亦不以尋常擧措, 而望其有濟也明矣。 譬如膏肓之病, 非溫平可口之劑, 所能治之。 必須得大藥、神丹, 湔滌腸胃之積痼, 而養出元氣, 然後始可回生, 今日之勢, 何以異此? 國家當初乘倭賊退歸, 京城旣復之後, 汲汲爲自强之計, 以之積穀訓兵, 收拾瘡殘, 措置規畫, 日不暇給, 則今已一年, 必亦稍有頭緖, 可以承藉奮發, 爲中興之基。 計不出此, 中外之臣不能深惟長遠之慮, 惜陰圖事, 而一切玩愒, 浪費時日, 專以討賊之責, 付諸天兵, 而自己所當爲事, 全不講究。 軍政未嘗修繕, 糧餉未嘗經紀, 民心未嘗收拾, 百事紛紜, 眩亂顚倒, 如行雲霧之途, 而孑遺民力, 更無分寸之餘, 誠可痛心。 今日急務, 亦不在多言, 惟急行便民之政, 使四方聞風, 曉然有再生之望。 然後又因時變通, 措置糧餉, 聚諸京師, 以其食招募精勇之士, 晝夜訓鍊, 皆成節制之師, 可以禦外侮, 可以消內變, 國家之勢, 安如磐石矣。 往時, 朝廷狃於昇平, 不修軍政, 只以民兵數千, 上番京師, 皆畝畝荷鋤之氓, 不知戰鬪爲何事。 該曹又以徵贖侵剝爲事, 多聚布物, 以爲私用, 而實未嘗一番操練。 猝遇事變, 烏合之卒, 如不繫之馬, 奔逸四散, 不可復收。 變故之後, 尙未有以懲改前日規例, 而循途守轍, 依舊推遷。 且四方皆已蕩敗, 諸色軍應上番者, 百不一來, 京城空虛, 但有飢餓代立之卒數三百。 以此欲以摧滔天之强賊, 而振已衰之遺緖, 不亦難乎? 近者訓鍊之軍, 人頗樂屬, 應募漸多, 而亦限於無食, 不能多聚, 恐歸於無益。 蓋食不足, 則人不可聚; 人不可聚, 則兵不可鍊, 此, 必然之勢。 今國廩空竭, 經費之外, 更無餘儲, 雖欲練兵禦敵, 計無所出。 臣靜思默念, 百分籌度, 而近得一策。 常時騎兵上番之數, 合二萬二千七百餘, 而各有三保, 則共爲九萬餘人。 步兵上番之數, 一萬六千二百餘, 而各有一保, 則共三萬二千餘名, 摠計十二萬二千。 此乃平時上番騎步, 二色軍戶、奉足之數也。 至如甲士之上番者, 四千六百四十, 而各有二保, 則一萬三千九百二十名, 定虜衛上番之數, 二千一百六十一, 各有奉足二人, 則六千四百餘名。 別侍衛上番之數, 一千一百十九, 而亦有奉足二人, 則亦合三千三百餘名, 而他色軍不與焉, 此外有各司奴婢。 臣前在己卯冬, 爲刑房承旨, 取考元數, 則三萬七千餘名。 其後以公賤役歇, 漸次增添, 其數不止於三萬七千矣。 此外有各司諸員, 合二千一百七十七戶, 而各有奉足二人; 各司皂隷, 合三千六百二十八名, 而各有奉足一人。 又有掌樂院樂工七百、樂生三百, 而各有奉足二人, 其數亦三千矣。 此乃平日各色名數定額, 其間有流亡未究之處, 而大槪則如此矣。 今於兵亂之後, 不可以平時之額求之, 想存者無幾, 然全羅、忠淸道, 以及慶尙左右稍完郡邑, 江原、黃海道、京畿等處遺存爲役者, 應亦幾至十萬, 或過之矣。 若除其上番, 各捧人一石米, 使爲糧餉, 則其數將至於十萬餘石, 而勿論牟麥、大小米、大小豆, 充數納之, 則甚爲輕歇, 而人情大喜矣。 因於京城, 召募四方精勇之士, 亦勿論士族、庶孽、公私賤、有無役, 只取其勇力, 得一萬名, 分爲五營, 營各二千人, 依法操練, 則是京城之內, 常有一萬精兵, 而根本壯固, 居重御輕之勢, 得矣。 蓋一萬兵一年之糧, 乃四萬四千石, 假使更出數千餘石, 日給人三升, 使庇家屬, 亦無不足之憂。 因以所餘數萬石, 別儲軍資, 爲食兵之需, 不管於戶曹之經費, 則三年之後, 所畜當倍(簁)〔蓰〕 , 而軍食不可勝用。 苟食足而兵强, 則何爲而不成, 何賊之足慮哉? 一萬名之軍, 亦當分爲二番, 每營恒留一千, 而其五千, 則別於京畿肥饒閑曠之地, 大備農器、農牛、種子, 分屯作農, 如曹操 許下屯田之法, 而使自食其半, 官取其半, 則資食之路日廣, 而應募者相繼雲集矣。 夫三代寓兵於農, 唐初府兵之制, 亦倣古制, 先儒美之。 然其世變日下, 禍亂繁興, 則兵農不得不分, 故自唐中葉, 以及宋、元、大明, 皆不得變, 使兵以衛農, 農以養兵, 其勢然也。 我朝上番之制, 得府兵之遺意, 而至于今日, 皆耒鋤之徒, 無一可用於戰陣者, 不得不因勢變通, 以適於宜, 亦其理也。 至於外方之事, 則臣前日所陳鎭管之說, 已擧大綱, 綱旣擧則節目自當隨之, 臣請略言之。 兵法最以分數管轄爲重, 然後條理整齊, 號令通行, 調發無敢參差矣。 故中原將官, 勿論大小、高下, 皆有所統之軍, 平時盡心操練, 一有事警, 以此徵用。 各處之將, 合率其軍, 聚于一處而行, 其軍卒亦習隷於其將, 而知其終始相隨, 故畏而愛之, 不敢有苟且之心。 雖使之赴湯蹈火, 豈有潰散之患乎? 我國不然, 兵不隷將, 將不統兵。 平時邈不相接, 一遇警急, 皆聚兵田野、閭閻之間, 瞿瞿不知所屬。 富者納財而圖免, 壯者駭散而之他, 所謂色吏、都訓導等, 乘時作弊, 哄嚇侵督, 無所不至。 畢竟稍堪赴戰者, 盡皆脫漏, 而貧民之不能自免者, 苟充其數, 未及出境, 而逃走相續, 比至軍前, 盡亡無餘, 今日之事是也。 夫使一道之內, 有鎭管之法, 郡縣大小之勢, 不得不相維。 又於一邑之內, 別擇其地, 品官中有計慮, 自愛其身, 不敢犯法者, 使之主管, 各面抄兵之事, 從其壯弱, 分類抄出, 爲上中下三等, 守令親自點閱。 且令被抄之人, 告發其脫漏者, 累名以上, 梟示其抄兵之人。 常時設法操練, 而有事則卽使其人, 領赴軍前, 凡有逃散不精之弊, 皆令自任其責, 則不敢不盡其心, 而軍政稍淸矣。 因令上等之卒, 循次赴戰, 而中下之民, 資給軍糧, 事皆前定, 無臨時搔動之弊; 無吏胥作弄之端, 絲牽繩連, 次第順序, 而不復如曩時之無緖矣。 前於啓辭中, 略發其端, 已爲知委四方, 而其後猶聞抄軍, 尙無條理, 民弊萬端, 所謂可用之兵, 則無一赴戰者, 弊習之難袪也如此, 可勝歎哉? 夫因地之所有以生財, 則財不可勝用; 因財之所裕以聚人, 則人不可勝記; 順民情之所欲以圖功, 則功無有不成。 臣前日所謂: "事得其序, 然後有條而不紊; 物理其本, 然後力省而功多" 者, 此類之謂也。 且臣又聞, 撥亂反正, 雖在於足食足兵, 而其要尤在於得民心。 得民心之本, 不可以他求, 惟當輕徭薄賦, 與之休息而已。 國家田稅, 則輕於什一, 民情不以爲重。 但稅外之事, 如貢物進上及各節方物被侵之事甚多, 而其初磨鍊貢物之際, 不以田結之數, 均一平鋪, 大小之邑, 多寡懸殊。 故一結貢物之價, 或有出米一斗二斗者, 或有出米七八斗, 或十斗者。 民役之不均如此, 加以往來道路之費。 各司捧納之時, 爲奸吏刁蹬操弄, 出費百倍, 入於公家者, 僅十之二三, 而其餘皆歸於私門。 至於進上之弊, 病民益深, 此亦當初制法, 則未必如此, 而行之百年, 人僞滋勝, 弊端萬千。 今若卽未變通, 則民生更無蘇息之望, 而國儲無積峙之路。 臣常以爲, 處置貢物, 則當以一道貢物, 元數摠計幾許, 而又計道內田結之數, 參詳畫一, 裒多益寡, 勿論大小邑, 皆一樣磨鍊。 如甲邑一結出一斗, 則乙邑、丙邑亦出一斗, 出二斗則道內之邑, 皆出二斗。 如此則民力均平, 而所出如一矣。 方物之價, 亦依此均布, 或米或豆, 以其一年一道所出方物之數, 從田結, 均定所納, 每結不過出升合之微, 而民不知有方物矣。 其進上亦然, 皆以米豆出價。 以上諸條所收, 全羅道則納于群山、法聖倉; 忠淸道則納于牙山及可興倉; 江原道納于興元倉; 黃海道納于金谷、助邑倉。 慶尙道則待本道蘇復間, 納于本道, 以爲軍食; 咸鏡、平安道, 則留貯本道, 而其五道米豆, 皆令輸到京倉。 各司貢物及方物進上, 計物定價, 如濟用監進獻苧布、價木之例, 使有司貿用。 而若軍資不足, 及國家別有調度之事, 則貢物、方物、進上, 量數裁減, 而米豆之藏在庫中者, 不煩換作, 而取之無窮矣。 臣聞, 皇朝無外方進上之事, 只以十三道贖銀, 付光祿寺, 凡進貢之物, 皆貿易而用之。 若有別用之事, 則以特命減膳, 而用其價銀, 故遠地之民, 不知有輦載輸運之勞, 而四方工匠百物, 無不湊集於京都, 如探淵海求, 無不得而京師日以殷富, 田野之民, 晏然安業。 此其立法之善, 我國所當取法也。 常時國家京倉軍資, 幾至四十萬石, 議者尙患糧少。 今但有數千石, 朝夕懍懍無時月之蓄, 勢迫事急, 無過於此。 昔越國生聚然後訓鍊, 訓鍊然後復讐。 苟不生財而聚民, 則雖有善策, 將何所施? 故今日之事, 當捐去雜事, 略浮文敦本。 實限十餘年, 惟致力於糧餉訓兵, 不以一毫他事, 參錯撓奪於其間, 然後可以快復大讎, 而弘濟艱難矣。 今民窮已極, 事勢危迫, 塗炭倒懸之苦, 不足言也。 臣之此言若行, 則國有餘蓄, 民有餘力, 數年之後, 氣勢駸駸, 惟所欲爲, 而不難矣。 此外細瑣節目, 其端甚多, 今不敢毛擧。 伏乞聖明, 深惟恢復之長策, 痛念國恥之未復, 汲汲於挽回民心, 以爲祈天永命之本, 而一日二日, 念念於生財、訓鍊之策, 惡衣菲食, 勞心焦思, 又策勵群臣, 一變因循之習, 以振大有爲之志, 則一時賢智之士, 皆將輻輳竝進, 爲國任事, 而不憚矣。
箚下備邊司, 皆令採議施行。 鎭管之法, 人皆稱便, 而終不得行。 貢物進上作米, 上意不欲皆講究, 未擧而罷。
- 【태백산사고본】 7책 28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4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군사-군역(軍役) / 재정-잡세(雜稅) / 재정-공물(貢物) / 농업-전제(田制) / 역사-고사(故事)
- [註 005]